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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위하여 (1)기독운동은 내가 서 있는 자리인 기독교 자체의 변혁을 먼저 위하는 운동
정강길  |  minjung2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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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8월 21일 (화) 15:04:09 [조회수 : 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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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환시대의 모든 기독운동가들에게 드리는 글)

"제 자리에서 제 일 제대로 하기!" - 함석헌과 안병무의 차이

안병무 : … (중략) …,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할 때 지금 불평등하고 불의한 것이 전부 제가 있어야 할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없이 곧 바로 하느님 나라에로 돌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죠. 해방이라는 과정없이 평화로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죠. 해방이라는 과정없이 평화에로 들어간다, 불평등하고 불의한 상황을 그대로 안고 평화로 들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그 과정은 예수에게 꼭 있어요.
함석헌 : 날더러 말하라고 하면 거꾸로 말하겠어. 하느님의 평화에 들어가지 않고는 해방은 없다. 해방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되지도 않을 소리를 하는 거요. 해도 해방은 못가져 올거요. 다만 하느님의 평화에 들어간 사람은 그대로 해방에 들어가.
안병무 : 선생님 사고는 비역사적이거든요.
함석헌 : 글세 그러겠죠.
- (중략) -
안병무 : 잘못하면 제 것만 하고 제 집안만 다스리라는 말이 수수방관하라는 말도 돼요. 그러는 동안 권력자, 가진 자에 의해 평화가 교란되고 있는데요.
함석헌 : 할 수 있는 제 일도 안 하는 것이 문제지. 안 될 걸 자꾸 말하면 뭘 해. 제 자리에서 제 일 제대로 한다는 것은 곧 전체의 일을 한다는 거지. 제 일만 하라니까, 마치, 아무리 보수주의 신앙이기로시니 옆집 학생이 데모하다 잡혀갔는데, 종교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거기도 한 번 들여다보지 않는단 말이냐. 그건 정치가 아니라 사람 노릇도 않는 것이거든. 예수님이 설령 아무리 정치 관계 안 했다고 해도 사람 노릇하지 말란 말은 안했거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학생이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잘못했으면 했을수록 그 집을 들여다보는 것이 사람 노릇이고 종교인이지. 모른 체 한다, 이것이 바로 제 일 제대로 안 하는 것이야. 그러니 그거라도 배워 줘야지. 큰 일부터 아니고 가능한 일부터 하자는 거지. 이것이 곧 개인에 철저하면 전체에 철저한 자리이지. 이것은 장자의 주장이기도 해. 개인의 생명자리는 전체와 구별되지 않거든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 pp.177-179. 재인용).

여기서 안병무와 함석헌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물론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의 차이라기보다 서로 중첩된 차이다. 정확히 말해서 위의 함석헌의 입장은 안병무의 입장을 지양한다. 그러나 그 역은 아니다(이미 위의 대화와 관련하여 함석헌과 안병무의 차이에 대해선 나 자신의 졸저<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서도 언급해놓은 바 있다).

나는 오늘날의 기독운동을 고민하는 모든 기독 활동가들에게, 기본적으로는  "제 자리에서 제 일 제대로 하라!" 는 위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적어도 불평등하고 불의한 상황에서의 해방을 얘기한 위의 안병무보다 말이다. 기독운동? 그것이 뭔가? 나는 그것을 제 자리에서 제 일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얘긴지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현실 삶에서의 여러 사례들

① 내가 다녔던 한신대는 소위 말하는 데모로 유명한 곳이었다. 내가 다닐 당시에도 노태우 정권 말기에서 김영삼 정부 초기여서 데모할 집회들은 여전히 많았었다. 특히 신학과는 거의 선봉에 있었는데, 잘 알다시피 장준하, 문익환 선배님의 전통들도 함께 뿌리내리고 있어 말할 나위 없을 정도로 많은 집회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시 모든 신학생들이 모두 데모에 나가진 않았었다. 게 중에는 데모에 나가는 신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도서관에서 공부에 몰입하는 신학생도 있었던 것이다. 이때 데모에 나간 사람들 가운데는 더러 이러한 학우들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②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소위 말하는 민중운동가에 속하는 열혈투사다. 하루는 그 남자친구가 유치원 교사에게 이번에 아주 중요한 집회가 있으니 꼭 참석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 날은 자신이 유치원 교사로서 아이들을 위해 교육을 준비해야 하는 날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의견이 충돌하여 일말의 다툼으로까지 번졌다. 만일 이 유치원 교사가 그 집회에 불참한다면, 그녀는 민중현장을 배반하는 반동이 되는 것인가? 혹은 민중운동에 아무 관심 없는 자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가?

