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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아빠 부재가 상처였던 정푸름 교수
최윤희  |  aa2291415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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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년 06월 03일 (월) 21:49:54
최종편집 : 2024년 06월 04일 (화) 17:41:23 [조회수 :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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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아빠 부재가 상처였던
정푸름 교수

“진실 되게 상처를 내놓다 보면 치유가 될 거예요”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에서 ‘전인치유상담’과 ‘다문화와 여성’을 가르치고 있는 정푸름 교수. 우아한 외모에 고급스러운 단어를 구사하는 그녀를 보면서 상처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상처가 있었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의 미국 유학으로 인한 부재에 대한 상처이다. 그것이 어떤 상처로 작용했고, 상처로 인한 후유증은 무엇이었는지 지금부터 들어보자.

글. 최윤희 │ 사진. 이종관

   
 

아버지의 부재

“저는 언어가 좀 늦게 터졌어요. 어린아이의 기억은 언어와 함께 저장되거든요. 물론 몸에 저장되는 것도 있지만. 저는 언어가 늦게 터지다 보니까, 아버지가 없어진 현상을 언어로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장을 못한 거예요. 제가 기억이 생긴 이후로는 아버지는 항상 안 계셨어요. 아버지는 항상 사진 속에서나 계신 분이셨고, 가끔 미국에서 오는 녹음테이프와 편지로만 계신 분이셨어요. 그때 우리 집에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어서 다른 분에게 빌려서 들었는데, 저는 아빠라는 직접적인 경험이 없으니까, 그 내용을 다 이해하거나 귀하게 와 닿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일상생활 얘기를 한참 하시다가 ‘하늘에 대고 너희 이름을 불러본다’며 나와 관련된 얘기를 하실 때만 잠깐잠깐 들렸던 것 같아요.”

2살 때부터 아버지가 안 계셨으니,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때라 아버지에 대해 직접적인 느낌을 받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을 때도 한두 줄 쓰면 더 이상 쓸 게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어서 힘들었다’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한다.

 

글로 먼저 깨닫다

“제가 상담 공부를 했으니까, 부모랑 자녀가 떨어져 산다는 것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글로 먼저 깨달았어요. 이런 걸 전문용어로 ‘대상 경험의 부재’라고 하는데, 아이에게 이것이 어떤 경험인지에 대해 제가 이론으로 먼저 배웠고, 점점 나이가 들수록 ‘그 부재 경험이 이런 거였구나’라고 더 알아가는 것 같아요. 한 10년 정도 됐을까요? 그전까지는 아버지 없는 경험을 상상 속에서 ‘이런 거였을 거야’하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는 이론과 접목해서 깨달았던 것 같아요.”

 

엄마는 늘 부재중

아버지는 미국에 공부하러 가시고 생활비를 벌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교회 심방 전도사를 하셨는데, 집에 안 계실 때가 많아 늘 세 살 많은 언니랑 일하는 언니랑 셋이 있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미국에 공부하러 가시면서 어머니가 심방 전도사님으로 일하게 되셨어요. 저희가 출석하던 교회였는데, 어머니는 늘 새벽기도 가시고 심방 가시고 장례 가시느라 바쁘셨어요. 저는 어머니랑 어린이날 뭘 해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제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린이날 어머니랑 어디를 가기로 했던 것 같아요. 어린이날은 얼마나 기대가 돼요? 물질의 풍요는 항상 없었으니까 특별한 걸 기대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뭘 하자’ 이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교회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 어머니가 빨리 나가셔야 했어요. 아마 장례가 났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우리를 빨리 중국집에 데려가셔서 자장면을 사주시고 우리는 집에 가고 어머니는 출근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 정도로 어머니는 항상 바쁘셨고, 어머니는 항상 부재중이셨어요.”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옆에 있어야 안정도 되고 편안한데,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었으니 얼마나 불안정한 생활을 했을까?

 

생활고에 시달리다

“우리 네 식구는 어머니 월급으로 살아야 하니까, 아주 높은 지대에 있는 집에 수돗물도 안 나오고, 화장실도 밖에 있는 단칸방에서 살았어요. 전화도 없어서 전화가 오면 주인집으로 전화 받으러 갔던 기억이 꽤 많아요. 짐도 거의 없어서 그 당시 비키니 옷장이라고 불렀던 것 하나와 책상 하나밖에 세간살이가 없었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어린 시절 책도 없고 장난감도 없었다.

