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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역사적예수 독서모임] 안내 "왜 역사적 예수인가?" 한인철박사 강연 전체 동영상 게제![2차 역사적예수 독서모임] 취소! 무기한 연기
이필완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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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0월 22일 (월) 14:43:12 [조회수 : 9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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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만난 하나님>의 번역자로서의 내용정리와 한인철목사의 왜 역사적예수 인가 강연 60분  
독서모임 12월11일의 한인철박사의 강연 전부를 동영상으로 게제한다. 독자 여러분이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고 왜 오늘의 시대에 역사적예수를 논하는 지, 그리고 어떻게 한국적 상황에서 "역사적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에 대한 명 강의였다

<독서모임 참가자들의 편리와 자료 참고를 위해 관련 기사를 모두 모았습니다>

제 2차 [역사적예수 독서모임] 안내

취소 무기한 연기 /

인도자인 이필완목사 종교인 100일 국토순례 참석 예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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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산의 <예수> 독자들의 서평을 모았다          -자료제공 김준우

크로산의 <예수>(부제목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개정판을 내면서 표지에 한글 제목으로 <예수>라 하고 영문으로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로 표기한 채 부제목인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를 표기하지 않았더니 이 책을 찾지 못해 전화하는 분들이 많아, 크로산, 예수로 검색하면 이 책을 찾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별로 관심이 없는 가톨릭 교회가 많은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묵상수련의 전통을 간직한 성인들과 사제들의 실천적 영성 전통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개신교의 경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오늘날처럼 듣기 민망한 사회적 비난에서 벗어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밝혀낸 예수의 영성과 목회를 회복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수많은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 가운데 단연코 가장 탁월한 책이라 생각하기에 독자 서평 몇 개 첨부합니다. 1994년에 원서가 나왔으며, 번역 초판(2001) 나왔을 때 이미 일반 독자들조차도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고 있더군요.

참고로 존 도미닉 크로산과 몇 년 전에 작고한 로버트 펑크를 위시해서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가들, 곧 마커스 보그, 리처드 호슬리, 월터 윙크, 버튼 맥, 존 쉘비 스퐁, 알버트 노울런, 체드 마이어스 등도 모두 필생의 역작들을 계속 내놓았으며,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번역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보문고 독자서평

예수에 관한 혁명적 전기 | naz77 | 2001-11-22 | 내용 |디자인 | 추천:0


흔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 관해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 쉽다. 허나, 과연 그럴까?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복음서를 비롯한 몇몇 성경 본문들에서 말하는 정리되지 않은 여러 예수의 상(像)일 뿐이다. 그런데 이 예수 상이 서로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는 듯이, 우리는 교회에서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듣고 배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라. 복음서 자체에서마저 각기 일어난 사건의 본문들과 맥락을 자세히 대조하여 비교해 보면, 그 보도의 상이성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지적하면, 어떤 이는 대번에 다음과 같이 반박할지도 모른다. 한 인물에 대한 진술이 엇갈리고 분분한 것은 오히려 그게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왜냐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이 경험하고 이해한 예수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한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양한 예수 상에 대한 우리네 궁금증이 시원스레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가감없는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직한 답변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기 위한 작업은 수 천년 동안 교회의 전통과 교리에 의해 덧칠된 예수의 상을 넘어서서 정직하게 예수를 만나기 위한 하나의 힘겨운 신학적 몸부림이다.

이 책은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인 도미닉 크로산의 저작이다. 그는 지금까지 약 40 여년 동안(거의 한평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역사적 예수 연구에만 몰두해온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책들이 근래에 한국어로 속속히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최근 번역 출간된 이 책은 작년에 이미 번역돼 나온 바 있는 그의 『역사적 예수』라는 방대한 책을 저자가 일반 독자들을 위하여 보다 평이하게 다시 쓰고 축약한 요약본이자, 많은 토론과 질문 및 반론들을 거치면서 새로 수정 보완하여 내놓은 책이다. 먼저 걱정되는 것은 일부 극성스러운 기독인들에 의해 예수연구로 평생을 보낸 한 신학자의 성실한 연구 결과물이 기독교 신앙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책으로 쉽게 평가절하 되어 일방적으로 매도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왜냐면, 이 책이 매우 급진적인 최근의 예수 연구에 대한 시각을 소개하고 있는데다가 기성 기독교 신앙을 뿌리째 전복시키는 지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이 책을 잡고 읽기 시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몇 장을 못 넘겨 책을 집어 던져 버리거나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굳이 소개하는 것은, 이 책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진지하게 그 분의 뒤를 따르고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이해에 있어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할 매우 중요한 사항들을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크로산이 이해한 바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는 유대의 농민 출신으로 견유(Cynic)적인 현자였다. 그의 전략은 거저 베푸는 치유와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동식사를 결합하는 것이었는데, 그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였던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브로커(broker)도 매개자(mediator)도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활동은 종교적이고 경제적인 평등주의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유대교의 엄격하기 짝이 없는 정결 규정들이나 지중해 지역에 일반화되어있던 명예와 수치, 후견과 의뢰의 가부장제적인 결함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임과 동시에,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문명의 영원한 속성, 즉 선을 긋고 경계를 나누며 계급체제를 구축하고 또 차별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문명의 영원한 속성에 대해서까지 도전하는 행위였다.

저자는 이 책을 기술하는 방법론으로 세 개의 독립적인 방향축이 교차하는 곳에 예수를 위치시키고자 시도하는데, 즉 교차문화인류학, 예수가 살았던 초기 25년간의 그리스-로마 역사 및 유대역사, 문학적 혹은 본문적인 비평이 그것이다. 특히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일반인들이 좀처럼 접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고대 사료들의 자유로운 인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며, 그러한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예수를 읽어 나가면서 전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예수 읽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저자의 주장들은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며 곰곰히 따져 성찰해 볼만한 주제들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 얼핏 드는 생각은 역사적 예수를 복원한다고 기존의 텍스트들 대부분을 창작과 가필로 자르고 단정지을 경우 예수를 발견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에 대해 미궁에 빠져드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다행히도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하지 않고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개방성을 말한다. 그러면서 "다양한 역사적 예수 연구들"이 동시대의 세상 학문들의 성과와 학제간의 연구가 가능토록 방법론에 대해 열려있어야 하며 세상의 학문적 판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저자의 주장처럼 "다양한 역사적 예수들"이 시대적 요구에 걸맞게 연구되어 재조명되어야 하며, 그에 기초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또한 새롭게 형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이유는 2천년 전의 "그때의 예수"를 새롭게 이해하면서 "오늘의 그리스도"로 그가 현재 의미하는 바를 다시금 얼마든지 의미심장하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 연구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에서 과거사적 유물을 발굴해 내려는 할 일없는 학자들의 작업이 결코 아니다. 이 작업의 진정한 의의는 오늘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어야 하는지를 정직하고 진지하게 되묻는 작업이며,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꾸만 왜곡되고 굴절된 우리 기독교 신앙을 다시금 제대로 바로잡는 혁신적인 작업 중의 하나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이 책은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하나의 매우 중요한 도전장이 될 것이다.

실제적인 혁명을 실천한 예수 ... | eva240 | 2001-10-01 | 내용 |디자인 | 추천:0

1.예수에 대한 나의 煎이해 하나님은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 밑에서 고통받고 있는 소외된 식민지 백성들을 구원하고 억압적 현실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 이러한 예수는 나에게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실체로 이해되기보다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뻗쳐진 '신의 손길'이라는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으로 다가온다.