③ 나와 같은 모교회 출신의 형이 있는데 이 분은 매우 신실한 교회신자다. 그는 보수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쟁적인 진보 기독교인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그는 가난하지는 않으며, 어느 정도 연봉이 높은 직장에서 근무한다. 가정을 꾸려가면서 매우 쁘띠부르주아적인 소시민적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사회문제에도 내심 관심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자기 가정의 평화문제를 우선적으로 여긴다. 또한 직장 상사와의 관계문제가 자신의 고민 가운데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는 매우 심약한 사람이다. 적어도 북한 문제나 평택 혹은 FTA 같은 사회체제 개선의 고민보다도 더 훨씬 깊게 말이다.

④ 한때 민중신학에 열렬히 경도된 이가 있었다. 그는 결국 기도하고 찬양하는 종교적 예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거리에 나가서 민주화와 정의를 부르짖고 저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던 이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교인으로서 탈퇴하고 오히려 좌파사회주의 운동단체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만난 그는 놀랍게도 변두리가에 조그만 학원을 운영하는 학원원장이 되어 있었다. 물론 나름대로의 진보적 의식들은 여전하였지만, 결혼한 뒤에 결국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 예전처럼 그렇게 사회운동에 뛰어들 여력까진 없다고 토로한다. 그렇다면 학원원장으로서의 삶은 사회운동의 통로가 막혀 있는 것인가? 또한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그는 여전히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다.

⑤ 얼마 전에 기독운동을 한다는 후배 간사와 함께 술을 먹게 되었다. 그는 내게 불만이 있다며 털어놓기를 어떻게 요즘은 집회 현장에 잘 보이지를 않냐며 내게 불평불만을 털어놓았다. 나로선 그동안 나름대로 준비하는 운동도 있고 해서 내 할 일이 있다 보니 모든 집회 현장에 일일이 참석할 수는 없었기에 여력이 되는 가능 한에서 참여하곤 했었다(알고 보니 내가 집회현장에 있을 땐 오히려 그 후배가 보이질 않았었다). 어쨌든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 후배의 태도를 탓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 후배가 지니고 있는 기독운동에 대한 인식이다. 그 인식의 배경에는 알게 모르게 <집회현장 우월주의> 가 깔려 있었다.

먼저 양립 가능한 다양한 삶들의 투쟁과 현장들을 인지할 것!

 
 
▲ 우리 앞에는 다양한 삶의 현장들이 놓여 있다.


