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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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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5월 31일 (수) 16:08:35
최종편집 : 2023년 05월 31일 (수) 16:24:11 [조회수 : 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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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자료집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예배문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설교문
          용서와 화해를 위한 7가지 기도문
          용서와 화해를 위한 7가지 묵상과 기도
          용서에 대한 종교의 가르침
        

     주관: 용서와 화해 기도 모임

 


2023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취지와 목적 
전쟁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며 슬픔입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전쟁을 기억하고 전쟁 이야기를 합니다. 전쟁 후 70년 동안 실질적 전쟁은 없었지만, 전쟁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분단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 이야기는 오랜 가뭄처럼 우리 마음 바닥을 갈라지게 하여 갈등과 분쟁을 고조시켰습니다. 남과 북 사이뿐만 아니라 개인, 가족, 집단 등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갈등과 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제 전쟁과 분쟁 이야기 대신 용서와 화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후손들에게 전쟁 이야기 대신 용서와 화해의 이야기를 물려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이 용서와 화해와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용서와 화해의 힘이 증오와 분쟁의 힘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해마다 6월 25일 직전 주일을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로 정하고 우리 사회와 민족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면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 기도 모임’은 2023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과 관련된 행사 자료집을 엮어 여기에 모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자료집에 대하여 
자료집의 내용은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준비위원들이 집필하였습니다. 자료집이기 때문에 출처와 각주 등은 생략하였습니다. 자료집은 자유롭게 편집 수정하여 사용하실 수 있도록 파일로 만들어 제공합니다. 자료집의 내용을 예배나 기도회에서 사용하실 경우에는 출처를 언급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내용의 일부를 출판물에 넣을 경우에는 우리 기도 모임에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자료집의 내용 중에는 이미 출판된 저작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료집 내용에 대한 문의나 건의는 연락처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용서와 화해 기도 모임’에 대하여  
‘용서와 화해 기도 모임’은 우리 사회와 민족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자는 뜻을 모아 2017년 12월부터 매월 첫째 주일 오후 5:30에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66차 기도회를 가졌으며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 기도 모임 운영위원  
김현호 신부(성공회 파주교회), 김광수 목사(감리교 원로 목사), 김홍섭 교수(인천대 명예교수), 손운산 교수(목회와상담연구소), 손은정 목사(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오영희 교수(덕성여자대학교 심리학과), 이근복 목사(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임석재 사관(구세군사관학교)

문의 및 연락 
김현호 신부(010-4763-9140, 성공회 파주교회, 2023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준비위원장) 
기도 모임 이메일 poiema2017@naver.com 

 

   2023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프로그램


  

 

프로그램

일 시

장소

내용

2차 용서의 목회 화해의 선교 워크숍

2023. 5. 25(목)

오후 2:00-6:00

한양대학교회 혹은 Zoom

용서와 화해의 실제

용서와 화해를 위한 묵상과 기도 주간

2023. 6. 19-25

개인적으로

용서와 화해에 대한 7 가지 묵상과 기도

용서와 화해를 위한 평화기도순례

2023. 6. 24(토)

오전 8:20-오후 2:00

임진강 생태탐방로

분단의 현장 걷기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2023. 6. 25(주일)

각 교회

예배 혹은 기도회

68차 용서와 화해 기도회/연합예배

2023. 7. 2(주일)

오후 5:30

성공회대성당

예배

 

 

        프로그램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행사 신청은 아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2023 용서와 화해 기도주일 

 

 


* 아래의 예배 순서를 교회 상황에 맞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전체 예배순서 대로 진행할 수 있고, 성찬식을 생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를 위한 공동기도는 꼭 넣으셔야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의 의미를 살릴 수 있습니다. 이 예배문은 이천진 목사님(한양대학교회 담임/한양대교목실장)께서 만드셨으며 순서 중의 찬송 ‘하나님의 어린 양’은 이 예배문을 위해 작곡한 곡입니다. 


2023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예배(안)

 

● 전주           Christ, You Are the Fullness(미연합장로교회 찬송가 346장)          오르간 연주

   
 


● 예배행진      전주와 함께 성서, 십자가, 촛불, 꽃, 기도자, 성서봉독자, 집례자 입장

● 인사 -  다함께 

집례자: 오늘은 6.25를 맞이하여 용서와 화해를 위한 기도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역사의 고비마다 늘 함께 해주셨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갈등과 분쟁 가운데 있는 우리 민족 위에 큰 은총이 임하길 기원하고, 우리 교회가 용서와 화해의 사명을 감당하는 능력을 얻게 되길 소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회  중: 당신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 공동체 인사      오르간으로 ‘찬송가 3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하는 동안  --    다함께 

집례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시겠습니다. 예배실을 돌면서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 찬송                       98장, 예수님 오소서    -    다함께

   
 


● 참회의 기도  -      다함께

집례자: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진심으         로 우리의 죄를 고백합시다. 하나님의 정의보다 나의 의를 주장한 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싸         움을 일으킨 죄, 하나님의 생명을 업신여긴 죄를 다함께 침묵으로 참회하겠습니다.(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1절 연주 / 오르간 연주)
회  중: (침묵기도)

● 하나님의 용서    -      집례자와 회중

집례자: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         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요일 1:9) 
회  중: 주님의 용서를 믿으며 감사드립니다. 아멘.


