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계
'한국을 사랑한 파란 눈의 어머니' 캠벨 평전 나와권지영 著, 신앙과지성사 출판. 이덕주 전병식 감수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펴내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3년 06월 08일 (목) 20:19:33
최종편집 : 2023년 06월 15일 (목) 18:27:41 [조회수 : 1423]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나는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미(북)감리회의 한국 여성 교육과 전도에 스크랜톤 대부인(스크랜톤의 어머니)이 있다면, 남감리회 여성 교육과 전도, 여성 리더 양성에는 캠벨 선교사가 있다. “한국을 사랑한 파란 눈의 어머니” 캠벨은 1897년 남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받아 1918년 안식년 휴가를 받아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교육사역(배화 학당, 매일학교, 야학 등), 교회 사역(자교교회와 종교교회의 모체가 되는 자골교회 설립, 수표교, 광희문에서 전도부인 양성 및 활동, 주일학교 운영 등), 의료사역(세브란스병원 수간호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디프테리아 병을 얻어 쇠약해졌지만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캠벨은 “나는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한국에 더 헌신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1920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4달 후 67세의 일기로 별세해 양화진에 묻혔다. --책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에서 발췌

 

   
▲ 캠벨기념사업회가 8일 배화여자대학교 캠벨홀에서 캠벨 평전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권지영 저, 신앙과지성사)"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캠벨 기념사업회는 8일 오후 배화여대 캠벨홀에서 조세핀 필 캠벨의 평전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신앙과지성사)”를 출간하고 줄판기념회를 가졌다. 스크랜턴에 대한 연구물은 풍부한데 비해 캠벨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차에 반가운 소식이다. 

이 책을 지은 젊은 여성사학자 권지영 목사는 “그녀의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시점은 남편과 두 아이를 잃은 뒤였다. 가족을 잃은 빈손을 한탄하며 자책하거나 주저않지 않고, 그 빈손으로 넘어진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기 시작했다”면서 “그러한 캠벨의 삶에 매료되어 그녀의 삶의 자취를 따라 다녔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이 책은 캠벨 선교사의 생애를 따라간다. 그가 선교사가 되기까지의 과정, 중국선교사로서 상하이와 쑤저우에서 펼쳤던 캠벨의 사역, 한국선교를 결정하기 까지의 과정과 내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 그리고 별세하기까지의 과정을 300여 페이지에 담아냈다.

저자 권지영 목사는 “한국을 사랑한 파란 눈의 어머니, 캠벨이라는 고귀한 유산을 발견하는 과정은 놀라움과 기쁨,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고 책 서문에서 고백했다. 권 목사는 이어 “누군가를 영웅화하기보다 객관적으로 조명하고자 했지만 캠벨의 삶이 들려주는 날것의 이야기들에 감동이 밀려와 때론 고개가 숙여졌다”며 집필과정에서 받은 감동을 전하며 “캠벨의 삶이 주는 위로와 격려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해지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 저자인사 / 권지영 목사
   
▲ 저자인사 / 권지영 목사

출판회에 앞서 드려진 감사예배는 홍용표 목사(자교교회)의 사회, 차재일 목사(광희문교회)의 기도, 최이우 목사(종교교회 원로)의 설교, 김진홍 목사(수표교교회)의 축도 등 캠벨이 세운 교회의 현 담임자들이 순서를 맡아 진행했다.

지난 2020년 캠벨 소천 10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회 준비를 시작으로 ‘캠벨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킨 최이우 목사는 ‘헛되지 않게 하라’를 제목으로 설교를 전하면서 “캠벨의 유산을 이어가려면 그 소중한 가치를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과 유산을 선하게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배화학원과 캠벨 선교사로 인하여 세워진 교회들은 사람을 키우는 일, 사람을 세상에 보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게 하는 일을 감당해야 받은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주문했다.

전병식 목사(배화여자대학교 교목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출판기념회는 배화여자대학교 이사장인 이현식 목사의 환영사, 경과보고, 저자의 지도교수인 이덕주 교수의 서평, 저자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배화여자대학교 이사장인 이현식 목사는 먼저 “우리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보물과도 같은 훌륭한 책을 안겨주셨다”며 저자와 캠벨기념사업회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이 책은 치밀하고 섬세한 연구의 결과물입니다. 다. 수준 높은 학문적 고민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포근한 문체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했다.

이덕주 교수는 서평에서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턴 대부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됐는데 권지영 목사의 수고로 비로소 캠벨 선교사의 생애와 사역의 전모가 드러났다.”고 책 출간이 주는 의미를 짚으며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 꼼꼼하게 자료를 찾아낸 권지영 목사의 수고를 칭찬했다.