 

교육열 높은 엄마

그녀의 어머니는 굉장히 교육열이 높았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저희를 피아노를 가르쳐주셨어요. 교회 전도사님이셨으니까 교회 성가대 지휘자님께 부탁해서 저희가 피아노 레슨을 받았어요. 그래서 언니는 피아노 전공을 할까도 생각할 정도였어요. 게다가 저희 형편에 저희가 어떻게 사립학교를 가겠어요. 그런데도 어머니는 저희를 교회랑 연관된 사립학교에 입학시켜서 교육을 시켜주셨어요. 어머니의 높은 교육열 때문에 언니랑 제가 둘 다 박사학위를 받게 됐어요. 어머니는 딸들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한 분이셨어요.”

 

멍하게 지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게 가만히 있는 게 굉장히 익숙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제가 자란 곳이 안양이고 제가 기억하는 선에서는 흙 땅이 없었어요. 다 시멘트로 발라진 공간들이었어요. 그때 안양은 도시화됐고 서울에 이사 와서는 언덕배기에 있는 단칸방이 무슨 자연이 풍요롭게 있는 곳이었겠어요? 그러니까 자연에서 오는 접촉이 없는 거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시멘트벽을 오래 보고 살아서, 그 정해진 공간 안에서 제가 재미있게 놀아본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언니는 늘 집안일 하기 바빴어요. 그러니 제가 얌전히 가만히 잘 있었겠죠? 어릴 때부터 그게 익숙하니까 나가도 교회 앞에 살짝 나갔다가 다시 집에 들어오는 게 전부였어요. 아이들하고 놀지도 않았어요. 멀리 나가면 안 되잖아요. 어린이집을 가는 것도 아니고, 유치원을 가는 것도 아니고, 누가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는 이상, 제가 게네들 집에 가기엔 너무 어리잖아요. 제가 그나마 사회성이 생긴 건 저희 외할아버지 집에서 1년을 살았는데, 그곳에 삼촌이랑 이모들이 있고 옆집에 친구도 있고 해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사회성이 생긴 거지, 그전까지는 자극을 잘 못 받는 아이었어요.”

 

언니가 엄마가 되다

그녀는 언니 얘기를 꺼낼 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만큼 언니와의 관계가 특별했기 때문이리라.

“저는 왜 언니 얘기만 하려고 하면 이러는지(눈물 나는지) 모르겠어요. 언니가 어머니가 바쁘셨기 때문에 실질적인 저의 어머니 같은 분이었어요. 언니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재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어요. 언니도 원하지 않았겠죠. 근데 어쩔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저에게는 언니가 너무 중요한 대상이 돼버렸어요. 언니에게는 또 제가 책임져야 되는 어마무시한 대상이 돼버렸고요. 저는 강의할 때 이렇게 표현해요. ‘언니가 더 이상 언니일 수 없었던 날이었다’고요. 그래서 둘이 너무 친했어요. 언니는 저를 정말 잘 챙겨줬고, 커서는 맨날 ‘뭐 먹을래?’ 하면서 요리를 해줬어요. 그렇다고 맨날 끼니를 챙겨준 건 아니었지만요. 저는 그래서인지 언니 말을 제일 잘 들었어야 했어요. 아니, 너무 잘 듣고 싶었어요. 중요한 사람이잖아요. 저한텐 어머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잖아요. 어머니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고, 자주 있고, 더 직접적으로 있고, 저를 낱낱이 더 잘 알고 있고, 그러니 언니 말을 잘 들어야죠. 어머니 말은 안 들어도... 언니 말을 듣기 싫어서 막 언니한테 반항해 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커서는 모를까? 어릴 때는 언니 말을 잘 듣는 게 최선이었어요. 언니가 나를 안 챙기면 세상 슬펐어요.”