● 응답송                                 감사드립니다                                       다함께

   
 

       
● 구약의 말씀                             이사야 2:1-5                                  성서봉독자 

낭독자: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하나님 감사합니다.

● 시편송                               시편 95                                             다같이 

   
 

● 서신의 말씀                   에베소서 2:14-22                                        성서봉독자

  낭독자: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하나님 감사합니다.

● 알렐루야 영창                                                                            다함께

   
 

●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 5:1-12                                       성서봉독자

  낭독자 :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주님을 찬양합니다.

● 성가찬양                                                                                찬양대

● 말씀의 증언                    전쟁 이야기에서 치유와 화해의 이야기로                      설교자 

● 침묵기도                                                                                 다함께

  집례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 성찬식

초대와 응답 
  집례자: 주 하나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농부들이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드리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회  중: 하나님, 길이 찬미 받으소서.
  집례자: 주 하나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농부들이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포도주를 주님께 드리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회  중: 하나님, 길이 찬미 받으소서.
  다같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평화의 인사 
  집례자: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평화를 이룩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됩시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집례자님(혹은 목사님, 신부님, 사관님)과 함께 하소서.
  집례자: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높이!
  회  중: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드나이다. 
  집례자: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회  중: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감사기도
  집례자: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저희 마음에 보내시사  복음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깨우치시고 진리에로 인도하셨습니다.
  회  중: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 거룩함과 의로움과 영생의 후사를 따라 승리하며 살게 하였습니다.
  다같이: 그러하기에 이 땅 위의 온 백성과 하늘의 거룩한 성도, 또한 천군 천사들과 함께 주님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하기를 

거룩, 거룩, 거룩(SANCTUS)18)   

   
 

성령 초대 
  집례자: 불같은 성령께서 오셔서 이 감사의 식탁이 성별되게 하시고  이 떡과 포도주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회  중: 창조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찬 기도
  집례자: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복종하여 수난하신 전날 밤 떡을 들어 ● 성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떡을 떼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또 식사 후에 잔을 드시고 ♜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마셔라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너희들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새로운 계약의 피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찬송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19) 

   
 

성찬례 
  집례자: 주님의 몸, 여러분을 위해 찢기셨습니다. 
  회  중: 아멘
  집례자: 주님의 피, 여러분을 위해 흘리셨습니다. 
  회  중: 아멘

성찬분급(삼중 교독식 찬양)

   
 

  1절 / 다같이 /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2절 / 찬양대 / 말씀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3절 / 집례자 / 성찬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성찬 후 기도
  집례자: 주님이시여, 온 우주를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크신 당신을 제가 제 안으로 모셔 들였나이다. 제가 당신을 열렬하게 그리워하였더니 당신께서는 저를 채워주시려 오셨나이다. 하나님, 제  영혼의 힘을 다하여 예배드립니다. 제가 드리는 예배가 비록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하늘의 천사들의 예배에 못지않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입니다. 당신은 불멸의 왕이시며 영광과 영예와 찬송은 영원히 당신의 것이옵니다. 

        하나님, 이제 저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그리스도여, 생명도 죽음도 기쁨도 슬픔도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비참한 상태와 약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당신께서 저를 버리시면 죄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 저는 힘을 얻고 비록 비천한 존재이지만 당신의 사랑 속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거룩하신 살과 피로서 저의 몸을 정결케 하여 주소서. 저의 영혼을 성령으로 가득채워 주시고 저의 욕망의 불을 꺼주시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온갖 덕이 제 안에서 자라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용서와 화해를 위한 공동기도                                                               다함께

인도자: 이 시간에는 용서와 화해를 위한 공동기도 시간입니다. 피해자를 위하여, 가해자를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각각의 제목으로 기도한 다음에 묵상으로 기도하고 다음 기도로 이어집니다. 

인도자: 먼저 피해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함께: 주님, 억울하게 입은 피해로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쓰라린 배신감, 죽이고 싶을 정도의 보복심, 죽고 싶을 정도의 수치심이 돌덩이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들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옵소서. 과거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옵소서. 주님의 큰 은총을 힘입어 가해자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도 주옵소서(묵상기도). 

인도자: 주님, 당신의 자비를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옵소서
다함께: 아멘

인도자: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다함께: 주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는 힘도 주옵소서. 가해는,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 자신 그리고 공동체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시고 회복에 동참케 하옵소서. 그들의 영혼에게 자유를 주옵소서(묵상기도).   

인도자: 주님, 당신의 자비를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옵소서.
다함께: 아멘.

인도자: 상처 입은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다함께: 주님, 상처 입은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분쟁으로 무너지고 파괴되고 있습니다. 깨진 가족 관계가 회복되게 하시고 갈라진 가족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상처 입은 교회들도 치유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고, 가해자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묵상기도). 

인도자: 주님, 당신의 자비를 우리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에 베풀어 주옵소서.
다함께: 아멘.

인도자: 우리 민족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다함께: 주님, 분단으로 갈등 가운데 있는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과 사랑이 크고 놀랍습니다. 당신의 은총은 햇살처럼 언제나 한반도 구석구석을 비추고, 당신의 사랑은 바람처럼 남과 북의 모든 사람에게 불어옵니다. 당신의 크고 놀라운 은총과 사랑으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여 하옵소서. 한반도에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냉대가 환대로, 배제가 포용으로, 적대가 우정으로 바뀌게 하옵소서. 갈등과 전쟁 대신 용서와 화해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하옵소서. 한반도에서 용서와 화해와 평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만방에 퍼지는 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분열과 갈등의 현장을 찾아가서 용서와 화해의 길을 보여 주게 하옵소서.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십자가에서 몸소 용서와 화해의 길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용기를 갖게 하옵소서(묵상기도). 
인도자: 주님, 당신의 자비를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 주옵소서.
다함께: 아멘. 

