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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선 가르쳐주질 않는 바울신학의 실체세기연 6월포럼, 박찬웅 교수의 “교회에선 잘못 알려진 바울신학”을 듣고서..
정강길  |  minjung2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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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6월 28일 (목) 08:27:25
최종편집 : 2014년 09월 26일 (금) 21:21:49 [조회수 : 9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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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인은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

내가 중학교 때였던가. 나 자신이 예장통합 측의 큰 교회를 다니던 시절이었고, 아주 보수적인 신앙에 젖어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부흥회 같은 집회가 열렸는데, 당시 강사로 초빙된 분은 너무나도 말빨을 기가 막히도록 재미있게 잘 전달했었던 젊은 분이셨다.

솔직히 그 언변만큼은 얼마나 탁월했었는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인데, 청중들을 완전 배꼽 빠지도록 웃게도 만들고 감동을 먹도록 울게도 만들고, 한 마디로 자기 손 안에서 사람들을 흔들었다 놨다 할 정도였으니까.

그 집회에서 뜨겁게 말씀을 전하던 그 강사는 점점 절정에 이르러서 자못 심각하고 진지하게 커다란 질문 하나를 던졌다. 바로 “그리스도교인은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다행히 객관식이었다. 보기는 아래와 같았다.

① 믿음으로
② 믿음과 행함(선한 행실)으로
③ 행함으로

예상대로 당시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2번에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강사 왈, “정답은 1번”이란다. 2번은 천주교식의 구원론이고, 3번은 불교식의 구원론이라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 나는 이를 가슴팍에 아로 새겨놓을 정도로 깊게 남아 있었고, 이후엔 확고하게 오직 믿음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나 자신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스도교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사실이 내겐 너무나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그렇게 하면 구원만큼은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만 받고 선한 행실의 덕을 쌓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이 점에 대해 당시 나의 모교회의 부목사님께 질문을 드렸는데, 이 분은 아주 재밌는 표현을 하셨다. 그럴 경우 하나님께선 <부끄러운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다. 즉,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은 받을 수 있지만, 그래도 천국 안에선 얼굴을 들기 힘들만큼 부끄러운 구원을 주신다는 얘기다.

부끄러운 구원.. 이 얼마나 환상적이고 빈틈없는 개념인가. 아니면 엄청난 궤변과 구라이든지. 내가 알기에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 현주소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리라.

<믿음 구원> 받으려고 많이 채택되는 바울서신의 본문들

보수 근본주의가 지배적인 한국교회 현실에서 아마도 주일예배 시간에 가장 많이 채택되는 설교본문을 든다면 정작 바울서신이 아닐까 싶다. 특히 바울서신에 나타난 그의 구원론 혹은 그의 칭의론은 기존 기독교에 너무나 지대한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씀은 어떠한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느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8~10)

이 말씀은 현세의 축복과 내세 보장의 영혼구원에 목말라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그야말로 단비와 같은 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외에도 마음에 드는 바울의 구절들은 또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

와아,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잖은가. 혹시 여러분은 길을 가다가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구원을 받았다면 언제 받았습니까?”라고 대뜸 들이대는 기독교인을 만난 적은 없는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구원이란 것을 너무나도 쉽게 받는다. 구원을 받는 그러한 패턴은 다음과 같다.

즉, 주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입으로 믿고 시인하면 나의 영혼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이고, 천당행표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4영리>식의 전도와 거의 동일하며, 오늘날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대부분이 기독교 전통신앙의 핵심으로서 삼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 바울신학이 나오게 된 시대적 정황들을 철저히 무시한 문자적 독해일 뿐이다. 이 같은 오도된 이해들이야말로 이천 년 기독교사상사에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교회 현장에까지도 만연해 있는 악습적인 병폐들이다.

바울신학에 대한 잘못된 큰 두 가지 오해

 

바울신학에 대한 잘못된 커다란 오해들이 있다. 박찬웅 교수는 이번에 열린 세계와기독교변혁을위한연대(이하 '세기연') 6월포럼을 통해서 기존의 기독교가 교회현장에서 가지고 있는 바울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을 소개한 바 있다.

