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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화된 사회에서 기독교신앙 터놓고 말하기(3)먼저 성서 스스로 말하게 하라
구교형  |  ku6699@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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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9월 18일 (화) 17:24:49 [조회수 : 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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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신앙(종교)을 갖고 있다는 것 이 연재 글에 대해 참 다양한 반응을 만날 수 있다.

어떤 분들은 “정통신학이 아니다.”라고 훈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역시 보수적 한계를 넘지 못한다.”라고 책망하기도 하고, 또 다른 분들은 “결국 예수쟁이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큰 관심이 없다. 다만 이 글을 통해서 지금 기독교신앙을 갖고 있는 분들이나 그렇지 않은 분들 모두가 신앙과 종교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신앙(신념)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기독교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리의 기독교신앙을 깊이 반성해 보고, 성서에 대한 전통적 이해에 굳이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단지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게 아니다. 종교나 신앙은 절대자의 절대정신을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에(특히 기독교인들은 그런 경향이 강하다) 자기가 믿고 있는 바를 자기를 넘어 다른 사람과 사회에 파급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냐 그렇지 않으냐는 것은 단지 그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을 살리거나 죽일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마르틴 루터 킹의 신앙일수도 있고, 조지 부시의 신앙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다양한 차원에서 사회의 근심거리를 안겨주었던 한국기독교의 신앙을 새삼 문제 삼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앞서 문자주의의 폐해를 말했지만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 모든 사람들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예로 아무리 보수적인 성서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네 신체 중 하나가 범죄하면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낫다.’(마 6:27~30, 18:8, 9)는 성서의 말씀을 문자대로 적용하여 팔, 다리를 잘라버린 사람을 볼 수가 없다. 이들도 이미 이 말씀이 비유요 풍자일 뿐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문자주의자는 없고 다만 자기 취향대로 취사선택할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신화에 불과한 문자주의를 당장 폐기해야 한다. 그게 정통신앙이다. 문자주의를 폐기하면 성서의 권위가 실추되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는 생각은 근거 없는 두려움일 뿐이다.

2. 성서는 과학책이 아니다.

성서를 존중하는 사람이나 비판하는 사람이나 자주 잊어버리는 것은 성서가 한반도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을 1차적인 대상으로 삼아 기록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존중하든 비판하든 우리는 성서시대의 배경과 그 말씀이 1차적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 자신과 비교해 봐야 한다. 성서를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오해되고 있지만 창세기는 과학교과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와 에덴동산 이야기를 근거로 창조연대를 측정하려거나 에덴동산의 위치를 탐지하려는 것은 엉뚱한 열심히 될 가능성이 높다(물론 추정과 가설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걸 통해 과학적 사실로 인정받으려는 것도 또 다른 과학만능주의다).

그러나 성서의 사실성을 서둘러 무시하는 사람들의 오류도 있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서가 마치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 형사가 용의자를 신문하듯 한 현대적, 과학적 질문에 만족할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서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서는 육하원칙에 근거해 작성한 신문기사나 재판에 올릴 증빙자료로서의 수사기록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 인간들이 궁금한 것들을 묻고 하나님이 하나하나씩 대답해 준 대담기사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내가 원하는 기록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성서는 엉터리라고 하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3. 그러므로 성서의 사실성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책이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가르치려는 교훈을 사전적으로 요약정리하지 않고, 구체적인 시간, 장소, 인물이 개입되어 일어난 사건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역사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성서가 역사의 형태를 택했다는 것은 위험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평면적으로 적용되기 보다는 시대성과 문화, 각기 다른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피와 살을 가지고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실존에 적합한 것이다. 음모와 거짓말, 살인과 집단강간, 사랑과 증오 등 사람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숨김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수도원의 책이 아니라 생활현장의 책이다. 공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합성을 목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이렇게 솔직한 인간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적합한 교훈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수많은 학자들과 지성인들은 성서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성서의 기록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저 그 기록이 주는 오늘날의 교훈이 무엇인가만 살피면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는 기본적으로 과학적 지식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을 담은 고백의 책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서기록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오강남 교수는 그의 책 ‘예수는 없다’의 “흥부전과 성경”(66-68쪽)이라는 목차에서 흥부전은 정말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느냐와 아무 상관없이 흥부전의 교훈들(권선징악, 형제간 우애, 가난한 이웃돕기 등)을 충분히 깨우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도 굳이 사실 여부를 따질 것 없이 교훈 받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흥부전과 성서는 처음부터 그 범주(카테고리)가 다르다. 흥부전은 누구나 처음부터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자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저 엉터리 같은 또는 인간의 운명을 멋대로 얽어매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책이 되기도 한다.

