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오늘의칼럼
트로이메라이
조진호  |  jino-jo@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4년 05월 11일 (토) 03:26:58
최종편집 : 2024년 05월 11일 (토) 03:28:19 [조회수 : 860]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언제부턴가 집안에 어린이가 사라지게 되자 어린이날이 고요해졌습니다. 대체 공휴일이던 지난 월요일, 제게는 여전히 어린이로 보이지만 덩치는 어느새 저 보다 커버린 아들은 커다란 악기를 등에 메고 연습실에 나갑니다. 그 뒷모습에 인생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십여 년 전 아이가 초등학교에 처음 등교하던 날이 떠오릅니다. 은명교회 김용미 권사님이 사주신 파란색 봄 코트를 입고 커다란 남색 가방을 멘 채로 뒤도 안 돌아보고 교문 너머로 달려가던 아이의 뒷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아들의 첫 등교를 축하하러 간 건데 그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감싸고 펑펑 울게 될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그 뒷모습에서 내 아들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어린이 덕에 어른들이 행복했던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어린이가 없는 어린이날이 여전히 어색하기만 합니다. 뻥튀기처럼 순식간에 커 버린 아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 어린 시절도 바로 엊그제 같은데 왠지 친구들이 다 떠나간 놀이터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듭니다. 그래도 약간의 쓸쓸함일 뿐 늘 함께 해 주는 친구, 제 아내가 있어서 그리 외롭지는 않습니다. 서로의 쓸쓸함을 달랠 겸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를 떠나기로 합니다.

저는 강원도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말 그대로 '산골'이었습니다.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우리 마을은 그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을 둘러싼 높은 산 때문에 달이 더 밝게 보였는지 마을 이름도 명월리였습니다. 밤에 쥐불놀이를 하고 반딧불을 잡으며 놀았었지요. 제 오른쪽 관자놀이에는 그때 관솔에 불을 붙인 깡통을 돌리다가 데인 상처가 있습니다. 

산골 소년은 항상 앞산과 뒷산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습니다. 밤마다 지도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고 늘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슈만의 피아노 소품 ‘트로이메라이(Träumerei)’는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독일어로 꿈은 원래 ‘Traum(트라움)’이며 그 복수형은 ‘Träume(트로이메)’입니다. 여기에 붙은 ~ei 라는 어미는 무언가의 총칭 또는 반복되는 소소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트로이메라이’는 ‘늘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다채로운 꿈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베르트 슈만은 1838년 ‘Kinderszenen(Op.15)’이란 제목으로 피아노를 위한 13곡의 모음곡집을 작곡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작품을 ‘어린이의 정경’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일본식 이름의 번역체이고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라고 부를 때 이 작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모음곡집은 어린이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스냅사진처럼 기억된 자신의 어린 시절의 특정 장면들을 피아노 음악으로 그려낸 것이지요. 

1838년 봄 슈만은 클라라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슈만의 스승이었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둘 사이에 대한 강한 반대가 있었고 슈만 또한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법이지요. 어느 날 클라라는 슈만에게 그가 가끔씩 어린아이처럼 보인다고 말했고 그 한마디가 슈만의 악상을 깨우게 됩니다. 슈만은 며칠 만에 약 30개의 작은 작품들을 작곡했고 그중에서 13곡을 추려서 이 피아노 작품집을 만들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에게 바쳤습니다. 그중 일곱 번째 곡이 바로 ‘트로이메라이’입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1903~1989)는 우크라이나 키에프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1986년 4월, 소련의 붕괴가 이루어질 무렵 그는 노년의 몸을 이끌고 떠났던 고국을 61년 만에 다시 찾아 모스크바에서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그 음악회의 백미는 다름 아닌 앵콜로 연주된 ‘트로이메라이’였습니다. 짧고 단순한 이 곡 속에는 호로비츠와 슈만, 그리고 고향과 어린 시절을 향한 우리의 그리움이 눈물방울처럼 응결되어 있습니다.  

https://youtu.be/qq7ncjhSqtk?si=nYYu4J_ZegXa7mKN

 

 

조진호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4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