그가 행했던 수많은 사랑의 실천은 단순히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구원이라는 추상적인 이미지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사랑과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메시지는 분명히 우리들이 행복한 삶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덕목들이다. 하지만 사랑과 평화라는 것은 우리의 관념 속에 이상화된 어떤 상태를 이르는 말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관념을 동경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그러한 상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와 노력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예수는 하나의 이상화된 관념으로써 사회 안에서 작용할 뿐, 현실과 치열하게 부대끼는 어떤 삶의 구체적 모습과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또한, 예수가 행한 다분히 관념적인 사랑과 구원의 행위는 '전지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인 그와 '나약한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시혜'로써 이해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 받는다' 라고 하는 일상적인 표현 속에 그러한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의 사랑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행위를 구원의 전제로서 살펴보면, '믿음'의 행위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으로 연결되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심정적인 기댐'이라는 수동적인 측면의 뉘앙스를 풍기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뿐이지만, 예수는 적극적인 구원을 행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구원의 메커니즘이 '위에서 아래로' 베풀어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곳곳에서 행한 기적들은 예수의 신적인 위대함을 증거하는 사건들로써 대중적인 측면에서의 부각된 모습으로 많이 듣고 접했기 때문에 그러한 기적은 단순히 그의 신적인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행한 기적들은 그 때마다의 상황 속에서 존재하는 여러 사건들과 의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맥락적인 면에서 파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모든 맥락은 절대자인 하나님 하나로 통한다는 생각에, 예수의 기적행위도 신이라는 하나의 관념을 바탕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예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시각은 그는'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격과 삶 속에는 신성이 내재되어 있고, 그는 신으로서 인간에게 베풀며, 신의 위대함을 기적으로 발현했던 것이다. 그는 실로 인간이 아닌 인간이었다. 그는 나에게 '인간의 모습을 한 하나님'이라는 하나의 상징, 관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2.크로산이 말하는 '예수' 예수의 탄생에 대한 진술은 어른 예수에 대해 생겨난 믿음으로서 유아기의 예수에게 신화적으로 되쏘아진 것이다. 그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진술 속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 다윗 계통의 메시아라는 신앙 고백적 믿음이 내재되어 있는 신화이다.

하지만 그의 허구화된 신화의 바탕에는 그가 일생동안 스스로 행했던 위대한 모습이 기반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처음에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의 묵시종말론을 수용하였으나, 어느 시점에서 요한의 묵시종말론과 결별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메시지를 확립하였다. 그는 미래의 하나님 왕국을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 속에 기만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가치를 깨고 현실에서의 하나님 나라실현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와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불의에 의해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들과 함께 열린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이러한 열린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교류할 수 있는 급진적인 평등주의에 근거해서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러한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행해진 개방된 공동 식사는 유대교의 엄격한 전통과 관습을 부정하고, 심지어 권위주의적인 가족과의 관계에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사회의 근본적인 틀에 대한 즉,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체계화시키면서 어떤 경계를 설정하고 처벌을 규정하는 억압적인 측면에 대해서까지 비판을 제기했다. 그

가 행한 치유와 관련된 기적들은 사회적인 권력관계에 의해서 경계 밖으로 규정된 '병'이 가져오는 억압에 대한 해방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저항은 분명히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의 측면에서가 아닌 실제적 실천의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그의 저항행위는 전개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체제 비판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순회하였다. 그는 신과 인간의 만남이 후견인에 의해서 매개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즉, 고정된 장소가 성전화되고 자신이 헤게모니를 쥐게 되는 권력구도를 피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개된 운동은 각 개인들 스스로가 하나님 나라에의 주체적 행위자가 되도록 유도되었다. 이렇게 사회를 부정하는 행동을 전개한 예수는 기존사회의 권력에 의해서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수의 시각을 통해 가능성을 느꼈던 사람들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해서 그에 대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부활에 관해서까지 언급되게 되었고, 그 이후에도 그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많은 기적과 상징을 구성해내기에 이르게 된다.

3.예수에 대한 나의 새로운 이해 예수는 신적인 모습을 추상적으로 아우르는 하나의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가 세상 속에 전한 메시지도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의 전파가 아니다. 그의 삶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상징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던 것은, 기록자의 시각으로 재구성되고 미화된, 그에 대한 신화적인 기록 때문인 듯 싶다.

예수 이전의 시대에도 항상 존재해왔던 사회적 부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항의 행동을 유발시키고, 촉발시켜 왔다. 하지만 그들이 행했던 저항은 현실 속에서 부정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출현하는 것을 준비하거나, 설득하거나, 돕는다는 측면에서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자체의 전지 전능한 모습을 하시고, 언젠가 나타나시기만을 믿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금방 오지도 않을 하나님 나라를 기약없이 기다리기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의 희망이라기보다 현재의 생활방식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가 사회에 가한 비판과 실천들은 실제적인 방법으로 그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기만적인 억압의 체계들을 하나하나 거부하고, 실천에 옮겼다. 권력이 내재된 전통적 가족관계의 거부,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식사, 민중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회적 상징의 억압으로부터의 해소 등 그의 실천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자 한 지속적인 혁명적 행위였다.

예수는 분명히 일반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많다. 그의 실제적인 비판과 실천은 확고한 자아와 그것에 기반한 용기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나약한 보통사람들보다 훌륭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의 무수한 실천들이 '아래로의 베풂'의 방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훌륭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과 함께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주도권을 찾아가는 운동을 전개했다. 사람들은 예수의 입장을 단지 수동적인 태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인 주인공으로서 예수의 혁명에 동참했다. 이러한 실천은 사회곳곳에서의 변혁의 기반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으로서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의 이러한 사회 변혁적인 참된 혁명가의 모습이 허구화되고, 신화화된 기록과 전승에 의해 왜곡되어서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예수는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으로써의 경배 대상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고 느끼기에 그런 식으로 신성화된 예수의 모습들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권위를 내재화시킴으로써 그들을 순종의 대상으로 만드는 하나의 권력의 산물일 뿐이다.

예수에 대한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이해의 과정 속에서 나는 허구화된 신에 대한 외경과 두려움의 장막을 걷어 내고, 부당한 사회에 맞서는 훌륭한 삶의 방식과 사상을 실천한 하나의 인간으로써의 예수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Yes24 독자 서평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내용 편집/구성 |seonhui | 2002-02-03

존 도미닉 크로산이 지은 <예수-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속의 예수는 내가 알고 있던 얕은 지식들과는 그 차원이 매우 다르다. 크로산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신격화(神格化)된 예수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존재로서의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새로이 조명해 보고자 했다. 그는 여기에서 교차 문화적인 인류학(cross-cultural anthropology)적 방법을 도입하여 유대의 역사(Jewish history)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펴보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복음서 속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보다 객관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기 위해 문학적, 혹은 본문적인 (literary or textual) 방향축까지 동원하는 열의를 보이고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비롯한 많은 복음서들이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보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지 않은가 싶을 만큼, 성서 안에서 예수는 지극히 신(神)적인,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예수의 일생은 출생에서부터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실의 왜곡된 해석에서 창작에 가까운 기록에 이르기까지, 상당 부분 신화(神話)화 되었다. 그러나 사실, 예수는 교차-문화적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역사적 인물로 파악하였을 때, 유대인 목수였다. 이는 곧 그가 하층계급에 속하였으며, 문맹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전지전능한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처럼 피와 살을 가진 보통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은 한마디로 실천적인 혁명가이다.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를 비롯한 무수한 무신론자들이 비판하는 기독교의 모습 중에 하나가 바로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개혁하려 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문제를 도외시한 채, 내세에만 의존하여 현실 개혁의 의지를 꺾어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드러난 예수의 모습은 그러한 비판이 무색할 정도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후대의 기독교 내부의 필요에 의해 신격화되었을 뿐이지 역사 속에서 실제의 그의 모습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세례요한과 같은 묵시종말적인 예언자가 아니었으며, 허황된 말만으로 민중을 호도하는 자칭 메시아는 더욱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예수는 무수히 많은 이적을 행한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지만, 실제로 그가 행했던 질병치유와 귀신추방과 같은 행위는 실제적 의미의 의술적 치료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고통의 치유였던 것이다.

