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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6 충청남도 서천군채우려는 욕심보다 비우려는 마음으로 둥굴이의 인간과 자연에 하나된 삶, 유랑캠페인
당당뉴스 편집실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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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0월 10일 (수) 18:35:44 [조회수 : 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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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글이 박성수님은 작년 9월부터 전국을 유랑하고 있습니다. 몇 달전, 필자가 11년동안 목회했던 벌교원동교회에 유랑길에 들르게 되면서 서로 이메일로 연락해 알게된 분이지요. 방학동안은 쉬고 9월부터 다시 유랑길에 오르면 당당뉴스에 정기적으로 기행기를 게제하기로 하였습니다. 둥글이의 전국 유랑기 함께 가보시렵니까?  혹 사진이 안보일 수도 있습니다 http://www.howcan.or.kr/ 

 
 
   
 
애써 둥글이의 일지를 떠둘러 보는 분들께 글이 매끄럽지 않고 철자법 맞춤법 까지   종종 틀리는 점에 대해서 송구스러움의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꾸벅~)

 

   
 
  둥글이 박성수  
 
 편하고 여유 있게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에서 몇 번의 퇴고를 거치며 글을 다듬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군청민원실, 도서관, 우체국, 때로는 길가 벤치 등에 앉아서, 혹은 텐트 속에서   지역당 적게는 20여장에서 많게는 40여장 분량의 글과 평균 100여장 되는 사진을   틈틈이 정리해대야하는 상황이다보니, 일지를 ‘예쁘게’ 꾸미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역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릴 수 없는 관계로(시간을 늘리면 늘릴수록 내 젊은 시절을   죄다 길바닥에서 보내야 하니깐 ㅠㅜ) 하여간 짧은 시간 동안에 보다 집중적으로 ‘잘~’   글을 정리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시민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분이라면,

일지 하단부의 [ 포용과 비판 3 - 21세기 운동의 방향 ]은 필히 살펴 주시고 조언 주시기 바랍니다.


머릿말.


포용과 비판 사이 2 - 주체적 권리 찾기


과거 고등학교 다닐 때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너무 떠들어 대는 통에

여선생님이 울고 나가는 일 등이 있었다.

나름대로는 너무 화가 나서 수업시간에 떠드는 친구들에 대해서 잔소리를 시작했다.


대학 다닐 때는 도서관에 책 놓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공부할 기회를 뺏는 이들을 상대로

도서관 대정리? 활동을 수시로 했고, 학교 버스 새치기 하는 학생들 대상으로도

각종의 활동을 했었다. 학업보다 열심히.


졸업 후에는 버스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댐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편안히

버스에 앉아서 갈 기회를 빼앗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버스 안 예절 지키기 캠페인’ 스티커 등을

(회사 허락 하에) 버스에 붙였고, 버스 탈 때마다 피켓을 열고 앞에 서서

버스 탄 승객들을 대상으로 ‘버스 안 예절지키기’ 캠페인을 행했다. 1년 넘게 그리 했다.


현재도 도서관에서 책 읽는 중에 소란스럽게 하는 사람들,

찜질방에서 새벽에 떠드는 사람들이 있으면

적당히 참다가 가서 한마디씩 해주곤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내가 종종 듣는 소리는...

‘왜? 그렇게 예민하냐?’

‘마음을 좀 넓게 가져라’

‘네 할 일이나 잘해라’

‘네 마음만 편히 가지면 그러한 소리는 안들린다’는 등의 충고이다.


이런 때는 답답함이 목 위까지 밀려온다.

그런 일에 그냥 눈 딱 감고 있으면 내 자신이 편한 것을 몰라서 그리했겠는가?


고등학교 시절 그리 얘기를 했던 친구들의 말을 들었다면,

‘할아버지(잔소리꾼)’라는 별명을 얻어 짝궁없이 홀로 쓸쓸히 고교시절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 때도 그냥 그 무질서하고 타인 배려하지 않는 이들과

그냥 잘 어울려서 취직 공부 열심히 했으면 지금은 안정된 직장생활하면서 하고 있었을 것이다.


졸업 후에도 계속 그러한 ‘다른 사람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내 할일’만 잘했다면

나는 나름대로 ‘평온한 살’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공공의 영역’에서 빚어지는

분명한 ‘사회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 사안이 너무 경미해서 ‘사건’이 되거나 ‘이슈’화 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안은 개인의 문제로 지나쳐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회 공공의 영역에서 하나의 주체가 다른 주체의 자유와 평안을 얻을 권리를 침해하는

사안으로 판단해서 이에 ‘사회적’인 개입을 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주체적 개입’은 ‘나’라는 주체가 사회 속에서 보편적인 개인으로서

사회를 대변해서 능동적인 사회 작용을 이뤄내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주체적 개입’은 ‘개인적’의 행동이 ‘사회적’의미를 창출하는 일련의 활동을 말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사회 속에서 빚어지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제안되는 사안’에 대해서

그냥 ‘사사로운 일’로 치부해 버리고, 그 하나하나의 사안들이 모여지고

사회적인 파급력을 발휘해서 발생할 사회구조적인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를 하나 하나 짚어 내는 것에 대해서

‘왜? 그렇게 예민하냐?’ ‘마음을 좀 넓게 가져라’ 는 등의 충고나 일삼곤 한다.


이렇게 자기 주변에서 빚어지는 ‘사회적인 사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이의 개입을 통해서 작은 부분부터의 사회 변화를 위한 노력이 차분히 축적되지 않다보니,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부조리’에 면역이 되고 무반응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자기 가족이나 친구, 동문, 조직원들의 부정과 비리 마저도 그냥 각자가

알아서 조절해야할 문제로 인식하면서 눈감아주거나 타협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혈연-지연-학연으로 얽혀진 비합리적인 무리근성으로 움직여지고,

이로 인한 총체적인 사회 부실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사회적 사건’을 접하고도 ‘주체적 개입’의지를 깨우지 못하는

각 개인의 순간순간의 불성실이 축적된 결과가 아닐까? 