흔히 기독교 진보운동을 하는 그룹들의 가장 큰 이슈들은 잘 알다시피 사학법 투쟁이나 평택 대추리 문제와 한미 FTA 문제 같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의제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같은 사회적 이슈들의 문제와 예컨대 성서무오설에 대한 투쟁 혹은 기존 기독교에 대한 변혁의 작업은 그 비중에 있어서 전자만 못한 것인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특히 진보 기독진영의 모든 활동가들에게 한 번 묻고 싶다. 도대체 <기독운동>이란 게 뭔가? 기독교인이 참여하는 사회운동을 말하는가? 그렇다면 통일운동이나 평택 대추리 문제나 FTA 문제에 있어서 일반 사회운동가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연대는 할 수 있겠지만, 늘상 보면 참여주체로서 이끌어가기 보단 오히려 참여단체 중 하나로서 끌려가기만 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한때 기독교사회운동이 주도적이었을 때도 있었다. 예전에 7, 80년대에는 조금만이라도 눈을 뜬다면 그 적대세력들이 매우 뚜렷하게 인지되었기에 적어도 지금보다는 당시 사회가 그렇게 복잡하진 않았었다. 암울했던 그 시절의 기독운동가들의 투쟁들은 전설처럼 군부 독재정권의 가장 요주의 인물들로 낙인찍히기 일쑤였고, 기사연의 활동들과 분석자료들은 많은 일반 사회운동가들에게도 매우 주목받았었다. 정말이지 어찌 보면 한국 기독운동사의 찬란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점차로 본격적인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양상은 보다 다분화되고 복잡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진보적 사회운동의 주도세력들 역시 이전에 비해선 다양한 소수자 운동들로도 분화되었다. 오늘날의 다원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삶에는 많은 현장들이 있고 많은 투쟁의 양상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삶의 다양성에 대한 인지들이 폭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날 사회운동의 집회현장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당연히 공감한다. 그리고 그 일에 참여하는 기독 운동가들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 자신이 <집회현장 우월주의>라고 비판하는 맥락은 바로 이들 가운데도 하나님 나라를 향한 양립 가능한 다양한 삶들의 투쟁과 현장들을 간과하고 그 자신의 집회현장에만 집중하고 이를 내세우며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분명히 말하지만 나의 주장은 사회운동의 사안이 결코 중요하지 않다거나 그 참여를 반대하는 맥락이 결코 아님을 인지하길 바란다. 비판의 지점은 거기에 있지 않고, 기독운동의 현장들을 협소하게만 보고 있는 에큐메니칼 활동가들을 겨낭한 얘기다. 나는 적어도 그 지점에서만큼은 분명하게 비판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진보에도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있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기독운동은 사실 종교 바깥의 일반적인 사회 문제에 대한 직접적 얘기가 아니다. 솔직히 그러한 문제들은 오늘날 굳이 기독인들이 아니래도 전문가들이 더욱 많은 실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는 여러 정치적 사회적 현안을 들을 필요가 없다거나 무시하는 것 역시 아니다. 나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비껴 있는 입장이지만, 총체적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나아감에 있어서 우선적으로는 기독인으로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염두에 둘 뿐이다.

내 현장의 우선적인 다급함을 안다면 다른 현장의 우선적인 아픔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함이 인지상정인 것을.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요컨대 그것은 아름다운 오해일테지만,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분열이 되어선 곤란한 것이리라. 데모할 때 시국집회에 안나가고 도서관에 있었다고 해서 그 학우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나중에 그 학우가 자신의 달란트인 학업으로서도 얼마든지 사회변혁에 관여할 수도 있잖은가. 모든 삶은 언제나 그 과정상에 놓여 있음을 기억하자. 무릇 자기에게 놓여진 우선적인 삶의 현장과 자기에게 우선적으로 익숙한 달란트가 있는 것이다. 모든 변혁의 새로운 출발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으로 나타나야 하며 거기서부터 점점 넓혀져나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반대하지 않는다면야 적어도 비난하진 마라! 내가 볼 땐, 진보진영의 고질적 병이라는 자기분열 원인에는 바로 이 점도 한 몫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자기노선 우월주의, 자기현장 우월주의 말이다. 이렇게 볼 경우 진보 역시 보수 근본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 적어도 그 패턴만큼은 동일한 것이다. 참으로 제 살 깎아먹기가 아닐 수 없다.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노선이 근본적이요, 타노선에 대해선 배타주의를 띤다. 따라서 <근본주의>란 것은 보수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진보에도 얼마든지 있다.

오늘날 기독운동의 1차적 텃밭은 바로 기존 기독교

많은 사람들은 기독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기독운동은 기독인들이 평택 대추리와 한미 FTA 문제를 거론하는 그러한 사회운동인가? 그 같은 사회적 이슈들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속적 자리는 기독교 신앙의 자리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려는 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독운동의 일차적인 텃밭은 바로 기존 기독교라고 본다.

기존 기독교를 상대하되 작금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 시대에서 <새로운 기독교>를 형성하는 운동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정말이지 나는 요즘 들어 특히 CBS를 비롯한 케이블 기독교 방송이나 극동방송을 보면 미국이나 자본주의의 폐해에 못지않은 분노를 느낄 때가 많다. 도대체 그게 무슨 얼어죽을 놈의 기독교인가? 아무래도 록그룹 넥스트(N.E.X.T)가 불렀던 <예수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Jesus 작전 이 실제적으로 실행되고 시작되어야 할 시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 기독운동의 1차적 텃밭은 바로 기존 기독교요 오늘날의 한국교회다.


