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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에게한국교회여, 차라리 선교활동을 포기하라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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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9월 02일 (일) 11:02:06 [조회수 :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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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당신들의 예수> 246~252쪽에 실린 글의 원본으로,

2006년 8월에 쓴 글을 책 편집에 맞게 다듬은 글입니다.


탈레반 인질들이 돌아온 이후에도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교회여, 차라리 선교활동을 포기하라

-한국 개신교의 아프가니스탄 ‘평화축제’ 유감


‘아시아협력기구’라는 개신교 단체가 주최한 ‘평화축제’가 아프가니스탄에서 2006년 8월 5일부터 4일간 20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8월 3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수백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출국명령을 내림으로써 이 행사는 시작 단계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이들에게 출국명령을 내리면서 밝힌 추방의 이유는 “이슬람 문화를 훼손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아시아협력기구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NGO단체로, 아프가니스탄 입국 목적을 “주민들에게 컴퓨터 기술과 언어를 가르치고, 교육과 건강 시설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보수 개신교 선교단체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해당 기관의 C사무총장도 “한국 기독교인들이 아프간을 방문한 이유는 종교 활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호활동 및 평화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권 이외에서 이들의 활동을 보는 눈은 여타 보수 개신교 선교단체를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유세프 스타네자이 아프가니스탄 내무부 대변인은 “한국인들이 관광비자로 입국했지만 이들의 활동을 보면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평화축제 참가 학생들이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지역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글로 된 기독교 복음 관련 전단을 배포하여 말썽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혹 아시아협력기구가 순수한 인도적 봉사 차원에서 행사를 추진했다 하더라도 보수 개신교인들의 ‘선교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통제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행사를 주최한 사람들은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4년 동안 많은 기독교신자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여 문화와 스포츠 활동을 했지만 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사를 주최한 분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런 무모한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였는가? 예수님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왜 4년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던 방식, 즉 ‘조용한 봉사 활동’을 계속할 것이지 2천명에 이르는 대규모 행사를 추진하였는가.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고 그냥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종교를 묻지 않고 형제로 대해주는 너그러운 사람들이 무슬림(이슬람교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이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전하거나 훼손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면 결코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이 또한 무슬림이다. 그들은 그만큼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꾸란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권에서 벌어지는 ‘선교 행태’에 대해 차분히 짚어보고 싶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선교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인이 좋게 말해서 ‘선교에 대한 사명감’,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선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성서, 특히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선교를 독려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명감에 불타는 기독교인들이 특히 마음에 새기는 대표적 성경 구절로 다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18~20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장 1~2절)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최후의 명령이며, 바울에 의해 재차 승인된 선교 명령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태복음 끝에 첨부된 이 구절은, 예수에 의해 직접 선포된 말씀이 아니라 그로부터 백여 년 이상 지난 이후, 즉 교회가 조직화되고 권력체로 자라기 시작한 시대에 복음서에 뒤늦게 첨가된 구절이며, 디모데서 역시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 바울의 이론을 따르는 제자들(그들은 자신의 글을 바울에게 헌정하다 못해, 바울의 저작이라고까지 주장한다)이 교회 확장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모든 기독교권에서 폭넓게 지지받는 공인된 학설은 아니다. 보수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의 교계 현실에서는 ‘사이비 이단사설’이라고 정죄되는 이론이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을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의 정직한 연구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내 주장이 절대로 맞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또 하나의 독선일 뿐이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선교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 역시 하나의 견해일 뿐이지 절대적 명제일 수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시대의 산물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입장, 사상이 녹아있다. 물론 성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깨어 들었던 하느님의 사람들의 정신도 들어있다. 그렇기에 성서(거룩한 책)임을 인정받는 것이다. 결국 성서에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도 녹아 있고, 시대의 한계를 반영하는 인간의 억지와 오류도 담겨 있다. 이 사실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인지할 때, 비로소 성서는 읽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책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


