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난다, 2017)

시집을 다 읽고서 충격에 휩싸인 적이 있다. 그의 시집은 페이지마다 진한 사랑의 마음과 깊은 슬픔이 비쳤고 나는 어렴풋이 이렇게 깊고도 슬픈 정서가 짙은 이 시인은 연배가 좀 있으시겠구나 했다. 그 시인은 박준, 그 시집은 바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였는데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시인은 1983년생이었다. 나와 나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시인이 어떻게 이런 시들을 쓸 수 있었을까 놀랐고, 그의 시는 오래도록 내 마음 속에 진한 여운을 남겨 종종 생각날 때 꺼내어 보게 되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책은 박준 시인의 첫 산문집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답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중)

시인은 누군가와의 대화를 나눌 때 한 문장 정도의 말을 기억하려 애쓴다고 한다. “뜨거운 물 좀 떠와라”라고 하셨던 외할아버지의 말이, 평소 좋아하던 원로 소설가 선생님과 다음 만남을 고대하며 했던 선생님의 인삿말이, 두 분의 임종을 보지 못했기에 보통날 나누었던 그 평범한 문장들이 그에게 유언이 되었다고 말한다. 꼭 먼저 죽은 이가 아니더라도 시절인연들이 남긴 마지막 말들 또한 이제는 만날 수 없으니 유언이 된 셈이라 표현한다. 내가 하는 말들도 언젠가 누군가에겐 유언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찔해졌다. 조금 더 사려깊고 조금 더 다정한 말들을 더 많이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폐가가 을씨년스럽거나 흉물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곳에서 불을 켜고 밥을 짓고 사랑을 하고 병을 앓기도 하며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보냈다는 것.
폐가는 자신과 함께 살던 사람의 시간을 풍장시키듯 서서히 기운다. 깨진 유리창과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바람을 마주 들이기도 하며. 
어디가 되었든 평당 천만 원이 훌쩍 넘는,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내쫓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는 도시와는 다른 모습으로 지금 태백은 있다. 사람을 보듬는 땅의 방식으로.
떠난 이를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 꼭 닮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다리는 일, 기억하는 일’ 중)

폐가를 지날 때면 왜인지 모르게 으스스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이 바쁘게 걸음을 떼었던 것 같다. 폐가를 이야기하는 시인의 시선에 그의 따듯하고 고운 마음이 느껴진다. 지금은 스러져가는 그곳도 언젠가는 가족들의 따듯한 온기가 그득했으리라. 

“나는 이렇게 외연을 넓히며 사는 삶을 그리 길게 이어나가지 못한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쉽게 지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며 맺는 관계에도 어떤 정량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 정량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나는 한 번에 많은 인연을 지닐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고독과 외로움’중)

결이 맞는 소수의 내 사람과 깊고 좁은 인연을 지향한다. 타국에 사는지라 자주 만나거나 자주 연락하지 못해도 평생 가고 싶은 연들이 내게 있다. 나이가 먹으니 시절 인연도 자연스럽게 잘 보내어주는 연습 중이다. 지금도 가장 내가 연연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나란 사람을 알아봐주고 서로 귀히 여길수 있는 인연들이 있기에 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나 한다.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선생님의 이 말은 당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삶의 장면 장면 마다 불러내는 말이 되었다.” (‘낮술’ 중) 

이 페이지를 읽으며 나이가 들면 스스로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구나 하고 시인에게 해주신 선생님의 따듯한 말씀이 나에게도 위안이 되고,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그동안 나는 참 많은 말들과 사람들과 시간들을 믿었다. 믿음이 깨지지 않은 말도 있었고 믿음이 더 두터워진 사람도 여럿이었으며 생각처럼 다가온 시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서 내 믿음은 해지고 무너지고 깨어졌다. 딛는 마음, 마음마다 폐허 같았다.
그렇지만 이 마음의 폐허에서 나는 다시 새로운 믿음을 쌓아올릴 것이다. 믿음은 밝고 분명한 것에서가 아니라 어둡고 흐릿한 것에서 탄생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밤이 가고 아침이 온다. 마음 속에서 새로운 믿음의 자리 만들어내기에 이만큼 좋은 때도 없다.” (‘마음의 폐허’ 중) 

우리 부부가 미국 서부에서 처음 타국살이를 시작했을 때, 이해되지 않는 수많은 상황들을 겪으면서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에 대한 기대나 신뢰가 사라졌다. 1000명 정도의 인구가 사는 위스컨신 시골 지역 작은 마을로 이사 오고서 우리 가족은 이곳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는데, 나는 타인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것보다 외로운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2년 정도는 감사로 보냈지만 3년 정도 되니 함께 기도할 수 있고 마음 맞는 한 사람이 정말 간절했다. 위스컨신에 온지도 이제 4년 차인데 지금은 마음 나누고 곁을 내어주고픈 있는 이들이 생겼다. 그동안 폐허였던 마음이 회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걸어 두었던 마음의 문을 다시 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나는 또다시 새로이 믿음을 쌓아가 보리라.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정중함과 예의를 잃지 않는 선생님의 태도를 좋아했다.” (‘소설가 김선생님’ 중) 

