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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하나님은 다윗의 간음죄를 용서하셨는가?[어느 평신도의 외침-28] 간음의 경력이 있는 목회자와 동역하는 교역자들과 직분자들에게
당당뉴스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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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3월 24일 (토) 00:00:00 [조회수 : 17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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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이민교회의 실상을 다루는 복음과 희망( http://www.gospel-hope.org )에 "이민성도" 라는필명으로 올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필자는 미주교회에서 전문직업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장로로 미주교회들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쳤는 바 오늘날의 한국교회 실상에서 대단히 유익하고 귀담아 들어야할  "어느 평신도의 외침"이라고 판단하여 연재합니다.  당당뉴스가 책임지고 실명을 보호합니다. (당당뉴스 운영자)

[다음 글은 "목회자의 간음죄" 에 대한 긴 글로서 읽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길지만 끝까지 읽어야 이해를 할 수 있는 글이기에 인내를 요구합니다. 상당히 레디컬한 내용들이 나오기 때문에 일반신자들이 이해를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간음의 경력이 있는 목회자와 동역하는 교역자들과 직분자들이 반드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필자)]

고백폭풍의 여진들

뉴욕교계와 이민사회가 동부지역의 최대 장로교회인 뉴욕장로교회 이 영희목사의 공개적인 간음죄 고백으로 인하여 설왕설래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멘넷과 기독교민신문을 비롯한 기독교관련매체뿐만 아니라, 미주중앙일보 등은 3월 19일자 신문에 이 영희목사의 공개적인 간음죄 고백관련기사를 1면 톱으로 장식하기도 하였다.

보수적인 성경중심의 복음적인 설교자이자 성공한 목회자로 알려진 이 영희목사의 간음사건은 지금까지 정통신학과 정통교단과 정통교회를 표방해온 뉴욕장로교회와 소속교단은 아침에 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을 정도의 메가톤급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그 동안 이 영희목사가 뉴욕을 침투하는 이단을 비판하는데 앞장을 서 왔던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단 사이비에 소속된 사람들이 뉴욕교계를 향하여 “네나 잘 하세요” 라고 조롱하고 비웃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뉴욕, 뉴저지는 현재 공칭 650여 곳의 한인교회들이 있으며 90%이상이 교인수 100명이하의 작은 규모의 교회들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작은 규모의 교회들에 비하여 출석교인이 2천 5백명의 뉴욕장로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필자는 이 영희목사의 간음죄 고백을 처음 접하고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폭탄을 맞은 기분이었다. 간음사건이 있었던 지난 3년간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도저히 간음을 한 사람의 설교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복음적이고 보수적이며 성경중심의 설교를 하였던 설교자라는 사실과 교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목회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뉴욕장로교회의 웹사이트는 비판을 두려워 하면서 나눔게시판 자체를 없애버리는 순복음뉴욕교회, 퀸즈장로교회, 퀸즈한인교회, 뉴저지초대교회 등 다른 대형 한인교회들에 비하면 대단히 자유화되어 있고 익명으로도 글을 올릴 수 있는 각종 나눔게시판을 성도들이 누려왔다. 즉 이 영희목사가 교인들로부터 얼마나 신뢰를 받아왔는가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한 대목이었던 것이다.

성경중심의 설교자가 어떻게 무서운 간음죄를 지을 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들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설교도 청교도적이며, 복음적이고, 목회도 성공적으로 해왔고, 교인들로부터도 전폭적인 신뢰도 받아 왔고, 너무나 바쁘게 지낼 수 밖에 없었던 50대후반의 목회자가  피가 끓어 오르는 30대나 40대도 아닌 노체를 가치고서 그 바쁜 와중에 복수의 여성도들과 간통을 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감성을 터치하는 상담목회나 영성훈련이나 프로그램을 많이 하거나 찬양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40대 목회자로서 젊은 여성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거나, 또한 얼굴이나 몸매나 말투가 여성들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바람기가 넘친 세련된 사람이라면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보겠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아마 뉴욕장로장로교인들도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뉴욕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희목사는 천상 목사밖에 할 수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고 농담할 정도이다. 심지어는 “그런 얼굴 생김새 때문에 여자들이 접근도 하지 않기 때문에 지간 30년 동안 여성문제도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사람들 조차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얼굴이나 몸매나 말투나 나이를 보면 바람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인지 바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인지를 인생을 조금이라도 살아보면 대강이지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영희목사의 간음사건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목회의 최전성기를 달리는 50대중반의 나이에 분명히 한 명도 아닌 복수의 여성들과 바람을 피웠으며, 그 바람 피운 것으로 교인들 앞에서 주일예배시간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간음죄를 고백하였던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 고백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며, 뉴욕장로교회의 당회도 이미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사임이라는 절차를 밟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음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신앙사상

필자는 이 영희목사의 고백과 그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결론부터 말한다면 “간음죄” 를 지을 수밖에 없는 신앙사상의 중대한 오류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도 짓게 되면 감옥소에 가거나 도태되어 버리는 간음죄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공인으로서 목회를 재개할 수 있다는 생각하는 목회자들, 그리고 그런 목회자가 계속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용서하고 허용하는 교인들이 별 생각도 없이 젖어있는 교리와 신앙사상에 있어서 중대한 오류가 있음을 지금부터 글을 통해서 나누기를 원한다.    