인도자: 주님,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한반도에서 일으키시는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사건에 참여하게 하옵소서. 
다함께: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길을 보여 주시고 우리를 초대해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봉헌                                                                                     다함께

● 찬송                                       주기도송                                       다함께

   
 

● 축도                                                                                      

● 후주                   찬송가 475장, 인류는 하나 되게                                오르간 연주

 

 

예배 설명

 

01) 색동 스톨 / 색동저고리는 예로부터 기쁜 날(명절, 백일, 돌)에 입던 옷으로 기쁨을 나타낸다. 그리고 악귀를 쫓아내는 것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색동옷을 입혔다. 오늘의 색동 스톨은 분열과 싸움을 일으키는 악한 기운을 내쫓고, 용서와 화해를 이루는 영적인 기운을 상징한다.  
02) 예배행진 /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화해를 이루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순서이다. 동방교회 예배 유형은 그리스어와 그 문화를 포용한 예배 의식인데, 이 예배 유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예배 행진(procession)이다. 일요일과 축제일에는 도시에서 반드시 예배 행진이 있었고, 그래서 예배는 도시 전체의 예배 행위로 인식되었다.(박근원, 「오늘의 예배론」, 28). 오늘 예배에서는 성서-십자가-촛불-꽃-기도자, 성서봉독자, 집례자 순으로 행진한다. 성서는 하나님을, 십자가는 예수님을, 촛불은 성령을 상징한다. 5개의 초는 5개의 대륙을 상징하고, 꽃은 자연을 대표하고, 기도자, 성서봉독자, 집례자는 사람을 대표한다. 자연과 사람이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 예배의 자리로 행진함으로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이 우주 공동체를 이루는 순서이다.  한국의 전통사상에서 우주 공동체를 삼재(三才)로 표현한다. 삼재는 천(天), 지(地), 인(人)이다. 모든 우주 세계가 화해를 이루어 함께 예배에 참여한다.(조기연, 「예배 갱신의 신학과 실제,  65) 
03) 인사 / 초대교회 예배 전통에 나타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3:13을 통해 보여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가톨릭교회, 개혁교회, 루터교회 전통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04) 공동체 인사 / 집례자와 회중이 인사를 나누고, 전체 회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을 돌면서 사랑의 인사를 나눈다. 연주가 끝나면 자리에 앉는다. 연주는 예배자의 숫자를 참고하여 한 절 혹은 두 절을 연주한다.  
05) Amazing Grace / 선율은 체로키 인디언의 민요이다. 체로키 인디언들이 강제 이주를 하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강제 이주 중에 4,000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가족이 죽으면 땅에 묻으며 이 노래를 불렀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다. 한국전통음악에서 자주 사용하는 5음계 곡이다.   
06) 예수님 오소서 / 찬송가 98장이다. 한국 전통음악 선법으로 작곡한 찬송이다. 장단은 중모리이고, 선율은 메나리토리이다. 중모리는 매우 느린 장단이고, 메나리토리는 동부지역에서 불렀던 민요의 선율이다. 중모리는 스님의 머리와 관련이 없다. 굿거리는 굿과 관계가 없다. 무당벌레와 무당이 관계가 없다. 중모리, 굿거리는 한국음악의 리듬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한국인에게 주신 리듬이고, 영성이다.    
07) 참회의 기도 / 욕망을 따라 살면서 자연과 이웃을 해치며 살아온 삶을 회개를 통해 존재와 추구하는 것을 바꾸는 순서이다. 자연과 사람이 용서와 화해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한다. 
