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세습>, 대니얼 마코비츠, 세종서적, 2020)

“능력주의는 결과의 배제뿐 아니라 기회의 배제까지도 유발하며 능력주의식 가치관은 물질적 피해도 모자라 도덕적 모욕까지 안긴다. 능력주의는 중산층에게서 훌륭한 교육과 보람된 일자리 기회를 박탈하면서도 학교와 직장에서의 성과를 고결한 가치로 포장한다.”(22)

  ‘능력주의 사회meritocracy’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자수성가를 이룬 사람을 향한 숭배도 만연하다. ‘you deserve’의 말의 쓰임이 1970년에서 2008년 사이에 3배로 증가했다는 통계도 유념할 만하다. 재능과 노력으로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긴 하나, ‘능력주의’와 ‘공정’의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스스로 이룬 것이라 여길수록 세금납부에 적대적이고, 노력이 부족한 낙오자들을 돕는 일에도 미온적이다. 감사의 마음이나 이웃과의 연대감은 약화된다. 차별에 찬성하고, 이주민의 유입을 꺼리게 된다. 여러 가지 포비아가 양산된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한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정의에 대해 고결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에게 대항할 수단을 빼앗아버린다. 더욱이 정체성 정치에 대한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의 찬양은 어중간한 숙련도를 지닌 노동력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과 결합해 존중받지 못하는 백인들 사이에서 소수자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일으키고 있다.”(141-2)

  대니얼 마코비츠는 <엘리트 세습>을 통해서 능력주의 사회의 민낯을 들추어낸다. 기본적으로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분석이지만, 우리 정서에도 크게 이질감이 없다. 과거에는 귀족들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하면서 특권을 누렸다면, 오늘날에는 능력을 세습하고 있다는 것이 책의 논지다. 기실, 이 능력주의는 불공평한 혜택 분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허위일 뿐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능력주의의 함정’이라는 원제에 걸맞게, 자녀를 피 말리는 교육경쟁으로 내몬다는 점에서 스스로 올무에 빠지는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능력주의 윤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인과응보, 내가 이만큼 열심히 공부했으니, 이 정도 학력에, 이 정도 자격증을 지녔으니, 이만큼의 보상과 성취를 누려야 한다고, 저 사람은 나보다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나보다 낮은 처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출발점이나, 진학을 위해서든 학업을 위해서든 획득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부모에게 대물림 받은 ‘인적 자본’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능력주의의 마력은 그 해악을 은폐하고 그에 따라 능력주의로 인한 좌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해방을 불러온다.”(32) 세상은 정해진 도식처럼, 각자 능력이나 노력에 맞게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많은 소설가들이 부조리극, 비극을 써오고 있고,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누군가의 불우한 처지에 공명할 수 있는 것은,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궁극적으로 <엘리트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 지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외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된 지 오래지만, 실질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지 않은가. 정부와 고위관계자들은 시민을 정치적으로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다. 자산가와 재벌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경제 불평등은 정치 불평등을 낳고 능력주의는 민주주의를 훼손한다.”(128)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