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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문학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가?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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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년 05월 14일 (화) 05:00:28 [조회수 :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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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문학을 멀리해 왔다. 그들은 문학을 세상적인 것 혹은 인간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신앙을 노래하는 시를 제외하고는 문학을 외면했다. 4세기에 살았던 어거스틴은 연극은 죄악을 가르치는 것이니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에서 문학을 멀리한 것과는 달리, 문학의 편에서는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을 다루어 왔다. 인간은 종교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왔고 문학은 인간 경험을 다루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문학 작품들의 주제가 되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절대 진리를 부정하는 시대적 조류나 신의 부재에 대한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작가들은 종교적 신앙을 다루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회에서는 그의 소설에서 기독교 신앙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그레이엄 그린에게 노벨상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작가들이 종교에 등을 돌린 것과는 달리, 문학을 멀리하던 교회 편에서, 20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성경에 나타나는 문학적 표현이나 내용에 대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성서학자들은 성경 전체를 문학으로 보고 ‘성서 문학’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성경을 ‘작품’이라고도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거룩한 성경을 ‘작품’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그것은 불경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1990년대에 신대원에 다닐 때, 교수들이 성경을 ‘작품’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문학을 전공하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미국의 베일러 대학교에 가서 1년 동안 성경과 문학에 관해 연구하면서 신학자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성경과 문학의 가장 뚜렷한 공통점은 성경과 문학이 모두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문학은 언어를 매체로 하는 예술인데, 우리는 그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쓰기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도 시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를 문학서로 분류한다. 그들 중에서 시편과 아가서는 분명 시이다. 그리고 성서학자들은 원문 성경에서는 문학서에 속하는 지혜서뿐 아니라 예언서까지 운문으로 기록되었고 평행법이라는 문학적 표현 형식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지적해 왔다. 

성서학자들은 예수께서 문학적 표현인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비유는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는 시를 쓰시지는 않았지만, 비유적 이야기를 좋아하셨고, 특히 천국에 관해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의 비유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문학적 재능이 탁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은 성경에 나오는 비유나 상징의 의미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우리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은유, 과장법, 상징, 아이러니 같은 것은 문학 전공자조차 해석하기 쉽지 않다. 특히 마가복음 4장 11-12절에 나오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는 예수의 비유를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조차 난제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는 문학적 표현 외에 문학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나온다. 구약의 창세기, 출애굽기, 사사기, 역사서, 예언서는 모두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신약의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역시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예수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를 강조해 왔지만, 그 관계에서 인간을 제외하면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인간들은 문학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인간의 삶을 다루는 문학 작품에서는 육체와 감정을 지닌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여러 가지 유혹에 빠질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런데 성경에도 모범적이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육신의 약함으로 인해서 죽음을 피하려 하거나 유혹에 빠지거나 실수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바로와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사라를 그들의 부인으로 내주었다.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 이긴 믿음의 사람 엘리야는 이세벨이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자 두려워서 광야로 나가 숨었다. 

다윗은 육욕의 유혹에 빠져서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일부러 위험한 전장에 보내어 죽게 만들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는 실수를 했다. 심지어 예수도 겟세마네에서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피땀 흘려 기도하셨다. 

위에서 예를 든 모범적인 믿음의 사람들만이 아니고 선민인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육신적 욕구를 위해서 번번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했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무감각한 로봇으로 그리지 않았다. 성경에서 육체와 감정을 지닌 인간을 다루었다는 면에서 성경과 문학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왜 성경과 문학 사이의 공통점을 말하는가? 성경에 대한 문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성경 말씀에 담긴 의미가 풍부하게, 분명하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알기 쉬운 예로, 개역 개정 성경의 번역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문학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작가나 문학 애호가는 언어 표현에 능숙하게 마련이다. 성경도 우리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번역자들의 언어 표현이 세련되어야 한다. 

번역이란 원문의 의미를 번역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언어 표현에 맞게 바꾸어 놓는 일이다. 그런데 개역 개정 성경의 번역자들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지 않는 ‘너희’라거나 ‘...하라’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 성경에는 구두점이 없는데, 단적으로 말해서 구두점이 없는 글은 틀린 글이다.

그리고 개역 개정 성경에는 일관성이 없다. 그 성경에서는 보통 상대를 나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너희’라고 부르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여러분’(행20: 17-38)이라고 말한다. 구두점이 없는 그 성경 번역에서 몇 곳에는 쉼표(사 43:16; 고전 12:8-10)가 나오기도 한다.

개역 개정 성경의 문체가 무게가 있다거나 성경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런 표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어느 누가 대중을 상대로 연설하거나 편지를 쓸 때 ‘너희’라고 말하는가? 어느 누가 구두점이 없는 글을 쓰는가? 그리고 거룩한 성경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불성실한 태도인가?

이렇게 현대인의 언어 표현과 맞지 않는 개역 개정 성경을 많은 교회에서 채택하고 있다. 이렇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번역자들 대부분이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 선발되고, 일반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은 문학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성경과 문학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 70여 년이 지났으니, 이제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도 문학에 관심을 보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성경과 문학의 공통점을 개관하다 보니 글이 좀 길어졌는데도 주마간산 격이 되었습니다. 성경과 문학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분은 제가 <당당뉴스>에 올린 다음 글들을 참고해주세요. 게재된 날짜를 확인하시면 찾기 쉽습니다.) 

〔“마가복음 4장 12절 다시 읽기”(2023-10-03), “14만 4천만 ‘새 땅’에 살 수 있는가”(2020-03-12), “왜 그들은 종교적 상징을 말하는가”(2017-04-24), “요나서는 예언서인가” (2017-04-04), “왜 문자적 성경 읽기를 문제 삼는가”(2015-06-17), “성서는 어떻게 기록되었는가”(2014-12-31), “예수님의 복음과 문학의 주제”(2014-11-12), “왜 성경을 문학 작품이라고 하는가”(2014-03-20), “우리말 성경 번역”(2013-12-1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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