예수는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나누는 평등주의를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 예수는 치유프로그램을 통해서 후견인과 의뢰인이라는 과정을 부인하였고, 공동식사 프로그램을 통하여 명예와 수치라는 가치의 대조를 부정하였다. 이렇게 예수는 질병과 극빈으로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였으며, 그의 공동식탁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하였다. 후에 예수의 제자들에 의한 선교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수의 치유능력을 받은 그들은 세상을 돌며, 민중의 고통을 치유하면서 그들 안에서 선교를 해 나갔던 것이다. 예수는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관해 논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그는 그것을 다양하고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이를 보여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전하였던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남은 예수는 한 사람의 실천적 지도자의 모습이다. 그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위대한 인물이었다. 비록 전지전능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지라도, 우리를 구원하러 오는 메시아가 아닐지라도, 예수는 역사적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위인이라 이를 만하다. 오히려 후대에 신격화를 통해 왜곡되어 버린 그의 모습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가슴에 와 닿는 듯 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신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한사람의 실천적 영웅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오히려 더욱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복음서의 신화적 이야기들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연구로 신화의 의미파악
내용 편집/구성 |moochon | 2002-02-08

오강남 박사가 <예수는 없다>에서 역설한 것처럼, 단군신화나 흥부전과 같은 은유적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문자근본주의라는 오류이다. 또한 그런 신화들이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주장은 근대적 사실근본주의라는 오류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신자들처럼 문자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있거나, 오늘날 대부분의 비기독교인들처럼 사실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 <예수는 없다>. 그러나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신화의 문자적 사실성이 아니라, 그 신화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 신화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신화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크로산의 이 책은 복음서들 속의 신화적 이야기들, 즉 동정녀 탄생이나 기적 이야기들, 부활현현 이야기들이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를 규명함으로써, 그런 신화적 이야기들의 역사적 진실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당시 로마제국의 착취구조와 세계화 전략에 대항하여 식민지 약소민족의 농부였던 예수가 어떻게 그 패거리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전략을 펼쳐나갔는지를 규명함으로써, 당시의 정치군사적 혁명가들, 자칭 메시아들과 반란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사회적 혁명을 전개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독특한 학제간 연구방법론을 통해 현재의 다양한 예수상들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20세기 기독교의 초석이 불트만의 <공관복음 전승사>였다면, 이 책은 21세기 기독교의 초석이 될 책"이라는 조태연 박사의 지적에 찬동한다.

역사적으로 바라본.. 예수의 모습..
내용 편집/구성 |flineblue | 2002-01-05

크로산이 이책전에 지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책이있다. 이책은 그책과 비교해 볼때.. 기독교를 어느정도 알고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것이라 생각된다. '예수는 누구인가'는 질문에 대답형식으로 알기쉽게 만들어져있는 반면 이책은 기독교에 관한 어려운 단어나 개념이 많이 있기때문이다.

크로산은 역사 속에서 실재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복원하고자 한다. 크로산은 예수의 어린 시절부터 차례차례 나아가며 성경에 나와있는 복음서와 도마복음, 그리고 비 기독교인들에 의한 자료를 인용하며 신적 예수의 모습을 벗겨 내고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영웅적인 인물로의 부각을 위한 창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예수의 초월적인 이미지를 그의 임신과 출생에까지 덮어씌우고자 했던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근거를 들어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처녀 출생이나 천사의 등장같은 주변상황이 아니라 예수가 태어난 것이 무엇을, 누구를 위함인가와 관련된 근본적인 고찰이라고 단서를 붙이고 있다. 예수의 등장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예수는 인간으로서 장인에 속하는 하층계급,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유대민족은 로마 식민지로 불평등과 불의가 팽배했고, 당시 하층계급들은 상당한 억압 속에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와 같이 묵시종말적 전통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요한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입장을 취한 반면 예수는 그 반대의 입장으로 하나님나라를 외치며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갔다. 본문에서 크로산은 Q복음의 인용을 통해 '금식하는 요한'과 '잔치하는 예수'를 대조 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을 향해 두 가지를 행한다고 크로산은 얘기한다. 첫째로 예수는 누구나 와서 먹고 마실 수 있는 열린 공동식사를 한다. 이는 식탁을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해 볼 때 예수는 누구나 동등하고 아무차별 없는 그러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급진적 평등주의를 주장했던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는 그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리기도 했다. 둘째로 예수는 무상 치유를 행했다. 성경에는 예수가 나병환자, 앉은뱅이, 장님 같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다고 써있다. 크로산은 이것을 예수는 병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그 병자들을 만지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함으로써 그들을 무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정신 적인 치유를 베풀었다고 해석한다.

예수 당시는 후견인과 의뢰인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계급체제가 있었다고 한다. 예수가 만약 한 장소에서 치유를 행하며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면 이는 또 하나의 후견인과 의뢰인의 관계가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의 제자들이 사람들을 찾아다녔으며,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는 그 당시의 후견인, 의뢰인 체제의 과정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그의 인격으로 좌우되는 하나님 독점 사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의 차원에서 시작해서 식사와 치유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물질적 자원과 영적 자원을 모두가 차별, 구분 없이 계층구조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동체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생활의 한 방식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하나님 나라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줄 수가 있다.