상식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등 어떤 분야에 있어서 유명인이 불륜한 것이 드러나면 인정사정 없는 비판을 당하면서 거의 회생불능의 상태가 된다. 가장 화려한 연예계 조차도 불륜한 배우들은 하루아침에 광고가 끊어지거나 영화 또는 TV드라마에 출연한 기회가 끊어지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또한 정치가 사회에서도 정치가의 불륜이 드러나면 다음 번 선거에서 도덕성문제로 여지없이 낙선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예수를 믿지 않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공통적인 가치관과 상식도 불륜을 죄악시 하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직업적으로 볼 때 가장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양심적으로 깨끗하게 살아야 크레딧이 보장되는 목사들의 불륜에 대해서는 교회 안의 교인들이 왜 이렇게도 관대해지고, 왜 이렇게도 무감각해지는 그 의식과 가치관의 뿌리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뿌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영희목사와 같이 평생을 표면적으로는 말씀중심의 성공목회를 해왔다고 말하면서 결국 막판에 가서 간음을 하면서 실족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목회자의 간음죄는 칠계명만 어긴 것이 아니다

간음죄는 십계명에서 칠계를 범하는 정도의 단순하면서도 제한적인 죄가 아니다. 간음한 목회자들이 마음 속으로 나는 칠계(간음하지 말라)만을 범하였다고 애써 자신의 간음죄를 축소시키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목회자들이 범한 간음죄의 뿌리 속에는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을 어긴 죄들이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성령을 속인 죄까지 추가되어 있다.  

목회자가 배우자가 있는 여신도와 간통을 하게 되는 것은 결국 제10계인 네 이웃의 집(아내, 남종, 여종, 소, 소유물) 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또한 간통으로 진행하는 과정에 그 시간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거짓 말로 변명을 하고, 간통상대자를 진실과 다르게 표현하는 제9계(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를 어기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소유물인 그리스도인 여성들의 마음을 육체로 빼앗고, 남의 아내의 마음을 빼앗는 도적질하는 제8계(도적질하지 말찌니라)을 어기는 것이 된다.

또한 목회자가 여성과 간통을 하면서 전도대상이자 구원의 대상이자 양육의 대상인 상대편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사모와 가족들과 교인들의 영혼을 죽일 수 있는 영적 살인자가 되는 제6계(살인하지 말지니라)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식을 할 때 반드시 아내와 영원히 함께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역하고 동시에 낳아준 부모들 앞에 부부가 함께 잘 살겠다고 약속을 하게 된다. 특히 목회자들의 결혼은 너무나 거룩한 것으로 그 누구도 헤어지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을 수호하여야 할 책임이 있고, 부부가 서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자체가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드리는 부모공경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남의 아내와 간통을 하는 것은 바로 부모들의 마음을 찢어 놓는 것인 제5계(네 부모를 공경하라)을 어긴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목사들은 주일(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켜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거룩히 지켜야 하는 그 바탕에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 이라는 말씀이 들어 있다.

목사가 엿새 동안 할 일이 무엇인가? 영혼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는데 전력투구하는 일이다. 새벽기도하고 심방하고 상담하면서 영혼구원이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일날 정말 안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간통하는 목사는 엿새 동안 무슨 일을 하였느냐는 것이다. 은밀한 밀실에 들어가서 남의 여자 앞에서 바지를 함부로 내리고 땀을 흘리면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속이면서 늙은 몸뚱이를 열심히 흔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일이냐는 것이다.

더구나 간통상대 여성들이 간통상대 목사가 설교하는 예배시간에 보고 있는 판에 과연 제4계(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절대로 거룩하게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보수적인 교회라고 하여도 1년에 적어도 2차례이상의 성찬식을 목사가 집전해야 한다. 수찬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떡이나 잔을 사사로이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이자 정통교회의 교리적인 상식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의 수찬을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간음한 것이 드러났거나 횡령하였던 것이 증거와 증인들에 의하여 징계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수찬정지” 라는 징계가 있는 것이 정통교회의 상식이다.

그런데 그 러한 치리를 하는 당사자인 목사가 교인(엄밀하게 말하면 교회의 지체) 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 를 상징하는 거룩한 떡과 포도주를 사사로이 먹거나 나누어 주는 일을 집전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수찬정지보다 훨씬 악한 간통죄를 수년간 숨기고서 계속적으로 거룩한 성찬식을 집전하면서 “성부, 성령, 성령” 을 남발 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제3계(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을 뿌리부터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탐심과 탐욕은 바로 우상이다. 간음행위는 탐심과 탐욕이라는 우상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음으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의 반복적인 간통행위는 바로 제1 계(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과 제2계(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을 어긴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목사의 간음죄는 성령을 속인 고의적인 죄에 해당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성도들)를 섬기도록 세움 받은 목사의 간통행위는 우발적인 다른 죄와는 달리 대단히 고의적이고, 치밀하며, 의도적인 처음부터 끝까지 간통이 죄인 줄 알고서 짓는 “고범죄(자범죄)” 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인식할 필요가 있다.
탐욕과 육욕을 따른 간통행위는 하나님의 성령을 속인 것이며, 사모와 자녀들과 가족들을 속인 것이며, 성도들을 속인 것이다.

