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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의 언어는 재평가 되어야 한다 " 外 2편황규학목사의 정치 칼럼 모아보기 "노무현 대통령은 끊임없이 주변을 향했던 지도자"
황규학  |  hpastor@ms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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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7월 26일 (목) 06:18:10
최종편집 : 2010년 09월 06일 (월) 14:31:56 [조회수 : 2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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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학목사  
 
* 이 기사는 당당뉴스에 교계기사와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황규학목사의 정치 관련 최근 칼럼 3편을 <에클레시안뉴스>에서 뽑아내어 당당뉴스 운영자가 따로 모아 편집한 것이다. 교회법을 연구하는 황규학목사는 에클레시안뉴스(

* 이 기사는 당당뉴스에 교계기사와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황규학목사의 정치 관련 최근 칼럼 3편을 <에클레시안뉴스>에서 뽑아내어 당당뉴스 운영자가 따로 모아 편집한 것이다. 교회법을 연구하는 황규학목사는 에클레시안뉴스(http://www.ecclesian.com/)와 온라인서점 에클레시안(http://eccbook.co.kr/)을 운영하고 있다. 일부는 데일리안뉴스에도 기고했다.


 

노대통령의 언어는 재평가 되어야 한다

대 대통령사기극

인권변호사 출신이자 상고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서 사회는 노대통령 언어에 대해서 임기말년까지 헌법 운운해가며 노대통령의 입지를 좁히려 하고 있다. 정말 노대통령은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다시 말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기 전에 한 인간이자 국민의 한사람이기를 바랬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민중들끼리 사용하던 일상적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를 원했고, 그만큼 국민들과 동네 아저씨처럼 가까워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국민들과 일부 기득권층들은 대통령을 인형의 집에 가두어두고 자신들만 행동하기를 원했다. 자신들은 대통령에 대해서 막말을 해대는 폭언을 가하면서 대통령의 언어에 대해서는 거품을 물고 대들어 결국 대통령은 인형처럼 집에 가만히 있기를 원하는 모순투성이의 삶을 누렸다. 국민의 대 대통령 사기극이다.

대 국민사기극

국민들은 대통령이 그저 ‘에헴’만 하고 있으면 밑에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하고, 자신들이 떠들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은 에헴만 하고 있으면서 뒤로는 측근들이나 자식들을 통하여 부정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대국민사기극이었다. 국민들은 어리석게도 사기를 당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국민들은 겉으로는 ‘에헴’하고 근엄한 척하면서 뒤로는 발빠르게 국민의 혈세를 가로채고 있는 그런 사람들 처럼 노대통령도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독재주의자는 독재주의 방법을 갖고, 민주투사들은 민주주의라의 방법으로 국민의 재산을 가로 채는데 혈안이 되었었다. 결국 왕의 남자와 왕의 아들들은 유치장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들과 함께 있는 주변의 사람들도 형식과 말은 민주이지만, 내용은 부패세력이었다. 우리 시대는 독재정이나 민주정이나 모두 민주의 형틀을 쓰고 내면으로는 부패를 일삼았다. 이면은 독재와 민주를 넘어서 공통분모는 모두 부패세력이었다. 민주당에 부패와 철새, 변절자들이 많은 것만 보아도 내용성 민주주의가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명론적 민주주의

최근 장영달의 의원의 말대로 민주당이 민주당 간판을 내걸었다고 해서 민주당에 진정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한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고 해서 민주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정인을 배제하는 정당이 과연 민을 주로 하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갖고 있느냐라는 말이다. 본인들이 민주당에 있다고 해서, 민주화 투쟁을 했다고 해서 민주세력이 아니라, 민을 왕으로 접대하고 민을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이 진정한 민주세력인 것이다. 한 때 민주세력이었던 권노갑, 박지원, 김덕룡, 서청원, 정대철, 김영삼, 한화갑 등은 부패세력이거나 야합세력으로 결말을 맺었다.

민주당에 몸담았던 이인제의 경선불복으로 사회는 ‘이인제 학습효과’라는 말까지 만들어냈고, 김민석은 변절자라고 낙인을 찍었다. 결국 부패세력으로서 매듭을 짓고 말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몰랐던 것이다. 명목상 민주주의자들이었다. 즉 유명론적 민주주의자들이다. 내용과 알맹이는 없고 이름만 있는 민주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정치인들이 말하는 평화민주세력의 대단결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민주세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역과 기득권만 챙기는 독선세력이거나 부패세력으로 전락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부패재산탈취와 위장전입, 국민의 재산 탈취로 연일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이명박후보와 박근혜후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독재당의 딸이나 차떼기당의 전시장의 비리와 부패가 민주당 출신인들의 부패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민주투사들, 대부분 부패투사로 전락

박종철 사건을 외부에 알려 민주화를 가속화시킨 이부영 의원, 김영삼대통령을 도와 감옥에 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의원,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동지인 권노갑 전의원, 한화갑 전의원등이 부패로 법정선고를 받았다. 민청학력 사건의 주역인 이철 철도청장이 비정규직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민주투사들의 대부분은 변절자로 부패세력으로 결말을 내리고 말았다. 대통령탄핵에 앞장섰던 추미애가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그들은 민주당이었지만 민주주의를 몰랐으며 민주화운동을 했지만 진정 민들의 정신을 알지 못했다. 유명론적 민주주의자들이다. 즉 pshydo-democrat 이다. 권력만 누릴 줄 알고 왕만 되기를 원했다.

