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지나, 세월호 참사 10주기와 4.19 혁명 기념일이 있는 4월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은 아직도 풀지 못한 가슴 아픈 숙제로 남았고, 어떤 사건은 독재를 찬양하는 이들로 인해 얼룩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2023년의 4월은 더욱 잔인한 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T.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슬픈 무녀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영생을 얻었으나 젊음을 얻지 못해 영원히 늙어가는 몸둥이로 새장 속에 갇힌 무녀는 꽃이 피는 4월 들녘을 바라보며 한탄합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그러나 육신의 노쇠함보다 잔인한 것은 생각의 노쇠함, 사상의 노쇠함입니다.

어디서 젊은 꼰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몸은 젊으나 생각은 노쇠한 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생각의 노쇠함은 육신의 젊음도 퇴색시키고 맙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생명은 그 속에 담긴 생각, 그 속에 담긴 사상에 있습니다. 과거에 사로잡힌 공동체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는 냉전 이데올로기에 영혼을 의탁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목사와 성도들이 광장에 모여 “빨갱이는 죽여도 돼!”를 외칩니다. 세월호-이태원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비난하고, 독재를 추억하며, 보편적 인권에 반대하는 최전선에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이 새장 속에 박제되어 4월을 증오하며 영생하는 무녀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무척 잔인한 4월입니다.

<향수>를 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중에 <깊이에의 강요>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날 미술계에  소묘를 잘 그리는 젊은 여성 작가가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신선하고, 아름답고, 기교가 넘치는 그녀의 작품을 보고 많은 사람이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미술계는 미래가 촉망되는 이 작가의 등장으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집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나이든 평론가가 그녀의 유일한 단점을 발견합니다. 이 평론가는 신문에 젊은 작가의 단점을 지적하는 글을 기고합니다. “당신의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깊이가 부족합니다.” 유명 신문에 실린 기사는 사람들의 반응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녀를 칭송하던 사람들이 그녀의 깊이 없음에 대해 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예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어요.”

그때부터 이 젊은 작가는 곤두박질 칩니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내가 결여한 깊이는 무엇일까.’ 고민을 하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깊이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허사였습니다. 점점 절망에 잠식된 그녀는 3년 후 삶을 져버리고 맙니다.

과연 젊은 작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깊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경험과 연륜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얻어질 무언가였을 것입니다. 깊이는 근육과 같습니다. 오랜 시간 성실하고 진지하게 단련한 사람에게는 깊이라는 근육이 붙습니다. 깊이의 부재는 재능의 부재가 아니라 진지함과 성실함의 부재입니다.

그러나 그 평론가는 젊은 작가가 가진 가진 많은 재능보다, 아직 갖지 못한 깊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얻게 될 깊이를 강요했습니다. 이 나이든 평론가는 젊은 이의 단점을 찾아낸 자신의 깊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몰랐던 이 평론가야 말로 얄팍함의 극치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깊이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깊이인것을 말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과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폭력성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과거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적 권위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사상이나 생각은 논리가 아니라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자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웃의 목소리에 있습니다.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가치를 세상에 강요하지 않기. 민주주의자 되기.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세월호-이태원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교회가 가질 최고의 신학은 이런 목소리를 듣는 “들을 귀”를 갖는 것입니다.

우동혁 목사 (만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