 

   
 

언니에게 매달리다

이해가 됐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재인 상태에서 하나밖에 없는 언니는 그녀의 엄마이자 하나밖에 없는 보호자였으니 언니를 가장 중요한 존재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언니가 4학년 때였어요. 언니가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아서 가는데 조금 멀리 가야되는 거예요. 애 걸음으로 한 20분 정도 걸어가야 되는 거리였어요. 언니 친구 생일파티를 제가 항상 쫓아다녔어요. 그런데 언니가 그날은 데리고 가기 싫다고 하는 거예요. 문밖에서 ‘진짜 나 오늘은 혼자 갈 거야’라고 얘기를 하는데, 제가 지금 언니를 떠나보내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절박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결국 언니는 어쩔 수 없이 저를 데리고 갔어요.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언니도 혼자 가고 싶었을 텐데... 가면 저를 또 챙겨야 하고... 언니도 4학년인데 저를 어떻게 챙겨요? 근데 저를 안 챙기면 언니도 너무 불편할 거 아니에요?”

 

언니랑 공유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언니랑 관계가 중요해지다 보니 그런 관계가 너무 익숙해졌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언니와 공유하는 기억이 되게 많단다.

“제가 미국에 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 당시 미국 생활을 한 사람이 주변에 거의 없었어요. 해외 생활을 한 사람이 그때는 정말로 없었어요. 그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었어요. 저희가 언어를 영어랑 한국어를 섞어 썼거든요. 그걸 긴밀하게 포착해서 그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언니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언니랑은 어떤 연대감이 오래 지속됐어요. 그러다 보니 둘이 굉장히 친했고, 대학 가서도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가 저희는 같은 교회를 다녔는데, 한 명이 늦게 오면 서로가 자리를 맡아놓을 정도였어요. 저희는 공동체에서 그런 행동을 많이 하고 다녔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언니랑 저를 자랑하고 다녔어요. ‘쟤네들은 너무 친해요’, ‘얼마나 친한지 몰라요’, ‘쟤네는 싸워본 적이 없어요.’ 이게 우리 엄마가 밖에서 하는 우리 자랑이었어요.”

 

역기능 가족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중에 상담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게 그녀의 가정은 ‘역기능 가족’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희는 안 싸운 게 아니고 못 싸운 거예요. 언니는 저를 책임져야 되고, 저는 언니 말을 잘 들어야 되고, 그런 관계가 돼서 우리가 못 싸운 거지 안 싸운 게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이 관계를 이별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싸우고 나면 이별해야 되는데 ‘그럼 난 누구를 의지하지?’라는 게 심각하게 작용했어요. 만약에 오빠나 남동생이 있었다면 언니랑 싸웠을 거예요. 그런데 둘만 있으니까, 언니랑 싸우면 이 관계는 이제 끝인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홀로서기를 해야 될지 감이 없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감당해요? 그래서 못 싸우는 거죠. 그러다 보니 안 싸우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살면서 어떻게 갈등이 안 생겨요? 티격태격은 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얘기는 안 하고 넘어가는 거죠. 그걸 서로 직면할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이게 상처였다

언니랑은 생존 때문에 묶인 관계라 어쩔 수 없이 강한 연대감으로 이어져 나갔다.

“그 관계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었어요. 당시는 그게 생존의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고, 너무 편안해지기도 하고, 게다가 우리 가족 구조가 엄청나게 뭘 서로 흔들어서 막 강하게 부딪혀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방식이 아니에요. 이게 아버지 없이 산 모든 사람의 상처죠. 이게 저의 상처이기도 하고, 어머니, 아버지의 상처이기도 하고, 언니의 상처이기도 해요. 한마디로 우리 가족의 상처인 거죠. ‘우리는 한번 엄청나게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으니까 다시는 힘든 시간이 있으면 안 돼.’ 그런 어떤 무언의 메시지였던 것 같아요. 실제로 노력해서 얻은 평화이기도 하고, 부모님이 엄청나게 애써서 얻은 평화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이 평화 깨지 마!’ 이런 어떤 무언의 약속 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는 거죠.”