08) 응답송 / ‘감사드립니다’는 한국음악 선법으로 작곡한 찬송이다. 장단은 중모리, 선율은 경토리이다. 경토리는 경기지방에서 불렀던 민요의 선율이다. 
9) 성서봉독 / 성서봉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독서(구약성서)와 시편, 제2독서(서신서)와 찬송, 그리고 복음서이다. 예배에서 구약과 신약 모두를 봉독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의 일치성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조기연, 「예배 갱신의 신학과 실제」, 191) 전통적으로는 구약성서를 봉독한 후에 시편송을 노래하고 그 다음에 서신서 봉독과 알렐루야 찬송 그리고 복음서 봉독과 설교의 순서로 이어진다.(조기연, 「한국교회와 예배 갱신」, 150) 
10) 시편송 / ‘시편 95’는 한국음악 선법으로 작곡한 찬송이다. 장단은 굿거리, 선율은 경토리이다. 가사는 성실문화 이정훈 목사가 편사했다.   
11) 알렐루야 영창 / 한국음악 선법으로 작곡한 찬송이다. 장단은 굿거리이고, 선율은 경토리이다. 
12) 말씀의 증언 / 성경본문과 설교문은 자료집 설교문 중에서 골라서 사용할 수 있으며 예배문에 나온 성서본문에 대한 설교는 설교모음 1,2,3을 참고하면 된다.
13) 침묵기도 /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말씀을 내 마음에 채우면서 하나님의 존재 안에 머무는 순서이다. 설교 후 침묵은 동방교회 예배 전통에도 나타난다. “그래서 침묵은 미래 세계의 신비이다. 그것은 우리를 순례자로 남게 하여 우리를 이 시대의 걱정에 얽매이지 않게 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거처하시는 성령의 불을 지킨다.”(헨리 나우웬, 「마음의 길」, 58-59).  “그래서 교회의 모든 조직적인 활동을 지도함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어떻게 사람들을 분주하게 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어떻게 분주하지 않게 하느냐는 것이다.”(헨리 나우웬, 「마음의 길」, 65)
14) 나눔의 마당 /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는 평화의 마당이다. 20세기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의 역사였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은 수많은 하나님의 생명을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다. 이제 미래 사회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하나님 나라의 영성’, ‘나눔의 영성’이다. 이 ‘나눔의 영성’은 피와 살을 나눈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다.       
15) 성찬식 / 성찬식 예문은 해운대교회의 성찬식 예문이다. 한석문 목사가 정리하였다. 
16) 상투스(Sanctus) / 전통적으로 성찬식에서 불렀으나 개신교 예배에서는 사라졌다. 이사야 6장 3절에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이 노랫소리를 타고 하나님께서 현현하신다. 한국음악 선법으로 작곡한 찬송이다. 장단은 중중모리이고, 선율은 경토리이다.   
17) 하나님의 어린  양 / 전통적으로 성찬식에서 불렀으나 개신교 예배에서는 사라졌다. 오늘 예배를 위해 한국 전통음악 선법으로 작곡한 찬송이다. 
18) 삼중 교독식 찬양(Three Antiphons) / 동방교회 예배전통이다. 다함께, 찬양대, 집례자가 교독으로 찬송하며 성찬분급을 받는다.
19) 용서와 화해를 위한 공동기도 /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설교 후에 진행되었다. 전통적으로는 이웃을 위한 기도, 중보기도라고 불렀다. 세계의 모든 교인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다. 이번에는 우리 민족과 사회를 위한 용서와 화해 기도로 드린다. 
20) 봉헌 / 말씀과 성찬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 후에 그들을 생각하면서 헌금을 드린다. 그래서 이웃을 위한 기도 후에 봉헌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 위치에 있었다.(조기연, 「예배갱신의 신학과 실제」, 234)
21) 주기도송 / 예배학자 박근원 교수가 4절로 된 아람어 주기도 찬송을 보고, 주기도문을 3절의 가사로 정리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 수요기도회에서 찬송으로 불렀다. 한국 전통음악 선법으로 작곡한 찬송이다. 장단은 중모리이고, 선율은 메나리토리이다. 