십계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안다. 고범죄에 해당하는 간통행위를 한 목회자는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 을 스스로 배반한 것이다.

적어도 목회자가 간통행위를 하는 전후 동안은 철저하게 “실천적인 무신론자” 로 살게 되는 것이다. 뉴욕장로교회의 이 영희목사가 간통행위를 고백하는 그 시간 전까지 3년 동안 “실천적인 무신론자” 로부터 설교를 들었다고 이해를 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와 같이 목사가 지을 수 있는 죄악들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가장 하나님의 말씀을 통째로 어기는 행위가 바로 간통행위(간음)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목회를 하였다면 지금까지 말씀중심의 복음주의자로 자처해왔던 건강한 목회자로 알려진 이 영희목사가 과연 복수의 여성도들과 간통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우리들은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다.

간통죄를 시인하는 고백과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신학문제

이 영희목사의 간통행위 고백을 들어보면 “죽음과 지옥을 경험하였다” 고 말은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들고 나오는 것이 바로 “간음죄를 저지른 다윗과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의 죄” 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았다” 는 것과 “누구도 나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 없다” 는 비장의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이 영희목사가 스스로 “간통행위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 과 “간통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 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 해석이 잘못되면, 또 다른 모양의 제2의 김 홍도불륜사건(불륜행위가 드러나가 교회헌금으로 합의금을 지불한 사건- 당당뉴스에 실려 있는 고등법원판결문이나 대법원확정판결문에 자세히 나와 있음) 이나 제2의 서 기종사건(교회여성도들과 18건의 간통행위가 고발되었으며 그중에 5건이 유죄, 한 건은 여자전도사와의 간통으로 결국 쇠고랑을 찬 사건으로 당당뉴스 또는 뉴스앤조이에 자세히 나와 있음) 이 재현되는 일이 뉴욕장로교회 안에서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희목사가 “간통행위의 자백”을 통해서 목사직을 반납하였다면, 목회윤리상 간통행위를 절대로 시인하지 않다가 법정에서 판사와 검사에 의하여 공개를 당하였던 김 홍도목사와 서 기종목사의 도덕성보다 훨씬 높은 영적수준으로 보였을 것이다.
만약 숨겨진 또 다른 의도성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다윗이나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내 죄를 사하여 주었다” 고 공개적인 선언을 하였다면,  “이  영희목사의 신학과 신앙사상” 에 엄청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영희목사”의 “간통행위의 공개적인 자백”은 지금까지 간통을 하고도 법정에서까지 부인하다고 증거에 의하여 쇠고랑을 찼던 목회자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대단히 인정을 받을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 는 공개적인 선언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간음죄에 대한 신학적인(신앙사상) 문제” 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간음죄의 용서(죄사함)에 관련된 신학적인 문제” 에 대한 중요성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면, 지난 100년 동안 한국교회 안팎에서 기생하면서 여신도들과 간음하는 더러운 행위를 피가름 또는 영혼육합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여성들의 몸과 재산과 영혼을 탈취하고 있는 이단-사이비교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일이 정통교회 안에서 앞으로 또 다시 반복적으로 계속 벌어질 것이다.

이 영희목사가 은밀하게 행하였던 추악하고 악한 (이 영희목사 본인의 표현) 간음죄를 하나님께서는 과연 용서하셨을까 대하여 우리들은 진지하게 하나님께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죄질상 추악하고 악한 간음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이목사가 말하였던 “우리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많으셔서 간음한 다윗을 용서하시고,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용서했던 우리 주님이 저의 죄 또한 용서해주셨습니다………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셨으니 여러분도 저를 용서해주시고” 라는 말이 성경적으로 타당하고 정말 그러한 용서가 성경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은 정직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목사나 일반인들이 그냥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인간적인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 는 근원이나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간음죄로 인하여 나머지 아홉가지 계명을 전부 어기고 성령을 속이는 일까지 벌이는 추악하고 악한 고범죄인 간음죄에서 이 영희목사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며, 과거 간음죄를 짓고서도 태연한 척하면서 여전히 목회를 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도 절대로 그 죄의 습성과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상황만 주어지면 또 다시 반복적인 간음죄를 짓게 될 것이다.

이 영희목사가 인용하였던 것과 같이 목회자 입장에서 설교할 때 다윗이 분명히 무서운 간음죄를 저질렀지만 회개하여 결국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다윗이 사함받은 것은 죽임당함을 면제받았다는 뜻이다    

다윗이 간음죄를 저지른 전후 과정을 성경 속에서 정확하게 살펴본 목회자라고 한다면 과연 “다윗의 간음죄와 하나님의 용서(죄사함)” 가 간음한 목사 본인에게 적용되기를 바랄 수 있을까에 대하여 질문할 수밖에 없다.  