첫 번째는, 바울신학의 구원론은 그 맥락에서 볼 때 개인구원이 아니라 엄연히 집단구원의 맥락에서 나온 신학적 장치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구원의 차원을 무시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 맥락에서 볼 때는 분명하게도 그렇다는 얘기다. 즉, 바울은 당시의 이방선교를 위해서 유대교 전통에 머물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단호하게 이를 넘어서고자 했던 열렬한 기독사상가로서 그는 오히려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을 신학적으로 옹호하면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서의 의롭다함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의 신학은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신학적 장치였던 것이다. 이같은 그의 입장은 당시로선 오히려 진보적인 기독교의 입장에 해당한다. 게다가 신약에서의 구원론은 바울의 구원론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요한의 구원론도 있으며, 매우 다양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획일적으로만 바울을 이해했고, 루터식의 독해에만 머물곤 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당시의 유대교를 정직하게 연구해보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알고 있는 유대교에 대한 이해와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즉, 오늘날의 기존 기독교의 교회가 바울신학을 독해함으로서 흔히 이해하는 유대교와는 달리 당시의 유대교는 율법적 행함으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그러한 종교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미 그 당시에도 유대교에는 여러 다양한 분파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다양한 분파들 가운데서도 대체적인 공통의 기반을 찾는다면,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를 지향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늘날의 기존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유대교 율법주의와는 다른 것인데,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에 의해 이스라엘은 택함을 받았고 그러한 은총에 대한 요청적 응답으로서 언약이라는 율법의 준수가 있었을 뿐, 적어도 유대교 신앙의 그 핵심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그 은총에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그것이 언약으로서 이스라엘 역사에 표출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가 알고 있듯이 유대교를 형식화된 율법적 종교로 이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이해다. 이러한 이해는 지금까지도 교회현장에 만연해 있는 유대교에 대한 잘못된 편견들이다. 이미 오늘날의 현대 신약학계 전반은 오래전부터 이를 넘어서 있었다. 더 깊게는 바울 연구의 새로운 전망은 W. Wrede, A. Schweitzer, J. Munck, H.-J. Schoeps, W. D. Davies 등이 시도한 ‘바울 해석에 대한 탈-루터주의’ 해석들에 이미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좀더 본격적으로는 1960-70년대에 바울 연구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전망들이 나오면서 이제는 학계에선 일반화되었을 정도라고 한다.

특히 1963년 발표된 하버드대 신약학 교수였던 스텐달 교수(K. Stendahl)의 글이 서서히 본격적인 반향을 일으키면서 이러한 흐름들은 신약연구 학계에선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었다고 한다(K. Stendahl, E. P. Sanders, H. Räisänen, J. D. G. Dunn, N. T. Wright, L. Gaston 등등).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선 여전히 아직도 전혀 소통되어 있지 않고, 오래전의 낡은 주장들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기존 기독교의 교회 신앙에는 ‘변하면 변질’이라고 생각하는 그 아둔한 보수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두 가지는 1960-70년대와 그 이후 연구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에게서는 이미 이것이 일반화된 것으로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현장에선 전혀 얘기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바울에 대한 기존의 낡은 이해들과 유대교에 대한 편견들 기독교가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공헌

대체적으로 바울만큼 기독교사상사에서도 격렬한 찬반 대립의 평가를 받은 이도 드물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교회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회 전통에서만큼은 사도 바울이 매우 우상시될 정도로 그의 대한 이해 역시 매우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바울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의 공헌은 공헌대로 또한 그의 한계는 한계대로 정직하게 탐사해야 할 것으로 본다.

바울의 공헌을 말한다면 그래도 기독교에 대한 이방선교의 열렬한 관심과 그 신학적 체계 수립으로 인해 적어도 오늘날의 기독교가 있게끔 하는 데에 많은 공헌들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특히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우리에게 예수가 전해졌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사실 나로서도 회의적인 느낌이 든다. 유대교의 틀을 박차고 나왔던 당시 바울의 입장은 오히려 진보적 기독교의 입장에 해당한다.

그동안 숱하게 바울의 공헌만큼은 회자되었기에 이 자리에선 바울의 한계에 대해서 조금 얘길 풀고자 한다.

바울의 한계

내가 보는 바울의 한계는, 첫째 당시의 헬라적 언명과 개념들로서 기독론과 복음을 얘기함으로 인해 은연중에라도 헬라철학적 세계관에 해당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전제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철학이란 것은 부지불식간에라도 전제되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태이기도 하다.

물론 바울 자신은 헬라적인 세계관에 빠지지 않았다고 해도 적어도 그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바울이 만약에 이러한 위험성을 알았다면 그는 사실상 <새 술을 새 부대에> 예수의 복음을 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기존에 있던 헬라철학적 세계관의 언명들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설명했던 것이다. 혹자는 바울에 대해 당시 이원론의 극단에 있던 영지주의적 해석까지도 얼마든지 시도하고 있을 지경이다.