 

 


 2023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설교문 모음       

 


아래의 설교문은 각 교회와 예배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설교(자료)들입니다. 설교문 가운데 새번역과 개역개정판 성경이 문맥에 따라 사용되었으며 하느님이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이것은 용서와 화해 기도모임의 참가자들이 개신교 성공회 천주교회 등의 교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사용하는 표현을 선택한 것입니다. 

      
     1. 칼과 창을 보습과 낫으로(이사야 2:1-5)
     2. 휴전선에 세워진 십자가(에베소서 2:14-22)
     3. 무지개를 볼 때마다(창세기 9:8-15, 마태복음 5:1-12)  
     4. 요셉 생애의 마지막 이야기, 용서(창세기 50:16-26)
     5. 큰 사랑 품게 하소서(창세기 37:18-36  요한 1서 4:7-21)
     6. 이제, 6.25 한국전쟁을 넘어서다(시편 85:1-13  이사야 40:6-8)    

 


1. 칼과 창을 보습과 낫으로
   이사야 2:1-5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비전을 사람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날,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끝나는 날이라고 선언합니다.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칼과 창을 들고 싸우던 사람들이 전쟁을 끝내고, 칼을 쳐서 보습 즉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농기구로 사용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전쟁을 준비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이제까지는 주로 칼과 창의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칼이 얼마나 많은지, 창이 얼마나 날카로운지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그 칼과 창으로 상대를 얼마나 죽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또 다른 전쟁을 위해 더 많은 칼과 더 날카로운 창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 하나님이 임하시는 그날이 되면 칼과 창이 필요 없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전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쟁기와 낫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쟁기와 낫으로 농사를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칼과 창의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지금도 그 이야기는 끊이지 않습니다. 그 칼과 창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임당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이야기는 칼과 창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느냐의 이야기입니다. 칼이 창이 얼마나 첨단화되었느냐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같은 재료를 가지고 전쟁에 사용하는 칼이나 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농사 짓는데 사용하는 쟁기나 낫을 만들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칼과 창을 쟁기와 낫으로 만들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칼과 창의 이야기를 쟁기와 낫의 이야기로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칼과 창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윤흥길의 소설『낫』은 전쟁 후 이념 갈등으로 싸우다가 원수가 된 가해자와 피해자의 후손들이 가진 보복심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0대 회사원이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아버지 산소에 벌초하러 고향을 찾아 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귀수였습니다. 그가 고향을 찾은 때는 가뭄이 한창인 여름이었습니다. 그가 낫을 사려고 고향 마을 입구의 철물점에 들렸을 때, 그를 유심히 살펴보던 주인이 그가 배낙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귀수는 자기는 엄귀수라고 말하면서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철물점 주인의 말이 맞았습니다. 귀수 어머니는 귀수를 임신한 채로 이념 갈등의 마을에서 도망쳐 나와 엄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했습니다. 배낙철은 6.25를 전후로 좌익에 가담했다가 전쟁의 와중에서 낫을 휘둘러 마을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살해했던 사람입니다. 그 마을에서는 배낙철을 배낫철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배낙철의 아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하겠다고 낫을 들고 몰려 왔습니다. 그때 교회의 장로이며 마을의 유지인 최 교장이 사람들을 마을 회관에 모이게 하고 귀수와 그들 사이를 중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을은 좌우익 충돌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지주였던 최 장로의 아버지도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최 장로의 두 남동생은 살해되었고 그것을 목격한 어머니는 자살했습니다. 최 장로는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재산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최 장로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배낙철을 낫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는 낫이 농사에 유용한 기구면서 동시에 흉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배낙철도 사회가 그를 무서운 흉기가 되게 했다고 말하면서 원한을 풀 것을 권유합니다. “흉기는 틀림없이 또 다른 흉기만 불러들일 뿐입니다. 그때 그 기억이 지긋지긋하지도 않습니까? 낫을 흉기로 휘두르는 것은 옛날 옛적에 벌써 다 없어졌어야 마땅한 관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맘속에 저마다 한 자루씩 품고 있는 그 잘 드는 낫을 이제부터는 처자식 따뜻이 거느릴 곡식 거두고 꼴 베고 조상님네 산소 성묘하는 아름다운 용처에다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 마을은 오랫동안 가물어 땅도 황폐되고 인심도 메말라 있었습니다. 상처는 가뭄처럼 오랜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시켰습니다. 최 장로의 간곡한 호소에도 마을 사람들이 귀수를 향해 달려들려 하자 최 교장은 앙갚음하려거든 먼저 나를 처치하고 하라고 하면서 막았습니다. 최 장로의 중재로 귀수와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오랜 가뭄에 메말라 있는 마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보복하겠다고 몰려 왔던 마을 사람들은 비가 내린다고 기뻐하며 낫을 들고 논으로 달려나갔고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보복감정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해소되지 않은 채로 대를 물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억울함은 가장 오랫동안 기억되는 감정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해소되기도 하지만 어떤 억울함은 마치 가뭄처럼 사람의 마음을 황폐시킵니다. 이 소설은 오랜 가뭄 후에 비가 내리게 되는데 그것은 최 장로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중재와 그로 인한 상호 이해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 사회의 갈등을 중재하고 상호 이해를 도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갈라진 마음에 비가 내릴까요? 우리 교회가, 우리 신앙인들이, 최 장로처럼 둘 사이를 중재하고 중재를 통해 서로 이해하게 될 때, 하늘부터 은총의 비가 내릴 것입니다. 그러면 낫은 더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아니라 농사 짓는 유용한 농기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휴전선에 세워진 십자가
   에베소서 2:14-22

 

바울 당시에도 종교와 인종과 신분 등이 높은 벽 혹은 담이 되어 사람들을 가르고 갈등 가운데 있게 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 율법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벽은 높았습니다. 벽 이쪽과 저쪽의 사람들은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벽을 허무는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허무심으로 벽을 허무시었고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우셨고, 벽으로 나누어져서 원수로 지내던 사람들이 평화를 이루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벽들이 너무 많습니다. 남과 북 사이의 벽도 서로 넘어오고 갈 수 없도록 철조망으로 높게 쌓아져 있습니다. 그렇게 원수지간으로 지낸 지 70년이 넘습니다. 언제 어떻게 이 벽이 허물어지고 평화롭게 서로 오갈지 알 수 없습니다. 휴전선은 지도상으론 선이지만 높고 튼튼한 벽이 되었습니다.