‘주체’와 ‘개인’이 제대로 깨어나지 않은 터에 사회가 제대로 설리는 만무한 것이다. 


우리 각자의 일상에서의 조그마한 ‘주체적 나섬’의 노력들은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기반이 된다.

따라서 공공의 장소(버스 안, 도서관 등등) 등에서 시끄럽게 떠벌리거나,

휴지를 내버리는 등의 무질서한 행태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면, 

‘내가 조용히 안식을 취할 권리가 있는 이 공공장소에서,

왜? 제가 당신의 떠드는 소리에 귀를 간지럽혀야 합니까?

좀 조용히 말씀해 주실래요’는 식의 이야기를 건네고,

무질서한 행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는 ‘보편적 개인’의 권리를 찾기 위한 일상의 작은 노력이다.   

이것 자체가 사회의 지반을 탄탄하게 하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주체를 온전히 세우는 ‘훈련’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주장이 딱딱하게 ‘주체적 권리’만을 강조하는 세상이 ‘이상사회’라는 것은 아니다. 


다소 건조하고 원리원칙적인 활동을 통해서 능동적 ‘주체’와 ‘개인’이 우선 깨어나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못한 전체주의 집단과 조직의 관성에 매몰되어서 발생되는 각종의 부정 부당함의

‘자체정화’를 위한 ‘최소한의’ 시스템 장착일 뿐이고 다만 ‘중간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일상에서의 잡다한 노력과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깨어난 ‘주체’와 ‘개인’ 들은

그 이후 사회, 자연, 우주와의 합일을 시도하면서 자아를 ‘확대’(다른 표현으로는 자아버림)를

시도해야 하는데, 그것은 또 다른 논의에서 다뤄져야할 문제이다.




나를 뛰어넘기


서천 가는 길에는 내내 피곤이 밀려왔다.

시군 간 이동시에는 45분 걷다 15분 쉬다를 반복하곤 하는데

잠시 누워 쉬는 족족이 잠이 들 정도였고,

걷는 중에는 눈동자가 돌아가고 하품이 계속 나곤 했다.

36km의 거리 내내.


나라는 인간 머리도 좋지 않고, 가진 재산도 없고,

그나마 가장 쓸 만한 능력이 체력이라서 이리 유랑을 다니고 있는데,

이리 허고 헌 날 골골대야 하다니...


슈바이처는 스물다섯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머리가 뛰어났고,

예술적 감각이 있었으며, 글도 잘 썼었다.

그는 나이 30살 이후로는 자신의 삶을 인류에 봉헌 할 것을 다짐했으며,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병원을 설립하여 오지에서 자신의 일생을 봉사로 일관했다.


이에 반해 나라는 인간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몸으로 떼우는 활동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비교는 내 처지를 한탄하기 위함은 아니다.

특별한 능력과 힘을 소유한 이들 몇몇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온전히 해 낼 때라야만이 

세상이 올바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힘을 발휘한 역사상의 몇몇 위인이 보인 역량을

상대 비교하면서 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폄하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경쟁력 있는 활동이 ‘몸으로 떼우는 활동’인 이의 몸이

이리 허약하고 골골 거리니 이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그 ‘골골’ 거리는 몸과, ‘투덜’대는 입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직면한 상황에 성실히 임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바로 시지프스 언덕에서 아직까지도 돌팍을 밀어 올렸다가 다시 굴려 내렸다가를

반복하는 이의 자기초월성이 현현되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훌륭한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서 그 능력의 실현으로 세계사의 줄기를

바꿔 낼 수 있다면... 당신은 말 그대로 ‘영웅’ 이 될 것이며 사람들로부터 찬양을 받으리라. 


하지만 당신의 부족한 능력과 결핍된 힘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비루한 투쟁과

갈등에 맞서 그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당신은 순간순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신은 공평하다.

특출한 능력을 가진 이가 수 없이 많은 세계사적 위업을 이루고 가게 할 수 있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천재를 받지 못하고 태어난 이들은 매 시간마다 스스로를 초극할 수 있는 ‘노력의 기회’를 부여해 주셨기에...


나는 오늘도 길바닥에서 ‘골골’ 거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골골거리는 몸뚱아리를 불평하면서

내 자신을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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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가는 길



부여에서 몇 일 머물렀던 농민회 사무실에서 12시 경에 빠져 나와서 서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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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 부여읍을 빠져나가는 길목 / 백제대교 - 서천까지 36km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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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0 백제대교 건너편으로 부여 팔경의 하나인 자온대(그 위에는 ‘수북정’)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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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0 백제대교 건너는 길목에 느티나무가 인도로 뻗어 나온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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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0 세상 편한 개 한 마리 - 인기척에 눈만 살짝 떠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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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0 쉬어가고 싶은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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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0 가드레일 너머 억세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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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5 바닥에 새겨진 죽음의 흔적 - 그 처참한 당시의 상황을 시간이 좀 지워내기는

  했지만, 발동되는 상상력은 그 처절히 찢기워진 고통의 몸부림을 망막 앞에 재현시킨다.   

이정도흔적이려면 아마 4주 이상 수천 대의 차량에 짖밟혀야 했으리라.  ]

  

피곤에 눈이 핑핑 돌아가는 마당에 국도 상에서 마땅히 쉴 곳이 없어서,

갓 길 한편에 자리해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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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0 갓 길 한편에 누워서 ]


아스팔트도로는 철저하게 ‘차’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에

동물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도보여행객에게도 항시 ‘죽음’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종종 이리 누워 쉬면서 하는 생각은

이렇게 쉬고 있는 중에 혹시나 트럭이 갑자기 돌진해서 깔아 뭉게고 지나간다면

부디 ‘머리’부터 짓이겨 주십사 하는 것이다.