이덕주 교수는 또 “여성 사학자에 의해서 여성 선교사에 대한 삶이 구성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캠벨의 자료에서 어머니 캠벨의 섬세한 감정을 찾아내 기술한 점은 남성은 알 수 없었던 여성 사학자의 강점임을 짚으며 “이를 계기로 권지영 목사는 여성사학자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특히 여선교사 연구에 큰 진보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치하했다.

이교수는 “다만 책을 읽으면 다 느낄수 있지만 결론 부분에서 죽음으로 끝내지 말고 캠벨의 신학사상, 교육자로서의 교육철학을 독자를 위해 정리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거나 “코로나로 인해 중국이나 LA, 고향 텍사스를 방문해 자료를 찾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덧붙였다.

지은이 권지영 목사한양대학교에서 사학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M.Div)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졸업논문으로 「캠벨 부인의 선교와 신학에 관한 연구」를 썼다. 현재 감신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출판기념회 사회 / 전병식 목사(배화여자대학교 교목)

 

   
▲경과보고 / 전병식 목사(배화여대)

캠벨평전 출판기념회 경과보고

배화여자대학교 전병식

캠벨 선교사가 하나님께 드린 ‘빈손’이 가닿았고, 그 헌신의 발길이 머물렀던 조선 선교 사역지는 주로 학교와 교회 그리고 병원이었습니다. 학교로서는 배화학당(현 배화학원), 교회는 종교교회, 자교교회, 수표교교회, 광희문교회, 석교교회가 있고 의료기관으로서는 세브란스 병원이 있습니다. 한동안 캠벨 선교사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기리고자 했던 노력은 주로 배화학원과 종교교회 그리고 자교교회가 어우러져 함께 했던 추모 행사 위주로 ‘기억과 감사의 의식’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기념의 의식(儀式, ritual)을 치르는 것만으로는 ‘기억의 감사’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지던 때, 2020년 소천 10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회 준비를 시작으로 당시 종교교회 담임이었던 최이우 목사님의 주도로 ‘캠벨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습니다. 기념사업회의 논의에 따라 2020년 11월 12일 배화여자대학교 캠벨홀에서 기념 학술제를 열었고 캠벨 선교사 묘역에 기념 동판을 설치하였으며, 11월 15일 주일 오후 5시에 종교교회에서 ‘서거 100주기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이후 기념사업회의 활동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캠벨장학회’의 운영과 캠벨 선교사님의 전기를 출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캠벨 선교사님의 전기는 평전(評傳)의 형식으로 출판하기로 하고, 권지영 목사에게 집필을 이덕주 교수에게 내용 감수를 전병식 목사에게 편집체제에 대한 감수를 맡게 하였습니다.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과 자부심으로 스승 이덕주 교수와 제자 권지영 목사가 쉼 없이 밀어붙인 합력(合力)의 결과는, 오늘 2023년 6월 8일 캠벨 선교사님의 평전,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를 출판하여 기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책을 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시기임에도 ‘신앙과지성사’의 대표인 최병천 장로의 도움과 격려로 평전이 출간되었음을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기억과 기념,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기록은 기억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전달하고 기억하는 일에 기운을 일으켜 새로운 기적의 기세를 일으킵니다. 모쪼록 이 평전이 캠벨 선교사님의 헌신을 기념하면서 선교사님의 선교 활동을 계승하여 세상 곳곳에 또 다시 펼쳐지는 캠벨 후예(後裔)의 선교에 활력을 제공하는 기적의 기록이 되기를 바라며 경과보고를 마칩니다.

2023년 6월8일 

 

 

   
▲ 저자인사 / 권지영 목사

캠벨의 생애와 선교활동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용비어천가 중)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글귀처럼,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며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린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교회 역시 역사가 깊고 그 헌신의 자욱이 확실할수록 견고하여 쉽게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는다. 종교교회의 시작점, 그 뿌리에는 캠벨(Josephine P. Campbell) 이라는 한 여성 선교사가 있었다. 설립자 캠벨의 생애와 선교활동을 재조명하는 일은 우리의 뿌리를 더욱 견고하게 마련해가는 작업이 될 것이며, 아울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겨줄 것이다.

 

* 캠벨의 출생과 선교사 지원

   
 

캠벨은 1853년 미국 남부 텍사스의 웨이코(Waco)에서 출생했다. 캠벨의 선교사로서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외할아버지인 마틴 루터(Martin Ruter) 다. 그는 켄터키의 어거스타 대학과 펜실베니아의 엘러게니 대학의 학장을 역임하고 미국 감리교 목사로서는 최초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였다. 그는 학장을 사임하고 텍사스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6개월 동안 2,200마일(약 3,726㎞)을 다니며 연합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조세핀의 아버지 브라이언트 필(Bryant L. Peel)은 남 감리회 텍사스 연회 소속 목사였고, 법조인으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루터에서 필로 이어지는 목회자 가정의 환경은 생의 짙은 어려움에 직면했던 캠벨로 하여금 선교 사역으로 눈을 돌리는 데 영향을 주었다.