독일인 동화 작가인 브리타 테켄트럽이 지은 빨간 벽이란 제목의 동화가 있습니다. 여러 동물이 모여 사는 마을에 빨간색의 벽이 아주 높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 벽을 누가 만들었는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또 그 벽이 어디까지 뻗쳐있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벽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동물 중에 생쥐는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생쥐는 “난 정말 궁금해, 벽 너머에 뭐가 있을까?” 생쥐는 겁 많은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야옹아, 이 벽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지 않니?” 고양이가 소곤거렸습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있는 거야. 벽은 우리를 지켜 줘, 꼬마 생쥐야, 저 바깥쪽은 위험해.” 그러고는 총총 가 버렸습니다. 꼬마 생쥐는 늙은 곰에게 물었습니다. “곰 할아버지, 저 빨간 벽은 왜 세워진 거예요?” 늙은 곰이 말했습니다. “기억이 안 나는구나. 꼬마 생쥐야. 저 벽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단다. 이제 내 삶의 일부야.” “하지만 궁금하지 않으세요, 곰 할아버지?” 생쥐가 물었습니다. “아니, 별로 궁금하지 않구나.” 그러고는 느릿느릿 가 버렸습니다. 꼬마 생쥐는 언제나 행복한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저 벽 뒤에 뭐가 있는지 아니, 여우야?” “벽 뒤에 뭐가 있든 무슨 상관이야.” 여우가 씩 웃었습니다. “꼬마 생쥐, 넌 질문이 너무 많아. 뭐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러면 나처럼 행복해질 테니까.” 그러고는 서둘러 가 버렸습니다. 꼬마 생쥐는 으르렁 소리를 잃어버린 사자를 만났습니다. “사자야, 저 벽 뒤는 어떤 세상이에요?” 사자는 슬픈 얼굴로 말했습니다. “벽 뒤에 아무것도 없어. 아마 거긴 깜깜할 거야.” 그러고는 생쥐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꼬마 생쥐는 여전히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빛깔 고운 새가 벽 너머에서 날아왔습니다. “와!” 꼬마 생쥐가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파랑새야, 넌 어디서 왔니?” “이 벽 너머 세상에서.” 새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말도 안 돼!” 다른 친구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파랑새야, 날 벽 너머로 데려가 줄 수 있니?” 꼬마 생쥐가 물었습니다. “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파랑새는 꼬마 생쥐는 엎고 벽을 넘어 날아갔습니다. 거기서 꼬마 생쥐는 상상도 못 하던 색색 가지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했습니다. “여기는 껌껌하고 으스스할 거라고 생각했어. 내 친구들이 그렇게 얘기했거든.” 꼬마 생쥐가 말했습니다. 파랑새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봐서 그래. 너는 궁금해하면서 봤잖아. 넌 정말 용감했어. 진실을 스스로 찾아 나설 정도로 말이야. 꼬마 생쥐야, 네 인생에는 수많은 벽이 있을 거야. 어떤 벽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지만, 대부분은 너 스스로 만들게 돼. 하지만 네가 마음과 생각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그 벽들은 하나씩 사라질 거야. 그리고 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발견할 수 있을 테고.” “친구들에게 말해 줘야겠어.” 생쥐가 소리쳤습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됐을 수도 있어. 꼬마 생쥐야.” 파랑새가 타일렀습니다. “그래도 해 볼래.” 생쥐가 말했지요. 그런데 둘이 뒤를 돌아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벽이 어디 있지?” 꼬마 생쥐가 물었습니다. “무슨 벽?” 파랑새가 물었어요. “벽은 처음부터 없었어.” 그게 무슨 말인지 생쥐는 알 것 같았습니다. 꼬마 생쥐는 친구들에게 돌아가서 자기가 본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모두 귀 기울여 듣더니, 하나씩 하나씩 벽을 통과해서 걸어 나갔습니다. 사자만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사자도 마침내 발을 떼었습니다. 꼬마 생쥐랑 친구들을 찾아 벽 너머 세상으로 나가려고 움직였습니다. 

이 동화는 남과 북을 갈라놓은 휴전선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휴전선은 높은 벽인가? 바닥에 그은 선인가? 줄인가? 높은 벽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넘을 수 없다고 포기하든지 아니면 넘기 위해 무너뜨려야 합니다. 줄이라면 줄 위 혹은 아래로 넘어가면 됩니다. 바닥에 그어 놓은 선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오갈 수 있습니다. 남과 북은 휴전선을 높은 벽이라고 생각했고 서로 오갈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 벽이 있기에 서로 침범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 더 높게 쌓았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바벨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광경을 보신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더 이상 탑을 쌓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탑을 쌓지 못하게 하셨을까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의 교만에 대한 심판으로 보는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탑을 높게 쌓아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인간의 교만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려는 것에 대한 심판으로 보는 설명입니다. 이 설명은 사람들이 쌓은 것을 탑이 아니라 벽으로 봅니다. 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벽을 높게 쌓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설명이 본문의 의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 사람들은 높게 벽을 쌓고 담을 세웁니다. 벽을 쌓고 벽 이쪽의 사람들과 저쪽의 사람들이 싸웁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벽을 허무셨다고 선언합니다. 벽을 허무셨을 뿐만 아니라 벽 이쪽 사람들과 저쪽 사람들이 평화를 이루게 하셨다고 합니다. 새 번역으로 14절부터 17절까지의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17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바울 당시에 가장 높고 강한 벽 혹은 담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높은 담을 쌓아 놓고 이방인들이 절대 넘어 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지킬 수 없는 수많은 율법의 조항들을 만들어 놓고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이 그 율법의 조항들을 폐기하셨고 담을 허무셨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허무심으로 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 담을 허무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렇게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남과 북 사람들이 높은 벽을 세워놓고 서로 원수로 여기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을 우리 민족의 현실에 적용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휴전선 담에 세워져 있습니다. 휴전선에 세워진 십자가의 예수님은 두 팔을 넓게 벌려 남과 북 사람들을 다 품고 계십니다. 원수처럼 지내는 남과 북의 모든 사람을 품에 안으시고 이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우리는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인제 그만 원수로 지내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그리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라는 예수님의 음성, 예수님의 부탁, 예수님의 호소,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3. 무지개를 볼 때마다
   창세기 9:8-15  마태복음 5:1-12 

 

