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론>, 최재천, 김영사, 2024)

한 학생이 책상에 앉아 낑낑거리며 수학 문제를 풉니다. 저에게 도움을 구하길래 함께 문제를 푸는데 그 학생이 단순한 실수를 반복합니다. 늘 열심히 노력하는데 그만큼 성취가 따르지 않는 모습이 눈에 밟히는 학생입니다. 어느 날 수학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제가 그 학생 얘기를 했습니다. 매양 열심인데 실력이 늘지 않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느려서 늦게까지 숙제에 매달려 낑낑거리는 거리는 모습을 모든 선생님이 알고 있는 터라 얘기를 꺼내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안쓰럽기는 하고 딱히 도울 방도는 떠오르지 않는 제 자조 섞인 탄식에 가까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걔한테 좋아요.”라고 수학 선생님이 대답합니다. 그야말로 ‘심쿵’의 순간입니다. 수학 선생님의 어조는 잔잔했지만 제 머리를 종처럼 때렸고 그 잔음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노력하기 때문에 응당 수학 실력이 늘어야 하고 다른 친구들의 진도와 속도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은연중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학생이 수식에 안다리를 걸고 잡채기를 하며 안간힘을 쏟는 것 자체가 그 친구에게 의미 있고 유익하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학생에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고 장애인에게 행복은 발달순이 아니라고 알고는 있었는데,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게 들통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필자는 대안학교에서 가르치지만 대안적인 시선과 방법을 온전히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계속 고민할 따름입니다. 주입식 수업을 벗어나려고 토론식 수업을 해도 늘 한결같은 방해 요소 때문에 토론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방해 요소는 다름 아닌 제자신입니다.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듯한 자세, 정해진 방향으로 몰아가고 싶은 제 욕심이 늘 토론 수업의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최재천의 <숙론>은 토론 수업의 방해물이 되었던 제 모습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했습니다. 

최재천은 많은 저술과 강연으로 유명한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입니다. 그는 토론(討論)이 본디의 뜻과 다르게 토의(討議) 보다 논쟁과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다며 기왕에 많이 오염된 용어인 토론 대신 숙의(熟議)나 숙론(熟論)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숙론>이라는 책을 통해 그가 수많은 학문과 위원회 활동에서 숙론을 이끈 예시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저자는 한국의 사회나 교육에 관해 그가 진단하는 문제점과 개선 방법에 관하 말합니다. 특별히 단체나 사람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졌을 때 어떻게 합의나 의미 있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숙론’을 통해 방법을 제시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누군가의 독단으로 움직이면 불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교회나 사회의 어떤 조직이라도 리더가 구성원의 의견을 도통 듣지 않는다면 그 조직은 생기를 잃고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구성원의 의견을 다 수행한다면 그 공동체는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없을뿐더러 정체성을 잃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더가 숙론을 잘 이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공부할 때도 의도와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그 공부가 깊어질 수 없겠습니다. 쓸데없는 조바심을 조장하는데 일조했던 제 모습을 반성하며 다음 학기에 학생들과 숙론을 나누며 수업시간을 즐길 기대를 가져봅니다. 

김국진 목사(산돌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