앞으로는 민주하면서 뒤로는 부패세력으로 전락한 것이 과거 민주투사라고 하는 사람들의 양태였다. 특히 황제 대통령들의 뒷면은 부패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치고 말았다. 결국 말없는 에헴은 뒤로 측근들과 자식들을 통해서 부패를 일삼고 말았다. 야합민주당은 IMF로 끝내 2,000여명 이상의 자살자들을 만들어 냈고, 국민의 정부는 민주기득권자들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고수로 꼬마당으로 전락을 했다. 그러면서도 대통합을 반대하고 있다. 대통합이 되든지 소통합이 되든지 기득권을 누리기 용이한 쪽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민의 정신과 상관이 없는 행동들이다. 유명론적 민주당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자는 민의, 민에 의한, 민을 위한 정치가

지금도 범여권에서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세력들과 국민들은 민주세력 대동단결, 대통합해야 해야 대선에 승산이 있다고 말하지만 현재 민주당은 자신들의 지역 기득권을 위해 관심 없어 한다. 즉 민주는 없는 것이다. 민주라는 것은 민의 의지, 민의 열망을 담고 있어야 하는데 민의 의지는 간 데 없고 기득권 정치인들의 의지만 남아 알량한 지역적 기득권과 이익을 위해 민주를 외치고 있다. 진정한 민주투사는 과거의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투사들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민의(of the people), 민에 의한(by the people), 민을 위해(for the people) 자신을 희생하고 행위를 통해서 마무리를 짓는 사람이다. 유명론적 민주주의자들이 아니라 실제론적 민주주의자들이다.

불로소득에 대한 무한 욕구, 어떤 정책도 해결할 수 없어

우리는 대통령으로서, 정권인수자로서 준비되지 않았던 참여정부의 실책을 누구나가 다 안다. 참여정부의 최대의 실책은 부동산 정책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땅덩어리가 좁으며 인구도시집중이 심하고 지역이기주의가 세계적인 국가에서 케인즈가 나타나도 국가경제정책과 부동산 투기방지를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대도시의 부동산 값도 최근 2배나 뛰었다. 그리고 정부의 실책이기 이전에 국민들의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축적하려는 이기적 탐심과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정책도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선진국가란 국민개개인들이 양심적이고 정직하고 청빈과 노동의 정신으로 돈을 버는 국가이다. 자본주의란 돈을 위주로 한 주의가 아니라 청빈과 근면 검소, 노력을 통하여 부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막스베버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자본주의 정신이다. 노력한 만큼 자본을 생산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온 국민이 부동산 투기와 불로소득에 미쳐있다. 부동산 욕구와 탐심으로 가득찬 이 사회에 어떤 정부가 정책을 잘 실현한다 한들 이들의 무한 욕망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욕망앞에는 군사독재주의자들건 민주주의자들이건 장사가 없다.

야합정부의 결말은 IMF, 참여정부의 결말은 FTA

참여정부 들어서 부동산 투기억제정책의 추진으로 인해 경기가 어렵고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개인 인권과 평등, 복지, 약자와 노인들을 위한 정책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더 진전되었다. 부동산을 통한 무한 부축적의 욕망을 막은 것만해도 큰 업적이다. 때에 따라서 참여정부가 준비되지 않고 미숙한 정책으로 인해 시행착오도 많지만 민주를 실현시킬려고 애쓴 것은 사실이다. 야합정부는 IMF로 끝났지만 참여정부는 FTA로 끝내고 있다. 그것은 참여정부가 나름대로 좋은 결과를 거둔 표시이기도 하다. 참여정부는 서투른 정책으로 인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복지와 인권, 약자도 함께 사는 희망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참여정부를 아직 평가하기는 이르다. 홍준표의원도 얘기했듯이 참여정부는 역사적 평가가 필요하다.

