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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통해서 보는 하느님의 나라우리의 모든 걸음이 하나의 기도가 되도록 하라. 창조적인 노동만이 살길이다.
당당뉴스 편집실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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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8월 14일 (화) 23:44:48 [조회수 : 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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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당당뉴스에서 3달간 사랑방모임을 인도했던, 감리교 목사 공상퇴회 후  대관령에서 산자락을 일구며 살아가는 영원한 곰, 농사짓는 박흥규목사가  산자락 농사와 신화에 얽힌 이야기와 몇몇 단상과 서평들을 당당뉴스에 이메일로 보내왔다. 노인의 맞춤법인지라 운영자가 정리하여 몇번에 걸쳐 연재한다.

 숲을 통해서 보는 하느님의 나라(수목신앙)

1981년도 농촌교회인 김포 월곳교회에 부임하여 메마른 언덕에 나무를 심고 가축의 분뇨를 통해서 기름진 땅으로 바꾸어 나무를 여러 종류를 10년 이상 심고 가꾸어 숲을 만드는 일에 교인들을 참여시켰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나 목련의 봉우리가 피어오를 때는 지상에 이루어지는 천국을 본다.
충청도 선장교회에 가서도 3년 동안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었고 조경위원을 만들어 나무를 가꾸는 일을 도왔다. 그 후 강화 망월교회 에서도 값진 나무를 구입하여 나무숲을 만들었다.

   
 
   
 
내가 교회에 나무를 심는 것은 신을 한 구루의 나무로 보는 제 신앙이다. 추상적이고 애매한 관념의 세계 보다는 구체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신이 강림하는 곳을 나무를 통해서 보고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 나무는 성목들로 성스럽고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우주와 연관 되어 있다. 순수한 직관으로 감지되는 영원한 본성을 나무세계에 숨어 있다고 본다.
엘리아데는 누미노제로 나무(우주목)에서 두려움. 성스러움. 신비. 활력. 생동성을 가진다고 말을 한다. 나무가 수직으로 성장하여 잎이 다시 나는 일에서 무한한 재생을 보며 거기에서 제의나 성소로 본다.
기독교의 십자가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으나 대부분 교회들이 신화적인 사실로 인식할 때는 수목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생명의 나무는 이집트의 여신 히토로신의 모습으로 죽은 자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신으로 생명의 나무로 그 모습을 가진다. 고대 오리엔트에서는 포도나무를 생명의 나무로 보았고 복음서에는 선한 목자인 예수를 생명의 나무로 표현한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우주목)라는 나무에 강림했다. 신단수는 우주의 중심에 세워지고 하늘과 땅의 통로가 된다.
거기에는 거룩함. 위대함. 큼. 빛남이 있다.
수로도 구지봉 숲의 박혁거세도 양산 숲에 강림했다.
우리 민족이 가진 나무신앙은 솟대나 장승, 당목을 통해 이어져 왔다.
지금도 대관령 옛길 마을 입구에 있는 당목이 마을의 중심이 되며 마을의 수호신의 위치를 지켜 왔지만 옛부터 이 옛길을 지키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민속촌으로 밀려나 있지만 솟대. 장승. 당목은 우리의 근원적인 상징물로 우리 안에서 살아있다.
인간의 삶이란 본래 자연 가운데서 자연의 힘의 움직임에 따라 살고 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나무에 대한 신앙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신의 움직임을 보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원시인들은 세계(자연)와 인간 안과 밖과 사물을 분리 하지 않고 하나로 결합 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원시인들의 신화적인 우주관에서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다. 우주를 영적인 힘을 가진 커다란 생명체로 보고 정령의 활동을 감지했으나 일신교인 기독교는 자연을 객관화 시키고 분리시키어 자연을 파괴시키는 일을 하여 비대칭적인 관계로 전락시켰다.

동아시아의 자연관에는 자연이 영적인 생명을 가진다는 신화시대 애니미즘적인 사고가 계속 살아있다.
몸에 바탕을 둔 대우주인 자연과 소우주인 인간의 관계를 신화적인 사고로 이해하고 이러한 점을 인류의 공통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내면의 세계 즉 영혼의 영역을 새롭게 탐구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기독교 신의 구원(은총)을 교회, 또는 예수를 믿어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의 움직임을 제도화시키므로 형식화된 것이다. 그러나 동양적인 사고는 내성이나 명상 수행을 하다가 신의 차원에 가까이 갈수 있다는 기독교 초기의 흐름도 있으나 이단이라하여 정통교리로부터 소외를 당했다.
동아시아 자연관에는 몸과 마음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공시적인 대응관계가 존재 한다. 자연을 올바로 보는 것이 인간을 올바로 보는 것으로 이해한다.

