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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의 핵심 가치와 원칙을 훼손하지 마십시오.세 비전의 꽃 즉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진정한 조선교회’
곽일석  |  iskwa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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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년 05월 11일 (토) 12:53:16 [조회수 : 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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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에 이르러 한국감리교회는 그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혼돈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까 염려가 된다. 최근 UMC총회의 결과를 두고서도 설왕설래가 많은듯하다. 하지만 우리 한국감리교회는 창립 초기에 지향했던 바, 뚜렷한 핵심 가치와 원칙들이 있다. 이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서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진정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할 지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내적 모형은 대도대기(大道大器) 패러다임으로 부를 수 있다. 한국감리교의 지성인들은 기독교를 자신과 민족과 세계구원의 새로운 길로 수용하면서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의 본질과 위상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의 선각적인 신앙인들은 흔히 생각하듯이 선교사들의 서구중심적인 일방적 사유 방식으로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지 않았다. 기독교를 단순히 서양종교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동양과 조선의 현실을 치열하게 파악하고 자기 주체성을 지닌 자각 위에서 한국기독교의 길을 개척해냈는데, 그것을 “대도대기(大道大器)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독교를 동양종교 혹은 아시아 종교로서 인식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의 복음 진리를 동서양을 아우르며 누구나 믿고 따를 수 있는 인류의 한 길 혹은 큰 길 곧 대도라고 보았다. 비록 근대 서구열강에서 들어왔지만 그 기원을 볼 때 아시아에서 발생한 종교라고 파악했다. 좀 적극적으로 말하면, 기독교는 동서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류의 대도라는 것이다.

한국감리교회의 두 번째 패러다임은 1930년 12월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가 합동하여 “조선감리회”를 조직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만들어졌다. 즉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대도대기의 생명 맥은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세 비전의 꽃 즉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진정한 조선교회’의 패러다임으로 창조적인 계승을 맞았던 것이다.

그때 기독교조선감리회의 비전 즉 감리교회의 두 번째 패러다임의 초점은 구조와 제도적으로는 ‘영적 민주주의’구현으로, 사회선교적으로는 ‘사회적 구원의 진보주의’실천으로, 신학사상적으로는 ‘복음적 자유주의’로 추구로 나타났다. 이것이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과 운영의 핵심 가치요 원칙이었던 셈이다.

그 빛 아래서 일제하 역경 속이라 경제적으로는 미국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의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명실상부하게 독립 자치 총회를 조직하여 양주삼 총리사를 선출하고, “교리적 선언”을 했으며, 1931년 세계 감리교 역사상 최초로 14명 여선교사에게 목사안수를 주었고, 우리의 손으로 운영하는 자주적인 감리교회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 기독교조선감리회 패러다임의 특성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무엇보다도 먼저, "토착 교회"를 추구하였다. 그들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실제적인 한국교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조선에서 남.북감리교회가 처하고 있던 1920년대의 시대 상황은 3.1 운동의 여파로 열린 문회정치의 틈을 타고 식민지 조선에 문화적인 민족의식이 팽배해갈 때였다. 이런 분위기와 의식이 조선감리교회를 설계했던 전권의원들과 총회대표자들에게서 토착 교회의 추구로 나타났던 것이다.

많은 시대와 많은 지역에 걸쳐 구원과 진리의 보편성과 우주성을 추구해 온 기독교회였지만, 그러한 보편적인 구원의 효력은 구체적으로 한 시대와 지역을 통해 형성되어 표현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조선감리교회 역시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기독교회를 지향하면서도, 구체적으로는 당시 특정한 조선에서 조선인과 조선사회를 구원하기에 적절한 실제로 한국적인 교회가 되어야 했다.

둘째로, 조선감리교회는 조직과 제도와 운영 면에서 “민주적”인 교회를 추구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무런 차별과 차등 없이 하나 된 신앙인으로서 다같이 참여하고 다같이 권리를 누리며 다같이 책임을 다하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교회의 설립이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역사적으로 유구한 전제정치 밑에서 압제받아오던 한민족이었고, 당시 일제의 식민정치 아래 뼈아픈 고통 속에 살고 있던 조선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새 희망과 꿈을 지니고 출범하는 조선감리교회에서만은 동등한 권리와 자유와 책임을 누리는 “민주정체”를 이루려고 하였다.