노대통령의 언어도 역사적 재평가 필요....왕의 언어 포기, 민중의 언어 사용

노대통령은 이제까지의 대통령들이 행동하고 말했던 방식과 전혀 다른 일상인의 언어에 사람들은 숙달되어 있지 못하다. 더군다나 조중동이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에헴’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계속 비평을 하고 있는 것도 한 몫을 더한다. 노대통령이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한 것이 얼마나 솔직하고 보통사람다운 표현인가? 조중동은 대국민 사기극을 펼치고 사람들은 이에서 조중동과 같이 춤을 춘 것이다. 민중들의 일반의지는 늘 히틀러나 전두환 같은 독재들에게 이용당하기 마련이다. 참여정부의 정책과 성향은 노무현 대통령의 솔직한 언어에서 표현되었다. 참여정부도 부동산 투기 억제하지 말고 에헴하고 가만히 있고, 대통령도 신경쓰지 말고 ‘에헴’하며 가만히 있으면 지지율 50%를 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언어를 재평가해야 한다. 그는 '에헴'하지 않고 솔직하게 보통사람 처럼 일상사의 언어를 말함으로 국민들과 가까워지기를 원했고 실제로 5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유교의 의한 수직적 귄위주의를 청산하는 데 큰 공로자이기도 하다. 왕의 권위를 없애는 것은 민의 권위를 높이자는 계산이다. 노대통령은 자신은 구시대의 마지막 대통령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 역시 자신을 넘어서 더 발전된 민주주의가 도래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임기말년 대통령의 부축적과 무소불위의 권력, 계보정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득권층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언어를 인형의 집에 가두어 두기를 원했다. 중세 부패교회가 하나님을 교회당안에 가두고, 부패 민주당이 민주주의를 특정정당에만 가두듯이 노무현 대통령을 인형의 집에 가두어 두고 꼼짝하지 못하기를 바랬다. 중세교회에 하나님이 없듯이, 민주당에 민주가 없듯이, 민주사회에 민주주의가 없는 것이다.

부패교회에 목사만 남고 예수는 없으며, 조선인민공화국에는 공산당만 남고 인민이 없고, 민주당에 명목상 민주정치인만 남고 진정한 민주가 없듯이, 민주국가에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할 민주주의가 없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다. 이러는 의미에서 이 사회는 아직도 민주주의의 완성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도래를 인식하고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했다.

노대통령의 언어는 민주주의의 상징

그러나 선거위원회는 노대통령의 혀를 인형의 집에 가둬두려고 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성문법이 기초된 나라에서 관습법을 가져와 노대통령의 수도이전 정책을 가로막고, 국회는 대의 정치를 배반하고 독선으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가 직접 민주정치로서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국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으로서 기본권을 실현한 대통령에게 선거법위반을 결정하였다. 노대통령의 언어는 민주주의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언론과 국가기관은 그의 혀를 끊임없이 막고자 했다. 기득권층들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라는 명목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민주를 자신의 기득권틀안에 꼭꼭 가두어 두고 뒤로는 땅을 투기하고 부패 경제인들과 담합하여 민이 주가 되는 것과는 달리 자신들이 주가 되기를 원했다.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는 위선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노대통령은 왕정시대가 아니라 민주시대의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이 중세교회에서 하나님을 해방시켰듯이, 부패민주당과 헌법의 틀안에만 속박되어있던 민주주의를 특정당과 헌법에서 해방시킨 한국의 정치개혁자이다. 이제 민주는 특정정당만이 사용하는 명목상만의 민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민이 주가 되는 실제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민이 주(왕)가 되고, 주(왕)가 민이 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는 의미에서 민이 되려고 하는 노대통령의 언어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민의 한사람으로서 헌법의 기본권의 테두리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할 자유를 마음껏 발휘한 것이다.

참여정부의 정책과 노무현 대통령의 언어는 역사적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중의 시대로, 계보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한 정책과 언어에 대해서 말이다. 말꼬리잡기식 조중동의 언어평가도 역사적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민주사회는 대통령이나 국민들이 수식적 권위주의를 벗어나 격차나 격의 없이 모두 다 자신의 사상과 정치적 견해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사회이다. 위선자는 겉으로는 '에헴'을, 민주주의자는 솔직한 언어표현에서 그 진가를 찾을 수 있다. 예수는 겉으로 에헴만을 말하는 위선자 바리새인들에 대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했다. 즉 겉으로는 회를 칠해 멀쩡하지만 속에는 시체썩은 냄새와 부패한 뼈들로 가득찼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회칠한 무덤이었는지는 역사의 몫이다. 분명한 것은 참여정부는 위선과 불투명, 부패, 권위를 걷어낸 것은 사실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왕의 언어가 아니라 솔직담백한 민중의 언어에서도 잘 드러났다.

노대통령은 부패와 속박속에서 솔직담백한 언어를 통해서 명목상 민주주의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천한 정치개혁자였다. 그가 일선 검사와 일반 일반언론사 기자들과 토론으로 맞짱 뜬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것이 그의 민주적 언어의 발로였다.  2007/06/24 [22:47] ⓒ ecclesian.com

 

   
 
   
 
기독교는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유시민의원의 발언은 일부 옳은 지적

기독교는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유시민의원의 발언

유시민의원은 2002년 8월 '복음과 상황'과의 인터뷰에서 “기독교는 예수님이 하지말라는 것은 골라가면서 다한다고 말하면서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고 했는데 통성기도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드러내 놓고 자선을 한다. 외식하지 말라고 했는데 성전을 엄청나게 때려짓는다. 종교기관을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한다. 단기간에 사람을 마취시키는 것이든 그걸 주는 댓가로 헌금을 받는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교회가 하는 것을 보면 거의 절망적이다”고 말한 바 있다.