이것은 말과 행동의 조화로써 하나의 생활 방식을 이루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 선교 활동에 있어서 견유학파와 비슷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견유학파나 예수의 선교활동 모두 생각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며 그들의 메시지를 상징화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의복과 장비를 착용했다는 면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견유학파는 도시에서 개인적인 철학을 따르는 반면, 예수의 선교활동은 그 가르침대로 공동체 운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크로산은 책의 마지막 두 개의 장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적 예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가설들이 등장한다. 예수는 왜 죽어야만 했나? 그 당시 지중해 지역은 혈통과 성에 기초한 집단주의를 강조했으며 중추적인 도덕가치들은 후견인과 의뢰인 체제뿐만 아니라 명예와 수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런데 예수는 공동식사와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지중해 지역의 중추 도덕가치, 즉 계급구조와 구분과 차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여러 불평등과 억압적인 풍경들을 바라보고 성전에서 분개하여 폭발했다. 이로써 그는 당시 지배층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게 만들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작가는 그 당시 십자가형 받은 사람들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예수도 그들과 같이 매장되지 않고 동물들에 의해 시체가 없어져 버렸을 가능성을 얘기한다. 부활의 기적은 '기억된 역사'가 아니라 '역사화된 예언'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에 의해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예언이나 기록들에 힌트를 얻어 예수의 이야기가 새롭게 기록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 크로산의 해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가 죽고 부활한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는 '살아 있는 예수'로 우리 마음속에 남아서 지금도 그의 주장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크로산은 더 이상 신적인 존재가 아닌 사회를 변혁시켜보고자 죽음까지 무릅쓰고 실천의 삶을 산 한 인간에 대해서 쓰고자 했다. 그의 책 안에서 예수는 자기에 대한 모든 과장의 옷을 벗어버리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식민지 사회 속에서의 불평등과 부조리, 권력의 계층사회에 공동체적 삶의 실천을 통해 모두가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주장함으로써 사회를 바꾸어 보고자 노력했다. 크로산에게 있어서 예수는 한 시대를 바꾸고자 했던 선구자요 사회적 혁명가인 것이다.
예수는 이책속에서.. 실천하고 먼저 나아갔다. 크로산은 그 예수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 네번째 역사적예수 독서모임은 12월18일(화) 오후7시 당당뉴스 옆 맑은샘교회에서,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를 읽고 토론한다.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이후 내년초부터 다시 두번째 독서모임을 계속한다.

   
 
   
 

3회 역사적예수 독서모임이 11일(화) 오후7시 맑은샘교회에서 1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날 마커스 보그의 <새로 만난 하나님> '제 3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요약 정리는 박정인 목사가 하였고 돌아가며 책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에 <새로 만난 하나님>의 번역자인 연세대 교목살장 한인철목사가 "왜 역사적 예수인가"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였다.(* 박정인목사의 3부 요약 내용은 아래에 싣는다)

이에 한인철박사의 강연 전부를 동영상으로 게제한다. 독자 여러분이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고 왜 오늘의 시대에 역사적예수를 논하는 지, 그리고 어떻게 한국적 상황에서 "역사적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에 대한 명 강의였다. 

제3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5장 하느님에 대한 개방 - 영성의 마음

하느님은 우리 주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왜 하느님은 잘 드러나지 않을까?
우리가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과 “인식론적인 거리”를 갖고 살고 있고, 우리가 자라면서 거치게 되는 사회화 과정의 결과 때문에 “나-그것”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 나-너의 관계 속에서 만난 실재(하느님)을 오히려 차단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표면에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깊이 속에서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마음
마음은 인간 정신의 정체성, 즉 감정만이 아니라, 지성, 의지, 그리고 심지어는 인식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보는 것보다 한층 “아래에”있는 자아의 한 차원으로서 이 모든 것들에 영향을 줍니다. 성서 전통에서의 “마음”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자아를 묘사하는 하나의 이미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인데 우리의 문제(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실재가 더 이상 우리에게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 부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개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영성은 “마음의 부화”를 위한 것입니다. 마음은 껍질에 둘러싸인 계란과 같습니다. 만약 그 안에 있는 것이 살아 있다면, 계란은 부화되어야 하고, 껍질은 깨져야만 하며, 마음은 열려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안의 생명은 죽게 되고, 악취가 나게 되며, 유황으로 변하고 맙니다.
비기독교적 형태든 기독교적 형태든, 영적 순례는 마음의 부화에 관한 것이고, 자아를 영적 실재에 개방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개방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아가 방향을 새롭게 잡고 변화되는 과정을 시작하게 합니다.

종교제의와 마음의 개방
수많은 전통적인 종교제의들은 인간이 하느님을 경험하도록 중재하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도록 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집단적 제의들
공동체의 종교적 삶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쉽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성한 이야기, 신성한 제의들, 신성한 시간, 신성한 절기들, 신성한 소리들, 신성한 음악, 신성한 말, 신성한 침묵, 신성한 이미지들, 신성한 공간, 신성한 여행, 신성한 법들, 신성한 예배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적 제의들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신성한 실재(신성한 것에 대한 개인의 경험)를 향하도록 합니다.
개인적 제의들
영적 훈련으로 불리는 이러한 제의들은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품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데 보다 뜻을 둘 수 있는 길들을 제시합니다. 이 중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데 기도와 자비(함께 아파함)의 행위가 그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온 관심을 집중하는 것인데 말로 하는 기도, 대화적인 기도, 말로하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의 효과는 하느님과 생명,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삶을 바꾸어놓습니다.
함께 아파함은 단순히 영적 변혁의 한 수단만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입니다. 또한 함께 아파함은 가슴 속에서, 자아에 있어서 마음의 보다 깊은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기도나 함께 아파함의 행위들 외에도 자아를 하느님에게 개방하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방향을 재정립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다른 개인적인 의식들도 있습니다.

영성과 변화
영성은 마음을 열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실재로 향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영성은 이미 여기에 계시는 하느님에게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의 열매는 함께 아파하는 삶입니다. 함께 아파함은 단순히 자아의 변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의 목적이요 목표입니다.

6장 하느님의 꿈 - 함께 아파하는 삶의 세계를 향한 정치

종교와 정치 이 둘은 우리가 종종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하느님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인 사고에도 영향을 미치며, 하느님에 대한 비전과 사회에 대한 비전은 함께 간다.

하느님의 꿈
넓은 의미에서, 성서 전체는 창세기의 낙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의 대단원의 비전속에서 회복된 낙원에서 끝이 나는 하느님의 꿈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서는 꿈 자체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꿈에 대한 거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하느님의 꿈은 샬롬의 비전으로, 이는 종종 “평화”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전쟁이 없는 상태 이상을 의미하는 풍부한 의미를 지닌 히브리말입니다. 이것은 종합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이 평안한 생태를 말한다. 이것은 건강, 번영, 그리고 안정과 같은 긍정적인 것들의 현존과 더불어, 억압, 불안,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것들로부터의 자유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샬롬은 하나의 사회적 비전을 포함한다.

성서의 사회적 세계
“소작농 사회”는 성서가 출현했던 시대에 지배적인 사회 형태였다. 상류층에 의해 지배되는 이러한 사회는 구조적으로는 계급적이고, 경제적으로는 착취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억압적이었다.


출애굽과 하느님의 꿈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고 그들의 자유를 도모하신 분이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창조하려는 이러한 시도를 인간의 사회적 삶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소작농과 예언자, 왕과 상류층
히브리 성서의 한편에는 왕들과 상류층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예언자들과 소작농들이 있다.
상류층 신학
상류층의 신학은 히브리 성서의 왕정신학 속에 표현되었다. 이 신학에 따르면, 왕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며, 하느님은 그와 그 후손들에게 영속적인 통치를 약속했다. 왕정신학은 왕과 성전에 중심을 두었다.
예언 신학
예언자들은 지배 체제와 이를 정당화하는 상류층 신학을 공격했다. 그들의 신학은 종교적인 사회적 저항의 목소리였다.
예언자들에게서 발견하는 사회 정의에 대한 열정은 체제적인 악에 대한 저항이다. 사회 정의에 대한 열정은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문제는 개인의 죄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의 가난한 사람들이 파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사회 체제이다.