맹렬히 바닥을 빨아들이면서 질주해 오는 차바퀴가 내 팔 다리 몸을 짖 뭉게 낸다면

그 고통을 뼛속 깊이 느껴야 할 터이지만,

머리부터 시작한다면 아무것도 못 느낄 것이다.

(물론 치우는 사람들이 좀 곤욕스럽기는 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앞으로 쉴 때는 차오는 쪽으로 머리를 향해 놓아야 겠다.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내가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거나,

염세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거나, 죽음을 동경하거나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혹시나 죽는다면 덜 고통스럽게 죽고 푼 소박한 바램이랄까? 

아니 오히려 이렇게 ‘차바퀴에 머리가 깔렸으면 하는 바램’은

고통 없이 행복한 단꿈에 젖어 있다가 가고 푼 ‘낭만주의자’적 발상이리라.


길바닥에 널려진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아오다 보니 이런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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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0 이 녀석은 턱뼈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몸이 짖이 겨져서 죽은 듯 하다.

  그 뼈 속 곳곳이 스미는 고통 때문에 한동안 이 턱으로 절규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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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0 가죽만 앙상히 남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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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0 쥐포가 된 동물들 ]


 3차원의 시공을 자유롭게 이동하던 동물들은 이곳 마술의 아스팔트 바닥에 발을

들여 놓은 후에는 2차원의 멈춰진 시간에 판막이 되어 차츰 멈지로 사라져가곤 한다. 

자연 상태에서 그 고유의 종의 모양, 행태, 삶을 향유하던 동물들은 이곳 아스팔트 바닥에

발을 들여 놓은 후에 ‘쥐포’로 수렴되고 분자로 환원되곤 한다. 

이들의 죽음이 ‘땅에서 태어나 땅의 뜻에 따라 땅으로 돌아가는’ 다른 동물들의 죽음과

다른 것은 이들의 죽음의 원인과 이유 대부분이 ‘한국도로공사’의 도로포장작업과

‘개개의 차주’의 운전 질에 의한 것이고,

그 죽음이 다른 생물에게 양분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다만 아스팔트 위의 뿌연 흙멈지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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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1 정말 ‘쥐’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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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2 1093 기타의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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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0 땡 볕을 가르며 길을 걷다 보면 흐르는 땀에 때가 밀리기도 하고

손이 끈적끈적 해져서 영 께름 직한 기분이 들곤 한다.

이런 때는 씻을 곳이 나타나기를 바램하곤 한다. 

네 시간 째 걷는 중에 오아시스가 하나 눈에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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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0 부여군 구릉면 박모씨댁 수문장 / 용맹하기가 이를데 없음.

  이 강렬한 카리스마의 멍멍이는 마치 ‘개쌔꺄 빨리 꺼져. 안그러면 물어줄테다’라고

  포효하는 듯 했기에 겁먹은 나그네는 빨리 그 앞에서 꺼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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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0 개의 박대를 받은지 얼마 안 되어서 두팔 벌려 나를 반기는 대추나무를 접했다.

밤은 하도 많이 따 먹어서 이제 질려서 눈도 안 가는데, 대추나무를 보자 반가움이 앞선다.

짐을 내려놓고 양쪽 바지 주머니에 부지런히 따 넣는다.

길가는 내내 내 입을 심심치 않게 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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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0 고개 넘어오는 아쥐매. 오늘은 어떤 세상을 경험하고 오셨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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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0 세상으로 향한 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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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0 밤은 고개를 넘어오고... ]


한 발 짝이라도 더 걸어서 야영을 해야 다음날 좀 덜 고생을 하기 때문에

어두컴컴해진 후로도 한 시간 쯤을 더 걸어서 7시 반쯤에 옥산면 옥산 초등학교 구석으로

야영을 하기 위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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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0 옥산면 옥산 초등학교 한편에서 야영 ]


인적이 끊긴 조그만 동네의 초등학교 한편에 텐트를 치고 나서

밤하늘에 살포시 뿌려진 별들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평온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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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0 아~ 제길... 정성들여 찍는다고 찍은 밤하늘이 이거라니...

  천체망원경 사고 싶다. ㅠㅜ ]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대하는 학교의 풍경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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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0 학교 운동장 한편의 야외독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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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0 학교 정문 ] 


옥산면에서 조금 빠져 나오는 길에 이정표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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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0 전날 20 km를 걸어왔나보다. 서천까지 16km 라면 너덧 시간 걸으면 도착하리라.

그 위는 고향 ‘군산’의 이정표.

전라남도 영광에서 경상도를 돌아, 전북 동부를 거쳐, 경남 남부를 지나는 마당에 고향땅의

이정표를 보게 된다. 가깝고도 먼 고향.

하지만 떠도는 나그네에게 고향이 따로 어디 있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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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0 모씨 댁 스레트 지붕 위에 박이 하나 자라고 있는디~

 저 안에는 금은 보화가 있을까? 도깨비들이 들어차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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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0 옥산저수지 한편으로 수련이 자라는 모습 / 그 위로 보이는 다리는

‘옥산저수지대교’ 정도 되는 다리인가? 저수지를 삥두르는 도로가 있음에도

뭐가 그리 급하다고 저리 저수지 위로 세워져야 하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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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0 길 가는 내내 안만 들어도 되는 쓸데없는 길이 옆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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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0 염소 한 마리가 ‘너희들 하는 짖이 다 그러지지지~~~’ 라며 핀잔을 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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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0 길 한편으로 소똥이 쌓여 있다. 인류는 저것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이상으로

기술문명을 발전시키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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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5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동에 의한 지속된 호우로 여물지 않는 벼.