기독교인의 반향이 생각보다 심하게 나타나자 유시민은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이런 말이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기독교 신자들과 목사님들께 얼마나 큰 상처와 분노를 안겨드릴지는 생각하지 않은 저의 독선이 실로 부끄럽습니다. 도시의 밤을 밝히는 수많은 교회의 네온사인이 무섭다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미성숙한 인경체이지만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경험하고 배웠습니다. 제 주변에는 제가 신앙을 가지도로고 이끌고 보살펴주신 많은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한번 저의 교만과 독선을 회개하면서, 저의 말로 인해 상처입고 분노를 느끼신 모든 기독교인과 목사님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고 했다.

원래의 기독교는 삼류가 아니라 일류

유시민의원은 사과를 했지만 일부는 맞는 말이었다. 이제까지의 일부 대형교회 목사는 기독교를 싸구려 종교로 전락시켰다. 기독교를 기득교로 만들었다. 적어도 한국의 기독교는 조국의 근대화와 항일운동을 위한 정신적 지주였다. 희망이 없는 땅에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와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만들어 왕실가족까지 치료하고, 학교를 만들어 민중들에게 근대의식을 일깨워 주었고 교회는 항일운동의 장이기도 했다. 이화학당, 배제학당, 연희 전문, 경신, 대광, 오산고 등은 민족의 지도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민족 대표 33인중의 절반이상이 기독교인이었고, 3.1운동을 주도한 것도 기독교인이었다.

6.25이후 배고픔의 시대와 정신적 공황기를 맞이하면서 한경직 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목회자들은 새로운 영적인 활력소를 불어 넣었고 독재정권을 맞이하면서 문익환, 박형규 목사 등 진보 기독교 목회자들은 민주화의 열망을 갖고 강력하게 투쟁하였다. 인명진 목사는 1987년 국민운동 대변인을 하였고 도시산업선교회를 만들어 노동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의 기독교는 100여년의 역사동안 민족의 위기가 있고 풍전등화상태일 때마다 새로운 희망의 빛이었다. 일제시대, 6,25이후, 독재정권시대에 기독교는 큰 역할을 감당했다.

일부 목회자들, 기독교를 기득교로 전락시켜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일부 대형교회와 일부 몰지각한 목회자들로 인해 기독교가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부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퇴보를 조장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의 지대한 역할로 삼팔선을 넘어 개성까지 철도운행을 하고 관광객들은 꿈에도 소원이었던 일만이천봉 금강산 내부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며, 북한을 6자회담으로 이끌어 내어 핵폐기조약을 맺게 하고, 개성에 수많은 공장을 세워 북한 경제에 활력소를 불어 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우익 기독교인사들은 참여정부와 북한을 계속 헐뜯고 있다. 이는 조중동이 큰 역할을 했다.

최근에 기독교는 시청 앞 광장에서 종교의 자유와 사학의 자율성을 이유로 기독교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머리를 깍고 사학법 재개정 투쟁을 하고 있으며, 일부 색깔목회자들은 현 정부를 좌익이라 몰아붙이고, 북한을 영원히 함께하지 못할 사단과 마귀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중동과 맥을 같이 하고, 전두환 독재정권때에는 독재투쟁보다는 전두환 조찬기도회에 참여하여 그를 격려하고, 김영삼씨가 대선에 나왔을 때는 장로가 대통령되어야 한다고 해 3당 야합을 사실상 지지했고,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청와대에서 서로 들어가 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줄을 섰다. 현정부에 대해서는 좌익이라고 매도하면서 미국에 대해서는 사대주의적 사고로 굽신거리기를 좋아한다.

미국것은 광우병 쇠고기라도 좋아

미국이면 무조건 좋은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를 몰래 주입하고, 론스타가 매국노들과 야합하여 은행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부를 가져가고, 매일 비자수수료, 토플비용, 조기유학으로 천문학적인 현찰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가도 단지 6.25때 인천상륙작전으로 맥아더가 구해주고,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오직 미국을 좋게 여긴다. 미녀가 석류를 좋아하듯이 보수기독교인들은 미국만 좋아한다.

미국은 1945년 해방 이후, 친일정권을 세워 독재정부의 틀을 마련해주고, 6.25이후 미국은 소련과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딜을 하고, 전두환 독재정권을 측면 지원하여 독재정부를 정당화하고, 이라크 침공에 한국을 이용했다.