예수와 하느님의 꿈
예수는 기존 사회 질서의 예리한 사회적 경계선들을 거부했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제도들에 도전했다. 그의 가르침과 행위는 대안적인 사회적 비전을 반영한다.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지배 체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행동과 사회적 비전을 통해 동시대의 상류층과 지배 체제에 철저히 도전했던 종교적인 사회적 예언자였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느님의 꿈은 1) “함께 아파함의 세상 만들기”- 동 시대 지배 체제에 저항, 2) “지배가 없는 하느님의 질서”, 3) “하느님의 나라”이다.
우리는 예수가 가르친 기도를 할 때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꿈은 개인의 가치에 대한 강조를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과 하나로 결합시킨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꿈
하느님의 꿈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리 잘 실현되지는 못했다. 기독교가 중심 종교가 된 나라들에서는 기독교가 너무 자주 기존 질서와 결탁해왔다. 하느님의 꿈은 기독교 전통의 지배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꿈은 성인들과 개혁자들, 그리고 여런 운동가들의 삶 속에서 때대로 표면화되곤 한다.

하느님의 꿈과 현대 미국사회
개인주의의 정치
실질적인 혹은 분배적인 정의보다는 절차적인 정의를 훨씬 더 강조한다.
개인적인 노력이 아니라, 사회적 정책이 부의 분배에 책임이 있다.
상류층이 조종하는 사회적, 경제적 정책을 갖고 있다.
기독교인, 교회, 그리고 하느님의 꿈
하느님의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정치적인차원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사회 구조에 의해 억압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이 땅의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아파하신다는 점에 기초를 두고, 함께 아파하는 새로운 세상을 펼치는 정치는 인간의 삶을 공동체와 관련하여 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함께 아파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정치
정치적 가치로서의 함께 아파함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우리 사고의 틀을 제공하는 패러다임으로 우리의 모든 정치적 사고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사회적 비전이다.
함께 아파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정치는 인간 삶에 대한 사회구조의 영향에 눈뜨게 하여 개인적이든 체제적이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원인들에 분노를 갖게 한다.
함께 아파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정치는 생명에기 힘을 제공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회질서를 추구한다. 함께 아파하는 정치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사회 구조에 의해 유발되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예수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예수의 포용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회적 비전을 그 내적인 삶 속에서 구체화하도록 부름받고 있다. 그 조직 형태로 보면, 이것은 함께 아파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정치로도 부름받고 있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함께 아파함으로 누룩이 되는 것이다.
함께 아파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정치,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하느님의 꿈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를 완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에 점점 가까이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7장 구원 - 이 땅위에서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서 전통에서 말하는 구원은 주로 이 세상에서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구원은 주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관심한다.

이 땅 위에서의 구원
성서에서 내세의 삶은 중심적인 화제가 아니다.
구원에 대한 제일차적인 성서적 이해는 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적인 것이다.

구원과 인간의 상처들
구원은 인간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나, 인간이 경험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들
하느님은 우리의 해방, 우리의 출애굽을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화해, 유배로부터의 우리의 복귀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깨달음, 우리의 봄을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용서, 죄로부터의 우리의 자유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들로 볼 수 있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부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우리의 나아감을 원하신다.
하느님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만족시킬 수 있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신다.
하느님은 전체적으로 우리의 행복-개인으로서의 나의 행복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와 피조물 전체의 행복-을 원하신다.
요약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과 치유를 지금 이 땅 위에서 원하신다. 기독교적 삶은 하느님의 구원에 지금 참여하는 것이다.

구원의 은사들
구원의 경험은 바울에 의해 특별한 힘으로 묘사되고 있다. 성령의 은사들은 “자유,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온유, 진실, 선행 그리고 절제이다. 이 중 네 가지, 즉 자유, 기쁨, 평화, 그리고 사랑은 바울의 서신들 속에서 가장 중심적이다.
구원의 경험은 “사랑의 충만함이 있는 삶으로 인도한다.”

신앙을 통해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구원
구원은 은혜에 의해 받게 되며, 우리는 신앙을 통해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은혜
은혜란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는 구원이 하느님의 주도적 역할을 통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는 심오한 의미에서 평등주의적인 개념이다. 은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면, 교만은 그만큼 더 감사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감사와 은혜는 맥을 같이 한다.
신앙
신앙은 하느님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자,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다.

구원과 내세
죽음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매우 일반적인 긍정을 넘어서서 어떤 구체적인 신념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첫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 전통 그 자체 안에는 내세에 관한 다양한 신념들이 있어서, 수많은 내세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표준적인 기독교 입장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이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구원에 대한 성서적 이해의 중심에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 은사들은 자유, 기쁨, 평화, 그리고 사랑이며, 그 열매는 함께 아파함이고 정의이다.

기독교 복음은 우리의 치유와 온전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 관계, 우리의 상처를 치유함으로 온전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 관계, 우리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고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만드는 이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3회 모임, 12월11일(화) / 제3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p173-269
                                           왜 역사적 예수인가? 한인철박사 공개 강좌
4회 모임, 12월18일(화) /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 읽고 토론하기

*한국기독교연구소 주최 예수목회세미나 2008년 2월 19-22일, 안성 수양관 예정*

   
 
   
 

[역사적예수] 화요독서모임 두번째 모임이 11월4일(화) 오후7시부터 8시30분까지 당당뉴스 옆 맑은샘교회에서 열렸다.  1회 참석자 중 2명이 사정상 불참하고 새로 2명이 더와서 7명이 참석한 이 날 모임에선 먼저 돌아가며 3분 생활이야기를 나눴고 이필완목사가 마커스 보그의 <새로 만난  하나님> 2장 요약 발표를 한 후, 책 내용과 읽은 느낌, 그리고 신앙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부딛쳐온 하나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들을 나눴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나온 신앙생활들을 돌아보면서 매우 깊고 솔직한 이야기들이 넘쳐나 여기에 다 적지 못한다. [역사적예수] 독서 모임이 대단히 의미있는 모임임을 모두들 절감했다. 아래에 공개 강좌로 열릴 제3회 모임에서 한인철박사 공개 강좌 들을 준비를 위한 "왜 역사적 예수인가?" 자료와 이 날 함께 공부한 <새로 만난 하느님> 제2장 요약정리를 실었다. 

 

 

 

왜 역사적 예수인가?
                            -한인철박사 공개강좌 들을 준비를 위한 자료 

1.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와 신앙의 그리스도(kerygmatic Christ)
1) 역사적 예수: 역사상의 한 인간으로서의 실제 예수(Jesus as he really was)
2) 신앙의 그리스도: 교회가 신앙에 입각하여 공동체적으로 고백한 예수
* ‘그리스도’는 원래 아람어 ‘메시야’의 그리스어 번역이나,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될 때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바꿔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예수는 메시야이다’라는 말이나, 오늘날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이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말이다.

2. 전통적인 한국 기독교: 신앙의 그리스도와 사영리
1) 니케아신조(327년)에 근거한 신앙의 그리스도: 한국 그리스도 신앙의 뿌리
*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이다.
2) 신앙의 그리스도에 근거한 사영리: 한국 그리스도 신앙의 체계
1.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한다.
2. 인간은 죄인이다.
3.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
4.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은 예수를 믿을 때만 구원받을 수 있다.
3) 전통적인 한국 기독교는 니케아신조에 근거한 신앙의 그리스도에 기초를 두고 있고, 그에 따라 대부분 사영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3. 신앙의 그리스도에 기초한 기독교의 강점과 약점
1) 강점
(1)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과 마음의 안정
(2) 내세신앙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 극복
2) 약점
(1) 배타주의와 제국주의: 동전의 앞뒷면
(2) 예수의 삶의 재현 불가능: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예수처럼 살게 되지 않는다.