나 또한 상대방의 나이와 직업,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인 지위를 떠나 모두에게 한결같이 정중하고 예의 있는 태도에서 “진짜 어른”을 만났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일상의 공간, 여행의 시간’ 중) 

휴일이 없는 살림과 육아에 지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환기가 필요할 때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낯설거나 익숙한 여행지에서 때로는 긴장하고 자주 감탄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여행 후 다시 돌아온 우리의 집, 보통의 일상, 짐을 풀고 따듯한 물에 목욕한 후 여독을 풀기 위해 침대에 눕는다. ‘역시 집이 최고야’라는 말을 조용히 읊졸이며.

“생각해보니 초간장을 먹는 것은 아버지의 오랜 식습관이었다. … 아버지는 초간장만 살짝 찍어야 음식 맛이 살아난다며 자신의 먹는 방식을 어린 나와 누나에게도 권해왔는데 우리는 그때마다 케첩 같은 것을 푹 찍으며 웃어넘겼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초간장을 찾고 있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오랜 시간 보고 또 먹어온 몸에 배인 것이다. 
그러고는 곧 슬퍼졌다. 다른 양념이나 부재료 없이 음식을 먹어야 할 때 초간장만한 것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득 담은 따듯한 밥 한 공기와 초간장 한 종지를 유년의 아버지에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내내 아프기만 했던 속이 조금 편해지기 시작했다.” (‘초간장’ 중)

속병이 나서 아픈 속을 달래기 위해 끓인 밥을 먹다가 초간장을 만들어 밥 위에 뿌려 먹던 시인. 시인 아버지에 대한 단상을 써 내려놓은 글이다. 시인의 초간장 이야기를 읽다 보니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초고추장이 떠올랐다. 항상 작은 종지에 초간장을 준비하셨던 시인의 어머니처럼, 우리 엄마도 냉장고 한켠에 초고추장을 항상 만들어 놓으셨다. 보통 사람들은 삼겹살에 쌈장을 찍어 먹지만 우리는 초고추장을 찍어 먹었더랬다. 그게 우리에겐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가 식초가 들어간 음식을 꽤나 좋아하셔서 엄마는 여름이면 항상 미역냉국을 넉넉히 만들어 놓으셨고, 야참으로는 어묵을 노릇하게 구워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수 있게 내어주셨다. 또한 초가 많이 들어간 골뱅이무침도 자주 해주셨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가 동그랗고 투명한 유리 반찬통 가득 만들어두었던 달큰한 초고추장 맛이 가끔 생각난다. 결혼하고서 미국에 와서도 가끔씩 골뱅이무침을 해먹고, 여름마다 엄마가 해주셨던 미역냉국을 그리워한다. 이렇듯 집집마다 고유의 식문화가 있으리라.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엄마에게 레시피를 여쭈어 미역냉국을 만들어봐야겠다.

“살아오면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맞이해야 할 때가 많았다. 부당하고 억울한 일로 마음 앓던 날도 있었고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에는 스스로를 무섭게 몰아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 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오래 삶은 옷처럼 흐릿해지기도 하며. 나는 이 사실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 
다시 새해가 온다. 내 안의 무수한 마음들에게도 한 살씩 공평하게 나이를 더해주고 싶다.” (‘내 마음의 나이’ 중)

시간이 흘러 그대들의 앓던 마음도 조금은 흐릿해지고 무르익어 덤덤히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고아’ 중)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이 문장을 되뇌며 우리 모두가 가엾다고 느껴졌다. 그러니 서로 미워하지 말고 밀어내지 말고 사랑만 하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나온 시간들을 담담하고도 따듯하게 풀어낸 이 산문집의 제목 뒤에는 “같이 울자”는 말이 숨어있었구나. 등단한 직후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 시인. 제주 강정마을, 세월호 등 주요 사회 이슈들에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며 책 곳곳에서 시인만의 언어로 목소리를 내주어 참 고맙다. 자연스레 항상 내가 품고 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장의 이 말씀이 떠올랐다. 함께 마음 모으고 연대하는 마음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간혹 이런 작은 일들이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 오래 자란 나무가 갑자기 베어지는 일, 땅이 집을 잃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 자유롭게 흐르던 강물이 갇히는 일, 인간의 노동이 노동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일, 누군가의 죽음이 애도되지 못하는 일…… 
작은 일들은 작은 일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삼월도 지났다. 누구에게는 작은 일처럼 또 누구에게는 큰일처럼, 사월이 오고 있다. (‘작은 일과 큰일’ 중)

김은진 (윌로우리버 연합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