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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마음의 문(門)은 열려있는가?지금 나는 자연과 이웃의 소통(疏通)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박철  |  pakchol@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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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7월 25일 (수) 08:40:09 [조회수 : 3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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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꺼덕거리는 / 문을 열고나서니 / 모든 것이 삐꺼덕거린다 / 삐꺼덕거림에 신경을 쓸수록 /삐꺼덕거리는 굉음은 / 예리한 메스가 되어 나를 찌른다 / 그러나 삐꺼덕거린다고 / 문을 떼어 놓을 수도 없고 / 차라리 문을 닫고 지낼 수만도 없고 / 진정 문이 없는 세상이 온다면 좋으련만. -박철의 시. 문(門)-


   
  ▲ 마음의 창과 마음의 문도 열어야 할 때 열고 닫아야할 때 닫을 수 있어야 한다. 열리는 것과 닫히는 것을 공유하는 법이다.  
 
나의 스승 예수는 천국에 가는 길은 '반드시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좁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나의 유년시절, 어머니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덕지덕지 해진 창호지를 뜯어내고 풀을 쑤어 창호지를 붙이고 거기에다 코스모스 꽃잎이나 예쁜 나뭇잎을 붙인다. 그리고 문 밑에는 조그만 유리를 달아 유리구멍을 만든다. 참 신기하다. 그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본다.


안과 밖의 경계가 그 조그만 유리구멍 사이로 나누어진다. 그 구멍으로 비가 오는 것도 보고, 눈이 오는 것도 보고, 사람 지나가는 것도 본다. 이따금 생쥐가 지나가는 것도 본다. 소쿠리로 참새를 잡을 때도 그 구멍으로 내다본다. 동무들이 찾아와 놀자고 소리치는 것도 본다.


나는 가끔 나의 유년시절, 들창문의 그 작은 유리구멍을 생각해본다. 그 좁은 구멍을 통해 일찍이 예수께서는 천국에 가는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이라 했으니, 더 이상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나를 다스리고 내 마음의 창문으로 사물이나 세상을 볼 수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몇 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여행 경비가 넉넉하지 않으니 주로 여행하는 도중 열차에서 많이 잤고, 허름한 여인숙 같은데서 잠을 잤다. 그런데 그 허름한 여인숙이라는 곳이 수백 년 전에 지어진 집이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집이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모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창문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창문이 원목으로 만들어졌는데, 문을 열고 닫는데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스르르 열렸다 닫히는 것이었다. 수백 년이 지났을 창문인데, 튼튼하기가 이루 말할 때 없고 창문으로서의 기능도 완벽하였다.


창문을 열고 밖을 조망(眺望)하면, 또 다른 세계와의 마주침을 느낄 수 있다. 창문은 단순히 열고 닫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을 원활하게 소통하게 해주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통로이다. 창문의 네 틀이 90도 각을 이루어 마주하면 사각은 입 '구(口)'자가 된다. 문은 입이다. 입이 부실하면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문의 기능만큼 문의 상징성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나는 나와 자연, 나와 이웃, 나와 사물의 소통(疏通)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마음의 넓고 견고한 창문이 나에게 있는가?


창과 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마음의 창과 마음의 문에 관한 나의 관심의 유비(類比)이다. 마음의 창과 마음의 문도 열어야 할 때 열고 닫아야할 때 닫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마음의 창과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그 보다 우리 주위에는 마음의 창과 마음의 문을 조심 없이 열거나 열어 놓은 사람들 역시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따스한 봄날 해 맑은 햇살이 비치고 향긋한 공기와 더불어 훈풍이 불어 올 때 그 누가 창을 닫아두겠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고 싶지 않겠는가? 우리 주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실 때 그 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겠는가? 그런데 비바람이 몰아치고 황사와 흙먼지가 불어 닥치는데 창문을 열어 놓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독 가스나 연기가 들어오고 심한 악취가 날 때는 두말할 것도 없다. 침입의 위험이 있을 때도 그렇다.


   
  ▲ 내가 낮아져서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없다. 내가 낮아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세상의 문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다. 결국 길과 문은 연결되어 있다.  
 
강원도 정선에서 목회 할 때이다. 강원도 집들은 다 야트막하다. 집집마다 문이 다 여닫이인데 문 높이가 내 키보다 훨씬 낮다. 내가 건망증이 심하다보니 그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교우들 집이나 동네 이웃집이나 들어가면서 내 이마가 문틀에 박치기를 한다. 별이 번쩍번쩍 한다. 손으로 아픈 이마를 만지면서, 내가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다짐을 한다. 그러나 그 집에서 나오면서 문틀에 또 박치기를 한다. 이마가 성할 날이 없었다. 작은 문을 제대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심지어 다락문 같은 데는 기어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잊어버리고, 또 박치기를 했다.


요령부득하면, 이마만 찧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다친다. 문이 주는 화두는 '내가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낮아져야 한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겸손'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또 그 반대가 '교만'이다. 자기 가진 것이 많다고 하여 교만을 떨면 마음은 추해지고 만다. 자기가 잘났다고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겸손할 줄 모르면, 그 사람은 아직 인생의 철이 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고 겸손에 처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삶의 깊이를 갖춘 사람이다. 내가 높아지려고 하다가 다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낮아져서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없다. 내가 낮아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세상의 문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다. 결국 길과 문은 연결되어 있다. 누구든지 자기가 가야할 길이 있고 통과해야 할 문이 있다. 그러나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서는 그 길을 제대로 갈 수 없고, 또 그 문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없다. 낮아져야 한다.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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