 산성화될 비... 점차 난대화 되는 기후로 인해서 농사 짖는 일은 점점 어려워 질 것이다.

  2007년 4월 6일자 UN 보고서는 기후변화와 각종의 자연재해로 인해서 이번 세기 말에

  대부분의 동식물이 멸종하면서 파국을 맞이하리라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발밑에 떨어져있는 자신의 직접적인 이익을 거머쥐기

  위해서 후손과 환경의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조차 두고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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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0 인간의 욕망은 결국 자멸을 위한 것이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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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5 어떤 새끼님이 인류자멸을 위한 깊은 이해를 얻기 위한 학습을 위해

     이 숲속에 책상을 가져다 놓았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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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6 인간의 만행에 독기를 품은 독사의 눈 같은 숲...]


하지만 이 유랑의 길에 답답함만이 있다면 어찌 한발을 내 디딜 수 있으리요.

폐 속으로 신선한 공기 스며드는 가을의 정취도 가는 길 내내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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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 억새풀 산들거리는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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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0 잎새 가을에 물드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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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0 불어오는 바람에 잎은 떨어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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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0 낙엽 길을 가르는 폭주족 어르신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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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0 서천군 홍림저수지에서 낙시꾼들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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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0 장항선(서울-(서천)장항) 열차 지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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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00 유난히 버거웠던 이동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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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10 십여분 겔겔 거리고 난 후 모퉁이를 도니 서천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


서천으로 오는 내내 ‘내가 여기를 와본 적이 있는 것 아닌가?’하는 기시감을

들게 할 만큼 보여지던 장면이 계속 되풀이 되어서 머리의 혼란이 가중되는 일이 있었다.

이 장면은 특히나 지나쳐 왔던 수십여 개나 되는 시내버스 정류장 벽면에서는 어김없이 접해야 했는데,

이 장면을 벽면에 그리 연출시켜야 했던 이의 절박함이 가슴으로 스며듦에

일지에 기록해 남김으로 그의 수고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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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0 사람을 찾습니다. 포스터 ]




서천군 


서천은 충청남도 서남단에 위치해있는 지역으로 인구 6만 5천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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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0 서천의 지리적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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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0 서천군청 ]


비교적 생태환경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서천 남부를 두른 금강변이 철새도래지로서의

생태적으로 의미가 있고, 서부 해안을 끼고 ‘다사리’ ‘송석리, 선도리 등의 갯벌 체험장이 있으며,

춘장대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서천 8경인 마량리 동백 숲과 신성리 갈대밭, 한산 모시마을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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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00 서천군의 케릭터인 - 서천의 특산품인 한산모시 줄기와 잎을

   모티브로 하여 머리모양을 형상화하였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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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00 서천시가 ]

 

 


 

 

 

 

 

 

 

 

사람 1

 

몸이 많이 피곤해서 어린이집 정문 한편에서 배낭을 깔고 누워 눈을 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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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00 어린이집 정문 앞에서... ]


그런데 전화가 한통 온다.


‘조동준’


자주 보는 사람의 경우에는 전화기에 찍힌 이름을 보는 순간 상대의 어굴이 떠올려지곤 하는데,

이 사람 안본지가 한참 되어서 얼굴을 떠올리려는데 1초는 족히 걸린 듯 하다.

그랬다. 

이 사람 고향은 서천으로, 군산지역에서 복지시설 등에서 일했었는데,

그때 얼굴 익히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이도 같겠다, 사람도 좋겠다.

격 없이 더 친해질 수도 있었는데, 활동하는 공간이 좀 다르다 보니 더 친해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친해질 만하니 서천으로 넘어와서 생활하다 보니 연락이 끊겼었다.


그런데 내가 서천에 온 것을 확인하고 이 친구가 전화를 준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낮잠을 포기하고 군청에서 관광지도 하나 받아서 바로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사회복지협의회와 함께 사무실을 나눠 쓰고 있었는데,

인상 좋은 협의회 관계자님의 양해를 받아서 몇 일 머무를 수 있게 자리를 봐줬다.


이 친구(동준)는 시민사회운동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시민들을 끌어내지 못하는 시민사회의 운동성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지를 견지하고 있었는데,

과거의 구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역의 단체들과의 이질감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이란다.


그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고도 순수한 열정이 어느 순간엔가는 결실을 맺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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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0 동준 친구 운전 중 ]


이런 차분하고 신중한 친구들을 볼 때 마다 ‘열등감’? 이 밀려오곤 한다.

나름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 적인 측면이 있고 ‘쌈닭’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기에

사람들을 제대로 품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데,

이런 친구들을 볼 때 마다 그 덕성에 한없는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사람 2


이 친구가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지역 사람이 있다며 ‘기인’을 한분 소개시켜준다.

이강선님.

이분은 참으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상당히 통하는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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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0 이강선님 / 사무실에서 ]


사진작가로서 미국에 가서 5년간 공부를 했을 정도로 그 방면에 전문성을 쌓았는데,

작은 앵글집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시는 한편,

본업보다 더욱 열성적으로 ‘시민운동’을 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 시민운동은 ‘시민단체’의 운동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시민의 운동’이었다.

자신의 일상에서의 작은 실천을 통해서 세상이 변화된다는 믿음 하에,

투철한 사명감으로 무장되어 자신이 현재 직면한 삶에서의 부정과 부조리에

단호히 대처하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그러한 운동이었다.


절대로 ‘타협’이라는 것이 없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그는 - 신호위반, 휴지 버리는 행동을

발견했을 때는 즉시 시정요구를 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즉시 신고해서 문제 삼는다고 한다.