보수우익대형교회 일부목사들은 자신들의 부패와 비리를 묻기 위해, 즉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미국을 선호하고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현정부를 좌익세력으로 규정하면서 대중선동을 일삼는다. 그러면서 뒤에는 개인적으로는 세습, 횡령과 부패, 성범죄, 땅투기, 사학법재개정, 다단계 판매, 특정인 후보지원 선거운동, 반정부 투쟁 등 기독교의 본질과 먼 것들만 일삼는다.

대통령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성경(디모데전서 2:2)에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는데 한 나라의 임금을 반대한다. 기독교인들은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던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위하여 나라의 우두머리를 위하여 기도할 의무가 있다. 대통령이 좋아서가 아니라 온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이다. 그것이 성경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정신과는 별도로 한나라의 대통령을 비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그러나 일부 대형교회는 돈을 좋아해

뿐만 아니라 성경(담전 6:8-10)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말하고 있는데 대형교회 목사들이 횡령과 부패로 형사 처벌을 받고 교회를 기업하듯이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진대 돈을 사랑하여 횡령과 부의 세습, 다단계판매 등을 일삼는다. 총회 때는 돈봉투가 왔다 갔다 한다. 현재 예장통합 총회장 선거도 돈 냄새가 풀풀 난다.

감독은 절제하고 신중하며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해

일부 목사들은 로마서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을 설교하면서 자신들은 성범죄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성경은 (딤전 3:2-3)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라고 되어있는데 일부 목사들은 한아내의 남편으로서 신중하지 않고 술을 즐기고, 때에 따라서 방송국도 때려 부수거나 조폭들을 경호원으로 대동하고, 그리스도보다 돈을 사랑하여 횡령과 부패, 땅투기를 일삼는다.

원수를 사랑하라

성경(마태복음 5:44)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는데 끝까지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사랑하지 않고 그들을 마귀로 보고 있다. 성경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라고 했는데 부정의하고 불공정한 사학법의 투명화를 위한 입법화를 교계가 앞장서서 사학의 자율권, 종교자유의 침해라는 이유로 사학법 재개정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이렇게 안하면 머리숫자를 내세워 낙선운동까지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압력단체로서 변모하겠다는 의지이다. 종단에서는 자율권의 침해라고 하지만,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밥그릇 챙기기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고 투쟁을 하는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대중은 내면의 기득권과 부패를 자르는 모습을 더 보기를 원한다.

종교의 자유는 미국장로교단 헌법에서 온 것

이와 같이 성경은 왕을 위한 기도, 골방에서의 기도, 성직자를 위한 절제, 근신, 검약, 청빈의 도, 원수에 대한 사랑, 단체의 공의와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시청앞에서의 통성기도, 북한 반대투쟁, 사학법 재개정 투쟁 등은 성경적이지 않다. 종교의 자유의 침해는 종교단체가 국가의 침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미국 장로교단이 1789년 헌법을 작성함에 있어 기본원리로서 '양심의 자유'를 채택한 것도 1776년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끝나고 시민사회가 형성될 무렵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침탈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장로교는 미국장로교단의 헌법을 그대로 채택하여 종교양심의 자유를 수록하고 있다. 종교양심의 자유는 국가의 침해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현정부가 기독교도들에 대한 신앙침해를 하고 있는 지 의문이다. 종교다문화사회에서 국가가 특정종교를 침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학법재개정도 특정종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모든 사학에 대해 투명도를 실시하기 위한 정책이다. 이는 국가와 종교단체의 정직성과 투명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개신교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따라서 이제 개신교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 원래 성경이 요구하는 형태(form)로 다시(re)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그것이 reform 이다. 개혁이란 고양이가 공중에서 자신의 폼을 다시 잡아 착지를 준비하듯이 원래의 폼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특히 근대의 개신교는 protestant(악에 저항하는 사람들) 정신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가 원래의 성경으로 돌아가 한 나라의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통성기도보다는 골방의 기도를 강조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감독은 신중하며 절제하여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며, 원수와 자신을 학대하는 자를 사랑하며,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명심하고,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강 같이 흐르게 하고, 머리를 깍지 말고 속에 있는 기득권을 잘라내야 한다.

개신교는 종단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종교

기독교는 교단만의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 국민전체를 생각하는 보편성을 띤 종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대통령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7/06/30 [10:54] ⓒ ecclesian.com


 

노대통령, 중심은 주변으로, 주변은 중심으로

연못에 돌을 하나 던지면 중심을 시작으로 동심원은 주변으로 점점 크게 원을 그리면서 번져나간다. 이사회가 어디를 가든지 중심이 있으면 주변이 있기 마련이다. 누구든지 미국을 가게 되면 공항부터 철두철미하게 조사를 당하여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는 주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사이는 지문검색까지 해야 하는 인권차별까지 당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브라질은 맞불작전으로 공항에서 미국인만 지문검색을 하도록 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나라는 토플비용, 비자신청비용, 영어연수 등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매일 미국에 갖다 주고 있다.