우리 모두 평화를 사랑합니다. 평화로운 가정, 평화로운 사회, 평화로운 교회, 평화로운 국가를 염원합니다. 성경에서 평화라는 단어로 새번역판을 검색해 보면 183회가 나옵니다. 그만큼 갈등이 많았었다는 의미도 되지만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의 8복 선언 중에 일곱 번째가 평화에 대한 것입니다.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으론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자녀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고 희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평화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 평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어떤 평화의 이야기를 만들었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무지개를 보라’는 제목의 동화가 있습니다. 빨강 나라가 있었습니다. 빨강 나라 사람들은 빨간색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들은 빨간색이었습니다. 학교, 집, 옷, 자동차... 모두 빨간색이었습니다. 맞은 편에 파랑 나라가 있었습니다. 파랑 나라 사람들은 파란색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고 믿었습니다. 동사무소, 비행기, 교회... 모두 파란색이었습니다. 빨강 나라 사람들은 파랑 나라 사람들을 제일 미워했습니다. 파랑 나라 사람들도 빨강 나라 사람들을 제일 미워했습니다. 어느 날 밤 빨강 나라 사람들이 파랑 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모든 것을 빨갛게 칠해 놓았습니다. 다음 날 화난 파랑 나라 사람들은 빨강 나라에 쳐들어가서 모든 것을 파랗게 칠해 놓았습니다. 드디어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른들도 어린아이들도 무기를 들고 싸우러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그들은 매일 매일 싸웠습니다. 격렬한 전쟁이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중단하고 소나기가 멎기를 기다렸습니다. 햇빛이 다시 나왔습니다. 그들은 다시 전쟁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빨강 나라의 한 소년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하늘을 바라보세요.”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에는 예쁜 무지개가 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 중인 것도 잊은 채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파랑 나라의 한 소녀가 큰 소리로 “야, 저기에 파란색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어,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네.” 모두 말했습니다. “야, 아름답다.” 그들은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 손잡고 화해했습니다. 그 후로 그들은 서로 오가면서 평화를 이뤘습니다. 서로 마음이 안 맞을 때마다 그들은 무지개를 바라보고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무지개를 가리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빨간색이 가장 좋은 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파란색이 가장 좋은 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 두 가지 색 모두 아름다우며, 그 두 색이 함께 있으면 더 아름다우며, 다른 많은 색과 조화를 이루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할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들은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증오심과 갈등과 분열이 있을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 홍수가 끝난 후에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주셨던 축복과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후손들이 아담의 후손들처럼 번성하도록 복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하늘에 무지개를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노아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지개를 볼 때마다 두 가지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첫째로, 선조들이 지은 죄 떄문에 홍수로 심판받았다는 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사람들끼리의 갈등과 분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새로운 언약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신 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지개를 볼 때마다 분쟁과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만들자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인류가 죄와 허물로 심판당하지 않도록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팔 벌려 적대자들을 품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시고,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화해케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평화를 위해 일하고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 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4. 요셉 생애의 마지막 이야기, 용서
   창세기 50:15-26

 

“요셉아, 이제 용서하고 나에게 오렴”

창세기를 크게 두 부분 즉 1-11장 그리고 12-50장으로 나눕니다. 1-11장은 창조부터 시작된 태고적의 이야기고, 12-50장은 족장들의 이야기 즉 아부라함을 비롯한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마감되고, 이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를 담은 출애굽기가 시작됩니다. 창조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야기는, 족장들을 통해서 그리고 한 민족을 통해 나타나신 이야기로 계속됩니다. 족장들 이야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는데, 요셉의 죽음 직전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가 형들을 용서한 이야기입니다. 

성서의 유대인들에게 족장들은 민족의 선조들이 되었습니다. 족장들의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정체성 형성과 민족 설립의 기본 정신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부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향 떠난 그가 하나님의 은총과 타향 사람들의 환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이삭의 우물 파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타지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형의 용서를 받기 전에 그가 얍복강 가에서 얼마나 고민했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는지를 배웠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형들에 대한 용서가 없었더라면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에서 살아남지 못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 민족이 어떤 민족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었으며, 그런 교훈을 대를 물리면서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종교,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제도의 기본 가치로 삼았습니다. 
만일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정적으로 본다면 어쩌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탄생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용서가 없었더라면 그의 형제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애굽 사람의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원망하고 다투다가 소멸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용서를 받은 형제들은 애굽에서 번성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용서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고마워하면서 미안해하면서 애굽에서 최선 다해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을 용서한 배경에는 요셉에게 복 내려 주신 하나님이 계셨음을 믿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용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탄생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용서는 요셉의 죽음 직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왜 용서가 그의 생애 마지막에 있었을까요? 그만큼 형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모든 고난과 역경과 아픔을 겪어냈습니다. 그러나 형들을 용서하는 것은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을 용서하는 것은 아무리 해보려고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도 언젠가는 형들을 용서해야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미루어지고 또 미루어졌습니다. 그가 비록 부모님과 형제들을 애굽으로 오게 하여 함께 살고 있지만 여전히 형들이 용서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용서는 요셉에게 힘들고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왜 요셉이 죽음 직전에야 용서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답니다. “요셉아, 이제 형들을 용서하렴.” 그러자 요셉은 “하나님, 안 합니다, 저는 형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아, 형들을 용서하렴. 비록 많은 고생을 했지만, 너도 많은 것을 얻었잖니?” 요셉은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용서 못 합니다. 저의 억울함은 제가 얻은 모든 것들보다 크고 저를 아프게 합니다. 제가 오늘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하나님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참 후에 하나님께서 세 번째로 요셉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아, 평생 억울함의 응어리를 안고 사느라고 고생 많았다. 이제 형들을 용서하렴. 그리고 나에게 오렴. 나에게 와서 편안히 쉬렴.” 그렇게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용서는 요셉 생애의 마지막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은 죽기 전까지 형들을 증오하고 용서하려다 좌절하고 다시 증오하고 또 용서를 시도하면서 지냈을 것 같습니다. 형들을 용서하는데 90년 걸렸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요셉의 멀고 험한 용서의 여정

요셉의 용서가 그의 생애 마지막에 이뤄졌다는 것은 그에게 용서는 멀고 험한 여정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긴 여정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그가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의 용서 여정에 세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었고 그것은 용서에 필요한 요인이 됩니다.

