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문>, 이윤기, 열린책들, 1994)

숏폼이 대세다. 팝콘 브레인 세대다. 뇌가 현실에는 둔감하고 강렬한 자극에만 반응하는 현상을 팝콘 브레인이라고 부른다. 숏폼이 뇌의 회로를 변형하고 퇴화한다. 한 세대의 뇌가 기형적으로 역진화하고 있다. 기억력은 급감하고 집중력은 부서진다. 마비와 중독이 한 세대의 보편을 만든다면 장래가 어둡다. 30초 안에 답을 내놓으라는 조바심과 들뜬 풍조가 마음도 병들게 한다. 과잉 메시지가 영혼을 파괴하는 시대다.

메시지는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한 줄 메시지는 개인의 한 평생에 걸쳐 나왔다. 속담도 한 세대의 경험치가 반영된 촌철살인이다. 논점 없이 흐물거리는 메시지는 한 세대의 험준한 역사가 뒷받침되지 않아서였다. 서사가 실종되고, 담론이 소외되며, 은유의 빛이 바래고 있다. 2023년에는 AI와 6주간 대화를 나누던 30대 남성이 극단의 선택을 했다. 당시 AI가 던진 말은 천국에서 같이 살 수 있을 것, 이었다. 인간의 말랑한 심리가 기계의 딱딱한 명령에 종속되고 있다. 개인의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 종말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다.

정보들에 지치고 메시지 탈수 현상을 겪고 있다면 소설을 집어 들자. 거기 서사가 있다. 긴 호흡을 하는 법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맞춤형 처방이다. 

<하늘의 문>은 이윤기의 자전적(自傳的)인 소설이다. 한때 그리고 여전히, 그는 번역가이자 신화학자로 명성이 높다. 장편과 단편 소설가로서도 물론이다. 그가 번역한 대표 책들만 꼽아본다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칼 융의 <인간과 상징>,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 니코스 카잔자치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등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온 책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죽은 문장을 쓸 텐가, 펄펄 살아 있는 문장을 쓸텐가”

그의 말을 빌어서, 죽은 30초 영상에 시간을 뺏기지 말고, 펄펄 살아 있는 문장으로 영혼을 살찌우기를 바라며 <하늘의 문>을 펼쳐본다.

우선 적은 분량이 아니다. 글자는 크지만, 1,200쪽이다. 3권으로 나뉘어 있다. 주인공은 이유복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태어난 유복자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릴 때 이후 본적이 없는 자신의 아들 ‘미로’가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형식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유복의 인생사는, 이윤기의 인생사다. 그는 서울신학대학교를 다니다가 월남전을 다녀왔고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미국 유학을 하고 교수생활에 작가의 시간과 번역의 시간과 신화의 시간을 겹쳐 살았다. 숏폼에 중독된 세대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파란만장의 서사와 마주할 수 있는 소설이다. 과연 나의 인생도 한 권의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작은 충동이 생겼다면, 죽은 영상에 몰입하는 중독에서 벗어날 항체가 생긴 셈이다. 

30년 전에 읽은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하니 오랜 벗을 만나는 기분이다.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쓱쓱 거리며 화면을 넘기던 내 손을, 마치 오랜 친구가 덥석 잡아주는 것만 같다. 

소설 속 이유복이 친구인 백교수가 한국에 간 사이에 미국에 있는 백교수의 집에 머물던 기간의 일화다. 

- 나는 밖으로 나올 때마다 늘 손잡이의 단추를 누르거나 열쇠 가지고 나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이유복은 우연한 일로 열쇠를 집 안에 두고 나왔다가 문이 닫혀버리는 일을 겪는다.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문을 열려고 했다간 이웃 사람들에게 오해당하기 십상이었다. 

- 백 교수 집 앞을 지나는 경찰차를 발견하고 달려나가 그 차를 세운 것은 세 시간 넘게 비에 젖은 채 처마 밑 잔디밭에서 오돌오돌 떤 뒤였다. 나는 경찰관에게 길게 설명했다. 말이 짧은 사람은 설명이 긴 법이다. 
- 경찰관은 내게 말했다. “유 아 락트 아웃, 안츄(밖으로 갇힌 거군요)?”
- 락트 아웃 맨...
- 열쇠가 있는 낙원으로 열쇠 없이 들어가려고 하는 자.
- 사람은 안으로만 갇히는 것이 아니다. 그날 나는, 오늘의 종교를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비극을 체현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숏폼 세대는 아무리 자유와 번영을 산다고 해도 밖에 갇힌 세대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열쇠는 안에 있다. 긴 호흡으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자. 그 30초에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유성원 목사 (서초 주님의 몸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