신약성서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선교적 사명’은 ‘하느님의 요구’가 아니라 조직체의 확장을 필요로 했던 그 당시, 즉 그 구절이 기록되던 당시 ‘교회의 요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내 확신을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 대신, 보수 기독교인들 역시 자기의 신념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이 참에 한가지 변명을 좀 해야겠다. 내 글을 읽은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 중에 내 글이 ‘강요적’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반하장이지만, 내가 ‘강요적’으로 글을 쓴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여기저기 썼던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보수 신앙은 원시 신념일 뿐이며, 거기에 매이는 것은 종교적 노예상태에 있는 것이다. 거기서 빨리 벗어나라. 내가 갖고 있는 열린 신앙을 너희들도 가져야 한다.” 사실 많이 무리한 셈이다. “너는 반드시 틀리고, 나는 반드시 옳다.”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


내가 그런 식의 단정적 표현을 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참 못난 이유지만, 내 마음 속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입으로는 ‘예수님 찬양’을 떠들면서도 철저하게 예수님을 교리 안에 가두고 제 멋대로 그 이름을 팔아먹고 이용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분노와 ‘먹사들’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겠다. 앞으로도 이 못난 분심을 제어할 자신이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독선과 허망한 확신에 맞서기 위해 ‘강요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을 일부러 골라 쓰는 경우가 있다.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겸손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인 대화법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확신하며 자기 신념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표현보다 “그건 반드시 틀렸다. 왜냐 하면...” 이라는 강한 표현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주식을 사면 반드시 돈 번다. 저 주식 사면 망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과 “그 사람 말이 틀릴 수도 있다. 이 쪽 주식을 사는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확신 없는 투자자는 “확신 있게 말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한국의 기독교인 중에는 지옥갈 것이 두려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는 공갈협박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점잖은 말보다 “그런 식의 신앙은 사랑의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신성모독죄를 저지르는 짓이다.”라는 강한 주장이 그들의 무지를 깨우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원시 신념’을 ‘절대 진리’인 양 착각하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나 역시 그들의 유치한 신념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내 신념을 절대 진리인 양 강요하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것이다.


이제 기독교인들의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선교 활동’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싶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선교’에는 세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참된 선교란 기독교 교리를 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보수 선교의식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상대방을 설득하여 기독교인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래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세상의 종말이 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선교활동이야말로 상대방을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천국으로 인도하는 선한 길이기에 온갖 핍박(?)을 당하면서도 기어코 기독교 교리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도 이런 의식의 연장선에 있다.


둘째, “바람직한 선교는 교리를 전하는 것 뿐 아니라, 봉사와 구제를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만 교리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돌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결국은 상대방을 예수에게로, 즉 기독교라는 종교에로 귀의하게 만드는데 최종 목표가 있다. 나는 이런 부류의 생각을 가진 사람은 차라리 첫 번째 부류의 사람보다도 순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가면을 벗는 것이 낫지 않을까.


셋째, “진정한 선교는 교리를 강요하지 않고 그냥 이웃들의 삶의 자리가 좋아지도록, 혹은 회복되도록 돕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픈 사람은 조건없이 치료해 주고, 배고픈 이웃에게 빵을 주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는 기술을 가르쳐 주되 종교와 연관짓지 말고 그냥 돕기만 하라는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와 테레사 수녀가 실행한 선교가 바로 이런 선교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다원화된 세계에서 기독교가 해야 하는 선교가 있다면 이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한국 교회에, 아니 기독교 세계에,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그냥 선교하지 말자. 이제는 그만 ‘선교’라는 용어를 버리자. 지난 2000년 동안 ‘선교’라는 이름으로 이웃종교의 고귀한 삶의 자리를, 그들의 아름다운 문화를 얼마나 훼손했던가.


‘선교’라는 말에는, “나는 당신들이 갖지 못한 좋은 것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담겨있다. 또한 “당신들은 부족한 것이 있다. 받아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전제가 담겨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없는 그것, 혹은 당신에게는 부족한 그것이 나에게는 있다.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는, 너그러운 듯하지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하고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오만이 담겨있다. 게다가 그 의식에 집착하여 “반드시 주고 싶다.” 혹은 “반드시 주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더해지면 그것은 상대방의 문화를 해치는 폭력으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니 더 이상은 ‘선교’라는 말을 쓰지 말자. 그냥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것은 당연하니까, ‘봉사’라고 하던가 ‘서로 돕기’라는 말을 쓰자. 그리고 제발, 도와야 한다면, ‘기독교’라는 이름을 접고 그냥 돕자.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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