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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의 물질 낭비와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관계론으로신영복의 동양고전 독본, 강의(1)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당당뉴스 편집실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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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8월 20일 (월) 16:55:08 [조회수 : 4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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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당당뉴스에서 3달간 사랑방모임을 인도했던, 감리교 목사 공상퇴회 후  대관령에서 산자락을 일구며 살아가는 영원한 곰, 농사짓는 박흥규목사는  산자락 농사를 지으면서도 틈틈히 책을 읽는다. 이번엔 신영복교수의 [동양고전독, 강의]라는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 당당뉴스에 이메일로 보내왔다. 2번째가 이어진다. 당당뉴스는 박흥규목사의 신화에 얽힌 이야기와 몇몇 단상과 서평들을 계속 연재한다. 노인의 맞춤법인지라 운영자가 대충 손을 보았다.

신영복의 동양고전 독본, 강의(1)
자본주의 체제의 물질 낭비와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관계론으로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 신영복의 동양고전 독본, 강의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 사상이다. 화엄경의 본래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 이다. 대는 절대개념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념이다. 방광은 넓다는 뜻으로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과 꽃으로 장엄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말한다. 화엄이란 여러 꽃으로 장식한 세계를 말한다. 고해를 화엄 세계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다른 것과 연관 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큰 것이고 넓은 것이다. 한 포기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 햇빛 봄여름과 연관되어 있으면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다. 공간적으로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다.
부처란 ‘깨닫다’라는 의미로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풀 한 포기, 돌 한 덩어리, 조상의 얼굴 속에서 연기구조를 깨닫는 것으로 연기세계를 들어 보는 것이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래도 무한한 시간과 무변의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사물은 찬란한 꽃이 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미물이래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화엄학의 핵심은 연기론이며 관계학이다.
불교에서 깨닫는 각이란 연기의 망을 깨닫는 것으로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이다.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으로서 연쇄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말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있는 우물에서 벗어남은 물론이며 우리 시대가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리는 일이다. 자본주의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불가능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계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연기란 시간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이다. 연기를 상생의 개념으로 보는 일이다.
물과 햇빛과 흙이 사라지면 나무도 사라지는 것이다. 서로 다르면서 하나인 것이다.
세계는 화엄의 찬란한 세계이면서 동시에 덧없는 무상의 세계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한계 내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우리의 생각을 조직하고 우리의 시공에 참여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슴에 두 손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에 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 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가슴이 관계론의 장이기 때문이다. 이성 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 되어야 한다. 감성과 인격은 사상의 최고 형태다. 두 번째는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이 된다. 말이나 글로 주장 한다고 자기사상이 된다는 것은 환상이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최후의 방법이다.
그림은 그리워함 이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다.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이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이다.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보라 치는 강에 낚시 드리웠다. 고독한 고뇌이다. 개혁의 의지의 끝없는 좌절로 점철 되어 있는 역사의 대하이다.

도는 자연을 본받습니다.(노자의 도와 자연)
동양사상의 정체성은 논어 보다는 노자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유가사상은 진의 사상이다. 인문 세계와 지속적인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된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노자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이다. 근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귀는 바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노자의 자연은 야만이나 산천이 아니라 천지의 근원적인 질서를 말한다. 노자는 인위적인 규제를 반대한다.
노자는 근본주의적인 관점을 가진다.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법을 따른다.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기존의 인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이 노자의 현대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노자의 반문화사상이 비판담론 만이 아니라 저항담론과 대안담론 으로 그 지반을 가진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집단적 담합과 폭력적인 개입에 의해 억제된 상태로 허위와 비인간적인 논리를 구축한다. 노자의 언어와 담론은 현대자본주의 모순구조를 조명해내고 자본주의 문화의 허구와 총체적인 낭비 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에 비로써 노자를 생환 될 수 있게 된다.
노자의 성명이 이이 시호는 담 이라고 사기는 기록했다. 왕실의 장서를 관리하는 수장리 이었다. 대체로 기원전 350-200경의 집단 창작으로 알려졌다. 노자의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이다. 무위와 관조는 동양적 사유의 근저를 이룬다.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무와 유는 같은 개념이다. 노자 철학에서 무는 제로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무이다. 여기서 무는 유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인 무라고 하기 위해 현을 사용 하고 있다. 현은 검은색과 붉은색의 혼합을 현이라고 말한다.
도란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개념적인 사고로는 담을 수 없다. 도라는 것은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이며 사유를 초월하는 세계이며 현상 배후에는 무가 있으며 무와 유는 동체이며 통일체이다.(현묘)

