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다산책방)

찰스 디킨스는 프랑스혁명 직전 18세기 프랑스와 영국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두 도시 이야기>라는 작품을 시작합니다. 그 중에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성직자들의 가호 아래, 프랑스는 한 젊은이를 상대로 손을 잘라 버리고 혀를 펜치로 끊어 내며 산 채로 화형에 처하는 인도적인 처우를 제공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비 오는 날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던 지저분한 수도승 행렬 앞에 감히 무릎을 꿇는 예를 표하지 않던 청년은 그렇게 사형당했다.”(<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김소영 옮김, 허밍버드)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며 중세 암흑기는 끝났으리라 예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교회의 권력은 강고했고 마녀사냥은 계속됐습니다. 교회는 르네상스의 파도로부터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몸부림을 쳤습니다.

프랑스 청년은 왜 사형을 당해야 했을까. 성직자에게 예를 다하지 않는 것은 교회에 예를 다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곳 그리스도에게 예를 다하지 않는 것이라는 나르시시즘적 논리가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주의가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듯, 교회가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성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이 길이 옳은 길이고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은 믿음의 뿌리가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옳다고 해서 그 믿음을 가진 사람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틀립니다. 생각보다 자주 틀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틀립니다. 따라서 신앙은 확신과 성찰 사이에서 위태롭게 고뇌할 때 생명을 얻습니다. 확신이 지배하는 믿음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합니다. 자기 확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른 얼굴과 목소리, 진실 조차도 외면해버리는.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던 어떤 사건에 관한 소설입니다. 

1985년 아일랜드 작은 도시에 빌 필롱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였습니다. 미세스 윌슨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중에 필롱을 임신합니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열여섯, 아버지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딸이 미혼모가 되자 가족은 등을 돌렸고, 미세스 윌슨만이 그들을 받아줍니다.

필롱은 미세스 윌슨의 보살핌 덕에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야적장에서 땔감을 판매하는 석탄-목재상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해서 딸 다섯을 두었고, 빠듯한 삶이지만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강 건너 수녀원에 땔감을 공급하러 갔다가 학대받는 여자 아이들을 목격합니다. 

수녀원은 아일랜드 정부의 지원을 받아 미혼모를 위한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호 받아야 할 미혼모들이 그곳에서 감금과 학대, 강제노역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필롱은 그 사실을 알고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여자들이 학대받는 사정, 수녀원이 큰 거래처인 사정, 교회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믿을만한 몇몇 사람과 상의하지만 모두 필롱을 말립니다. 상당수가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교회에 도전하는 일이 저어되어서, 수녀원 눈밖에 나면 입을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미혼모의 일은 나와 상관없는 사소한 일이므로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롱은 학대받는 여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을 자신과 어머니가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석탄 창고에 갇혀있던 겁에 질린 미혼모를 탈출시키고, 자기와 상관없는 사소한 일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기로 합니다. 가시밭길이라는 걸 알았지만 세상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변화하므로.

필롱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고 교회가 운영하는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권유린은 전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전역에서 3만 명에 달하는 여성이 감금, 학대, 강제노역을 당했고, 18개 시설에서 9000명의 아이가 사망했습니다. 

교회의 조직적인 은폐로 이 엄청난 범죄가 밝혀지는데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결국에 진실은 밝혀집니다. 인권유린을 은폐하는 세력은 그것이 교회를 지키는 일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교회의 고위직이지 교회가 아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교회는 무신론과 공산주의, 성소수자의 공격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르시시즘에 익사한 나머지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동혁 목사(양천지방 만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