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문학과 지성사, 2003)

   책장을 뒤적이다 오랜 시집 한 권이 손끝에 걸렸다.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 ‘2003년 인천 영풍문고에서’ 산, 빛바랜 메모가 반가웠다. 시인은 젊은 날, 달랑 시집 한 권 남기고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집은 그가 떠난 뒤에나 출판되었다. 시간은 흘렀으나 그의 시는 여전히 그리고 강렬하게 살아있다.   

   처음 시인을 알게 된 건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 한편에서부터였다. 시인의 눈에 비친 교회, 목사, 마을 사람은 멀리 있지 않았다. 외롭고 쓸쓸하고 아프고 소외된 우리의 이야기였기에 동질감과 먹먹함으로 사무쳤다. 다분히 현실적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시인이 궁금했다. 서둘러 시집을 사 들고 하나씩 읽어 내려갔으나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는 않았다. “엄마 걱정”과 같은 가족애를 느끼는 감성적 시들 외에는 무척 낯설고 어색했다. 여러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시조차 쉽게 읽혀지지 않았다. 20대를 지나던 때에 만난 그의 시는 고민과 갈등을 더해가게만 했다. 마음이 눅눅해지고 그늘지는 무거움이 있었다.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슬픔이 뒤틀려 신음하는 것 같아 읽는 것만으로도 때론 어지러움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세월이 꽤나 지난 지금, 다시 읽는 그의 시는 사뭇 다른 경험으로 다가온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안양천 안개처럼 희미함이 걷히듯 가슴과 감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시인이 어릴 적 아버지는 그의 표현대로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 열무를 팔며 모든 생계를 떠안아야 했다. 누이는 성폭행 당한 후 처참히 죽음을 당했다. ‘찬밥처럼 빈방에 남아 훌쩍이며’ 그 시절을 보냈다. 아픔과 그리움은 시인의 온몸에 깊숙이 배어갔다. 사회는 개발의 논리에 폭력을 그대로 용인했다. 숨 쉴 수 없는 폭압으로 시대는 요동쳤다. 기자가 된 시인은 ‘어떤 말’을 해야 하지만 재갈을 물린 듯 그의 혀는 ‘검은 잎’으로 변해 쉽게 반응하지 못했다. 국가권력의 폭력이 개인의 순수한 삶을 쉽게 짓밟는 상황과 그 모든 것을 개인이 감당하고 견뎌야 하는 짙은 안개 같은 현실 가운데 시인은 고독했고 그럼에도 존재하고자 거리 위에 섰다. 그의 시는 시대 속의 소리 없는 몸부림이었다.   

   년도의 숫자만 바뀐 듯 세상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이젠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 삐걱대며 돌아가는 뉴스들은 오늘도 불편하게 밀려있다. 어떤 면에서 정계나 교계는 개인의 기본적인 바람이나 기대에서 저만치 퇴보한지 오래다. 본질은 뒷전이고 그들 입맛에 맞는 단순한 ‘스피커’만 고집한다. 기형도의 시를 다시 꺼내 읽은 것이 단순히 우연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시간은 지나고 사건은 과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훗날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저마다 감당하는 것이 도리이지 않겠는가.  

백성창 목사 (이천창전교회)

<우리 동네 목사님> 

_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건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 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 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근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 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입 속의 검은 잎>

_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섰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레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서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