만약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저 다 끝나버린 자기들 지도자의 교훈을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 1,300페이지(개역 한글판으로)가 넘는 방대한 고대문서(구약)를 자기 지도자에게 적용시킬 잔재주를 부린 것이고, 새로이 제자들이 나서서 400페이지가 넘는 또 다른 책들(신약)을 조작해 내었고, 그 엉터리 같은 허구들을 지키기 위해(꾸며낸 이야기 인 줄 뻔히 알면서) 자기 인생을 다 바치고 태워 죽고, 맞아 죽고, 사자에 잡혀 먹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어리석음(히 11:35-38)을 자초한 것이다. 그러나 그걸 믿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사실성을 기초로 기록한 글이라면 사실성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처음부터 그저 교훈만을 목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라면 사실성은 아예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오 교수는 “경상도 시리즈와 성경”(앞의 책, 89-92쪽)이라는 항목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준다. 재미 삼아 어떤 우스갯소리를 할 때 예로 드는 금액이 150원이든 1,500원이든 이야기를 좀 더 길게 설명하든 짧게 축약하든 그 의미만 전달된다면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성경도 그 의미만 전달된다면 전후사정이야 넣든 빼든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도 볼 수 있다. 다윗이 블레셋 군을 물리친 숫자가 1,000명이든 1,100명이든 그 숫자가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숫자도 지금 나(우리)에게 있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일 뿐, 그것을 기록할 당시에도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었다는 말과는 다르다. 어떤 사람이 내게 1,000만원을 빌려 갔다면 1,000만원이라는 액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저 그가 내게 갚을 돈이 있다는 사실일 뿐이지 1,000만원이든 100만원이든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할 사람이 있겠나?

“기록된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결코 “기록된 글들의 사실성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내 관심보다 쓰인 동기를 일차적으로 파악하며 읽어야 지금 우리에게도 잘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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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형 (123.109.234.103)
2007-09-19 16:20:28
'무릇돌'님에 대한 답변
써 놓고 보니 표현에 문제가 있네요. 제가 성서가 '역사책'이라고 쓴 의미는 기본적으로 사상이나 추측, 신념을 뼈대로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기본바탕으로 하여 역사성을 깔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서의 여러가지 분류상 오경,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 등으로 나누는 분류를 무시하고 몽땅 역사서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리플달기
5 8
무릇돌 (121.141.148.251)
2007-09-19 13:01:03
성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책’은 아닙니다!(2)
구약에서 ‘편의상’ 역사서로 분류되는 신명기역사서와 역대기역사서조차도
‘역사서’는 아닙니다!
그들이 역사서라면 ‘두 가지 역사’의 반복이 불필요하겠지요.

성서는 ‘하늘문’ 님처럼 ‘신앙고백서’라고 하든지
아니면 ‘신앙교육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둘을 뭉뚱거려 ‘신앙교과서’라고 한다면 괜챦을 듯합니다.

요나 이야기를 역사적 이야기로, 룻기를 역사로 읽는 교회와 기독교는
‘머리 빼놓고’ 신앙을 추구하려는 노력일 뿐입니다.

구약역사의 허구성에 관하여는 ‘핑컬스타인’을,
좀 더 유연한 입장은 ‘밀러’와 ‘헤이스’를 읽기를 권합니다.

구약역사를 ‘종교사’로 보는 ‘알베르츠’의 저서는 방대하기는 하나
신학과 성서에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훌륭한 ‘참고서’로 보여집니다.

성서는 ‘신앙고백서’며, ‘신앙교육서’입니다.
좋게 말하여 ‘신앙교과서’입니다.

성서는 ‘전혀’ ‘역사서’가 아닙니다!
현금 한국 교회의 ‘혼돈’은 ‘성서관의 혼돈’에서
‘비롯’됩니다!

-한울성경서당-
리플달기
5 8
하늘문 (203.246.72.252)
2007-09-19 11:44:12
성서는 신앙 고백서 이지요.
성서를 기본적으로 역사책으로 놓는 것은 읽는 이에 따라 심각한 오류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히 다수의 현대 평신도들은 과학적 세계관에 지배되어 살기 때문에, 사실의 세계를 중요시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사기 혹은 이단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성서를 역사책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성서 무오류설"과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읍니다.

신화적 형태를 띠고 있는 책: 창세기, 욥기 등.
역사의 형태를 띠고 있는 책: 출애굽기, 여호수아 등.
전기적 형태를 띠고 있는 책: 공관복음서 등.
시가, 만가, 격언서: 애가, 시편, 잠언 등등
이외에 다수 등등.이렇게 나누어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출애굽기, 여호수아, 사사기, 열왕기, 역대기 등등은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고, "삶의 자리"에 기초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역사책이라고 하는 것은 해석상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사를 하나님과 연결하여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 역사서", 즉 신앙 고백의 변천사로 해석하는 것이 어떤지요.
리플달기
6 7
무릇돌 (121.141.148.251)
2007-09-19 10:56:21
성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책’은 아닙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책이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가르치려는 교훈을 사전적으로 요약정리하지 않고, 구체적인 시간, 장소, 인물이 개입되어 일어난 사건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역사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성서가 역사의 형태를 택했다는 것은 위험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평면적으로 적용되기 보다는 시대성과 문화, 각기 다른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교형 님의 글 중에서

“성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책”이라는 서술은 부적절합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신앙서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는 역사 이야기가 많이 전제되고 서술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역사책’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서와 성문서는 물론 전혀 ‘역사책’이라 불릴 수 없겠고,
신약의 복음서들까지도 ‘역사책’의 범주에 넣기는 ‘무리’입니다.
성서는 신앙에 의한 신앙을 위한 ‘경건 서적’일 뿐입니다!
이 ‘경건서적’이 ‘역사적 제약’ 속에 있기 때문에
‘각 책’의 ‘역사적 배경’이 먼저 궁구(窮究)되어야 할 뿐입니다.

-한울성경서당-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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