1.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
1) 죄인인 인간은 예수처럼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예수처럼 살 수 없다.(cannot)
2) 예수는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이미 용서받은 우리는 굳이 예수처럼 살 필요가 없다.(need not)
3) 예수처럼 살려는 노력은 그것 자체가 행함으로 구원받으려는 율법신앙에 해당하기 때문에,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should not)
2. 한 가지 인간적인 이유
* 솔직히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의 길은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는 한 가지 인간적인 이유의 교리적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4. 왜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려 하는가?
1) 역사적 예수에 기초하지 않은 기독교는 원칙상 기독교라고 말할 수 없다.
2) 역사적 예수에 기초하지 않은 그리스도 신앙은 근거 없는 신앙, 즉 맹목적인 신앙이 될 수 있다.
2) 역사적 예수에 기초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예수의 삶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5.. 역사적 예수의 빛에서 신앙의 그리스도 다시 보기
1) 문제: 기독교인은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에서 믿기는 하지만, 예수가 정말 어떠한 인간이었고, 왜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2) 질문: 예수가 하나님이었다는 고백을 예수의 삶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 도대체 예수가 어떻게 살았길래,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에서 믿고 있는가?
3) 힌트: 예수를 본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다.(요 14:9)
1. 예수의 무엇을 보았다는 것일까?: 예수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의 말과 삶
2. 예수의 말과 삶에서 무엇을 보았다는 것일까?: 예수의 말과 삶은 철저히 하나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3. 예수의 말과 삶이 하나님에게 뿌리를 두었다는 말은?: 예수의 말과 삶은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이다.
4. 그러면 예수를 본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은?: 예수의 말과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예수의 말과 삶을 움직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일찍이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은 없으되, 예수의 말과 삶을 들여다 본 사람은 그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

6. 역사적 예수의 빛에서 기독교인 새로 보기:
1) 문제: 오늘의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기는 해도 예수를 살지는 않는다.
2) 질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처럼 사는 것이 될 수는 없을까?
3) 힌트: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가 한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 14:12)
(1) 예수가 한 일을 한다는 것: 우리도 예수처럼 살 수 있다는 것. 우리의 말과 삶도 하나님에게 뿌리를 둘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를 본 사람은 우리의 말과 삶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
(2) 예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는 것: 우리가 예수보다 더 철저히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뿌리를 하나님에게 둘 수 있다면, 예수가 이루어낸 삶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7. 나가는 말: 역사적 예수에 기초하여 신앙 다시 세우기
1)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는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살았던 삶을 우리도 이제 그렇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단호한 결단의 선언.
2) 예수가 살았던 삶을 산다는 것은 예수와 똑같은 생각, 똑같은 말,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우리들 삶의 뿌리를 하나님에게 두고,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우리들의 생각과 우리들의 말과 우리들의 행동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
3)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할 때 보다는, 다른 사람, 특별히 비기독교인이 판단할 때, 가장 정확할 수 있다. 비기독교인이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 결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기독교인일 수 있을 것. 일찍이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도, 예수를 본 적도 없지만, 비기독교인들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살아계신 예수를 볼 수 있을 것.

<요약>마커스 보그의 새로만난 하나님

제2부 하느님의 이미지 그리기

3장 왜 그리고 어떻게 이것이 중요한가?

하느님에 관해 다양한 이미지가 있다. 문제는 하느님에 관한 우리들의 이미지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개념화하느냐 하는 것이 기독교적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양한 은유들이 있다. 은유의 특징은 비교로 이것과 저것과 같다는 것이다. 은유들이 문자는 참이 아니더라도 다른 의미에서 참일 수 있다.

목자로서의 하느님과의 관계에선 우리들은 양이다. 부모로서의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자녀다. 왕으로서의 관계 속에서는 신하다.

몇 가지 범주는 신인동형론적 이미지는 하느님을 인간의 형태로, 왕 군주, 심판자, 법의 수여자, 옹기장이, 목자, 아버지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 치유자 등과 비신인동형론적 이미지는 바위, 불, 빛, 독수리, 사자 곰, 구름, 바람, 숨, 요새, 방패 등이며
멀리 있음의 이미지-왕, 아버지-와 가까이 있음의 이미지-목자, 어머니, 친구, 방패... 남성이미지와 여성이미지이다.

군주적 모델에서 하느님은 우주를 지배하는 전능하고 권위 있는 남성적 모습으로 그려진다. 죄는 하느님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위엄을 손상했고 그래서 심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면서도 왕으로서의 하느님은 그의 신하들을 사랑한다.군주적 모델의 변형으로서 왕의 사랑은 예수 안에서 보여 지며, 예수는 왕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유일한 아들이다.

군주적 모델에서는 예수를 믿는 일, 참된 회개, 그리고 선한 행위들이 결합됨으로 왕이요 법의 수여자요 심판자이신 하느님과 화해하게 된다. 자신의 메시지와 활동을 통해 왕의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타파하려 했던 예수조차도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하실 왕이 된다.
대중적 기독교는 군주적 모델에 기초를 둔 왕관신화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군주적인 하느님의 모델은 초자연론적 유신론과 통한다. 이 모델은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분으로 예수를 끌어들인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법의 수여자와 심판자로서의 하느님의 이미지는 그대로 두고 법의 틀 속에서 기독교적 삶의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여기에서 기독교 삶의 이행모델의 첫째는 죄와 범죄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전통은 렌즈가 된다. 둘째는 이 모델은 쉽게 초자아와 그리고 기독교적인 삶을 초자아에 의해 통제된 삶과 혼동한다. 셋째 기독교적인 삶의 내적인 동력은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일’ 혹은 ‘요구에 맞게 사는 일’이 된다.

군주적 모델은 기독교적인 삶의 동력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자연, 사회(정치), 그리고 성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을 형성한다. 이 모델은 오랫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을 양육하여 왔다. 그러나 군주적 모델을 생각하여 하느님을 생각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조차 하느님의 사랑은 중심적이었으며 사실상 이 모델을 극복했다.

또 다른 모델은 영으로서의 하느님, 곧 영 모델이다. 이것은 교리적 측면의 ‘성령’보다 넓다. 성서에서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수의 삶과 초대교회에서 영의 의미는 하느님과 동의어가 될 만큼 폭이 넓다.

세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관P하신다는 것(하느님의 내재)과 밀접히 연관되어 이해된 영은 하느님의 초월을 가리킨다. 하느님이 끊임없이 세계와 관계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초월하고 있음을 이미지화 한다. 하느님은 우리 안과 동시에 우리 바깥에 게시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영이시다.

영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특수한 은유들로 비신인동형론적 은유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 지혜로서의 하느님, 애인으로서의 하느님, 여행의 동반자로서의 하느님을 들 수 있으며 요한복음의 예수인 ‘선한목자’가 곧 그렇다.

영 모델이 미친 영향은 첫 번째 군주적 모델에 함축된 먼 거리보다는 하느님의 가까움을 강조한다. 인간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어머니의 자궁 같은 분이다. 둘째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가 동시에 사용된다. 친밀한 아버지, 동반자, 친구, 목자로서의 하느님이 그렇다. 셋째 신인동형론적인 이미지와 비신인동형론적인 이미지들을 동시에 포함한다.

