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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화된 사회에서 기독교신앙 터놓고 말하기(2)“성서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구교형  |  ku6699@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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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9월 14일 (금) 15:28:13 [조회수 : 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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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앙을 이야기할 때 신앙인들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성서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대다수 일반적인 교인들에게는 큰 논란거리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성서는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글자 그대로 지켜져야만 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신이 스스로 제대로 확인해 본 적도 없는 다음과 같은 무반성적 신념을 주입받아 왔다. ‘우리가 교회를 통해 전수받은 전통적 신앙체계들(교리, 신앙고백, 신앙형태 등)은 다 초대교회 때부터 전승된 것이요, 초대교회는 예수님에 의해 직접 생겨났기에 다 옳다.’ 이러한 고백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사용하는 것과 들은 대로만 앵무새처럼 고백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정통 보수교회 출신 목사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도 동 교단 소속 목사다. 그러나 그 고백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무반성적 입술만의 신앙전통은 결코 성서적이지 않고, 기독교전통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1. 성서는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이 문장은 두 개의 진술로 구성된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성서는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 대부분 전통신앙은 두 진술의 인과관계를 설정하여 두 문장 사이를 ‘그러므로’로 연결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①나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주의 보편적 원리나 우리가 수행이나 선행을 통해서 점차 도달해 가는 존재가 아니라,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인격적 초월자임을 믿는다. 그러나 존재가 다른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이해할, 깨달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성서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과 세상을 향한 계획을 내 보이신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믿느냐?’라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고백은 내가 교회를 출석하여 듣고 배웠고, 그 후 살아가면서 이 진술이 사실임을 느끼고 체험하여 이젠 믿음으로 확실하게 고백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누군가 “나는 그런 경험도, 체험도, 느낌도 없다. 난 믿을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럴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지식이 그렇듯이 객관적 신앙(종교)이란 없다. 무한한 개연성을 갖는 것일 뿐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신앙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비이성(몰이성)이나 비상식(몰상식)을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위 고백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보다 훨씬 이성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신뢰가 간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 하나님이 세상을 지은 인격적 신이며, 성경은 그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믿어진다는 것이다. 믿고 살아보니, 이 믿음이 사실임을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롬 1:17). 올바른 신앙(종교)이란 항상 말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도 합목적적인 공감이 생긴다. 그런 면에서 올바른 신앙은 이성이나 도덕과 꼭 같지는 않지만 사회적 설득력을 갖는다. 삶의 일관성을 갖는다. 진정한 신앙은 종파적 이해관계를 넘어 반드시 사회적 공공선에 기여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 기독교신앙을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신념과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기독교신앙이 사회적 설득력을 잃고 자기들만의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②그러나 나는 ‘성서가 어느 한 부분도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완전무결한 책’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동안 교회는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당연히 ‘조금도 오류가 없다’고 바로 선언해 버리는데 내가 알기로는 전자는 반드시 후자로 연결되지 않는다. 교회는 ‘흠이 없는 하나님이 계시고 성서가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성서도 흠이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 한다.

첫째, 하나님의 의도 자체가 그렇다.

‘성서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말씀’이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하나님나라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다(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나라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말씀이 하나님나라의 초월적 언어가 아닌 오류가 전제된 인간의 언어를 빌려 기록된 것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눈높이 학습이다. 우리를 위한 은혜다. 인간의 언어는 언제나 시대나 풍습, 사용하는 사람들의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당연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왕정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시대에는 자연스러운 교훈들도 시대와 문화가 달라지면 재해석해야 한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잠언 19:12)

성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완결된 형태로 뚝 떨어진 천상의 책이 아니다. 각기 다른 시대적 배경 아래서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인간 저자들의 개성이 드러나고 구전, 증언 등이 결합되어 빚어진 작품이다. 하나님은 진공과 중립상태에서 일하지 않고, 언제나 특정시대, 특정한 문화를 택하여 일하신다. 성경은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지금 우리 한반도를 배경으로 쓰였다면 그 주제나 서술방식, 내용 등이 당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지금 한반도에 계셨다면 “나는 좋은 목자요, 너희는 내가 사랑하는 양”(요 10장)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는 내가 늘 사랑하고 함께 지내는 우리집 강아지처럼 사랑스럽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불경한 억측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영적 상상이다.

둘째, 성서의 원본은 우리에게 전해져 오지 않으며 수많은 사본들과 번역본들이 옮겨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인간적 실수들이 개입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이미 각국 언어로 번역된 사본들을 들고 성서가 오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건 의미 없는 말이다. 이건 이미 가장 보수적인 성서학자들조차 인정하는 사실이 아닌가? 대표적 사례로 마 6:13을 보면 본문 중 일부(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가 ‘괄호’ 안에 들어있고, 각주를 따라가 보면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이라고 적혀 있다.

사실이 이러한 데도 ‘하나님이 하신 일에 어떻게 오류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상상 속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 억지로 붙들어 두려는 충성은 가상해 보일 수는 있어도 진실함도 없고, 더 이상 효과도 없다(욥 42:8). 그것은 기독교교리 형성과정에서 받은 헬라 철학적 영향으로 공리를 진리로 착각한 결과다. 그러므로 성서에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도 어리석은 질문이다. 성서가 이러한 특징을 가진 책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러한 단순 논리적 우문들을 넘어서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2. 성서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글자 그대로 이해되고, 지켜져야만 하는가?