 

아버지 부재에 대한 후유증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를 많이 기다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기다리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제가 누구를 잃어버려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가 지쳐서 중요한 대상을 안 만드는 습관을 들였어요. 기다리는 게 얼마나 싫었겠어요? 중요한 대상이 상실됐을 때는 그 중요한 대상이 ‘빨리 오면 좋겠다’, ‘이 경험이 빨리 다시 회복되면 좋겠다’를 제가 굉장히 간절하게 원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중요한 대상을 만들지 않는 습성을 제가 체득했어요. 그래서 제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을 별로 만들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니까 친구들도 단짝이 있긴 했는데, ‘얘 없으면 나는 못살아’ 한 친구는 없었어요. ‘단짝이 없으면 그런대로 또 적응해서 다른 단짝을 만드는 거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엄청난 상실감을 만들질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그런대로 적응해서 ‘그게 뭐 엄청나게 나에게 큰 상실감이야?’라고 생각해 보질 않았던 것 같아요.”

 

아빠는 훌륭하신 분이야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늘 좋은 말로 자식들에게 희망을 줬다고 한다. 때문에 아빠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부재하셨지만,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을 하러 가신 거잖아요? 공부하러 가신 거는 미래가 있는 거잖아요? ‘공부하고 오셔서 뭔가 훌륭한 일을 하신다’라는 어떤 미래가 있는 거잖아요? 저는 뭔지는 몰랐지만, 어머니한테 ‘아버지는 엄청나게 미국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 분이야’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어른이 왜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제 주변에 아버지들은 공부를 안 하잖아요? 회사 다니거나 가게를 하시거나...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공부를 하신다는 거잖아요? 그때는 미국에 간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미국에 간 우리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던 거예요. 우리 삶이 너무 어려우니까 그런 생각을 했겠죠?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 없는 딸들을 돌보시면서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어디서 경제적인 지원이 오는 것도 아니고, 심방 전도사 해서 애들을 가르치고 먹여 살리려니 그 부담이 이루 말할 수 없으셨겠죠. 그러니 우리 어머니에게 엄청난 희망이 필요했겠죠. 그 희망이 당연히 아버지가 되셨고, 저희가 행여나 아버지를 잊어버리거나, 아버지라는 대상을 저희가 생각하지 않을까 봐 두려우셨던 것 같아요. 제 추측이에요. 우리 어머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분이셨으니 그냥 ’아버지가 훌륭하신 분이야‘,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사람들한테 칭찬받는 분인 줄 알아?‘ 이런 얘기로 우리를 안심시키신 거겠죠? 그래서 실제로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 생각이 오래갔어요.“

 

   
 

드디어 아빠를 만나다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어땠을까?

“낯설지만,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어요. 사진에서 보고 처음 본 거죠. 아버지는 ‘얘네들하고 어떻게든 내가 다시 친해져야 돼’라고 작정을 하고 저희를 만나신 것 같았어요. 태도가 시종일관 따뜻하셨거든요. 왜 그렇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상황 때문에 짜증 날 수도 있고 원래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항상 말과 태도와 눈빛을 따뜻하게 하셨어요. 아버지는 인자하시고 온순하시고 큰소리 내는 법도 없으셨어요.”

 

아빠가 노력하시다

오랫동안 자식들과 떨어져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미안할 거다. 그리고 그동안 못했던 것을 많이 해주리라는 마음이 강할 것이다.

“아버지는 한 1년 정도를 일주일에 하루를 날을 정해서 저녁 식사를 항상 준비해 주셨어요. 약식이긴 하지만, 음식을 만들어주셨어요. 그게 저에게는 아주 오래 남아있는 좋은 기억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이 정도까지 했어’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평소에 요리를 하시는 분이 요리를 해주셨다면 감흥이 덜했을 텐데, 그렇지 않은 분이 매주 한날을 정해서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해주시고 우리가 다 같이 둘러앉아서 밥을 먹으니까, ‘엄청난 노력을 하신 거구나’하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늘 일하신 엄마

그녀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일을 하셨다고 한다.