하느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초월한 신비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 속에 잇는 현존이기도 하다. 성서의 오랜 이미지들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은유들은 신과 인간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계약적인 모델로 인도한다.

영 모델의 영향은 달리보이는 창조, 달리보이는 인간조건, 달리 보이는 죄이다. 여전히 죄는 남으나 이제 강조점은 하느님의 버들에 대한 위반으로서가 아니라 관계의 배반과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함으로서의 죄에 있게 된다. 회개 역시 이제는 범한 죄에 대한 진지한 뉘우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영이신 하느님에게로 돌아감과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심판 역시도 일차적으로는 영원한 심판의 위협이 아니다. 우리가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그에 따른 결과를 수반하게 마련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채로 남아있다면 우리는 불만족스럽고 미완성인채로 심지어는 절망적인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영으로서의 하느님 모델 안에서는 군주적인 이미지들이 군주적인 모델 그 자체를 전복시킨다. 기독교적인 삶은 그분과의 관계성을 깨닫는 것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4장 예수와 하느님 -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이미지이다.

예수에게로 돌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이미지를 그린다.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이미지이며 기독교 메시지는 ‘하느님의 이미지’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다. 하느님의 이미지로서의 예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계시다. 예수라는 인물 속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예수는 신적인 존재인가?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현대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기초해 볼 때 과연 예수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20년 전에 시작된 연구는 부활이전의 예수와 부활 경험이후의 예수로 구분한다.

복음서에서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 대신 예수는 인간의 형태를 띤 하느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일종의 가현설이 마치 기독교의 표준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이후 복음서 연구 결과로 예수는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말하지 않았고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부활 경험이전의 예수는 신적인 존재로 하느님이었는가? 당시 예수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감각으로서는 그는 신적 존재가 아니었다.

부활 경험이전의 예수는 영적인 사람, 치유자, 지혜의 스승, 사회적인 예언자, 운동의 창시자였다. 예수는 농부였으며 재기가 뛰어났고 은유적인 마음을 갖고 있으며 금욕적이고 삶의 열정을 가지고 세계를 긍정했으며 사회정치적 정열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자기를 뛰어넘는 경험(유대교 신비주의가)을 했으며 하느님은 그에게 경험적인 실재였다.

부활 경험 이전의 예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그 안에 영이 임재 한 것을 경험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물론 부활경험이후의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그리고 충분히 발전된 교리가 가리키는 신적인 존재이다.

바울은 역사적인 예수를 본 적이 없다. 그가 가르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였으며 그는 부활한 영적 그리스도를 경험했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는 무덤이 비었다고 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이 육체를 가진 실재였으며 예수가 먹고 도마가 만져보고 아침식사를 요리한다.

또 하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영의 경험이다. 이런 것들은 통해 부활 경험은 하느님이 예수를 옹호한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예수를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 분으로 언급했다. 그래서 부활경험은 단순히 예수가 살아있는 실재였다는 것만 아니라 그가 주님이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예수는 살아있고 그는 주님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육신과 함께 중요했던 것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은유였다. 부활 경험이후 경전적인 예수, 신조적인 예수가 확립되었다. 삼위일체교리는 신적실재임을 얘기하고 경험과 신앙에서 발생한 지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3 위격은 가면, 세 개의 다른 역할을 가진 것으로 하느님은 한 분 이신데 3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알려지며 그 중 하나가 예수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이미지요 얼굴이다.
부활 경험 이전의 예수를 하느님의 진지한 현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군주적인 하느님의 모델과 그 모델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을 철저히 전복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군주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군주적인 모델을 전복시킨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신화는 하느님과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화는 사실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상징으로 이야기 한다. 예수출생, 처녀 임신, 별, 현자의 방문 여관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진실을 힘 있게 말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은 역사적인 기억과 신화적인 이야기를 혼합된 형태로 내포하고 있다. 예수 처형 이야기는 출생에 비해 역사에 더 가깝다. 예수는 그가 서 있었던 입장 때문에 지배 체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완성된 가독교 이야기는 하느님과 우리에 관한 이야기, 하느님과 우리에 관한 신화가 된다. 신화로 본 예수의 전체 이야기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속에 관계하신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신화 속에서 예수는 단순한 유대교신비주의자거나 지혜의 스승, 사회적 예언자인 것만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잉태되고 처녀에게서 낳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기도 하다.

예수의 이야기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지혜가 되고 예수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심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아파하심이 되고 예수의 비전은 하느님의 꿈이 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발견되는 완성된 기독교 신화 속에서는 예수의 이야기가 곧 하느님과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물론 역사적인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완성된 이야기는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현존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나타나심, 곧 하느님의 계시와 현현이 된다.

역사적 예수 이거나 아니면 경전적인 예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불필요한 선택이다.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 역사적인 예수와 경전적인 예수를 동시에 보고 동시에 긍정하게 될 때, 부활 경험 이전의 예수와 부활 경험이후의 예수는 둘 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이미지이다. 둘 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낸다. (요약 정리 이필완)



[역사적예수] 화요독서모임 첫번째 모임이 11월27일 오후7시부터 8시30분까지 당당뉴스에서 열렸다.

   
 
  ▲ 역사적예수 화요독서 첫번 모임  
 

9명의 신청자중 1분은 오늘은 사정상 불참하고 8명이 참가했으며, 각자 소개와 읽어온 책 이야기 '하나님에대한 여러 생각들'을 주제로 5분씩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교수가 역사적예수 연구의 현황과 관련 책을 소개하는 30분 강의가 있었다.

   
 

 
  ▲ 김준우교수의 역사적예수 소개 1  

     
 

 
  ▲ 역사적예수 소개 2  

     
 

 
  ▲ 역사적예수 소개3  

     
 

 
  ▲ 역사적 예수 소개 4  

     
 

 
  ▲ 역사적예수 소개 5  

 

 

 

 

 

 

 

 

 

 

 

 

 

 

 

 

 

 

 

 

 

  다음 2번째 모임 때 읽어올 부분은 마커스보그의 [새로만난하나님] 제2부 하나님의 이미지 3장 왜 그리고 어떻게 이것이 중요한가 4장 예수와 하나님 p99 - 172까지이다. 미처 저녁을 들고 오지 못할 경우 간식이 준비되어 있다.

   
 
  ▲ 화요독서모임의 참가자 9명의 면면은 정말 다양하다. 걱정도 되지만 [역사적예수]를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학생1, 대학원생1, 목회자2, 목회자부인 1, 장로1, 권사1 그리고 각양의 직업을 가진 평신도들로 구성되었다.  
 

여러분은  [역사적예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우선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얘기가 됩니다.
당당뉴스 운영자는 최근 [역사적예수] 연구에 관련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될 이유를 절감했고, 하고 싶었습니다.
이왕이면 주위의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이에 당당뉴스가 주관하는 평신도, 청년, 대학생과 목회자들을 위한 [역사적예수] 화요 독서모임을 시작합니다!

[역사적예수] 독서모임 참가 신청자가 19일(월) 오후8시 예수포럼을 마친 이후 현재 7명입니다. 오늘 함께 읽을 책 2권<새로 만난 하나님, 이번달 재 출간한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를 나누어 드렸기에 다음주 11월27일(화) 오후7시 첫모임을 갖습니다.