다윗은 밧세바와 은밀하게 행하였던 간음죄를 죽을 죄인 줄을 꿈에도 알지 못하였고 또한 나단이 와서 비유로 설명할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였다. 나단이 비유를 들고서 직선적인 책망을 받을 때까지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간음죄를 단순한 비윤리적인 행위로만 알았지 그것이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갈만 한 죽을 죄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이 저지른 간음죄에 대하여 다윗이 그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여야 할 죄라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과 율법을 허락하신 이래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 가운데 이웃(부하)의 아내와 간통하여 임신을 시키고 이웃을 살해하도록 한 사건은 다윗이 유일한 케이스이다.

하나님께서 당시의 인종적 또는 문화적으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셨으며, 그 가운데 다윗 왕도 이미 여러 명의 아내들을 데리고 있었고 여러 명의 자식들을 낳고 있었던 일부다처제를 누리고 있었다. 일부다처제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죽을 죄” 라고 하신 적도 없었으며 다윗의 선조인 아브라함이나 야곱도 일부다처제 속에 있었다. 물론 일부다처제로 인한 부작용으로 아브라함과 야곱의 고통은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종들 가운데 유일하게 다윗만이 이웃의 아내, 그것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나라와 다윗을 위해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그 시간에  그 부하의 아내를 건드려서 임신을 시키는 사고를 친 것이다.

간통으로 상대편 여성을 임신시켜서 사고를 치는 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고, 거짓증거를 하게 하고, 부하를 이방인의 손에 죽도로 버려버리는 잔혹성과 더불어 간접살인을 하는 하였던 것이다.

다윗이 범한 죄는 단순한 간음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따르면 남의 아내와 간통한 다윗과 밧세바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공모하여 죄를 숨기고 결국 왕권을 이용하여 충성스러운 부하를 고의적으로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도 율법에 의하면 다윗과 밧세바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눈에는 말씀을 수호하고 말씀의 권위를 가지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단순한 간음죄를 지은 것이 아닌 반드시 죽임을 당하고도 남을 악하고 추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어야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죄에 대하여 전혀 무감각하고 있으니 나단선지자를 보내어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를 들려 주었더니 다윗이 크게 노하면서 나단에게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사무엘하 12장 5절)”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들려주었던 핵심적인 멧세지가 바로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죄를 지었다” 는 것이다.

간음죄를 살인죄와 똑 같이 반드시 죽임을 당할 죄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오늘날 백일하에 불륜과 간통이 드러나면서도 끝까지 부인하였던 김 홍도목사와 서 기종목사. 그리고 자백한 이 영희목사와 같은 간음한 목사들이 과연 다윗이 지은 간음죄를 “반드시 죽어야 할 죄” 라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오늘날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남의 배우자와의 간통죄” 를 보는 가치관이 “반드시 죽임을 당할 죄” 로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가 되느냐는 것이다. 혹시 재수없이 걸려들었다고 생각지는 않는가?

나단이 다윗을 향하여 던진 경고의 핵심이 바로 “(반드시 죽어야 할)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죽어야 할 간음죄의 뿌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셨다.
(1)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다
(2) 너는 여호와 보기에 악을 행하였다.
(3) 너는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죽이되 이방인 암몬의 칼로 죽였다.
(4) 너는 우리아의 처 아내를 빼앗아 네 처로 삼았다.
(5) 네 집에 재화(성폭행, 살인, 패륜, 분열)를 일으키겠다
(6) 네 처들을 빼앗아 다른 사람(아들 압살롬) 에게 주며, 그 사람이 백주에 사람들 앞에서 성관게를 가질 것이다.
(7)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간음죄에 대하여 심판의 말씀을 들었던 다윗은 즉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고 하였다.  그 때에 나단이 한 말은 무엇이었는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라고 하였다.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하였다는 말은 다윗이 더럽고 추악한 죄로 인하여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그 생명만큼은 거두지 않고 살려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드시 죽임을 당하여야 하였던 간음죄에 대한 죄사함과 용서의 범위” 인 것이다.

한마디로 “회개한 네 생명만큼은 살려 주겠다” 는 정도의 “죄사함과 용서” 라는 것이다. 그 뒤에 계속 읽어보면 간음죄에 대하여 반드시 치루어야 할 죄목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취소(용서)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이 회개하고 금식하였지만 즉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밧세바가 잉태한 아이를 죽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무엘하 13장부터 나단을 통해서 다윗이 간음죄로 당하여야 할 일들이 처절하게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전부 사하였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전부 일어났던 것이다.

다윗으로부터 낳은 배다른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을 근친 성폭행 하는 일이 벌어지고, 다말의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궁에서 쫒아내는 일이 벌어지면서, 다윗은 죽음을 피해서 떠돌이 신세가 된다. 아들 압살롬은 다윗의 처들 즉 계모(후궁)들과 백주의 대낮에 성전 꼭대기에서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갖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쫒아 다니다가 결국에 다윗의 군사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윗은 그 모든 것이 바로 자기가 지은 간음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삼하18:33)” 라고 하였던 것이다.

