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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의 수자의 의미성서에 기록된 수자는 상징성과 역사성이 있다.
정기호  |  texas.ch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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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9월 20일 (목) 06:57:55 [조회수 : 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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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는 수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 수자를 문자적으로만 읽는다면 단순한 수자에 지나지 않으나 , 성 서에 기록된 기사와 사건들을 둘 살피면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 만물은 공식이 있습니다. 수학문제는 공식에 의하여 풀어져야 합니다, 공식을 무시하면 그 문제가 풀어지지 않습니다. 화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외교공식을 통하여 협상과 타협을 시도합니다. 지난 번 아프칸에서 일어난 인질 사태도 외교적인 공식을 무시한 채 협상을 했다는 비난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19명의 “인질”들이 풀려난 것은 천만 다행입니다.

성서에도 공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은 1단위(창 1장) 로,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10단위로, 요한 복음은 100단위로 보면 됩니다. 요한 복음 21장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현장에서 도망쳐 바다가로 나가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물고기를 잡게 하셨는 데 153마리가 잡혔더라” 하였습니다. 요 한 계시록에서는 수자를 천단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성서에 대하여 지도자에게 문의하면 전에 로마 카돌릭이 일반신자들에게는 라틴어로 성서를 읽어주며 개인이 읽지 못하게 하고 믿음만 강조하는 식으로 개신교 지도자들도 “무조건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어서 남주냐?” 라고 애매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아 의문을 품고 문의 하면 “도마같은 의심 마귀” 가 들렸다고 공격하거나 , 믿음이 없는 신자로 낙인 찍히게 됩니다. 사실은 지도자가 프로그램화된 교리에 따라 성서위에 교리를 얹어놓은 신학교육을 받은 결과이며, 성서를 깊이 있게 연구하지도 못하고 강단에 올라서기 때문이며, 심한 표현으로 깊이 있게 성서를 연구하는 평신도 보다도 성서를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문을 품은 평신도는 이와같은 불명예를 안기 싫으므로 믿어지는 척, 믿음이 좋은 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이 공식이 있듯이 성경도 공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질서는 공식에 의하여 움직이는 데 기독교만 유일하게 성경의 공식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공식을 무시하고 풀면 각자가 다른 소리를 내지만, 공식을 활용하면 어느 사람이 해석하든지 같은 소리가 나옵니다.

성서의 수자는 상징성과 역사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의 족보에는 상징성(마태)과 역사성(누가)으로 구분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공부를 하게 되면 족보를 따져보게 되는 바 마태복음 의 족보에는 유대인의 상식으로는 족보에 기록될 수 없는 인물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상징성을 말하 는 것입니다. 즉 마태복음은 역사성을 부인한다기 보다는 상징성에 그 중심을 두고 우리들의 믿음과 영적 세계를 밝히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징, 영적, 믿음, 약속의 족보)

그러나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눅 1: 2-4) 누가가 말한대로 역사적 사실을 빍히려고 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성, 혈통적 족보)

같은 출애굽 사건에도 상징성과 역사성이 있습니다. 창 15: 13에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되어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또한 행 7:0에는 “400년 동안 괴롭게 하리라” 와 같은 기록은 상징성인 표현입니다. 반면에 출 12: 40에는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이었더라” 와 갈 3:17의 “430년 후에” 와 같은 기록은 역사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서에 666라는 수자의 표현이 등장하는 데 에스라 2:13에 “포로에서 돌아온 아도니감 자손이 666명이라” 는 것과 계 13:18에 “ 그의 수는 666 이라” 와 같은 표현은 상징성입니다.(에스라는 제사장 출신으로 역사 성 보다는 상징성에 그 의미를 부여했슴)

반면에 느 7:18에 같은 아도니감 자손이 포로에서 돌아온 수자가 667이라고 했는 바 이는 역사적인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느헤미야는 총리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야 할 직분이었습니다.)

수자의 뜻을 창 1:1-2:4를 살피면서 밝혀보겠습니다.

첫째,창세기 1장에서 첫 째날에, 빛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성서에서 1은 빛으로 풀이 할 수 있습니다.(창 1:3-5). 낮과 밤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고 요 한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근본은 빛이심을 우리는 성서의 여러 표현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고, 세례 요한이 유대인의 세계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가 빛인 줄 알고 따랐으나 요한복음은 그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요 1:8)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말미암아 지 은바 되었으되(창 1장)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 하였습니다. 창 1:을 보면 하느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낮과 밤”으로 나누었듯이, 같은 신앙생활하는 신자들이 빛으로 살아 어두움을 밝히는 신자가 있는 반면에 어두움의 세력에 동조하여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우며 어두움에 속한 교인들과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주도 한 분이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엡 4: 6) 하였습니다. 빛은 빛이지 다른 세계가 될 수 없으며 여러가 될 수 없습니다.

마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여 그 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 16) 라고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읽어보면 개신교회는 어두웠던 한국의 역사를 뒤집어 빛으로 이끌어 내었음을 알 수 있 습니다. 시장에서 “나는 아무개 교회에 다니는 예수교 신자 아무개 입니다. 마침 장에 왔다가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았음으로 외상으로 이 물건을 구입하고자 합니다.” 하면 두말하지 않고 외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예 수교 신자들의 신용이 매우 좋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크레딧 리포트 회사에서 주는 최고의 점수를 주었던 것이이지요. 하지만 오늘에 “나는 아무개 교회 아무개 목사입니다” 라고 저를 소개하면 외계인 보듯하며, 오늘의 인터넷에서 몰매를 맞는 이유를 1이라는 수자를 통해서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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