독서모임 회원은 다음주 첫번 모임을 가질 때까지 <기독교총서를 발간하며>의 김준우 교수 발간 서문과 <새로 만난 하나님>1부 p33-98  이상을 꼭 읽어 오셔야 합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는 틈틈히 읽으시면 됩니다. 역사적 에수 연구의 지평을 넓혀 줄 것입니다.

첫번 모임엔 먼저 김준우 교수의 강의를 들으려고 합니다. 참가를 원하는 분은 꼭 미리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참가신청을 하신 분들에게는 즉시 책 2권을 전달하거나 보내드리며 이메일로 자세한 일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김준우 교수 추천 첫번째 읽을 책/ 새로 만난 하나님 / 마커스보그 지음, 한인철 옮김 / 269쪽

시일 / 11월27일(화) - 12월18일(화) 매주 화요일 오후7시부터 8시반까지
장소 / 충정로2가 경기대, 인창고 입구 24시간 이지마트 3층, 당당뉴스 사랑방
회비 / 3만원(재학생은 2만원, 책2권 값과 간식 포함
, 신청하는 대로 곧 책 보내 드립니다)
신청 / leewaon3@chol.com 011-9147-7449 (이필완) 393-4002 (당당뉴스)

인도 / 당당뉴스 운영자 이필완 목사
한기연 소장인 김준우교수의 특강과 번역자인  연세대 교목실장 한인철 목사의 특강도 함께 준비 됩니다.

   
 
  ▲ 연대교목실 한인철목사  
 

1회 모임, 11월27일(화) / 제1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p19-88
2회 모임, 12월 4일(화) / 제2부 하나님의 이미지 그리기 p99-172
3회 모임, 12월11일(화) / 제3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p173-269
4회 모임, 12월18일(화) / "예수" 읽고 토론하기
5회 모임, 12월00일(??) / 책씻기  * 일정과 장소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 한기연 소장 김준우교수  
 

[역사적예수] 연구 결과에 대하여 호감을 가진 분들이나 혹은 반감을 가진 분들까지도 실제로는 [역사적예수]에 관하여 극히 피상적으로 알고 있거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합니다.
이에 당당뉴스는 매주 화요일 한번씩 모이는 [화요 독서 정기모임]을 열어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우선 [역사적예수] 관련 책을 함께 읽으면서 차근차근 공부하려고 합니다.
[역사적예수]를 공부하는 독서모임에 여러 평신도들과 청년, 대학생과 목회자 여러분들의 참여 바랍니다.

* 화요독서모임은 김준우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관련 책들을 한권 한권 계속 읽어나갈 예정입니다.

Homepage  :  
http://historicaljesu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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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난 하느님
[21C 기독교총서] 마커스 보그 / 한기연
Release Year :
ISBN :
USER RATING :  현재 독자평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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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속에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하느님은 여전히 전지전능하신 분인가?
하느님은 세상 밖에서 가끔씩 세상일에 개입하시는 분인가?
오늘날  과학시대에는 하느님이 정말로 \"실직한 신\"인가?
어떻게 하느님을 가슴으로만이 아니라 머리로도
이해할 수 있는가?

30대에 교회를 떠났다가 40대부터 다시 교회생활에 헌신하는 예수 연구 전문가가 자신의 체험과 또한 30년 동안 학생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교조주의적인 하느님 이해를 넘어 현대인들이 처음으로 새롭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

★ 가격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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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 (개정판)
[21C 기독교총서] 존 도미닉 크로산/ 김기철 역 / 한국기독교연구소
Release Year : 2007/ 12,000원
ISBN : ISBN 978-89-87427-76-8 94230
USER RATING :  현재 독자평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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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예수에 대한 20세기 최고 권위자의 결정판! 예수의 복음과 복음서의 예수의 역사적 진실!! 예수의 역사는 어떻게 예수에 관한 신앙으로 발전했는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평생의 작업 끝에 밝힌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들의 역사적 진실!!

존 도미닉 크로산 박사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서 시카고 드폴대학교의
성서학부 명예교수이며, 미국 종교학회 역사적 예수
연구분과 위원장을 역임했다. 작고한 로버트 펑크 박사와 함께
[예수 세미나]의 공동대표를 맡아 최근의 예수 연구를 이끈 선봉장이었다.
그의 저술들 중에는 In Parables(1973), Cliffs of Fall(1980), In Fragments(1983), Four Other Gospels(1985), The Cross that Spoke(1988), The Dark Interval(1988), The Historical Jesus(1991),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1994), Who Killed Jesus?(1995), Who is Jesus?(1996), The Birth of Christianity(1998), The Essential Jesus(1998), A Long Way from Tipperary: A Memoir(2000) 등이 있다.

저자는 슈바이처 이후 현재까지의 다양한 예수상을 비판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학제간 연구방법론을 통해 방대한 저작 {역사적 예수}를 출판함으로써 최근의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공인받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가 출판된 후 미국에서 종교부분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교회의 반지성주의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냉담했던 많은 사람들이 인간 예수의 역사와 그리스도 신앙을 치밀하게 연결시켜 분석한 크로산의 연구를 통해 기독교의 전통 교리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어 신앙적인 해방과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3년 동안 학계의 열띤 토론과 논쟁을 거쳐 그 책 내용을 다시 간략하게 정리한 이 책은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에 대해 정직하고 정확한 진실을 보여준다. 1세기 로마제국의 세계화에 맞서서 보다 근원적이며 영구적인 사회적 혁명을 실천한 예수의 철저한 평등주의 전략을 치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낸다.

옮긴이 김기철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여수석교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역서로는 {교회의 모델}(에버리 덜레스), {쩨다카: 생명에의 길}(아즈리엘 아이젠버그) 등이 있다.


"크로산 박사는 학문적 정직성을 고집한 채, 복음서들 속에 사실과 허구, 역사와 신화가 얽혀있는 것을 풀어냄으로써, 역사적 예수와 최초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확실히 드러낸다. 이 책은 진정한 기독교적 삶을 발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공헌을 하였다.
- 우타 랑케-하이네만, Eunuchs for the Kingdom of God의 저자

"이 책은 크로산 박사가 평생동안 복음서들과 예수 연구에 몰두한 다음 당당하게 그 정수를 뽑아놓은 힘찬 작품이다. 갈릴리 출신의 이 불가사의한 현자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주의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크로산 박사는 그의 예수 연구로 인해 20세기의 위대한 성서학자 반열에 올랐다. 그의 "혁명적 전기"는 혁명가의 전기이다. 즉 이 책과 그 주제는 진리를 찾기 위한 반란자들이다.
- 로버트 펑크, {예수에게 솔직히}, The Five Gospels의 저자

"이 책은 놀랍다. 크로산 박사는 기억과 상상력 모두를 존중하여, 복음서의 신화적 재료들을 벗겨냄으로써 정확한 예수상을 그리고 있다. 유창한 문체로 잊을 수 없는 예수상을 그리고 있다. 누구나 이 책을 읽고 싶어할 것이다."
- 버튼 맥, {잃어버린 복음서}의 저자

"오늘날 땀흘리는 신약성서 비평가들 가운데 크로산 박사는 언제나 선봉이었다.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는 간략하고 분명하며, 독자들을 사로잡는 예수의 삶의 이야기로서, 장기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비록 이 책은 학자 크로산의 저작이지만, 무엇보다도 문필가 크로산의 작품이기도 하다."    
- 잭 마일즈, {신의 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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