압살롬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다윗을 보고서 그동안 왕에게 목숨을 걸었던 부하들은 황당하였다.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였고, 이복형제를 죽였으며, 계모들과 더러운 짓을 하였으며 아버지의 군사들을 죽였던 압살롬의 죽음을 다윗이 왜 슬퍼하느냐고 항의를 하는 사태가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가슴 속에 “내가 지었던 무서운 간음죄와 살인죄로 인하여 압살롬이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는 것이다.

간음죄를 저질렀던 후에 일어난 다윗의 삶은 왕으로서의 어떤 권위나 위엄은 전부 포기하여야 하거나 깊은 고통과 슬픔에 젖어야 일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그러한 고통과 슬픔과 번민이 시편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죄를 지어 놓고 피할 길을 찾는 목회자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에 과연 간음한 목회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어떻게 용서하였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다윗의 간음죄를 용서한 것은 “죽어야 마땅한 죄를 용서한 것” 이지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결코 취소됨이 없이 이루어졌다.

간음한 목회자들이 과연 다윗의 눈과 슬픔과 고뇌와 몸부림과 아픔들을 겪고 있느냐는 것이다. 간음한 목회자들과 맹신자들은 나단선지자처럼 지적하는 교인들을 출교하고 치리하고 위협하였으며, 동료목회자들을 사회법으로 고발하는 일까지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의 신앙인격과 양심이라는 말인가? 천부당 만부당 한 말이다.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전부 사하시고 용서하셨다면 왜 아무 죄도 없는 어린 아이는 죽이시며, 왜 집안에 재화가 일어나 근친성폭행과 살인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는가? 왜 아들이 계모들과 백주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동침하는 사건이 터지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말인가? 이상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분명히 “네 죄를 사하였다” 고 하였다면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거두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거두는 것을 사하는 것” 외에는 다윗의 범죄에 대하여 경고로 말씀하신 것에 곱빼기로 이렇게도 처절하게 죄를 묻고 계시는가에 대해서 과연 오늘날 목회자들이나 일반신자들이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수많은 고범죄(자범죄)를 짓게 된다. 아무리 거룩하게 살려고 하여도 죄없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는 살 수 없으며 천국에 불려갈 때까지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하고 죄의 유혹을 받으면서 살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9-10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라는 약속의 말씀은 분명히 진리이며 피흘리까지 죄와 싸우는 우리들에게 위로의 말씀이 된다.

그런데, 고백한 죄에 대한 사하심과 깨끗게 하심은 바로 다윗이 반드시 죽을 간음죄에서 사람을 받아 생명을 건진 것과 같이 어떤 죄를 지어도 자백하고 회개하면 개인의 영적 생명은 하나님께서 죽이시지 않고 다시 치유하시고 회복시킨다는 뜻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난 후에 지은 자범죄(고범죄)에 대해서는 죄로 인하여 뿌린 죄의 씨앗들에 대해서 다윗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용서하지도 간과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진리를 제대로 안다면 말씀을 받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체험이 있는 사람들, 특히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간음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며,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의로 지은 죄이든 실수로 지은 죄이든, 뿌린 죄의 씨앗에 대해서는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이 진리를 일찍이 체험하고 깨달은 목회자들이 과연 반복적으로 섭고 더러운 간음을 반복적으로 행하고 하나님의 것을 횡령하고, 반복적으로 탐욕하는 일들이 과연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잘못된 사상을 거머쥐고서 지난 30년 동안 구름떼와 같은 사람을 모으는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여도 그 목회자는 신학과 기독교라는 종교를 지식적으로 연구하고서 조직 운영 기술을 습득하여 회사 CEO처럼 교회를 잘 운영해왔지만 결국 하루 아침에 “간음/간통” 이라는 유혹 앞에서 쓰러져 버리는 것이다.

다윗의 간음죄를 연상하면서 무슨 죄라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이다라는 기독교 교리만이 머리 속에만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죄를 지은 후에서 비로소 추악하고 더러운 죄로 보여졌던 간음죄를 함부로 반복적으로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간음죄가 생명에 죽임을 당할 정도로 무서운 죄인 것을 처절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안식년 등으로 시간을 벌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건의 충격이 사라지고 난 후에  슬며시 다시 설교단으로 돌아와  전혀 성령의 감동 없이 교리와 논리(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 를 훈련된 수사법으로 또 다시 사람들을 속이는 일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본인들은 잘못된 깨달음 속에서 ‘죄사함과 용서”를 받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파렴치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간통한 목회자는 다시는 강단과 목회에 복귀해서는 안된다

목회복귀를 위한 멍석을 미리 깔기 위한 의도로 “하나님이 내 간음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죄를 짓고 있는 여러분들도 내 심정을 이해하고 나를 용서하고 받아주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자 교인들을 속이는 일이다.

내가 남의 것을 도둑질을 하여 남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하자. 남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 고 하셨다고 음성을 들은 후 죄사함의 확신을 받았다고 하자.  그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도둑질 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100만 번을 강조하면서  “나는 도둑질한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하여도 그러한 “용서의 강조” 가 “도둑질을 한 행위” 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남의 물건을 훔친 일에 대한 도둑질 행위에 대하여 물건의 주인이나 바라보는 이웃들에게 “나는 이제 더 이상 죄가 없다” 고 주장한다면 정신이 나간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신이 나간 일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비극적인 모양으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이비사상인 것이다.  