개나 소나 아무나 목자고, 황금의 소를 따라가는 그 수많은 눈먼 양들을 우리는 오늘날의 대다수 한국교회 현장과 기독교 언론 방송이라고 표방하는 진영에서도 너무나 쉽게 목격하고 있잖은가. 단적으로 말해서 그 현장의 심각성과 중요성은 평택 대추리와 한미FTA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만일 나 자신이 기독인으로서 기독운동의 정체성을 말할 때, 둘 가운데 하나를 굳이 택해야 한다면 나는 전자에 중심을 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택 집회나 FTA 문제를 비롯하여 얼마든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들도 지지하면서 여력이 되는 한 함께 참여할 수도 있잖은가. 그것이 기독운동의 자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역으로 기독교 밖의 일반사회의 진보운동단체들의 호응 역시 이끌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최근 들어 기독교가 아닌 분들이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 혹은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해 호응하는 것을 보고 매우 고무적으로 느끼고 있다. 여기에는 일반 사회인들뿐 아니라 기독교를 떠나 적대시까지 했던 안티기독교인들마저 포함된다. 만일 그것이 건강한 종교라면 그것은 이미 그 사회가 찾는 답변으로서 그 구성원들을 끌어당길 것이리라. 제대로 알려지기만 하면 말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운동가들이 기독교 운동의 대중성을 고민하곤 하는데, 만일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제대로 서 있도록 해보라.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수많은 대중들을 포섭하는 운동이기도 하잖은가. 게다가 우리의 기독신앙이 제대로만 서 있다면, 내가 보기엔 평택 대추리 사건이나 한미 FTA 같은 많은 사회적 이슈들을 직접 토로하지 않아도 저절로 관심을 가지리라고 보고 있다.

삶의 동기부여는 그 자신의 궁극적 신념에서 나온다. 따라서 우리에겐 새로운 동기부여를 갖는 삶의 전인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한 개인의 삶에서조차 전인적 지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기독운동은 바로 현실 삶을 하나님 나라화하도록 기존 기독교인들을 새로운 기독교인으로 이끌어내는 운동이다.

더이상 한기총이나 기독교사회책임 같은 꼴통들이 생산되는 기존 기독교 시스템으로선 곤란한 것이다. 이미 그들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신앙의 젖줄에 서 있다. 내가 보기에 결국 기독교인에게 결정적인 것은 성서해석, 신해석, 예수해석에 대한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정체성을 지니려는 신앙인에게 있어선 핵심 키워드며, 이에 대한 신념을 변화시키는 운동이 보다 1차적이고 근원적이라고 본다.   

    

 
 
▲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교리인 성서무오설과 미제국주의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는 건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 관련성을 보지 못한 파편화된 시각일 뿐!


 
이것이 제대로만 뒤바뀌면야 기독 활동가들이 사회운동 집회에 사람들이 잘 안온다고 끙끙 댈 필요도 전혀 없을 걸로 보인다. 인식이 바뀌고 삶이 바뀌게 되면 집회현장의 참여여부는 개인적 역량의 문제일 뿐, 가능한 스스로 알아서 지지하게 되고 집회참여에도 노력할 것으로 본다. 즉,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 기독 운동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동기부여>를 지속적으로 심어주고자 하는 운동이다.

결국 기독인으로서(혹은 예수와 성서를 가지고서) 바른 시각과 바른 견해를 가지도록 이끌고 형성시키는 데에 나는 기독운동의 자리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신자유주의 폐해와 미제국주의 만행을 백날 홍보해봐도 그 효과는 기껏해야 그것은 그때뿐일 수 있다. 중요한 건 삶이며, 또한 그 삶을 지탱하는 신념이다.

기독운동은 자신의 삶을 영속적으로 하나님 나라화 시키려는 운동이다. 삶을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라면 그것은 제대로 된 기독운동이 아닐 것이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기독운동은 바로 그러한 지점에 있다. 그럴 경우, 예컨대 내가 속한 세기연이 하고자 하는 새로운 성경공부 교재작업 같은 것도 어떤 면에선 사회적 이슈들의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기독운동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썼다는 릭 워렌(Rick Warren)이 한국에 와서 떠들어대는 한국교회의 현장들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왜 진보 기독활동가들은 그 지점은 심각한 부조리의 현장으로서 고려하지 않는가. 만일 고려했었다면 일반 사회문제를 생각하는 것만큼 함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위한 노력들과 모색들도 분명하게 있어야 할 것이지만, 평택이나 FTA 문제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만큼의 그 흔한 논평이나 성명서 하나 없다.