경찰서에 이를 신고를 했을 때 당사자들이 이를 잡아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에는 즉결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자처하기도 했고 실지로

두 번 법원에 출두하셨단다. (참고로 경범죄를 인정하면 과태로 물고 끝나지만,

이를 잡아떼다가 법원까지 가면 ‘벌금형’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시민권력’. 즉, 서부활극에서와 같이 ‘말로 하는데 안 통했을 때는

법적 강제력을 과시‘해서라도 사안을 해결하려는 단호한 결의의 표현이다.


그의 철저함과 공평무사함이 처음에는 진의를 몰라주는 주변사람들의 원성을 샀지만,

차츰 그의 삶 속에서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원칙을 이해하며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이

늘고 있단다.


그의 ‘원칙주의’는 시민사회단체의 양면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단다.

외부의 대상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손가락질 할뿐 정작 자기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지 못하는

이들의 ‘이율배반적 운동성’ 자체가 잘 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식을 그대로 운동성으로 승화시켜, 자기 자신의 생활로부터의 변화를 통해서

변화의 근본적인 틀을 짜 맞추자고 하는 것이 이분 ‘이강선’님의 지론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일상에서의 주체적인 운동(자잘한 질서와 의식운동)]과

[사회운동(때론 격렬할 수 있는 운동)]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기에

격렬하고 폭력적인 운동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이강선님의 입장과는

약간 일치할 수 없는 관점이 있었지만, 하여간 이분이 한국적인

집단주의 사회에서 흔히 보기 힘든 소중한 분임은 분명했다.


일반 집단, 조직 활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단체행동은 잘 하지만,

개개의 일상의 장에서의 진보적이며 주체적인 운동이 꾸준한 흐름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는 독재자와 자본가를 상대로 직접적인 ‘조직’의 힘의

과시만 훈련되어온 이유로 사회적 투쟁을 통한 ‘사회적 역량’의 실현에만 힘썼을 뿐,

일상 속에서의 ‘주체적’ 실천이 훈련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런데 이분은 원래 기질적으로 그러한 것인지,

미국에서 사진 공부를 하면서 미국식 합리주의 정신을 알게 되서인지,

그러한 ‘주체적 실천’의 문제에 대한 온전한 관점과 신념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참으로 특별한 분을 이곳 서천에서 만날 수 있었다.



[ 서천초등학교 캠페인 ]


그 정면 입구가 소나무로 정취를 더하는 서천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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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0 서천초등학교 전경 ]


스티커를 사열해 놓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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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0 스티커 사열 ]


쌀쌀맞은 행동을 하며 가는 아이들은 없었지만, 아이들이 약간 무뚝뚝하게 느껴졌다.


활동하고 있는 곳 반대쪽 입구로도 아이들이 상당히 등교를 하고 있었는데,

군단위 초등학교로서는 드물게 학생숫자가 1400여명에 이를 정도로 큰 학교이다보니,

이쪽 문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에게만도 어느새 천여장의 스티커를 다 나눠주고 빈손이

되어 있었다.(원하는 아이들은 종류별로 몇 장씩 가져간다. ) 


별다른 특이사항 없이 활동을 마칠 수 있었다.


활동이 매너리즘에 빠진 듯 하다.

새로운 것이 느껴지지 않고, 늘상 하는 똑같은 활동으로만 느껴지니...

정비가 필요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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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00 서천초등학교에 한쪽 벽면에 붙어있는 플랭 - 100 점 맞은 애들 다섯명 성적표와 사진...

당사자의 부모들은 ‘뿌듯’해 할 것이고, 다른 부모들은 ‘부러’워 하겠지.

0점 맞은 아이들 플랭이 ‘재미’ 꺼리로 천역덕 스럽게 걸릴 수 있는 사회는 오지 않을까? ]


 

 

 


 

 

 

 

 

 

 

 

포용과 비판 3 - 21세기 운동의 방향

(오전부터 급히 쓰니라고 좀 정리가 덜 되었습니다.)


1. 시민운동의 두부류

운동의 ‘대상’ ‘목적’ 등에 따라 시민운동은 여러 차원에서 구분될 수 있겠지만,

‘주체적 실천성’을 기준으로 시민운동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주체적 실천]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실천]운동이다.

[주체적 실천]운동이란 사회 이슈의 문제보다는, 자기성찰에 기반해서 일상에서의

자잘한 사안에 대한 고민과 실천에 중점을 두면서 ‘주체적 실천성’을 각기의

사회구성원에게 확대함으로 인해서 건전한 사회 기반을 형성하려는 운동이다.


[사회적 실천] 운동은 반독재, 반자본 투쟁 등의 일종의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

사회의 기반을 다지려는 운동으로 주로 ‘조직적’ ‘집단적’ 실력행사를 동반한다. 

(* 편의상 ‘주체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개념을 위와 같이 나눴는데,

실지로 주체적 실천운동 ‘만’하거나 사회적 실천운동 ‘만’하는 활동가는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활동에 대한 인식-실천력이 1:9 / 2:8 / 3: 7 정도로 나눠져 있지만

문제를 개념상으로 다루기 위해서 이 양자를 나누기로 하자)




2. ‘사회적 실천운동’의 한계

현재의 시민운동단체들의 운동성은 주로 반독재, 반권력, 반 자본 투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사회적실천’운동에 대체로 집중되어 있다.

이는 해방이후 6.25를 지나 군부독재시대를 거치고, 현재에 이르르면서,

그 매국 - 독재의 잔재들이 민중을 억압하던 직접적 물리력을 자본과 정치, 행정에

교묘히 삼투시킨 이유로 필히 이에 저항할 수 밖에 없었던 특성에 기인한다.

이 단체들의 동반된 격렬성 역시 민중을 짖밟는 세력들에 대한

생존권확보차원의 저항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외국과 같이 계몽과 이성의 시대를 거치지 않고,

즉 ‘자기성찰’의 단계 없는 시민사회운동이 진행되다 보니,

그러한 사회운동의 한계는 빈번히 드러나곤 한다.