목회자가 간음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죄를 짓는 것이지만, 내 몸과 영혼에 죄를 짓는 것이자, 나의 배우자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간음한 상대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고, 간음한 상대의 배우자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회자의 자격을 스스로 박탈하는 행위였는데 그것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나는 죄사함을 받았다” 고 강조한다면 정신이 나간 사람의 독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나머지 모든 죄(배우자에게 지은 죄, 간음한 상대편에게 지은 죄, 상대편 배우자에게 지은 죄) 까지도 용서를 받은 줄로 착각하거나 또한 그 용서를 면죄부로 생각하는 교인들이 예상외로 많다.

간음한 목회자가 금식과 회개를 통하여 그동안 죄로 인하여 눌려 있었던 영혼의 상처와 무거운 죄짐과 죄책감과 마귀의 참소로 인한 죽음과 지옥의 고통으로부터는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목회복귀” 를 위한 “면죄부나 보증수표” 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따르기를 원하는 목사라면 당연히 목사직을 교단에 반납하고 자연인, 일반신자로 돌아가는 것이 성경적이다.  

죄짓는 것도 죄사함도 어그러진 고르반을 적용하는 자들

성경에는 “고르반 사상” 이라는 것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헌물을 바치는 고르반행위를 하면 공양해야 할 부모에 대한 책임도 전부 하였다고 착각하는 것이 바로 고르반 사상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거룩하고 훌륭한 목사, 장로, 권사로 보여주지만 집안에 돌아가면 악한 아버지, 악한 어머니, 악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악한 아들과 악한 며느리로 살고 있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전부 하나님께 바치기만 하면 나머지 내가 할 일을 전부 다하였다고 생각하는 악한 고르반 사상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이 돈이 없어서 굶어 죽고, 이혼하여 아이들이 고아원에 보내어져도 부자 교회, 부자 목사, 부자 장로, 부자 권사, 부자 집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악한 고르반 사상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탈세하고, 간음하고, 사기치고 횡령하여 번 돈이라고 하여도 십일조와 헌물로 교회에 고르반을 하기만 하면 그 고르반 하였던 공로 때문에 세상에서 지었던 모든 죄가 전부 용서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교인들이 많다.

집안에서 부모 형제들에게 무관심하고, 이웃들에게 냉정하면서, 교회에 가서는 목사, 장로, 권사들이 교회 안에서 물질이나 봉사로 고르반 하기만 하면 부모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이웃들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것도 전부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죄사함” 도 동일한 어그러진 고르반 사상으로 받아들이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분명히 “ 목사가 여성도와 지은 간음죄 안에서 복합적인 수많은 죄들이 함께 들어 있다” 고 하였다. 한가지 간음죄로만 국한하고서는 자백하기만 하면 그 간음죄 속에 들어 있는 수 많은 죄들이 전부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죽을 목숨을 겨우 건짐을 당하는 죄사함을 받았다” 는 것과 “하나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고, 간통한 상대 여성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사모와 가족들과 성도들의 영혼을 실족시킨 죄로부터 사함을 받았다” 는 것은 차원도 다르는 것을 골수에 박히도록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간음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죄의 시작과 죄의 뿌리와 죄의 삯이 얼마나 엄청난 것임을 알라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이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의미

다윗처럼 지었던 간음죄는 “죽을 생명이 건짐을 받는 정도” 의 사함을 받지만 반복적으로 또 다시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죄의 대가를 요구하시고, 그 죄값을 치루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쏙 빼버리고서 “목회복귀”를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죄를 사해주셨다” 고 한다면 하나님과 성도들을 또다시 속이려고 하는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 앞에 돌을 들고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라고 한 것과 모든 사람들이 떠난 후 여인과 일대일로 남아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고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죽이기 위해서 돌을 든 공중들 앞에서 “내가 이 여인의 죄를 전부 사하였으니 이제는 돌을 치지 말라” 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간음죄로 반드시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여자의 생명을 건져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건짐 받았다는 것이 바로 “죄사함” 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던 여자는 간음행위로 인하여 상처받은 남편, 상처받은 부모형제들, 동시에 비윤리적, 반사회적, 비도덕 간음행위에 대해서는 앞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간음한 여인”이라는 딱지를 가지고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목숨을 살려주신 것이지, 앞으로 그 여성이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당할 수 있는 수많은 고통과 고초까지도 용서를 받았다면 큰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간음한 목회자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간음한 수많은 목회자들과 직분자들이 이 성경부분을 비틀어서 인용하면서 “누가 나에게 돌을 들어서 칠 수 있느냐? 나는 예수님께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다.” 고 떠들면서 거룩한 목회를 다시 할 수 있는 보증수표나 면죄부라고 받은 것처럼 사이비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 예수님께서 간음한 자들의 죄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모든 사람들 앞에 선언하라고 하였는가?  예수님이 언제 간음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내 죄사함을 선포하라고 하셨는가? 만약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도 한참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무지하니 그 성경으로 또 다른 사람들을 도리어 정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 이 세대의 특징인 것이다.  