양주삼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게 하나가 된 기독교인의 동등한 지위라는 신앙적인 관점에서, 비록 지금은 현실적인 교회가 정치나 사회나 경제 조직보다도 덜 민주적이지만, 새로 설립되는 한국교회만큼은 참으로 민주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로 조선감리교회의 민주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민주적인 정신과 원리의 적용은 조선감리교회에서 평신도와 교역자 사이의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인 차별을 극복하고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누리는 방향으로 적용되었다. 그래서 평신도들도 총회대표가 되며, 연회에도 교역자와 똑 같은 비율로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심지어 신흥우, 김지환, 오화영, 이만규, 신흥식 등은 총리사 후보의 자격에서 평신도에게도 똑같은 기회와 자격을 주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의 민주적 분위기는 매우 강했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권을 확립하는 데에서는 “혁명적인 민주적 정신”의 표출이라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남성과 같이 여성에게도 총회대표자격을 갖게 하고, 여성들에게도 목사 안수를 주도록 규정하여 ,비록 선교사들이었지만, 1931년에는 세계감리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감리교회에서 여성목사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조선감리교회의 대표자를 감독제 대신 총리사(General Superintendent) 제도로 선택한 것도 민주의식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거의 모든 전권위원들과 특선위원들이 감독제를 거부했는데, 그 주된 이유가 전제적인 특성과, 감독이라는 한국 명칭이 공사장 감독이나 영화 감독의 뉘앙스가 있다는 것과, 장로교회 등과 이후에 합동될 가능성을 파괴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교회가 쓰고 있는 감독제를 버리고 4년의 임기와 단 한 번만의 재선 가능성을 조건으로 하여 ‘총리사’를 선출하였다.

셋째로, 조선감리교회는 사회적 차원에서 “진보적” 방향으로 출발하였다.

여기서 “진보적”이라 함은 그들이 인생과 사회와 역사와 우주를 보는 세계관(Weltanschaung)의 특성으로, 세상에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만히 정체되어 있는 존재가 없다고 인식했다. 인류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는 시대를 따라 새롭게 변화하며, 그것도 발전적인 방향으로 창조적으로 진보한다.

따라서 “산 생명체”인 조선감리교회도 과거의 낡은 틀과 세계관에 얽매여 있을 수가 2없으며(불가능한 일), 시대를 따라 이미 변하고 진보한 조선 사회와 그 안에 사는 조선인들을 구원하여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시대에 적합한 진보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의지적인 일)는 것이다. 여기에 조선감리교회의 생명적이며 진보적이고 시대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다.

새롭게 창립되는 “진정한 감리교회는 진보적이므로 생명이 있는 이의 특색을 가졌으니, 곧 그 시대와 지방을 따라 자라기도 하며 변하기도 할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현대문명과 과학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변해가고 있는 조선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과거 시대의 낡은 틀과 구속에서 과감히 “탈출”하여 그리스도의 혁신의 정신으로 모험적이고 개척적인 교회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이런 조선감리교회의 진보적 특성은 민주적 제도의 추구와 교리적 선언의 채택과 사회신경의 도입과 총리원 사회국의 신설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구태의연한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고 사회주의나 현대 과학사상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던 젊은이들을 의식하고 취해진 결정이기도 하였다.

넷째로, 조선감리교회의 한국적 특성은 조선에 있는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보편적인 한 “조선기독교회”를 형성해야 한다는 에큐메니칼한 꿈으로 표출되었다.

처음에 감리교회나 장로교회 등 교파 교회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조선인들은 교파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남감리교회나 북감리교회가 두 파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교파’라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나 기독교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서구의 역사경험 속에서 형성된 상대적인 부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조선에서만은 모든 교파가 하나로 만나 “조선기독교회”를 설립하는 편이 좋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양주삼은 남북감리교회의 합동을 “한국에 있는 모든 교파의 위대한 합동을 향한 한 걸음”으로 바라보기도 하였고, 제 1회 합동총회에서는 감.장 양교회 합동연구위원으로 윤치호, 오기선, 정춘수, 홍에스더, 노블, 하디를 선출하기도 하였다. 조선감리교회는 남북감리교회만의 통합에서 만족치 않고 더 나아가 장로교회 및 기타 모든 교파들이 한국에서 하나의 조선기독교회를 형성할 날을 밤하늘의 빛난 별처럼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 상기의 자료에서 한국감리교회사 관련한 상당 부분의 내용은 백석대학교 성백걸 교수의『개화기 동서의 만남과 한국기독교의 길』이라는 논문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인용하였습니다.

 

2030 메소디스트 포럼(Methodist Forum)

총무 곽일석 목사(iskwa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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