“저희가 가족으로 함께 살면서 돈이 갑자기 생기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 생활고가 계속됐어요. 아버지가 혼자 살면서도 방학 때 일을 서너 개씩 하면서 사셨대요. 학교 잔디를 깎는다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벨을 눌러주는 일을 한다거나, 부잣집 청소를 한다거나, 교회 청소를 한다거나... 엄마도 미국 간 지 한 일주일 만에 세탁공장으로 일하러 가시고... 어머니를 데리러 간 첫날이 기억나는데, 어머니가 한 4시 반쯤 퇴근하셨어요. 미국은 차가 없으면 못 오니까 어머니를 데리러 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랑 언니랑 저랑 차를 타고 어머니 공장으로 갔는데, 어머니가 저 멀리서 걸어 나오시는데 완전히 진이 빠진 모습으로 나오시는 거예요. 미국 온 지 일주일 만에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첫 출근을 해서 긴장하고 일을 하셨을 테니 얼마나 힘이 드셨겠어요? 아마 어머니는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되나?’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어머니의 하루 만에 진이 빠진 것 같은 얼굴이 저는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요. 어머니는 그걸 시작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기 며칠 전까지도 일을 쉬어보신 적이 없어요. 게다가 양로원 청소도 하시고, 큰 교회 주중 청소, 주일 청소까지 하셨고 다른 일도 무수히 많이 하셨어요.”

 

화장실 청소까지 하신 아빠

미국 이민 생활하는 사람치고 고생 안 해 본 사람 없다고 하지만, 정작 얘기를 들어보니 너무 고생을 많이 해 마음이 짠했다.

“아버지는 학생이라 저녁에 할 수 있는 일이나, 학교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셨어요. 저희는 그때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그 당시 아버지는 학교 도서관 청소를 하셨는데, 저희를 아침 일찍 태우고 가시는 거예요. 학교 시작 한 시간 전에 저희가 같이 갔던 것 같아요. 그러면 아버지가 도서관 청소를 하세요. 기억에 남는 장면 중에 몇 개는, 그 전체 청소를 혼자 하셨던 것 같은데, 4층 건물인가 그랬어요. 그런데 화장실 청소를 하시면서 손을 화장실 변기에 넣고 아무렇지도 않게 변기를 닦으셨어요. 게다가 큰 쓰레기통을 가지고 다니시면서 쓰레기통을 비우시고 카펫도 일일이 청소하셨어요. 많이 힘드셨을 텐데도 힘들지 않게 하셨어요. 심지어 노래도 하시면서 하셨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우리는 ‘아버지가 힘든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이 별로 없었어요. 우리는 어려서 그랬겠죠? 아버지 청소는 도울 생각도 못하고 위 아래층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니면서 놀았어요. 그렇게 아버지는 1시간 동안 청소를 하시고 저희는 재미있게 놀고 아버지가 저희를 학교에 데려다주신 일이 있어요. 저희에게는 아버지의 그런 성실한 모습 때문에 아버지를 단 한 번도 창피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상처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도 그렇고 무의식적으로도 그렇고 상처를 꺼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 생활은 그냥 같이 살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고 매일 매일이 즐겁고 좋았거든요. 그리고 한국 나와서는 아버지가 비교적 안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계셨고, 저희도 아버지 덕분에 지위가 상승된 거잖아요. 예전에 단칸방에 살던 시절이 더 이상 아니잖아요? 그리고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아이들의 관심을 많이 받고. 그러니까 ‘내가 무슨 상처를 꺼내?’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상처를 꺼내게 되다

그런데 대학원에 와서 교수를 하다 보니 상처 입은 분들이 너무 많아서 자연스럽게 상처를 꺼내게 되었단다.

“제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매일 듣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걸 들어주는 사람, 그것에 대해 해결책을 주는 사람이라는 자세로 대했어요. 제가 그분들 앞에서 제 상처를 꺼낸다는 것에 대해 상상을 못 해본 것 같아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까 그 얘기를 듣는 것도 너무 죄송한 거예요. 나중에는 듣는 것도 너무 교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가 뭐라고 저런 얘기를 듣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분들은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이야기들을 이렇게 와서 오픈하고 나눠주는데, 그 얘기를 제가 감히 듣고 앉아 있는다는 게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분들은 저에게 100을 던져주는데 저도 뭔가 내놔야 페어 게임이 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저도 제 얘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그분들의 아픈 얘기를 들으면서 가식적으로 얘길 할 수는 없더라고요. 진심이 아닌 얘기를 행여 수업의 어떤 거리로 꺼내거나,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꺼내거나, 아니면 무슨 상처 팔이 하듯이 그냥 사람들을 혹하게 하려고 마치 내 상처를 꺼내거나 한다면 그건 사람의 자세가 아니더라고요. 물론 그것도 꽤 했어요. 그런데 할수록 너무 죄송해지더라고요.”

