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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 무엇이 문제인가?" (2)한국개신교 문제, 우선 성서를 대하는 문제부터 풀어나가야
당당뉴스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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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3월 02일 (금) 00:00:00 [조회수 : 3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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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비평, 한국개신교의 고질적 문제이자 복음주의 진영의 딜레마
 
내가 보는 개신교 문제의 근원적 지점은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성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가장 기초적인 해석학적 인식의 교정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해석학적 렌즈부터가 기존의 보수 기독교에는 온통 <관념적 이원론>이 베이직한 해석학적 존재론으로서 깔려 있기에, 강단도 타락하고, 교회도 타락하고, 비역사적이고, 힘을 쫓아가는 사회적 행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개신교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양한 견해들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그 실마리를 좀더 구체화시켜서 집어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성서관>의 문제를 가지고서 풀어나감이 좋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성서관의 문제 역시 결국은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의 문제와 연결되고, 이 점은 또한 철학적 논의와 연관되지만, 현재로선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좋은, 적어도 한국교회 현실에선 뚜렷하게 문제시되는 지점부터 거론해도 좋을만한 분명한 지점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성서비평>에 대한 문제이다.
 
오늘날 주류 한국개신교의 대부분의 신학은 신학대에서부터 성서비평을 온당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 소위 말하는 인류사의 축적된 학문적 성과들 혹은 여러 인문학적 이해들이 결여된 채로 성서가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다.
 
고신, 성결신, 총신, 침신 등등 한국 보수교단 신학교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당연히 성서문자주의가 판을 치기에 딱 좋은 것이다. (반면에 장신, 감신, 한신 등등 성서비평을 가르치는 진보신학교의 경우는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의 이분화 현상>이 치명적인데, 이점에 대한 분석은 여기선 지면상 생략. 이에 대해선 본인의 졸저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 pp.281-291. 참조)
 
내가 알기에 정용섭 목사나 박득훈 목사나 두 분 다 성향이 아주 온건한 복음주의 진영의 신앙인들이라고 생각한다. 두 분 다 한국의 신학교만큼은 다소 보수교단의 신학대를 나오신 걸로 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보자. 왜 한국교회는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도 성서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그토록 결여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한국개신교 신자들은 그것도 9할 이상이나 놀라우리만치 성서문자주의에 얽매여 있단 말인가?
 
내가 보기엔 이미 잘못된 이해들이 교회 안에 뿌리 깊은 전통으로서 기독교 안의 <습속>(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정용섭 목사는 종종 나에게 말하기를, 이미 기독교 전통이 잘 차려져 있으니 그것을 지켜나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만에 하나 이 같은 성서비평의 역사마저 기독교사상사의 전통의 역사로 본다면 나로선 동의하기가 매우 힘들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기독교 전통이냐>부터가 분명하게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성서비평의 흐름은 개신교의 주류 교회전통과는 대립된 또다른 흐름
 
사실 르네상스 이후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성서비평이 활발하게 등장했던 근대에 이르러선 성서의 <역사비평>이란 것은 교회 안으로 제대로 스며들지도 못하였으며, 그저 대학의 범주에만 머물렀을 뿐이다. 오히려 교회의 입장으로선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은 전통 도그마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부정한다고 생각해서 철저히 대학과 이분화된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실제로 성서비평을 가한 신학자들 중에는 당시 교회의 거센 반발로 인해 아예 대학교수직에서조차 쫓겨나기도 했었으니 그 대립적 흐름은 매우 짐작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드디어 <근본주의>라는 형태의 기독교로서 그 흐름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보수 근본주의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그동안 교회 안에서는 지속적으로 깔려 있다가 소위 말하는 근대 학문의 인문학적 성과들이 주는 위협들에 대한 위기의식으로서 형성된 것이었다.
 
한국개신교는 일찍부터 이미 이러한 성격의 보수 근본주의 개신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한국개신교 역사에서도 성서비평의 문제로 인해 종종 불협화음을 보이기도 했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김재준이 이끌고 나왔던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과 당시 성서비평을 거부했던 예장과의 분파는 매우 대표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예장통합측 장신은 다소 온건보수적인 스타일이긴 하지만 성서비평을 받아들이고 있다.
 