예를 들어 반독재 반재벌을 외쳤던 이들의 상당수가 ‘기회만 되면’ 권력과 자본을 움켜쥐기 위한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그 한 예이다.

이는 임지현 교수가 우리안의 파시즘에서 이야기 했듯이 외부사회의 부조리한 권력이

개인 내부에 그대로 삼투 - 응축된 ‘내안의 파시즘’의 다름이 아니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계몽과 이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자기성찰’을 통해서 주체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외부의 거대한 적(독재, 자본)에 대해서만 ‘단죄’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이러한 ‘자기성찰’과 ‘자기주체’가 없는 사회활동의 주목할만한 특성은 집단,

조직을 이뤄내서 행하는 단체행동은 잘 하지만, 각 개인의 일상에서의 진보적이며

주체적인 운동이 꾸준한 흐름으로 진행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는 독재자와 자본가를 상대로 한 사회적 투쟁력만을 길러왔을 뿐,

일상 속에서의 ‘주체적 실천’이 훈련되지 않은 이유이다.  

 

이렇다 보니 ‘시민사회’의 영역을 일상에서 꾸준히 확대하여 그 세력을 확장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문제점 자체도 파악하지 못하며 축소되는 조직의 규모와 세에 한탄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3. ‘주체적 실천운동’의 한계

그렇다면 현재의 사회적실천운동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운동방식은

모두 거부되어야 하고, 대안적으로 새롭게 머리를 드는 주체적 실천운동만 대세가 되어야 하는가?

물론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자본세력을 견제하고 이에 저항할 사회적실천 조직이 없다면

주체적 실천운동을 할 수 있는 기반 자체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 한국사회에서 행해져야하는 올바른 시민운동의 방향은

자기 성찰에 기반한 일상에서의 ‘주체적 실천’과

민중을 억압하는 모든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사회적 실천’이 병행된 것이어야 한다. 


4. 양자의 대립

우리가 애초에 ‘이성(주체)의 시대’를 거쳐왔다면 양자(주체적 실천/사회적 실천)의 접목은

고민의 여지가 될 꺼리도 아니었다.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주체적 실천’을 깨우는 과정일 테고,

이에 따라서 시민사회의 운동성도 그에 맞게 편성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과 ‘주체’가 제대로 세워질 수 없는 ‘집단주의’사회에서

‘사회적 실천운동’만 활기를 띄다 보니 이 양자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그것처럼 원래 하나였어야 할 것이 두개로 나눠지게 된 것이고,

그 분열된 정신은 운동의 경향성으로 고착되어진 것이다.


이에 각자의 기질에 따라서

내향적이고 자기의식에 집중하는 경향의 이들은 ‘주체적 실천 운동’에 비중을

두면서 마치 그러한 주체적 실천운동만이 최선의 활동이며

투쟁성 사회운동을 시대에 뒤떨어진 운동이라고 비난하는 것이고,

외향적이고 어울려하기를 좋아하는 기질의 이들은 ‘사회운동’에만 비중을 두면서

주체적 실천운동을 시대의 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에티켓 운동쯤으로 폄하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 하나의 뭉뚱그려진 세계인식-실천의 에너지로 각개인의 머릿 속에서

조정-통합의 과정을 거쳐서 정립되었어야할 이 양자의 힘의 경향성은,

사회변화를 위해서 헌신의 의지를 가진 양 집단 간의 대립된 입장으로서

현현되면서 시민사회자체의 분열의 골을 날로 깊게 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이들 -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타인’으로 인식하는 자들은

원래는 서로가 원래 하나 되었어야 할 ‘내 밖의 나’임을 알아야 한다.

단지 시대를 온전히 거쳐 오지 못해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나됨’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봉합’될 미래를 기대하며 분열 상태의 현재에 갈증해 하고 있는 것이다.  


‘군체생물’인 ‘벌’들에게있어 개개의 벌들은 존재하지 못하고 뭉뚱 거려진

하나의 ‘벌집’만이 온전한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집단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과 주체가 깨이지 않은 우리들,

시민사회운동 영역내의 양분화 된 운동성의 한편에 서서 입장이 다른 서로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양분화 자체도 ‘우리의 것(내 집단의 문제)’임을 이해하고

껴안아서 합리적으로 사안을 해결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5. 양자의 조화


이 양자의 활동은 병행되어야 한다.

‘사회적 실천’과 ‘주체적 실천’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얽힐 때라야만이

건강한 사회성은 구축된다. 


[사회적 실천] 운동은 직접적으로 직면한 ‘독재, 권력, 자본’의 횡포에 맞서서

실력투쟁을 해야 할 필요에 의해서 요청된다.

자본과 권력이 과거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행사하던 ‘물리력’이 사라졌기에

일견 실력투쟁(물리력)을 사용하는 단체의 모습이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 있고,

‘시대가 어느 때인데도 아직도 저런 활동을 하냐?’는 비판에 무게가 실릴 수 있다.

(물론 게중에는 너무 과격하고 적절하지 않은 활동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 자본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사용하던 물리력은 

‘법’‘정치’‘행정’‘문화’ 방면으로 교묘히 삼투되어서 없는 이들과 약한 자들을 짖 밟고 있다.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길을 닫아 놓은 일방적인 사회정책 역시

힘없는 이들에 대한 폭력과 다름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이 없고 재력이 없는 이들은, 힘 있고 재력있는 이들이 구축해 놓은

사회현실에 직면해서 자신들의 생존권 확보차원에서 피를 튀기면서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력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장애인 이동권연대’라는 조직이 장애인의 짖 밟히는 권리에 대해서

흔히 말하는 ‘변화된 시대에 맞게’ 점잖게 ‘말’로 ‘법대로’ 만 대응 했다면

아무런 소귀의 목적을 성취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목에 쇄사슬 매고 도로를 점거하고 때론 전경들과 실경이 하면서 보인

‘과격성’ 덕분에 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행정-정치권력들은 그나마 움직

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권력과 자본의 힘이 실력투쟁의 필요성/성과의 평가절하를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불은 시민단체 내부의 비판은 대중의 반감을 유도했고 사회적실천 운동전반의 침체를

가져오고 있는 바 여기에 바로 [ 주체적 실천 ]운동의 병행이 요구된다.