필자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내 자신이 주변인이라는 의식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태어나면서 줄 곧 한국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내 자신의 위치는 항시 중심인이라고 생각했다.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중심인이라는 의식도 없었다. 7년 만에 외국에서 한국에 들어와 보니 외국 노동자들을 눈에 띄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보았을 때 내 자신이 중심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외국에 있으면 학벌이나 지역, 신분, 자본의 유무에 상관없이 단지 아시아인이라는 인종적인 면 때문에 주변인으로 자동 전락하게 된다.

L.A 폭동사고와 최근 세탁소 법정분쟁은 중심과 주변인의 시각에서 보면 답이 나온다. 중심인들은 흑인이나 아시아인들과 같은 주변인들끼리의 싸움을 부채질하거나 조장하기도 하며 처절하게 무시한다. 미국인들은 기본적인 것들을 양보하지만 이익과 관련한 것들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주변인들이 중심부에 들어오지 못하고 중심인들을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변인들은 중심인들에게 늘 이용당하면서도 연합하여 중심에 대항할 생각이나 꿈은 전혀 꾸지도 않고 주변인들끼리 갈등하며 분쟁한다. 최근에 들어서야 한인들과 흑인들의 관계가 좋아졌다.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보면 알겠지만 한인사회가 건강한 곳이 거의 없다. 한국사회가 그렇듯이 한인사회도 어디를 가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삿바싸움 투성이이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캐나다 주정부가 한인회관을 건립하라고 100만불까지 후원했지만 한인회가 양측으로 분열되어 천문학적인 변호사비용을 써가면서까지 캐나다 법정에 서는 일도 있었다. 특히 한인교회는 많이 생기기도 하지만 분열도 많이 된다. 분열의 일번지는 한인교회이다.

이와 같이 주변인들은 중심부에 들어가 중심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중심사회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유대인이외에 다른 소수민족들은 중심속에 들어서지를 못한다. 중국사회는 점점 강력한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한인사회는 쉽지가 않다. 한국에 와보니, 이제는 나 자신이 인종적 중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돈도 대출받을 수 있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고, 비자카드도 어느 정도 신용만 쌓이면 쉽게 받을 수 있고, 어디를 가나 차별 대접이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한국와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들을 보면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한인들이 북미에 있으면 늘 고민하는 것 처럼 비자 연기, 불법체류 등으로 고민을 한다. 이 땅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북미에서 한인들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경험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농촌 남자에게라도 결혼을 해서 한국에 정착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는 면에서 한인들은 인종적으로 중심인 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인종적, 지역적, 학벌적, 신분적, 혈연적, 정치적 중심인과 주변인이 있다. 필자는 중심과 주변이라는 시각으로 참여정부를 이해하고자 한다.

인종적 주변

먼저 인종적 주변인을 보자. 이 땅에 외국인 노동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한인들은 영원히 인종적 중심에 서게 된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도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인들은 어디를 가나 자신의 권리와 기본권 보장을 외치고 활보하고 당당하게 다닐 수 있다. 조금이라도 권리침해가 있다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중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이나 소수민족들은 권리침해를 당해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한인들처럼 조직적으로 거리로 나서기 어렵다. 이주노동자들은 주변인이라는 이유로 매를 맞고, 구치소에서도 불에 타죽는다. 현정권에서는 이들의 인권을 위하여 최대한 법적 조치를 강구했거나 강구중에 있다. 주변인들에 대한 포용정책이다.

지역적 주변

먼저 지역적 주변이 있다. 이 땅에서 호남과 연변, 북한출신은 항시 지역적 주변이다. 호남은 늘 불이익을 당하고 때로는 핍박도 받았다. 필자는 전두환 정권 당시 군생활을 청와대(대통령경호실)에서 한 적이 있는데 호남사람들은 당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가물에 콩나듯 있었지만 거의 없었다. 지역적 소외이다. 교계나 사회 각기각층에서 호남출신들은 대체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그나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있었기에 차별도가 많이 약해진 것이다. 경상도에 비해 호남지역은 모든 면들이 뒤떨어져있다. 공장하나 찾아보기 어려웠다. 김대중 정권 이후에서나 서해안 고속도로 등을 비롯하여 호남지역이 조금씩 개발이 되어 나간 것이다.