흔히 해왔듯이 많은 기독운동가들은 기독교인이면서 사회참여의 색조를 띠는 그 지점에 대체로 기독운동의 정체성을 놓고 있는 듯 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지금까지 이어 받은 기존의 진보 기독진영의 관성들도 어느 정도 작용한 요인 역시 있다고 여겨진다. 늘상 보면 진보 기독진영은 정체성과 대중성에 대한 고민들이 딱지처럼 붙어왔잖은가.

이제 나로서는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계몽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으로 본다(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계몽이라고 해서 꼭 근대 계몽주의를 떠올릴 필욘 없다). 지금 한국교회 현장에는 수많은 민중들과 그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다. 기존 기독교의 그 이원론적 폐단은 기껏해야 종교의 아편 구실을 할 뿐이잖은가. 기존 기독교라는 현장은 정말이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따라서 기존 기독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형성하는 운동이야말로 나는 보다 근원적인 기독운동이라고 본다. 이 패턴은 역사적 예수가 수행한 운동과도 동일하다. 이천 년 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기존 유대교 율법서와 경전들을 다시 새롭게 해석해서 나온 <새로운 유대교 운동>이 아니었던가!

모든 삶의 현장들에 하나님 나라 운동이 스며들기 바라며..

우리 앞에는 다양한 삶의 현장들이 있다. 적어도 하나님 나라 안에선 양립 가능한 삶의 현장과 투쟁들이 있다. 그렇기에 평택 집회와 성서무오설(혹은 근본주의 교리들)에 대한 투쟁은 서로 양립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그것에 대응되는 것들을 생각해보면 자명하다. 즉, 평택 집회와 성서무오설에 대응되는 것들이란 각각 부시가 지휘하는 미제국주의와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가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분명히 말하지만, 성서무오설에 대한 싸움 혹은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한 투쟁이 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보는 시각이야말로 오히려 전체 하나님 나라 운동을 분열시키는 파편화된 시각일 뿐임을 확고하게 말해두고자 한다. 사람들은 잘못된 이론들과 낡은 사상들에 의해 그 영혼과 정신이 피폐된다. 따라서 기독교 운동의 첫 번째는 기독인으로서 올바른 신념과 정신을 가지게끔 하도록 진정한 사상적 개조운동들이 필요한 것이다.

언젠가 김규항은 놀랍게도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뀐다.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운동하는 판사, 운동하는 국회의원, 운동하는 배우, 운동하는 코미디언, 운동하는 투수, 운동하는 장군, 운동하는 사장, 운동하는 교사, 등등 …. 세상의 모든 지점에 이러한 운동이 스며들 때 세상은 비로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오늘날의 기독운동은 바로 그 긴 신념을 성서와 예수에 근거하여 바로 세우고자 하는 운동이다. 혹자는 그 긴 신념을 바꾸는 운동이라서 어쩌면 더디다고 볼 진 몰라도, 적어도 그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키포인트임은 말할 나위 없잖은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전(全)생활의 영역에서부터 들풀처럼 일어나는 것이고, 정의가 강물처럼 일어나서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내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전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잊지 않으면서 살아감이 필요하리라.

이미 개인의 생명자리는 전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내가 속한 기독교부터 제대로 청소도 좀 하고 제대로 확립해놓기!   바로 이것이 서두에서도 말한 <함석헌식 기독운동> 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 사회문제 같은 사안들도 결코 도외시하는 것이 아님을 덧붙여 말해둔다. 기독교만 제대로 서 있다면 우리 사회 전체가 업그레이드 될 것 아니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선교>mission의 대상은 언제나 외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P.S - 혹자는 그것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 것이며, 성공할 지를 염려하기도 한다. 나는 그들에게 차라리 <미션임파서블> 영화라도 권하고 싶다. 솔직히 그 불가능한 작전과 임무에 맨 앞장섰던 자가 바로 예수아니었나.

 [세계와기독교변혁연대] http://freevie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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