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김승옥 역, RHK, 2013)

<약한 영웅>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공부밖에 모르던 전교 1등이 1진들을 물리치는 이야기입니다. 싸움에서는 체급이 깡패라고 합니다. 격투 경기가 세밀한 체급제로 운영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허약한 체구로 1진 무리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1진에게 없는 좋은 머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영웅이라하면 악의 무리를 물리치거나 추앙받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 추앙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엄석대 같은 일그러진 영웅도 탄생합니다.

어느날 서점에서 “출간 후 50년,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은 위대한 소설”이라 적힌 띠지에 홀려 집어온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흥미를 잃어 구석에 던져 놓았습니다. 첫 장부터 무시당하고 잊혀진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의 인생이 나같이 평범한 인생과 다를바가 없다면 그 속에 무슨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작가 존 윌리엄스는 이 소설을 통해 진짜 영웅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그 소설이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스토너>입니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주인공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업기술을 배워오라는 군청의 권유로 컬럼비아 대학 농과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영문학 수업에 매료돼 부모 몰래 전과를 하고 학위 과정을 밟아가던 중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전쟁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죽고 죽이는 전쟁이 탐탁치 않았던 스토너는 참전하지 않고 학업을 이어갑니다.

젊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고 강사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참전하지 않은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스토너에게는 영문학에 대한 열정, 탄탄한 기본기, 핵심을 관통하는 통찰이 있었습니다. 농부가 호미로 이랑을 고르듯 연구하고 강의하는 동안 그의 강의는 인기가 올라갔고 머지 않아 종신직 조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스토너의 인생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첫눈에 반한 여인과의 결혼생활은 처참했습니다. 이혼보다 처참한 실패는 평생을 원수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총명했던 딸은 알코올 중독에 빠집니다.

한 학생으로 인해 교수 커리어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찾아와 세미나에 넣어달라고 사정사정한 박사 과정 찰스 워커라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학기 내내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다 주제와 상관 없는 발표로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천재적인 말발로 때우는 발표였습니다.

문제는 그 학생이 학과장 로맥스 교수가 총애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찰스 워커가 자기를 쏙 빼닮은 천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학생을 스토너가 물을 먹였던 것입니다. 논문 전 치르는 구술 시험에서 찰스 워커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납니다.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고자 하는 학생이 스토너 교수가 던지는 기초적인 질문 조차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영악한 자의 천재성은 허약한 기본기를 감추는 위장 크림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스토너는 수준 미달자를 눈감아 주지 못한 정치력 미달로 로맥스와 철천지 원수가 됩니다. 이로 인해 스토너의 교수 생활은 은퇴하는 그 날까지 가시밭 길이 됩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쉴새 없이 몰려드는 감정은 애잔함입니다. 실패와 좌절이 촘촘하게 이어지는 스토너의 삶이 아무개의 삶을 펼쳐놓은 듯한 동질감을 줍니다. “놀라운 지혜와 용기로 악의 무리(아내, 찰스 워커, 로맥스)를 무찌르는 스토너를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묵묵히 견뎌내는 스토너의 삶만이 이어집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작가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의 인생에 대해 이런 인터뷰를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실패와 좌절이 많은 인생이지만, 엄청난 성공이나 명성을 기대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타협해서는 안 될 원칙이 무엇인지 알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아무개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안’ 일그러진 영웅이 아니겠는가. 오늘도 평범한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 아무개들께 박수와 갈채를 보냅니다.

만나교회 우동혁 목사(서울남 양천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