호남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이 주변이다. 서울이 사라지지 않는 한, 모든 지역은 지역적 주변으로서 머물게 되어있다. 그래서 참여정부가 지역적 편차를 줄이기 위해 수도를 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즉 중심은 주변으로, 주변은 중심으로 향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없는 주변 대통령은 중심세력들에 의하여 관습법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참여정부는 행정수도를 천도시키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면 서울이 지역적 중심인가? 서울도 강남이외에 모든 구는 지역적 주변이다. 강남과 격차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강남구와 중량구는 세수만 해도 수십배의 차이가 난다. 중량구는 서울이지만 지역적 주변이다. 그래서 현정권은 지역적 차이를 줄이기 위하여 종합부동산세를 국세로 하여 걷고 있다. 이는 세수가 약한 지역에 골고루 나눠줘 지역적 균형을 꾀하려 하기 때문이다. 부동산이 6억 이상이면 걷는 것은 강남사람 모두 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강남에서 6억 이하의 아파트는 없기 때문이다. 중심을 주변으로 주변을 중심으로 향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학벌적 주변

이 땅에서 국민들의 대부분은 학벌 면에서 주변인이다. 연세대, 고려대 출신인들도 학벌면에서는 주변인이다. 서울대가 사라지지 않는 한 비서울대인들은 학벌적 주변인이다. 그래서 한인들은 학벌적 콤플렉스가 평생 있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학벌차별이며, 학벌로 인해 사람을 평가하고, 기술여하에 상관없이 학벌을 갖고 사람을 고용한다. 서울대 교수라면 무조건 믿고 거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희대의 사기극을 펼쳐도 구속시키지 않고 끝까지 포용한다.

성직자들, 학벌 컴플렉스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욕구

그러므로 이 땅의 치마부대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능력 여하에 상관없이 모두 서울대에 보내려는 욕구와 야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지방대학출신과 비서울대인들은 평생 컴플렉스를 당하기 때문이다. 가짜박사가 그토록 성직자사회까지 난무한 것도, 학벌컴플렉스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욕구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서울대가 사라지지 않는 한 비서울대인들은 학벌 콤플렉스가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하버드나 동경대, 북경대, 케임브리지 출신보다도 서울대 출신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특히 법조인들은 서울대 반열에 서 있지 않으면 지방법원에서 일하기 일쑤이다. 단지 사법고시 합격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학벌로 인해 중심과 주변이 나뉘는 것은 망국적인 병이다. 그래서 서울대를 없애야 하겠다는 말이 나온 것도 국민들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일 것이다. 현재 현정권이 끝까지 본고사를 거부하고 평준화를 고집하는 것도 가능하면 학벌적 편차를 막기 위한 몸부림이다. 학벌적 양극화를 막고자 함이다. 현 정부는 며칠전에 세계 200위안에 드는 대학을 전국지역에 여러 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지방대를 서울대처럼 만들겠다는 속셈이다. 서울대에 버금가는 대학을 만들어 학벌적 편차를 줄여 대학의 평준화를 이루어 보겠다는 속셈이다. 중심은 주변으로, 주변은 중심으로의 전략이다.

자본적 주변

우리사회는 점점 양극화 되어가고 있다. 부익부 빈인빈이다. 이는 우리사회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침투한 곳이라면 어디나 겪는 병이다. 북유럽의 사회복지국가처럼 개인의 정직과 양심이 발전하지 않는 이상 양극화의 문제는 영원한 숙제이다. 아무리 정부의 정책이 숨통을 조이고 법률로서 규정한다한들, 약자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다는 부자들의 정신과 양심이 준비 되지 않는 이상, 양극화의 해소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정책과 법제정은 한계가 있다. 즉 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심령이 변하지 않는 이상 양극화는 끊임이 생겨난다.

그나마 양극화를 억제하기 위해서 참여정부는, 종부세를 실시하여 지역균형을 꾀하고, 대출억제와 금리인상을 통해서 부동산투기를 막고, 임대주택을 계속 늘려나가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중심인들은 더 이상 집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주변인들은 집을 소유하게끔 하려는 정책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건설 경기를 죽였다고 하소연은 많으나 사회는 많이 투명화되었고 불로소득으로 돈을 버는 욕망이 사라지게 했다. 현재는 부동산에 투자되었던 유동자금이 증권가로 흘러가 많은 기업들이 살아나고 있다.

이와 같이 참여정부는 망국의 암병인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여 중심은 주변으로 주변은 중심으로 들어가기를 꾀했던 것이다. 즉 종부세와 양도소득세 등을 부과함으로 두 채 있는 집은 한 채를 처분하게 하고, 무주택 소유자는 집을 소유하게끔 하는 가능성을 갖게 하고 있다. 이는 자본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주변으로,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가게끔 하기 위한 정책이다.

정치적 주변

우리사회에서 정치적 주류는 친일파와 독재정권의 잔당들이다. 이승만 독재정권부터 노태우, 김영삼 야합정권까지 친일파와 군부들이 함께 했다. 그 이외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주변부에 속했다. 흔히 지금은 부패로 전락한 당시의 민주세력들이었다. 그들은 김대중정권을 통해 중심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중심에서 계속 머물고자 했기 때문에 부패로 얼룩진 것이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말이다. 중심은 주변으로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 정신이건만 중심에 남기만을 원해서 부패한 것이다.