간음한 목사의 간음행위는 신학적인 오류에서 시작된다

이 영희목사가 평생을 보수주의 또는 복음주의 노선에서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대로 살아왔다고 하지만, 결국 그가 간음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이 “성경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중대한 신학적인 오류” 를 범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평생을 세련된 수사법으로 틀에 박힌 교리를 교인들에게 강론해 온 것이며, 엉터리로 성경해석을 하고 엉터리로 성경적용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복수의 여성들과 그 무서운 간음죄를 짓고도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해주셨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간음죄를 저지르고 하나님과 교회(성도)를 지금까지 속여왔던 이 영희목사가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한 것” 은 의미있는 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간음죄에 대하여 죄사함을 받았다” 라고 하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서 “내가 목회를 다시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용서하셨으니 여러분들도 용서해야 한다” 는 숨겨진 의도로 당회와 교인들과 교단관계자들로 하여금 어떤 목회복귀의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도록 시도한다면 그것은 이단과 사이비들보다 훨씬 악한 일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부정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 명백히 드러난 간음과 횡령을 한 후에 다시 목회를 재개하는 유명(?)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오는가? “다윗의 간음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자유함을 가지고 목회를 재개한다” 는 사이비적인 논리를 반드시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속이고 성도를 속이면서 반복적이면서도 고의적이면서도 은밀하게 지었던 “반드시 죽어야 할 간음죄로부터 목숨을 건진 것” 만이라도 다행히 알면서 목사직을 떠나서 이제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받아주는 아내과 자식들과 함께 조용히 살아가도 모자랄 판에 “목회재개” 를 위한 술책을 부린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보여주었던 그 모든 일들(환란, 서로 물고 뜯는 일, 분열) 이 간음한 목사가 30년 동안 목회하였던 뉴욕장로교회 안에서 똑같이 일어나도록 섭리하실 것이다.

우리들은 이번 교훈을 통해서 우리들이 무슨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반복적으로 죄를 짓게 되면 반드시 우리들의 영적생명이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내어 놓고 통회하고 회개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깨서 우리의 영적생명을 살려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용서를 해주신다.  그러나  우리들이 뿌린 여러가지 죄악의 씨앗들은 우리들이 반드시 보응(징계)을 받게 될 것이다. "용서" 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정직하게 맞이하지 않고 다른 핑계로 피하려 하고 도리어 내 상황을 합리화 하려고 한다면 평생 마귀와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단지 하나님께서 회개한 심령들에게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크고 작은 죄의 씨앗에 대한 보응을 받을 때에 그 보응(징계)가 너무 힘들어서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고 더욱 하나님을 사모하고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관련기사]

어느 목회자의 공개적인 간음죄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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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iris (58.120.121.61)
2016-11-07 19:29:39
불륜 아내 용서에 대해서는....
애를 아주 많이 낳고 나중에 노예로 팔려 노예시장에 갔다가 오면 그때는 용서해주라는 얘기는 성경에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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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40
사랑받는 이방인 (59.13.75.125)
2007-04-01 21:21:56
명철한 풀이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항상 갈등과 번민에서 자유롭지 못하지요.
대부분의 목회자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샤머니즘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론 때로는 그런 말씀 이전에 그분들이 항상하시는 말씀을 간과하고 비판하는 오류도 경험합니다.
만약 제 목사님의 설교를 처음 오시는 분이 듣는다면 한심하다 생각 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복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거든요. 물론 물질적으로도.
그런데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라는 복임이 복선에 깔려있죠.
그래서 그 분은 지금까지 한번도 헌금하라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제겐 없습니다.
제가 뵌 첫 목사님 다운 목사님입니다. 제 집사람의 말에 의하면 헌금(정말 작은 액수입니다. 어른이 6명 밖에 않되는 작은 교회니까)을 받으시고는 우시는 모습을 여러번 목격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래서 최소한의 헌금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복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눔의 삶을 위하여.... 물론 저도 넉넉한 사람은 아님니다.
아무튼 성경적으로 명확한 판단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고위 직급의 사역자들의 비리들을 보며 많은 고민을 했거든요. 잘못된 성경 해석 때문에.
이제 우리는 깊은 묵상과 말씀의 진리로 이 시대의 왜곡된 기독교을 바로잡을 수 있는 초석을 준비해야할 때라고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우매한 신앙인이 그 들을 더욱 타락하게 만들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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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39
이경선 (124.5.219.249)
2007-03-31 11:28:26
명쾌한 해석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성경을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꿰어 맞추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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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40
할배 (168.249.238.51)
2007-03-29 18:11:34
우리아의 억울한 죽음 의문 이제야 풀려
성경에 깊이가 없는 평신도로

다윗의 회개로 모든것을 용서 받았다는 목사님들의 해석에 언제나 우리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여준 다윗 편애적인 사랑을 이해 할수 없어서 몇개월이나 고민하며 이해하여 보려 하였으나 이제야 우리아의 억울한 죽음과 다윗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어 감사합니다.