▲ "한국개신교 무엇이 문제인가?" 기교협 학술대회 ⓒ 크리티앙
 
종교적ㆍ신앙적 보수신념과 정치ㆍ사회의 보수 지배이데올로기와의 친화성
 
또한 박득훈 목사의 강연을 들으면서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점이 하나 떠올랐었다. 적어도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볼 때, 성서비평을 도외시 했던 보수측과 나름대로 성서비평을 당연시 하면 수용했던 진보측은 정치 사회문제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양상을 띠며 전개해왔었다는 사실이다. 진보측이 7, 80년대 독재권력을 타도하기 위한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폈을 때 보수측은 오히려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열거나 혹은 표면상으로라도 정교분리를 내세워 정부비판이나 사회참여를 금하도록 했었다.
 
나로서는 신앙적 차이에 따른 이런 사회적 행태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하긴 성서문자주의에 얽매인 사람이 민주화 운동에나 신경을 쓰겠는가. 박득훈 목사는 <성서한국>이라는 단체가 아주 진보적인 복음주의 단체라고 말했지만, 그 단체의 선언문 첫 번째가 <성서무오설>을 신조로서 못박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서한국에서 말하는 그 성서는 보수 근본주의의 성서이거나 혹은 언제든지 그것으로 돌아갈 위험성을 안고 있는 성서일 뿐이라는 것이다.
 
박득훈 목사는 나중에 개인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는 그러한 <성서한국>의 단체에 대한 현재의 우려 역시 언급한 바 있다. 그만큼 복음주의 진영이 이 문제부터가 명확하게 하지 않는 한 여전히 보수반동으로 되돌아갈 위험성은 여전히 잠복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주로 보수 근본주의 성서관을 가진 기독교인일수록 정치 사회적으로 우파적인 성향을 띤다는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복음주의 진영이 아무리 사회 참여와 정치 개혁을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신앙을 신념으로서 사회참여를 부르짖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독신앙부터가 온전하게 명확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보수화할 수 있는 위험이 다분한 것이다. 실제로 복음주의 진영의 단체 가운데는 아예 보수화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그 신앙부터가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중도통합>이란 용어만큼이나 <복음주의>란 용어 역시 모호한 것이다. 사실상 기독교인들이라면 모두가 자기 자신의 신앙과 입장만큼은 '복음주의'라고 표방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것이 한국교회에선 명확한 개념으로서 정립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오래전에 김경재 교수가 잘 지적한 바가 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한국개신교는 성서비평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서 도입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개신교의 고질적 문제들은 성서비평 도입으로 우선 풀어나감이 좋을 듯
 
성서비평이 성서공부에 있어 자연스런 것으로 들어오면 두 가지 극단적 반응이 나올 수 있다. 단점으로서의 반응은 회의주의며, 장점으로서의 반응은 사유의 지평이 봇물터지듯 열린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절대시하던 성서를 비평한다는 것은 자신이 믿고 있던 확고불변한 기반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에 메스를 가할 경우 당연히 성서신앙에 대한 허탈함과 회의주의가 있을 수 있다. 서구학계에서도 역사비평의 문제를 말할 때 이점이 자주 언급되곤 했었다. 오히려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이 기독교 신앙을 해치는 게 아닌가 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학자들의 결론은 역사비평 자체의 성과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언젠가 말했지만, 이전의 신앙은 <더 큰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어떤 혼란의 과정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것은 지나고 나면 매우 유용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진리는 아무리 비판을 가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진리일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서 성서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럴 경우 장점으로는 열린 마인드를 갖게 되어 성서 이외의 다른 인문학적 사유들도 좀더 유연하고 탄력있게 수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신학이 얼마나 다른 여타의 인문학들적 성과들과 동떨어져 있거나 한참 뒤쳐져 있는지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으로 본다.
 
일단 한국개신교는 지독한 성서문자주의 혹은 성서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하나님의 영감이 깃들어 있어 정확무오하다고 주장하는 그런 축자영감설부터나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고서나 꽉찬 설교가 나올 수 있는 강단개혁이든 제대로 된 정치 사회참여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크리티앙 정강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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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문 (124.80.224.245)
2007-03-02 21:41:41
성서 비평을 가르쳐도 제대로 배울 실력들이나 있을까요
성서 비평을 비판하는 이유중에 하나로 성서비평을 할만한 기초 실력이나 열심조차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명 신학대학에서조차 성서비평을 소화하지 못하는 학생이 95%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우기면됩니다.

설교 내용을 보면 마음대로 아주 알레고리[allegory]하게 해석하지요.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에 억지로 갖다 붙힘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요.

하기사 자기들만 성령을 받았다고 우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고집을 꺽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는 것을 성서는 보여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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