1878년 캠벨은 조지아 주 출신의 캠벨(A. M. Campbell) 목사1)와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매우 행복했으며2) 2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둘째 남자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고, 남편 캠벨 목사 역시 쇠약해져 얼마 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첫째 딸 루이스도 2년 후 성홍열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5년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이어진 3년여의 짧은 시간동안 캠벨은 가족 모두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기록에 이어지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캠벨은 고통을 통해 인류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이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영성은 매우 담대했고 그리스도적이었기 때문에 비탄에 빠지지 않았다.3)

캠벨은 고통을 통해서 슬픔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나, 자신을 향한 비탄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눈을 돌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또 다른 기록은 캠벨을 힘들게 했던 상실의 경험이, 오히려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4) “녀자 교육의 개척자를 일흠”에서는 이 모든 일을 겪은 캠벨이 남은 일생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공헌하기로 결심”하였다고 전한다.5) 이러한 과정에 대해 기술한 「한국 선교의 개척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가족을 모두 잃은 뒤, 캠벨은 하나님께서 그녀의 빈손을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기도했다. 1년 이내에, 그녀는 중국 선교사가 되었다.6)

캠벨은 자신이 기도해왔던 대로, 더 많은 헌신을 할 수 있는 곳인 중국으로의 선교 요청이 오자, 흔쾌히 수락했다. 캠벨은 1년여의 시간동안 간호사교육을 완료하고,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사자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1887년 봄에 중국 선교사로 첫 발을 내딛었다.

 

* 캠벨의 한국 선교

캠벨의 생애를 조명해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 역할을 소화해냈다는 점이다. 선교 초기에 선교지에서 요구되는 역할들이 다양하기 때문도 있겠지만, 이는 캠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쏟아 선교지를 도우려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캠벨이 1887년 4월 상해에 도착하여 1897년 10월 한국으로 파송되기까지 10년 여 간 수행한 역할들은 상해 여학교 음악교사, 상해와 쑤저우 여선교회 본부의 사역 관리, 쑤저우 여성병원의 수간호사(총 책임자), 쑤저우 매일학교 운영, 램버드 학교(간호학교) 교장, 요한복음 번역(쑤저우 방언으로), 여성 전도사역 등 다양하다.

1897년 남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는 중국에서 10년 여 동안 경험을 쌓은 캠벨을 한국 여선교회 사역의 개척자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캠벨은 중국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주저함 없이 즉각적으로 요청에 응했다. 캠벨은 1918년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 교육사역(배화 학당, 매일학교, 야학 등), 교회 사역(전도부인 양성 및 활동, 주일학교 운영 등), 의료사역(세브란스병원 수간호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캠벨은 처음 한국에 들어와 남 감리회 본부가 있던 남송현에서 사역을 시작한 후 1년 뒤에 장흥고 앞 새로운 선교부지인 자골로 이전해 새로운 선교사업을 열어갔다. 자골에서 정식 학교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매일학교를 시작하고 있었던 캠벨은 6명의 학생들과 함께 캐롤라이나 학당(이후 배화학당)의 문을 열었다. 학당의 초기에는 낮은 계층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근대적 학교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으나, 이후 조금씩 발전해 낮은 계층으로는 보이지 않는 근대적인 기독교 여성들을 배출해냈다.

그리고 남송현의 남 감리회 선교부의 사역이 침체되면서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부터 캐롤라이나 학당의 기숙사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자골교회의 시작이다. 자골교회는 캠벨의 영향력으로 양성된 전도부인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계속 증가하는 교인들을 기존의 예배당 규모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고, 예배당이 여성 선교구역 안에 있던 관계로 남성들의 접근성이 저하되는 등 자골교회로서는 독자적인 예배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고 종침교 부근의 도렴동으로 예배장소를 이전했다. 1910년 6월 도렴동에 마련된 새 벽돌예배당을 종교교회라 부르기 시작했다.7)

캠벨은 1910년 배화학당의 교장을 다른 이에게 맡기면서 서울의 다른 지역의 여성사역에 참여했는데, 특히 수표교교회와 광희문교회의 전도부인 사역을 맡았다. 1918년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 캠벨은 끊임없이 한국을 위한 사역에 헌신했다. 안식년 휴가를 떠났을 때에도 한국선교에의 관심을 환기시키며 후원자를 모으고,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대상황 속에 놓인 한국 여성들을 생각하며 새로운 산업기술(양봉업, 양계업, 낙농업)을 배워 전수해주고자 했다.