인위적인 것은 거짓이다
널리 알려진 미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혐오스러움이다.
널리 알려진 선을 선 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는 것이다.
인식과 실천의 반성이다. 위란 인에 위, 거짓의 근본 의미는 인위이다. 인간의 개입이 거짓이다. 성인은 무위하고 무언할 것을 요구한다. 노자는 성인(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은 무위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공을 세워도 그 공로를 찾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노자의 실천론의 요지이다.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실천론이다. 노자는 백성들은 무지 무욕하게 해야 된다고 하고 있다.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불가능하다. 소비가 미덕 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 이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 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이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 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형태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 상품 이외는 소통 방식이 없다.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 가는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언어도 지식도 상품이다. 도무지 무지도 무욕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노자를 통해서 현대를 재조명 하게 된다. 노자의 무위란 무행이 아니라 실천의 방식이 된다. 은둔과 피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난세의 극복이며 혼란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가 된다.(노자의 철학은 물의 철학)
“도무수유”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은 물이다. 물로서 도를 설명 하는 것이다. “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첫째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우로가 되어 만물을 생육 하는 것이 물이다 생명의 근원이다. 둘째 다투지 않는다.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될 때에 쟁(싸움)이 된다. 셋째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위치가 낮은 곳이 아니라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에서 노자의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한다. 춘추전국시대 패권경쟁의 무도한 작위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은 민초들의 정치학이다. 약한 자가 이긴다는 사상을 선포 하고 있는 노자의 비판담론은 민초들의 투쟁적인 삶에 실천적 의미를 부여한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은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약한 사람이 다수라는 사실을 말한다. 다수가 힘이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다. 쉬지 않고 흐를 수 있다. 다수는 정의다 진정한 연대란 노자의 물이다.

장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장자 외편 추수에 나오는 이야기로 장자 사상을 비유로 말한다. 교조에 묶인 선비는 우물 안 개구리로 도를 말할 수 없다. 당시 제자백가들이 제도개혁이라는 실천을 통하여 사회변화를 실천하고 있으나 보다 근원적인 구성원의 “자유와 해방” 에 있다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이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관점이 되어야 한다. 장자의 소요는 보행과 달리 목적지가 없다 하는 일 없이 거닌다. 궁극적 자유, 자유의 절대경지 위에 군림 할 수 있는 어떤 가치도 존재 할 수 없다. 그는 낙천적인 세계관을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살았다. 중국의 루싄은 ‘호루라기 부르는 장자’라는 희곡을 통하여 장자의 무시비가 권력자에게 유리한 논리이며 호루라기는 권력의 상징으로 보았다. 발가벗겨진 상항과 절실한 현실의 옷 장자 철학의 관념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본다.
장자는 그 전편에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가진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물 속의 개구리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핵심이다. 논어나 맹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계를 다루며 기존논리인 기득권 논리를 따른다. 장자는 이 상식적인 세계의 세속적인 가치를 일갈하고 일소 초월을 한다.
초월이 장자의 사상의 핵심이다. 초월의 경지란 절대 자유의 단계로 도와 함께 노니는 소요의 단계로 성인, 신인, 지인이라고 말한다. 신인 이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절대자유의 경지를 말한다. 아무것도 기대 하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경지, 절대자유의 경지이다.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공헌은 자본주의 체제를 과도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관점이다. 모든 체제와 같이 존재하다가 사라질 과도적인 체제로 본 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로 규정 하고 있다.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으로 시작 되며 최종적으로 사상투쟁으로 끝난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일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드넓은 벌판과 높은 산을 보는 깨달음을 주며 이런 깨달음이 창조 공간이 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이다
포정해우란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백정이 소를 잡는 이야기이지만 바로 비천한 예로 도를 설명한다. 포정이 문혜군(왕)을 위해 소를 잡는데 최고의 춤과 음악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에 탄복하고 그의 솜씨에서 도를 터득 하였다. 포정해우는 기술이 아니라 도에 관한 것이다.
훌륭한 포정은 1년에 한번 칼을 바꾸나 보통 포정은 한달에 한번 바꾼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터득했구나.”하고 감탄을 했다.