[주체적 실천]운동은 직접적인 실력행사 자체를 원천적으로 덜 필요하게 만드는 사회의

지반을 구축해 낼 수가 있다.

[주체적 실천]운동은 격렬한 투쟁을 유도하는 사회의 부조리성(깨어나지 않은 이성과 주체)을

중화시켜낼 힘이 있기 때문이고, [사회적실천] 운동의 한계를 적절히 보충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 주체적 실천 ]운동의 중요성은 [사회적 실천]운동의 필요성과

보충점을 서로 뒤짚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주체적 실천운동]은 이 활동 자체가 직접적인 사회부조리와 갈등을 치유하지는 못해도,

현실사회의 개인과 개인, 조직과 조직 간의 대립갈등의 문제의 근본을

치유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깨어남’ 자체가 자본과 권력이 지향하는 몰개성화, 노예화,

우민화전략에 대한 저항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투쟁’의 성과물들의 차곡차곡

집적하여 이뤄내야 할 ‘역사적 작업’이기도 하다.


이는 자본과 권력을 가진 세력들이 자신들의 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중이 ‘주체’로 깨어나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노력이 워낙 시대에 따라 교묘하게 수행되고 있는 터이다 보니,

한바탕씩 [ 사회적 실천 ] - 실력행사를 통해서 판을 뒤흔들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결국 이 양자는 조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 하나됨 


선진 유럽국가와 같이 이성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주체’와 ‘개인’이 깨어나고,

그 깨어난 주체와 개인이 사회실천 조직을 운영했다면,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와 같은

‘시민사회운동의 위기’의 문제는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체와 개인이 제대로 깨어나지않은 ‘집단주의’ 사회인 한국의 시민운동은

반독재-반자본 투쟁으로 고착되면서 여러 가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자기성찰과 반성이 동반되지 않고, 즉 일상에서의 자잘한 실천의 문제와 주체적인 활동력의

재생산에 대한 관심 없이 외부의 대상에 대한 비판만 일삼는 류의 활동은 우선 당장의

사회부정과 부조리의 문제의 해결은 가능케 할 수는 있어 속이 후련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근본(인간 개인 - 주체)을 해결하는 노력이 아니라,

다만 겉으로 보여지는 문제있는 ‘자본가’와 ‘정치인’ ‘법’ ‘제도’를 ‘일시적’으로 단죄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문제의 근본(개인-주체)이 아닌, 사회적 차원의 부조리의 원천(자본가, 정치인, 법, 제도)에만

집중되다보니 이는 이들이 애써서 갈아치운 정치인, 자본가들이 비슷한 이들로 다시 채워지고,

바꿔놓은 법, 제도 등이 다시 과거의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부당한 권력과 자본을 비판하던 주체가 부당한 권력과 자본을 추종하면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부조리’한 사안들 역시, [사회적실천]에만 올인 해 있는 이들이 자칫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그들의 투쟁성 활동이 아직도 필요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그 일방적인 활동이 ‘구태의연한 활동’ 쯤으로 폄하되는 일견의 이유는 그 활동 내에 잠재되어 있다. 

 

이 ‘한계’를 면밀히 살피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는 운동진영 내부에서

[ 주체적 활동 / 생활에서의 실천 ]의 문제를 중요시 하는 이들이었다. 

주체와 개인을 깨어내기 힘든 한국의 척박한 ‘집단주의 사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는 것은, 시대가 바뀌고 역사의 경험이 집적되고,

외국문명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비교사회학적 시야를 넓혀가면서

‘시민사회’의 당연한 전제인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의 ‘희한한’ 시민 사회에 대한

회의감 증폭의 결과였으리라.


문제는 이들의 관점은 적절했지만, 그 반응이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시민사회세력들의 ‘주체’가 제대로 깨어나지 못하고,

현재와 같은 [사회적 실천-투쟁] 운동류의 활동이 대세인 현실 자체를 인식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 문제를 자신을 포함한 ‘우리 - 시민사회문제’ 로 받아들여서 고민하려 하지 않고,

‘너희’ ‘사회적 실천-투쟁’만 일삼는 이들의 문제로 가늠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민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주체'를 깨워나가는 류의 운동 지향성을 가진 이들 조차

그 문제를 자신(우리)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비판적 입지만 견지하는 상황이다보니,

하나 되어야 할 시민사회 세력의 균열이 증폭되면서 시민사회세력 자체의 힘이 감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 하나였어야 할 이 시민사회의 힘의 균열을 봉합하고

보다 건강한 시민운동성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요구된다.


1) [주체적 실천] 운동성과 [사회적 실천] 운동성을 가진 세력들은 각각 서로의 운동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조직의 집행부들이 ‘자기 낮춤’의 노력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화해를 요청하고

함께 만나서 이에 대한 합리적인 논의를 수행해야할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화해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체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운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백화점식 운동단체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각자의 조직이 자신들의 활동의

장에서 자신들만의 활동을 수행하기는 하되, 궁극적으로 하나의 머릿속에

들어차 있어야 하는 분열된 정신의 단편을 자기 안에 포용하기 위함이다.


2) 양자의 운동성은 궁극적으로 통합되어야함을 인식해야 한다. 

넓은 견지에서 봤을 때 ‘주체적 실천’운동은 운동이라기 보다는 일상적 삶이 되어야 한다.