그만큼 바울의 글들은 오해의 여지들을 남겨놓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기독교가 바울신학을 얼마나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그 작태들을 본다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그 당시의 지식인이라면 대체적으로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한계라고 생각되기에 <필연적인 리스크>일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내가 보는 바울의 문제점은 특히 두 번째에 더 가 있다. 즉, 그것은 바울신학으로 인해 <예수의 신앙>이 <예수에 관한 신앙>으로 돌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힘없는 약자들인 가난한 자와 아픈 자들을 위해 구원치유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쳤지만 예수가 지향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간 데 없고, 오히려 그 예수에 대해서 관심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본다면, 예수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다면, 바울은 달이 아닌 그 손가락에 신학적 옷을 입혔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볼 때도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온전하게는 몰랐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직한 입장인 줄로 안다. 물론 그 증거들은 더욱 부지기수로 많다.

바울은 부지기수로 예수의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그 역사적 장소인 흔한 골고다 한 번 얘기한 적 없고, 예수를 신앙하면서도 예수가 숱하게 말씀했던 비유나 그 주기도문 하나 인용해서 얘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정확히 말해서, 바울이 알았던 예수는 역사적 예수라기보다 다메섹 도상에 만났던 예수였을 뿐이며, 그의 기독론은 후대의 작업들을 통해 그나마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신학자들이(여기에는 진보진영의 신학자들도 포함) 여전히 바울을 억지로라도 예수와의 연속성을 확보하고자 애쓰고서 이를 아주 좋게 보려는 경향들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이것은 손바닥으로 자꾸 하늘을 가리는 격일뿐이라고 생각된다.

바울의 공과 실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기

물론 이외에도 찾아보면 바울에게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한계들이 있을 걸로 안다. 예컨대, 그의 여성차별 발언들이나 권세에 복종하라는 얘기 등등 말이다. 물론 진보적인 신학자들 중 바울을 좋게 보려는 사람들은 당시의 고린도교회와 로마교회가 처했던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같은 사정이 있다고 치더라도 적어도 그의 글이 오해의 소지를 여지없이 남겨놓고 있다는 점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여겨진다.

가령, 성차별을 극복하고 있는 바울이라면 자신의 편지에서 여성은 잠잠하고 집에 가서 남편 말에나 복종하라(고전 14:34-36)는 얘길 할 경우에라도 이에 대한 글을 쓸 때에는 더욱 조심하면서 오해의 여지는 없도록 제대로 써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글을 성경이랍시고 채택했던 기존 기독교의 한계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금 새롭게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는 바울의 공헌뿐만 아니라 그의 한계와 잘못에 대해서도 오늘날의 교회현장에서조차 정직하게 얘기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앞으로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낡은 패러다임의 안경으로서만 바울을 들여다보게 되지 않겠는가. 그럼으로써 기독교에는 여전히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교리와 이신칭의의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해 악순환적인 재생산을 할 것이기에 이 같은 끔찍스런 병폐들을 이제는 끊어내야만 한다.

우리는 어쩌면 <구원>이란 개념 자체부터 다시금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4영리 교리에 대한 시인과 암송으로서 그 영혼이 죽어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중세기적 주술의 신앙이며, 그것은 한 마디로 넌센스일 뿐이다. 바로 이 넌센스가 오늘날에도 거리의 열혈 기독교인들을 양산하고 있고, 이들을 통해 기독교가 여전히 폭력적으로 강요되고 있으며, 이 끔찍스런 넌센스가 주입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빼내어 혼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이 끔찍한 넌센스를 주여 어찌 하오리까~!

[세기연 6월포럼 바울신학 자료받기] http://freeview.org/bbs/tb.php/b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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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218.107.36.167)
2007-07-11 19:24:10
기대에 못미치는 실망스런 글이네요
뉴스엔조이에서 김창락교수님에 대한 글을 읽다가 바울에 대해 잘 설명한 좋은 글이 있다고 해서 들어와본 사람으로서 한마디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처지는 글을 보고 실망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어도 정확하지 않거니와 결정적인 부분에서의 표현이 제대로 되지도 않은 스스로 무슨 말을 할려고 하긴 하지만 뱅뱅도는 그런 글인것긑습니다,.기대에 비해 실망이 커서 ...시간이 나면 조목조목 반박하던지 아니면 질문을 던지고 싶지만,...해봐야 뻔한 대답이 돌아올것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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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4
아랫분님 (124.62.88.2)
2007-06-28 17:51:13
바울이 부정했다고 쓴 게 아니라 한국교회가 바울을 잘못 이해하고 그랬었다는 얘기잖아요~
윗글을 다시 한 번 잘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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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3
이용섭 (125.128.217.169)
2007-06-28 17:23:25
그것이 아닙니다
간단히 사도 바울님의 의인론(의화론)을 피력합니다. 사도 바울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The final Justification defends on the Faith"입니다. 그 분은 "내가 남은 구원받게 만들고서 오히려 내 자신이 버림받을까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선행과 공로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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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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