   
 
  ▲ 대관령의 곰목사, 박흥규! 그는 여름내내 화전을 일구며 잡초를 뽑는다.  
 
우리의 모든 걸음이 하나의 기도가 되도록 하라.
인디언들은 우리는 모든 날이 성스러운 날이라는 인식 속에서 생활을 했다. 부족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서 미래를 먼저 보았다. 나무와 풀, 그리고 새와 동물들을 모든 생명체가 자신들의 친구로 보았다. 아이들에게 우리의 걸음이 하나의 기도가 되도록 하라. 그들의 축제는 옥수수가 익을 때 새로운 버드나무 가지가 필 때이다.

다카기 진지부로는 자연에 뿌리박은 민중이 인간에 의해서 파괴되는 자연을 해방 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자연에 산다는 것은 개인적인 삶의 차원을 넘어서서 자연에 기반을 둔 사회적인 운동을 지향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돋이를 기다리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무지개를 보고 희열을 느끼는 감성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심신의 자연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이 자연스러운 생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본성에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라고 생각한다. 서양적인 자연관은 인간을 반자연으로 정립함으로써, 인간을 상위에 두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문제는 살아있는 자연과의 접촉에 의한 감성의 소생이다.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이나 잘못된 신앙의 편견에서 해방 될 때에 인간과 자연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자연이 상품으로 바뀌어 사회에서 생활전체가 창조적이고 살아 숨쉬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 되어야 한다.
칼막스는 자연을 피난처라고 말했다. 주말에 만나는 관광 상품으로 숲이나 계곡은 레저의 대상으로 상품화 되어버린 자연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상품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자연과 접촉을 통해 인간은 변화 되어진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연스러운 생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며. 이런 자연성은 인간성, 창조성, 활력, 상쾌함 같은 많은 것들을 회복 할 수 있다.

창조적인 노동만이 살길이다.(강화 농촌선교원 개원)

안정된 교회 생활을 버리고 평소 농촌선교에 대한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땅에서 땀을 흘리며 살고 있는 박상수 윤여군 부부를 존경한다. 민중 속에서 말없이 밀알로 썩어가는 실천은 신념을 자기화 사키는 일로 존경한다.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악화 되어갔다. 청계천의 노동자 전태일은 노동청, 대통령, 교회에 호소나 탄원서를 냈으나 반응이 없자 자기 몸을 불태워 죽였고 그가 그렇게 죽음으로 NCC에 산업선교가 생겼고 NCC 인권위원회 생겼고 배고프고 목마른 자 입장에서 성서를 읽는 민중신학이 생겼다.
농촌선교란 농민현실에서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비록 적은 수이지만 감리교 농촌선교를 하는 분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농촌선교란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삶 즉 실천이다.
화엄경 아라는 불경이 있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한 세계를 말한다.
산에서 사는 나는 하늘과 땅에 여러 가지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자주 보며 내가 사는 산자락을 화엄세계로 바꾸기 위해 꽃들을 열심히 심고 기르고 있다.
다람쥐, 뱀, 산새들이 꽃들 속에 어울려져 있는 땅에서 모두가 서로 얽혀 하나가 되어 있는 세계를 볼 때 생동력을 느낀다.
중국의 고전에 어느 공인이 나무로 새를 만들어 하늘에 날렸는데 3일이 되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가진 뛰어난 솜씨보다 늘 수레바퀴를 만드는 평범한 목수가 훌륭하다. 그 이유는 목수는 생활에 보탬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을 농촌목회자로 살아 왔다. 하늘을 나는 새를 만드는 일에 갇혀 살아 왔다.
이제부터라도 평범한 생활에 보탬이 되는 일을 위해, 갈대와 엉겅퀴로 뒤덮인 땅을 원시적인 방법으로나마 밭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들깨, 도라지, 당귀를 가꾸고 있다.
밭에 잡초를 매는 일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의 통증의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실천을 통해서 농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되고 여기서 얻은 것은 다시 땅을 경작 하는데 힘을 준다. 농사와 노동이란 실천이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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