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삶이 될 때>
- 김미소, 한겨레엔 

“이 책은 미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박사과정을 마쳤고, 지금은 일본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삼십 대 여자 한국인 교수의 기록입니다.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고 쓴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써 내려 간 글의 모음입니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들어가는 말 중에서도 가장 첫머리에, 저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며 글을 시작한다. 이 사실은 주목할만 한데, 이후로도 여러차례 저자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서있는 자리는 어디인가’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책 내용의 전부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제2언어, 제3언어가 이끌고 오는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선 자리가 계속 달라진다는 뜻이기에 그렇다.
 
   익숙한 모국어의 품 안에서 벗어나 낯설고 불친절한 외국어 사이를 헤쳐가야 할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 서로 다른 언어가 부딪힐 때 생기는 오해와 균열, 내가 모국어로 쌓아놓은 지식과 커리어와 인간관계가 무용해질 때 느끼는 절망감, 그리고 새로운 언어로 한 땀 한 땀 천천히 엮어가야만 하는 관계들. 이런 것들을 거듭 경험하다보면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라는 질문이 절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아마 외국어를 반드시 익혀야 하는 환경에 놓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어찌보면 그것이 외국어 공부의 매력이자 목표점이기도 한 것 같다.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외국어 공부라면 말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타인의 선 자리를 이해해야 하고, 나의 선 자리를 점검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위치와 눈높이를 조절하기도 하면서 맞춰나가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려면 나에게 익숙한 것들, 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내려놓는 것이 꼭 필요한데,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딱 그와 같다. 

“모국어로 쌓아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전자책, 32쪽)

“다 큰 성인이 하찮음을 견디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자아가 이미 자기 키만큼 성장해버린 성인에게, 겨우 한 뼘 되는 외국어 자아로 살아가라고 하면 절망스러운 게 당연하다. 어제도 하찮음, 오늘도 하찮음, 아마 내일도 하찮음. 이걸 어떻게 견디라는 말이야. (전자책, 114쪽)

   이 구절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외마디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 역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을 벗어나 외국에 살며 외국어를 익혀야 하는 입장에서, 매일같이 ‘하찮음’을 느끼며 산다. 이전의 내가 착실하게 구축해왔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 빠져 나가듯 사라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꽤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인데, 분명한 건 그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소통을 위한 토대가 마련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어를 학습하고 있는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익숙한 자아에서 벗어나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그냥 외국어를 배울 뿐인데 뭐가 이렇게 거창하냐고? <언어가 삶이 될 때> 이 책을 읽어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외국어를 배울 용기와 흥미도 얻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 정유은 (고난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