주체가 제대로 깨이지 않은 집단주의 사회 한국에서 개개의 주체를 깨우기 위한

‘공론’ ‘이슈’를 만들어 내기 위한 관점으로 ‘주체적 실천’은 한동안 운동의 방향으로

자리잡아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주체적 실천 운동은 운동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평이한 ‘삶’ 그 자체여야 한다.


그러한 주체적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고 대세가 되었을 때의

‘사회적 실천’ 운동은 비로소 올바른 궤도 위에서 급진적 파급력을 발휘될 것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운동성의 통합을 염두에 둔다면 양진영의 운동가들은

서로에 대해 좀 더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7. 시민이 없는 운동의 원인에 대하여.


앞선 논리 전개에 따라 시민이 없는 운동의 원인을 살펴본다면

이는 사회적 투쟁류의 활동에 몰입한 시민사회의 운동성자체의 한계에 의해

기인된 것이라기보다는

‘주체’가 제대로 깨이지 않은 한국사회 자체의 문제임을 살필 수 있다.


‘시민’의 의미에는 올바로 깨인 ‘주체’의 의미가 포함이 되어야 하는데,

집단주의 사회의 한국에는 ‘주체’가 제대로 깨어난 일이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주체적 실천’력이 바탕이 된 ‘시민운동’이 활기를 띄기는 힘들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는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었지만 지금은 침체를 맞고 있다며,

그 원인이 시민사회단체의 혜안의 부족 때문이라고들 말하지만

이를 좀 더 기술적으로 분석했을 때는 전혀 다른 문제점이 드러난다.  


‘시민운동’을 앞서와 같이 ‘주체적 실천’운동과 ‘사회적 실천’운동으로 나누고 나면

이 문제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즉 과거에서 우리가 ‘활발히’ 했던 활동은 ‘반독재’를 위한 ‘사회적 실천’운동이었고,

이는 주체가 제대로 깨이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냥 ‘울끈울끈’ 한 번씩 바람 몰이되는

‘집단성’에 의존해서 치러낼 수 있는 활동이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애초에 그러한 ‘집단성’ ‘사회적 투쟁력’에만 의존해서

활동했을 뿐이지 그 활동이 ‘(온전한)주체’에 의한 시민활동도 아니었으며,

그러한 ‘주체성’을 온전히 깨우기 위한 노력도 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터에 시대가 변하면서 ‘권력자와 자본가’들의 물리적인 실력행사가 줄어들고,

집단적 투쟁의 필요성이 감소되는 추세에서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집단적 행동력이 감소된 것이 과연 시민사회단체의 잘못인 것인가? 


물론 시민사회단체가 멀리 내다보고 ‘집단적 행동력’(사회적 실천)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시점에서 ‘주체적 실천’활동을 이뤄낼 수 있는 다양한 운동의 기회와 방향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잘못이 아예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주체’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자각을 가질 수 없는 ‘집단주의 사회 한국’의

국민인 것은 말할 나위 없기에 그들이 원치 않게 빠져있는 함정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문제를 문제 삼는 것이 온당하냐는 문제의식이 제기될 수 있다.

더군다나 설령 그들이 올바른 ‘주체의식’을 겸비해서 일반 대중에게 시대에 맞는

‘주체적 실천’을 이룰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지금이라도) 제공했더라도 그게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주체적 실천’을 이룰 수 있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대상은 ‘주체’가 깨인 이들에

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체가 깨이지 않은 집단주의의 환영에 휘둘리는 이들은 그러한

주체적 실천을 이룰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 받더라도 (현재 보는 바 같이)이에

동감하고 동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시민사회단체들이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우선 했어야할 활동은 ‘주체적 실천’을 이룰 수 있는 활동의 제공에 앞선,

각기의 ‘주체’를 깨우기 위한 활동이었음으로 판단된다. 


결과적으로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방대하고 난해한 작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시대에 맞게 시민참여를 이뤄내는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선 논의를 돌아 볼 때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 넘기에는 무리가 있음이 드러난다. 

  

이는 반대급부인 ‘시민들’의 행태를 살피면 더욱 명확해 진다.

자신의 일상의 장에서 ‘주체적 실천’이 하나하나 쌓임으로 인해서 세상이 변할 것을

가늠할 여력이 없이 집단적인 관성에만 주로 휘둘리는 ‘주체적’이지 않은 시민들.

그들은 사회적 책임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비주체적인 관심’(권력과 자본이

제공하는 방식으로만 관심을 갖는 것)으로 일관하면서, 자신의 일상에서의 잘 먹고 잘 살

문제에 대해서만 주로 신경 쓴다.  

이들 일반 시민의 행태는 근본적으로 권력과 자본가들이 힘없는 민중을 내리누를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시민사회운동을 날로 힘겹게 만드는 동인으로 작용되고 있다.


이렇게 깨이지 않은 ‘주체’를 가진 시민이 일반적인 상태임에야 

어찌 시민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뤄내지 못한다며 기존의 시민단체에 대해서만 비판하겠는가?

각각의 ‘주체’가 깨어나지 않은 이유로 시민사회의 기반 자체가 제대로 다져지지 않고, 

‘시민사회단체’가 제대로 된 활동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은 ‘필연’인데,

어찌 그 책임까지를 물을 수 있으랴.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시민이 없는 운동의 원인’은 시민운동자체에서 다소 있기는 하겠지만,

그보다는 한국사회에서 올바른 ‘시민’을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집단성’ ‘전체성’에 기인함을

결론 지을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른 사회지향, 운동지향을 위해서 가장 우선되어야할 것은

사회의 각 구성원이 기존의 집당성을 탈피하고 ‘주체적’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운동이 우선적으로 고민하고 해결을 위해서 총력을 다해야할 과제인데,

‘어떻게 해야 각 개인의 주체를 깨우게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2007년 10월 10일 충청남도 서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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