학의 다리를 길다고 자르지 마라
인의는 천성이 아니다. 천은 무엇이고 인은 무엇인가. 장자는 소와 말이 네 개 있는 것이 천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는 일 이나 소의 코를 뚫는 것이 인이다. 인위로 자연을 멸하지 말며 명리로써 천성의 덕을 잃지 말라. 인위적인 규제와 형식을 거부하는 사상이 장자이다. 인을 거부하고 천과 합일해야 된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자연을 피하려는 둔천의 형벌이다. 아내가 죽었을 때에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는 일화가 있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 장자에게는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일이나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도와의 합일이다. 이는 도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 할 수 있는 것이다. 도를 이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도와 정서적인 공감 곧 머리로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일이다. 머리 보다는 가슴이 먼저 안다. 머리로써가 아니라 삶의 실체와 부딪치며 살아갈 때에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 하지 않을 뿐
자공이 진나라에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지만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 용두라는 기계를 소개 하자 노인은 화를 낸다. 그 노인은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의 기능은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게 되면 도가 깃들지 못하게 된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여기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당신은 누구냐고 물어 공자의 제자라고 말하자 공자를 신랄하게 욕을 한다. 공자는 성인을 자처하고 백성을 속이고 천하에 명성을 팔고 다니는 자가 아니냐!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천하를 다스린다고 말인가. 내가 하는 일이 어리석다 말고 그만 가보시게 이 예시문에서 생산성, 경제성, 효율성 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장자의 사고인 동양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다. 근대성에 반성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장자의 시대와는 다르나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 되어 가고 있다. 노동의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 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고 있다. 1810년 일어난 러다이트운동은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운동이다. 기계로 노동자들이 일터를 잃고 기계로 인한 실업 문제 보다는 자본의 문제로 연결시킬 수 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효율성 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를 복원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그러한 반성을 원칙적으로 봉쇄하는 현실이다. 목표가 있어도 그것에 달성할 수 없는 현실이 슬프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온 천하에 있다면 얼마나 절망적일까.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르는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자기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거나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하다. 한 시대 한 사회의 경우도 같은 입장에 선다.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부단히 두려워 할 때에 사회는 발전 될 수 있다.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제나라 환공이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윤관이 당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책에 무슨 말이 있느냐 묻자 ‘성인의 말씀이다’ ‘그 성인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벌써 돌아가셨다. 그러면 전하가 읽고 있는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신이 제 자식에게 더 깎고 덜 깎는 것을 말로 설명 할 수 없고 전수 받을 수 도 없다. 일흔 살 노인임에도 손수 수레를 깎고 있다. 옛 사람들도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가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뿐이라는 것이다.

나비 꿈
어느 널 장주가 나비되는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자신이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무슨 구분이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컫어 물화라 한다.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 되어있는 함축적인 이야기이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가 서로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나 나비는 하나이다. 개별적인 상과 개별적인 사물을 하나로 아우르는 깨달음이 장자의 제물론이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물화는 변화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제는 고르게 한다, 하나로 한다 하나의 체계 속에 망라한다. 모든 사물은 변화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한다. 모든 사물은 직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직접적인 것을 인, 간접적인 것을 연이라고 모든 사물은 인연을 맺고 있다. 모순과 통일의 관계, 상호 침투, 장자의 나비 꿈은 이런 세계를 보여준다.

혼돈과 일곱 구멍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은 은혜를 갚기 위해 의논하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 주자. 날마다 구멍 하나 씩 뚫어 주었는데 칠일 만에 혼돈이 죽어버렸다.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통체적 전체를 분리하고 나누어 놓는 행위이다. 전체적인 연관이 소멸되고 남은 것은 분별지 별상 개아로써의 존재들이다. 혼돈이 죽어 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도적질에도 도가 있습니까?
도척은 공자 당시 노나라 현인 유하게의 동생으로 무리를 9천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침략한 대도이다.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일이 성이고,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이며, 늦게 나오는 것이 의이며, 도둑질해야 되는 가 판단하는 것이 지이며,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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