노대통령, 끊임없이 주변을 향했던 지도자

노무현대통령은 자신의 원칙을 고수한 꼬마민주당 출신으로서 철저하게 주변인이었다. 경남이라는 지역기득권까지 멀리하여 고향에서도 천대받는 주변인이었다. 그는 학벌적으로도, 자본적으로도, 신분적으로도(장인의 좌익성), 정치적으로도 주변인이었다. 그러나 주변인인 그가 대중들의 희망 열의와 기대로 인해 중심으로 들어갔다.

중심에 들어간 노대통령은 중심에 남지 않고 끊임없이 주변으로 나가려고 했다. 주변국가인 북한을 달래 6자회담을 끌어냈고, 왕의 언어를 벗고 민중적 언어를 구사함으로 중심언어에서 주변언어로 나가려 했으며, 약자와 노인들, 이주노동자들, 북한의 헐벗은 민족들 등의 지원을 통해 끊임없이 주변으로 향하려 했다. 중심에 있던 수도까지 주변으로 가져가려 했다. 불발에 그쳤지만 행정수도는 이동하는데 성공했다. 이제는 대학까지 주변으로 향하고 있다. 지방대학을 육성하여 세계 200위권에 드는 대학을 육성함으로서 군데군데마다 서울대학을 만드려고 하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까지 주변을 향하고 있다.

직위에 있어서 중심에 선 노대통령은 중심에 머물지 않고 국가나 언어, 지역, 자본, 사람들, 대학, 부동산 등을 주변으로 끌고 나가 중심을 주변으로, 주변을 중심으로 가져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발언도 더 이상 정파적, 지역적 이기주의를 멀리하고 서로 단결을 모색함으로 주변국인 한반도를 동북의 허브로 끌고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즉 주변국들끼리 조그만 땅떵어리 안에서 미주알 고주알 싸우지 말고 서로 정치적으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타협할 것은 타협해서 지역적 정당을 뛰어넘고 북한까지 포용해, 일본과 중국에 맞서서 대응할 수 있도록 강력한 한반도를 만들어 동북아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국이라는 주변을 중심으로 끌고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변인 북한을 끌어들이고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북한을 포용하지 않고는 미국의 경제공격에 대해서 대항할 수가 없다. 캐나다 알버타 대학의 재정관리학 담당 교수인 제이슨 리도 미래에는 북한의 값싼 노동력과 한국의 고도의 기술이 합해져야 중국과 일본을 능가할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을 포용해서 미국으로부터 FTA를 끌어낸 것은 주변인인 노무현이 중심에 서 있지만 끊임없이 주변으로 나가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중심에 있지만 주변으로 나갈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만 주변을 중심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중심에 서 있었지만 그는 창기, 세리, 귀신들린 자, 간음한 여인 등 죄인들과 친구를 함으로써 주변으로 나갔다. 예수는 결국 그들에게 구원을 줌으로써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보다 더 중심에 서게 했던 것이다. 교회는 약자의 친구가 되어야지 머리깍고 기득권을 구하겠다는 기득권자들의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삶처럼 정치인들은 자신이 중심에 서있지만 끊임없이 주변에 서있는 민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래서 민들을 중심에 서게 한다면 결국 민들은 그 정치가를 중심으로 미는 역동적인 힘으로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이며 대의주의인 것이다.

이번 대선, 민을 위해서 중심에서 주변으로 가는 사람을 지지해야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민들은 정치적으로 주변인이면서 민들의 힘에 의해 중심에 들어간 사람이 다시 주변으로 와서 자신만이 아니라 민들까지 중심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 중심에 들어가면 “나 몰라라” 하는 후보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 그는 결국 썩고 말 것이기 때 때문이다. 민을 주(主)로 만드는 자가 진정한 정치인이며 민주주의의 화신이다. 그러는 의미에서 노대통령은 중심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주변으로 향하려 했고, 그 주변인들을 변방에 두지 않고 중심에 세우려고 한 정치개혁자였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다.

중심인은 주변으로, 주변인은 중심으로 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자신이 주가 아니라 민이 주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적어도 주변인인 노무현이 정치적 중심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인 주변인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것은 중심을 주변으로 보내고, 주변을 중심에 서게 하려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몸으로 실천하려고 했던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주변으로 내려와 민을 중심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황제 정치가가 아니라 또 다른 주변정치인을 찾는 일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자는 민주 평화 연대, 선진 평화연대, 코리안 연합등으로 말장난식으로 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을 중심에 서게끔 하는 사람이다. 독재주의 시대도 아니고 자유와 평화가 없는 사회면 몰라도 언어와 말장난으로 국민들을 호도하지 않고 진정 민의 정신과 의지를 알고 그들을 중심에 세워 신분적으로 평등하고, 양극화를 해소하며, 학벌적 차별을 약화시키고, 부동산으로 인해 불로소득을 꿈꾸지 않고, 서구의 기독교인들 처럼 근로자들이 검약, 절제, 근면으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지지해야 한다.  2007/06/27 [13:16] ⓒ eccle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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