 

상호작용이 일어나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단다.

“제가 제 상처 얘기를 수업 시간에 하니까, 어떤 분이 ‘교수님도 상처가 치유가 안 되셨네요?’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 얘기를 다 꺼내는 것도 능사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됐고, 제 얘기를 듣고 ‘어떤 분들은 희망이 없어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됐어요. 그런데 내 상처이고 내 얘기도 진심이잖아요?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제 상처를 조금 더 진실하게 얘기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저를 바라보는 것도 조금 더 하려고 하고 있고요. 우리 학교는 영성 수련이나 수업 시간에도 서로의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상처의 길이 열리고, 또 가서 닿고 그러면 새롭게 보게 되고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거죠. 치유 상담이라는 것 자체는 삶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지 않으면 서로에게 그 어떤 접촉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진심, 이야기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야 되는 거죠. 저는 그 덕을 본 거예요.”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상담을 강의하는 상담학 교수로서의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궁금했다.

“상처라는 것은 안전한 공간에서 나누어야 해요. 상처는 너무나 강렬한 아픈 경험이기 때문에 내가 혼자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점점 더 아주 강하게 굳어요. 생각이라는 것도 기억이라는 것도 굳어요. 그런데 생각이라는 것이 약간 틈이 벌어지면 거기에 새로운 생각이 들어가서 그 생각이 다시 뭔가 재구성이 되어야 하거든요. 내 이야기라는 것이 그렇게 굳으면 10년, 20년, 30년 점점 더 균열을 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그 사건은 누가 잘못한 사건이라고 생각해서 더 이상 벗어날 수가 없어요. ‘걔가 거기서 그렇게만 안 했어도...’하고 굳어버린다고요. 근데 이것을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서 재구성이 돼서, 거기에 좋은 생각들이나 조금 다른 어떤 생각들이 같이 섞여서 조금 재구성이 돼서, 이것이 희망의 이야기, 나의 삶에 일어난 어떤 나의 이야기로 그냥 내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요. 이건 아픈 이야기지만, 그런데 이걸 나누지 않으면 균열이 생기지 않잖아요. 틈이 벌어지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 나눔을 아무 데서나 하면 이게 더 단단하게 굳어버려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공간, 아니면 이야기를 작정하고 들어주겠다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공간 등이 안전한 공간이에요. 누구 붙잡아놓고 내가 얘기하면, 그 사람이 내 얘기 안 듣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안전한 공간이 아닐 수도 있죠. 치유가 된다는 건 그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잊히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그 경험과 그 상처를 내가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그것도 치유예요. 내가 예전에는 너무 아픔으로만 바라봤는데, ‘이제는 거기에 다양한 것이 함께 있었구나’, ‘그곳에서도 민들레가 피고 있었네’라든가, ‘그럼에도 희망의 어떤 삶이 되어지고 있었네’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면 그게 치유의 시작인 거죠.”

 

치유는 끝이 없다

그녀는 치유라는 것은 끝이 없다고 했다.

“치유는 계속되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이 과정을 내가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치유를 내가 오늘 끝을 봐야겠다’라는 개념은 없는 거죠. 그래서 내일은 오늘보다 더 치유가 되고, 계속해서 되어가는 과정이어야 하거든요. 그 은혜를 매일매일 맛보면 너무 좋잖아요.”

그녀가 깨달은 치유에 대해서 들어보니 역시 치유는 상처를 직시하고 진실하게 바라보고 희망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상처는 끝이 없듯 치유도 끝이 없다. 단지 과정을 통해서 계속 치유의 과정을 걸을 뿐이다. 이것만 해도 희망적인 일 아닌가? 상처 안에서 계속 담금질하지 말고 상처 안에서 나와서 안전한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다 보면 언젠가는 상처 입은 우리도 치유의 종착점에 도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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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계간 ‘치유’ 7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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