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이성복, 2012初版, 2022년 9쇄, 문학과 지성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지식인은, 문화예술인 이하 문명을 이어나가는 지성인들은 막중한 문명적 책임 위에 걷고 있다. 풀어 말하자면 ‘새로운 것은 더이상 없다’는 말이 흔해질 정도로 2000년이 넘는 역사 위에서 최첨단의 발달한 문명 위에 태어난 사람은 그 역사의 산물을 누리는 만큼 축적된 문명을 상고하고 배우고 이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여느 역사학자의 지론이 아니더라도 구약과 신약을 거쳐 하나의 구심점으로 이어 서술된 역사 중 가장 다채롭고 긴 기록서, 성경을 기반으로 배움과 깨달음의 길을 걸어나가는 우리들의 무거운 책임은 매주 주일 설교와 말씀 묵상이 그렇듯이 이미 사장된 옛것을 회고하는 것이 아니요, 그것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가 대답하고 현재의 내 삶의 질문에 시편 기자가 대답해 주는 말을 듣는 행위로까지 나아가야만 한다. 
 
 그 행위는 ‘촉발’이라는 내면과 지성의 폭발성에서 비롯될 수 있을 것이다. 영향을 받다, 영감을 받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공격적이고 감정적인 ‘촉발’이라는 현상은 폭발과 감정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서 영감과 사유를 단번에 더 멀리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시인 이성복의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은 현세의 시인이 문명 속 시와 시인에 의해 촉발된 시를 또다른 자국으로 남겨 놓음으로서 ‘시인의 촉발’의 현장을 구체적으로 목격하게 하고 또한 우리를 촉발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담아 놓은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강해, 해설집, 또는 비평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시집’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고 있고 또한 작가 이성복은 시인으로서 책 앞에 앉아 있다. 숫자와 제목 아래 시인을 촉발시킨 시와 시인의 짧은 구절은 나라와 시대를 아루른다. 고프트리트 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파블로 네루다. 가르시아 로르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파울 첼란, 오시프 만델슈탐, 프란츠 카프카, 샤를 보들레르, 자크 프레뵈르, 로버트 프로스트……. 
 우리 정서와 낭만, 지성의 스승들의 글줄 한 단락 아래 조금 더 큰 글씨로 인쇄된 시인 이성복의 글들은 스승들의 이국적인 이름과 다르게 순박한 한국의 정서와 시인만의 관점을 거쳐 또 다른 산문시로 자국을 남겨 놓고 있다. 

“환희란 내륙의 영혼이/바다로 가는 것/집들을 지나, 곶을 지나-/깊은 영원으로-(에밀리 디킨슨 「환희란 내륙의 영혼이」”의 구절 아래 “환희란 끝내 얼굴에 떠오르는 것, 떠오르기 전까지 아무것도 아니다.”(66p)로 시작하는 새로운 환희의 관점이 적혀 있다. “당신의 목소리로 가두지 않는다면/난 손바닥에서 뛰쳐나와/암청색의 정원으로/내 몸을 부어버리겠어요.(라이너 마리아 릴케 「신부」”라는 구절엔 “기도는 협박, 사랑은 봉변”(103p)라고 상황을 정리한다. “이 상처받은 새를 어떻게 할거니?/하늘은 침묵하다, 죽어버렸네.(오시프 만델슈탐 「한기를 느낄 만큼 가난한 광선이」”의 시구에 “상처받은 새들은 내가 키우겠다.”(80p)고 대답하는 그의 시들은 때로는 대답이며, 때로는 동의이고. 반항이나 부연설명이나 작은 단어의 단초에서 촉발되어 터져 나오는 시의 시인의 시이다. 
  
 이 작법이자 독법인 ‘촉발’의 결과물들은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시인의 시인을 소개받는 즐거움도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독서 팁은, 이성복의 시 아래에도 공간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네루다의 한 구절, 또는 이성복 시인의 제목, 또는 시에서 어떤 촉발이 일어난다면 기꺼이 빈 공간은 새로운 글귀가 적히길 반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 시집의 진정한 독서법인지도 모른다. 글끼리 대화하고 서로 촉발하기. 

박창수 목사 (인천 성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