오늘 날 회개 없는 가증한 목사들이, 입술로만 외치는 하나님을 파는 파렴치한 목사들이 이글을 꼭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혹 이로 인해 한 생명이 회개하여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될지 모르지 않을 까요
리플달기
29 40
복음에 빚진자 (211.243.239.2)
2007-03-27 13:19:39
모든 것은 말씀을 도외시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호를 이용, 오용, 남용하여 저질러지는 모든 악행들에 대하여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게 됨을 두려움으로 마음에 새깁니다.
작금에 일어나는 모든 부끄러운 모습들은 구약시대부터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통해 항상 경고되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신약시대의 바울도, 베드로도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며 죄와 타협하기 쉬운지 항상 말했으며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처절하게 싸워야 됨을 경고했습니다.
구약 신약이 먼 옛날 얘기처럼 느껴진다면 근래에 이성봉 목사님 설교집을 보아도, 마틴 로이드 존슨 목사님 요한 일서 강해집을 보아도 말씀에서 변질되어 점점 인본주의적 설교로 듣기좋은 강연이 펼쳐지는 현대를 경고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달게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랑만을 강조하며 모든 것을 용납하는 것을 기독교의 정신이라고 자신들을 합리화한 성도들의 책임도 큽니다. 그런 성도들의 얇은 귀에 맞춘 웅변술을 설교라고 하는 목회자들이나 박수치며 환호하며 목회자를 잘 접대하는 것이 천국의 지름길인양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은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말씀은 설교시간에 듣는 몇 구절이 전부이기 때문에 말씀 전체를 앞뒤 문맥에 맞춰 핵심을 알지 못했던 게으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목회자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틀린 부분을 지적하면 하늘에서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협박했던 분들의 잘못은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샤머니즘도 아니고 일단 저주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날 것만 같은 찜찜함 속에 모든 것이 묻혀버렸습니다. 교황의 무오설보다 더 강력합니다.말씀에서 벗어난 것같아 물어볼라치면 비판자가 되어 버리는 작금의 상황에서 어느 누가 나서야 하는지요? 과연 웃물부터 정화가 되어야 하는지 아랫물부터 정화가 되어야 하는지-그러나 답은 명확하지 않습니까? 위든 아래든 모두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만이 기준이 되어야 하며 시편의 말씀처럼 주야로 묵상한다면 부족한 지혜를 구할 때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야 할 길이 적어도 분별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주일날 너무 바쁩니다. 맡은 일이 너무 많아 정작 예배 시간에는 늦게 들어가고 축도 전에 나와서 다음 일을 준비하거나 또는 예배만 달랑 참석하고 빠져나가는 두 부류의 교인들 속에서 예배는 누구를 위해 드려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또한 요즘의 실상이지 않은지요. 많이 배우지 않아도 말씀을 경외함으로 묵상한다면 해석이 되고 분별이 주어지고 회개도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들의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으며 또한 진리의 영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알게 되기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위장, 변장으로 숨길 수 있는 죄에 대해 담대할 수 없기때문입니다.말씀을 읽지 않을 때 비판과 분별이 주어지지 않아 무조건적으로 목회자의 아무 말이든지 받아들이며 -그것이 바른 말씀이면 그보다 더 꿀송이 같을 수 없겠지만 삯군 목자일 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때 결국 같이 구덩이에 빠지는 결과외에 얻을 것이 없습니다-맹목적인 과잉충성을 하게 되며 결국 아직 주님을 영접지 못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하나님의 성호를 욕을 끼치게 되는 지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닌지요. 저 역시 말씀에 대해 젖먹이같이 어리고 늘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에 심히 부끄럽고 낙심되지만-바로 그것이 저의 현주소이며 말씀이 있는 한 말씀에 의지하여 또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나아가는 것이 겸손이며 낙심이 곧 교만이라는 설교말씀을 듣고 넘어지고 넘어지지만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해 나아갑니다. 말씀은 제게 순종은 일상적인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알게 합니다. 고르반 문제는 어느날 저 역시 오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정말 말씀 앞에서 얼마나 경외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하는지에 대해 잊지 않으려 합니다. 성도들간의 모임에 있어서 교제(등산, 취미교실 등등)에 대해서는 정말 잘 모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알고 배워야하는 모임에는 정말 지원자가 적습니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것이 최소한의 반응인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했던 호세아의 외침이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아무리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가지고 변질시켜 자신의 욕심을 채우더라도 우리들은 결국 사라질 것이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각 지체 지체라는 형태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심은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고 교육의 혜택을 받고 성경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세대에 살면서 몰라서 그랬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베드로후서 3:17)'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한일서 4:1)'
말씀 앞에 오늘 다시 경외심을 가지고 읽고 순종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성령의 도우심과 무엇을 기도해야 할 줄도 모르는 우리에게 말 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로 함께 해 주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서 저의 악의 모습을 보며 가슴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저의 악과 다른 이의 악-결국은 저의 다른 모습의 악-을 위해 회개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별로 아는 것이 없어 핵심을 벗어났더라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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