한 번도 환자 목록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캠벨이었지만, 1918년 발목 부상에 이어진 디프테리아를 앓으면서 심장이 약해지는 등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먼 여행을 하기에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캠벨은 한국에 더 헌신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1920년 8월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오려는 발걸음을 주변의 모두가 만류했을 때, 캠벨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8)

캠벨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국에 다시 돌아온 지 4달만인 1920년 11월 12일 별세하여 15일에 양화진 서양인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처럼 캠벨의 삶은 선교지와 선교지의 사람들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한 삶이었다. 이 같은 캠벨의 생애는 한국교회의 귀중한 선교 유산으로 남아있다.

 

각주
1) 본고에서는 캠벨과의 구별을 위해 남편인 캠벨의 칭호는 ‘캠벨 목사’로 한다.
2) 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Nashville Tennessee. N.D.) 33.
3) A. E. Prince, “Planting the Gospel in Korea: Story of Josephine Peel Campbell,”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Lambuth Building, Nashville Tennessee. N.D.)
4) 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33.
5) 김인영, “녀자 교육의 개척자를 일흠,” 『신학세계』(1921) 115.
6)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33.
7) 1910년 정춘수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을 중심으로 종교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이들과 함께 갈라져나가지 않고 교내에 남아있던 자골 신앙공동체는 계속 남아 예배를 드렸으며, 이후 경복궁에서 가까운 창성동에 한옥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종교교회와 같은 뿌리를 가진 자교교회의 출발이다. 
)양주삼, “강부인의 략력,” 『조선남감리교회 30주년기념보』 288.

 

참고문헌

『신학세계』

『조선남감리교회 30주년기념보』. 조선남감리교회 전도국, 1929.

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Nashville Tennessee. N.D.

A. E. Prince. “Planting the Gospel in Korea: Story of Josephine Peel Campbell”.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Lambuth Building, Nashville Tennessee. N.D.

 

-------------------------

글쓴이 / 권지영

   
 

권종호 목사의 차녀이다. 현재 같은 지방 내의 평동교회에서 수련목회자로 시무하고 있다. 감리교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과정의 졸업논문으로 『캠벨 부인의 선교와 신학에 관한 연구』를 썼다.

 

 

조세핀 필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1853~1920)

약력

1853년 4월 1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
1874년, 21세때 조셉 캠벨(Joseph Campbell)목사와 결혼
1880년 남편 캠벨 목사와 사별하고, 자녀들도 수년 내 모두 잃음. 

시카고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간호 교육을 받은 후, 
1886년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중국의 상해 소주(蘇州) 등지에서 10여 년 간 봉직.

1897년 10월 9일(45세) 미국 ‘남감리회해외여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
한국에 도착한 후 남대문 근처의 남송현(南松峴) 선교부에 정착.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漢城府 仁達坊 古磵洞, 지금의 내자동으로 주로 내시들이 살던 곳) 이항복의 집터로 선교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육성. 
이것이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 ‘배화학당’ 창설이다. 
처음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어린이 헌금이 일부 쓰여졌기 때문에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함.

1903년 12월 윤치호에 의해 ‘배화학당’으로 정식 개칭.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함.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
캠벨 선교사는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초대 교장으로 봉직.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1901년 배화학당 안에 미국에서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가 보내준 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Chapel)’이라 함.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이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음.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함.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중 신병을 얻었고, 주위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을 권유했으나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20년 11월 12일 별세.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
양화진 제1묘역(나-7)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음.

 

 

   
▲ 출판감사예배 사회 / 홍용표 목사(자교교회)
   
▲ 기도 / 차재일 목사(광희문 교회)
   
▲ 설교 / 최이우 목사(종교교회 원로)
   
▲ 축도 / 김진홍 목사(수표교교회)

 

   
▲ 출판기념회 사회 / 전병식 목사(배화여자대학교 교목)
   
 
   
▲ 배화여고 동문들이 소개를 받아 인사했다.
   
 
   
 
   
 
   
 
   
 
   
 
   
▲ 환영사 / 이현식 목사(배화여자대학교 이사장)
   
▲ 서평 / 이덕주 교수
   
▲ 저자 권지영 목사의 가족들
   
▲ 저자인사 / 권지영 목사
   
▲ 저자인사 / 권지영 목사
   
▲ 저자인사 / 권지영 목사
   
▲ 저자인사 / 권지영 목사
   
 
   
▲ 마침기도 / 전창희 목사(종교교회)

 

   
 
   
 
   
▲ 평동교회 김종윤 목사와 교우들

 

 

심자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41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