이미 앞서 언급되었듯이 성서 자체의 성격이 그렇지 않음으로, 성서는 글자 그대로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가령 여성이 공공장소에서는 마땅히 머리 수건을 쓸 것이며(고전 11장), 여성이 대중 앞에서 가르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고전 14장)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모두 당대의 가부장적 세계관을 반영한(당대 보통사람들의 눈높이의) 시대적 교훈이지, 성서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이므로 여성을 하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게 아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적그리스도의 숫자 ‘666’(13:18)이 계산대의 바코드를 찍는 것이라던 해석이나, 열 뿔(17:3)이 10개국이던 당시의 유럽연합이라는 해석 등은 모두 요한계시록이 예언과 계시의 기록으로 고도의 상징성을 가진 문서라는 특징을 모르고 문자대로만 끼워 맞추려는 그릇된 열심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적용해야할 것인지는 처음부터 우리의 신념이나 신학으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성서 본문 자체가 갖고 있는 성격으로 판단해야 한다. ‘당신만 보면 나의 몸은 온통 깊은 폭포수 속으로 빠져들고 있소.’라는 문장은 사랑을 담은 고백의 언어이므로, 그저 문자대로만 이해하여 폭포수 속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는 비유처럼, 시는 시처럼, 편지는 편지처럼, 예언은 예언처럼 읽고 해석해야 한다. 성서도 이처럼 그 본문의 성격을 바로 파악하여 이해해야지 무조건 ‘문자 그대로’가 아니다. 성서는 일차적으로 문자적 해석을 존중해야 하지만 무조건적 문자주의는 폐기되어야 한다.

특히 많은 문자주의자들은 “모든 말씀은 하나도 틀림없이 다 하나님의 명령이다”라고 말하며 제게 유리한 말씀은 강요하면서도, 불리한 말씀은 슬그머니 피해버리기도 한다(마 23:23, 24). 성서를 문자대로 믿는다는 미국의 기독교 보수주의자들 중에는 하나님 명령을 따라 가정을 지키고, 도덕과 윤리를 지켜야 한다면서도(낙태반대, 동성애 반대 등), 총기소지를 지지하고,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것을 옹호하는 일도 많다. 잘못 적용된 성서의 문자는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세상을 죽이는 근거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마 12:1, 2). 성서는 생명을 살리는 책이지, 창백한 조문을 들이대며 사람의 목을 조르는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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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인 (220.75.187.199)
2007-09-15 12:32:20
구교형님의 말씀에 동감하며..
셜록홈즈란 책을 읽고 그 책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오직 셜록홈즈만을 위해 사는것은 물론 자기 자유이겠죠. 좀 웃기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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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9
무릇돌 (121.141.148.251)
2007-09-15 08:43:58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기자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듯하다.
'마음'이, '뜻'이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일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니다.
'성서의 아우라'를 걷어내려다
오히려 더 짙은 '아우라'를 만들지나 않을는지...

-한울성경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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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0
무릇돌 (121.141.148.251)
2007-09-15 07:29:35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듯 하군요
"그러므로 성서에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도 어리석은 질문이다. 성서가 이러한 특징을 가진 책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러한 단순 논리적 우문들을 넘어서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기사 중에서-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듯 하군요.
하기야 스스로 보수주의에 속했음을 자인하는데
얼마나 '전통'에서 나아가겠습니까?

성서-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기독교 '최악의 교리'가 이미 교회에
편만한데 '어물어물' 진단하고 처방해서는 안 될 일이지요.

-한울성경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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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9
감신 (203.255.190.49)
2007-09-14 17:31:07
중앙일보에 기독교 허위 기사 항의해 주세요..
신정아에 대한 어제 허위보도를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상식이 있는 기자라면 어떻게 이렇게 기사를 쓸 수 있을까?



너무 납득이 되지 않아서, 어제 서대문구 봉원동에 있다는 b교회에 직접 전화해서 사실 여부를 물었다.

기자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답변했다.



1. 신정아가 매달 50만원을 헌금했다?

기자의 소설이었다. 기자가 마음대로 지어낸 내용이라는 것을 들었다.

3만원 정도 돈이 있는데 (사실 누가 낸 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얘기했더니

기자 마음대로 3회 곱하기 한달.. 이렇게 소설을 쓴 거다.



2. 매주 꼬박꼬박 3회 교회에 왔다?

집 근처에 있어서 새벽에 잠깐 들른 것을 몇 번 봤다고 한다.

그게 꼬박꼬박 매주 3번으로 둔갑한 것이다.



3. <독실한 기독교신자>?

이 대목에서 넘어가는 줄 알았다.

그는 교회에 등록도 하지 않았고 공중예배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절에는 그만큼 방문하지 않는가?

절에는 더한 돈을 내지 않는가?

왜 그게 <독실한 불교>가 아닌 <기독교>로 둔갑을 했는지,

<중앙일보>가 외압을 받았는지,

타종교계에서 엄청난 돈을 받았는지

정말로 그들을 조사해야 할 것 같다.



751-5175 서명수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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