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순 지음, 『하나님과 무(無)_그 천의 열굴』, (서울: 동연, 2024)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담론이다. 이 담론의 가능성이 세속화와 무신론, 허무주의와 과학주의의 도전으로 쉽게 풀리지 못했다. 고전적 삼위일체론의 재해석을 통해 기독교의 고유한 신론을 다시 정립하려는 현대 신학계의 노력은 새로운 출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서양의 전통적 존재론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면서 신론을 탐구하려는 인식론적 노력 또한 필요하다. 서양의 철학적, 신학적 인식은 존재에 관한 물음으로서의 존재론에 집중되었다. 신에 대한 물음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에 관한 물음으로 교환되었다. 

박혁순 박사는 오랜(5년) 연구 끝에 나온 이번 저술은 어느 특정한 시대나 인물에 국한된 연구가 아니라 대안적 신론을 탐구하는 연구이다. 대안을 찾는 탐구의 눈은 존재나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놀랍게도 ‘무’(無)이다. 두 대체 ‘무’ 안에서, ‘무’로부터, ‘무’를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전통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존재론적 용어인 존재 자체, 존재의 힘, 존재의 근원 등으로 말해져 왔고, 무는 존재의 반대 개념으로 여겨져 왔던 바, 그 반대 개념을 통해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가? 그동안의 사유 방식의 해체와 재구성을 요구한다.  

유럽과 영미의 현대신학에서는 60-70년대 신론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숲을 이루었다. 19세기에 극성을 부린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의 무신론과 허무주의 그리고 세속화로의 평정은 신의 주변화, 부정, 심지어 신의 죽음으로 내몰았고, 그런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신론은 교회와 신학의 긴급한 요청이며 과제였고, 탈출구로 십자가 신학과 삼위일체론의 부흥을 통해 새로운 신론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입때까지 신학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박혁순 박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무’를 내건다. 이열치열인가? 무신론과 세속화 허무주의가 지배적인 정신적 상황에서 이무치무(以無治無), 즉 ‘무’로 진검승부하자는 것인가? 박혁순 박사가 쥔 검(劍)은 동서 철학과 종교 사상뿐 아니라 현대의 첨단 과학 사상을 분별하기에 충분한, 벼리고 벼려진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중구난방으로 널브러진 지구촌의 사상들을 찔러 쪼개어 간파하고 통섭하는 화쟁론이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하나님을 말하고 경험하려는 그의 구도심(求道心)의 이면에는 깊은 신앙과 하나님 사랑이 깔려 있다. 그가 “만 5년 동안 하나님만 사유하며 연구”해 올 수 있는 저력은 극진한 ‘하나님 사랑’에서부터 발원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보편적 지식과 신앙의 경계에서도 성서와 전통적 교리를 존중해 왔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구원과 자유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함과 동시에 나는 무로부터 창조된 이 세계,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하나님, 예수님의 ‘자기비움’(κενοσις, 빌 2:7), 성령의 존재 양식 등에 경외심과 함께 신비로운 의문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리고 무와 자기비움과 영이라는 ‘비존재’의 존재 양식을 하나님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단초로 발견했다.”(본문중에서)

무의 흔적과 자취, 무의 궤적을 찾아 나선 저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동행하다 보면 서양 사유 전통에 서 있는 사상의 거물들을 수도 없이 만난다. 고대 그리스 사상으로부터 출발하여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 및 신약성서와 그리스도교를 지나 중세의 신비주의와 부정신학, 그 정상에 서 있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최초 중국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까지, 종교 사상가로는 부족하여 다시 칸트, 헤겔, 니체,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그리고 사르트르 사상에 숨겨있는 ‘무’를 채취한다. 박 박사는 서양 사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무’를 서양사상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낸 불교와 도교 그리고 성리학까지 검토한다. 그리고나서 다시금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 사상으로 돌아와 개신교 신학자로서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 그리고 위르겐 몰트만, 가톨릭 신학자로 토마스 머튼과 베른하르트 벨테, 그리고 한국의 종합적 종교 사상가 유영모를 논의한다. 저자의 의 지적 방랑은 동서 철학과 종교 사상만이 아니라 현대 과학, 특히 물리학과 우주론의 첨단 사상을 섭렵하여 탈실체적인 파동/에너지 이론 혹은 정보이론의 기반 위에서 말할 수 있는 신의 사유는 실체적 존재보다는 탈실체적 무의 사유를 기반으로 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저자의 마지막 하나님 사랑은 삼위일체론의 재론에 모아진다. 20세기, 특히 1980년도 이후 신학은 삼위일체론과 성령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관계적 존재론에 근거한 삼위일체론의 재서술은 세계교회(정교회, 가톨릭, 개신교)일치 운동의 신학적 근거이면서, 한편으로 사회 변혁의 동기가 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과 공동체 교회론으로 발전하고, 다른 한편 삼위일체 하나님 고백의 원래 자리였던 세례와 예배의 재구성과 활성화에까지 영향을 뻗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서양신학이 삼위일체론을 논의하는 핵심 개념인 ‘실체’와 ‘위격’의 자리에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로고스와 ‘이(理)’, 루아흐와 ‘기(氣)’를 통해 재해석한다.

박혁순 박사는 존재의 대립과 모순을 극복하는 무의 경험, 음양상생의 논리 속에서만 “생명과 질서에 대한 감사뿐만 아니라 죽음과 혼돈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무의 빛을 타고 내려오는 하나님 경험 속에서 “살고 죽는 것,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높이 오르는 것과 낮게 내려오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은 하나님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근원적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다.”(본문 중)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천(千)의 얼굴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찌 천(千)의 얼굴뿐이랴, 천만(千萬)의 얼굴일 것이다. 그러나 얍복 나룻터에서 야곱이 이른 아침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던 경험은 밤이 새도록 낯선 자와 씨름하고 위골 되기까지 하는 당면한 무거운 실존의 압력과 고난의 투쟁, 곧 무의 체험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無), 그 천(千)의 얼굴들』은 서양 신학의 언어와 문법이 주류를 차지하는 신학의 담론장에 동양 종교의 사유와 언어로 신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대 과학사상의 결과들을 신론 해석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과감하고 탁월하다. 또한 저자의 글쓰기는 대단히 체험적이고 문학적이어서 신학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이 덤으로 주는 즐거움이다. 이 책은 대안적 신론을 위한 예비적 연구가 아니라 하나의 본격적 연구라고 평가하고 싶다.

심광섭 목사(조직신학, 예술신학,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