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김은국, 도경일 옮김, 문학동네, 2010)

순교자란 단어는 한국교회의 노스텔지어(nostalgia)다. 그 뜻처럼 신앙으로 살았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가 짙은 단어가 순교자다. 순교자를 숭배하고 순교를 강조한다는 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드물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치 옛 부귀를 곱씹으며 폐가망신한 가문의 후예처럼 말이다.

김은국의 순교자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평양 내 교회를 목회하던 12명의 순교자의 진위를 파악하는 과정으로 독자를 흡입한다. 이념의 대립으로 시작된 남북의 전쟁, 그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과 그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이들의 폭력과 살인. 서로 죽고 죽이는 고통 속에 삶이란 무엇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 끈질기게 묻고 답을 찾아가게 만든다.

키에르케코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정신 안에서, 자기 안에 있어서 병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즉 멸망하여 자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라고”라고 했다. 외력에 의해 절망한 이들은 자신을 포기고 생존만을 위해 살거나, 정신을 놓고 미치거나, 전체주의에 순종하게 된다.

전쟁이라는 극한 속에 너와 나로 구분을 지어 죽고 죽어야 한다면 제정신을 차리고 살기 어렵다. 나만을 위해 살거나, 나의 뜻을 숨긴 채 조직에 순응하거나, 미쳐야 질긴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전쟁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의 온상이다. 

“... 내 친구 목사를 만나고 그곳 교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나는 절망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삶의 어둔 감옥으로 던져 넣고 있는지를 보았소. 마을은 폭격과 포격을 당하고 석 달 사이에 두 번이나 털려 모두 알거지가 돼있었소. 젊은 남자들은 전쟁에 나가 죽고 딸, 누이, 아내, 어미 할 것 없이 여자들은 죄 강간당하고 먹을 건 없고 병자가 생겨도 돌봐줄 길이 없었소.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현실은 전쟁 중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삶 속에도 진행 중이다.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고 종교의 타락으로 신에게조차 기대기 힘든 전쟁같은 삶을 산다. 무한경쟁의 자본시장에서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는 게임의 법칙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오직 성공한 이들만 인정받고 살 수 있는 이 세상이 아비규환이다. 이 구렁텅이에 지치고 상처받아 절망에 빠진 이들 많다.

절망이 우리를 엄습할 때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며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방법은 없을까?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소설 속 신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난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던 겁니다.”

영화 쿼바디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다. 절망이란 급류에 몸을 내어주기보다 연어처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때 희망을 낳는다. 세상을 거스를 힘은 다른 세상에서 부여받는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린 그 절망을 때려 부수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단순한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절망이 자라잡고 있다. 정치, 경제, 언론, 종교,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 그 때 절망에 맞서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순교자다. 사람들은 한결같은 그를 통해 희망의 싹이 다시 자라고 있음을 본다. 다음의 문장이 가슴에 남는다.

“나는 그들 곁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그래 줄 사람이 없다면 나만이라도 남아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고 있고 나도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 (중략)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순교자는 자기가 믿는 신앙이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 뿐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여 불의와 맞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실천하는 모든 이들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을 치유하기 위해 온 세상을 형제애로 껴안고 어려움에 맞서는 무수한 얼굴들이 지나간다. 

이원영 목사(예장통합 총회농촌선교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