첫째로 요셉의 억울함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습니다. 용서가 이루어 지기 전에 먼저 상처의 치유 혹은 회복이 필요합니다. 억울한 경험은 기억나고 또 기억납니다. 그 경험은 잊히기는커녕 아무 때나 불쑥 떠 오르고 그때마다 분노, 증오심, 수치심 등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만큼 억울한 경험이 상처가 되었고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경우에 억울함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배신감이 더해져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틀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마음은 언제나 검은 잿빛으로 덧칠한 상태가 되어 삶에 진한 그림자가 따라다닙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가 애굽 사람들에게 팔아넘겨졌을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 봅니다. 어린 요셉은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슬펐을까요? 17세 때 애굽으로 팔려간 이후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습니다. 17세는 지금 나이로 하면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입니다. 요셉의 젊은 시절은 꿈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땀 흘렸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배신감과 증오심을 품고 날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때였습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이국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며 온갖 수난과 수모를 견뎌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때는 믿고 따르던 형들로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한 억울함,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타향에서의 외로움 등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적응해 가면서 형들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심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인정하고 직면했습니다. 증오하면서 억울해 하면서 혼자서 타지에서 외로운 삶을 살아갔습니다. 많이 혼자서 울었을 것입니다. 억울해서 울고, 힘들어서 울고, 외로워서 울고, 가족들을 보고 싶어서 울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요셉이 부모와 형제들을 만났을 때 크게 울었다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42:24, 43:29-31, 45:1-1, 50:17). 요셉은 보고 싶음, 억제된 억울함, 지난날의 고생, 형제 사이에 깨진 관계, 외로움, 서러움 등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 울었을 것입니다. 궁중에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형제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의 모습을 밝히지 않은 채로 혼자 울었습니다. 요셉은 90년이 넘는 세월을 애굽에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억울함의 상처로부터 벗어 나는 길은 상처를 인정하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상처입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미우면 증오하면서, 슬프면 울면서, 아프면 아파하면서, 외로우면 외로워하면서, 상처와 대면하고 직면하는 것이 회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다 보면 온전한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요셉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직면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갖은 유혹을 이겨냈고 고난의 길을 지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상처입은 자에서 살아남은 자로 바뀌어 갔습니다. 억울함이 있을 경우 용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처로부터의 회복입니다. 스스로 때론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상처의 치유가 일어나야 합니다. 요셉이 용서하기까지 상처로 벗어나는 긴 여정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그 상처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용서는 힘들어 집니다. 용서하기 전에 상처를 인정하고 직면하고 치유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는 요셉은 좋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억울함은 나쁜 경험입니다. 억울함은 주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배신이기 때문에 더욱 아프고 나쁜 경험입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좋은 경험 대신 나쁜 경험을 얻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처음에는 나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외지인이라고 차별받았을 것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요셉은 애굽 사람들의 인정과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왕의 인정을 받았고 나중에는 총리대신이라는 높은 지위에도 올랐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이 있고 실력이 있다고 해도 외국인을 높은 자리에 오르도록 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애굽 생활을 통해 좋은 경험을 많이 쌓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환대는 나와 다른 사람에게 나와 똑같은 권리를 인정해주고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형들은 동생인 요셉을 학대하고 배제했지만 애굽 사람들은 그를 환대하고 포용해 주었습니다. 요셉이 받은 좋은 경험은 나쁜 경험을 대면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좋은 경험을 갖게 되면 가해자를 측은지심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요셉은 좋은 경험을 바탕으로 부모님과 형제들을 초대하여 돌봐 주었습니다. 보복당할까 두려워하는 형들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을 가졌으며, 타지에서 살아가야 하는 후손들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좋은 경험이 쌓이게 되면 그 경험을 선물로 여기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고, 자신도 가해자에게 용서라는 선물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셋째로 요셉은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용서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만일 애굽에서 살지 않았으면 받지 못했을 수도 있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용서해 달라고 비는 형들에게 요셉이 말했습니다. “….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창세기 50:19-21, 새 번역). 사람들에게 받은 학대와 배신을 하나님은 선한 것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보면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연약하고 상처입기 쉽고 허물과 잘못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은 피해입고 아파하는 피해자에게만 비추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가해자에게도 비추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사는 동안 자신은 한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며, 그 은총은 자기를 억울하게 만든 형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을 받은 요셉은 형들에게 용서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지내는 동안 상처로부터의 서서히 회복되었으며, 좋은 경험을 많이 쌓았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조금씩 용서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후손들에게 용서 이야기를 남긴 요셉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지만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는 요셉을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요셉을 만난 후에 그들은 보복당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후에는 더욱 두려웠나 봅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용서해주라고 유언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잘못을 고백했어야 합니다. 야곱도 죽기 전에 자녀들 사이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용서는 형들의 사과를 전제로 한 조건적 용서가 아니라 무조건적 용서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참회와 사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참회와 사과 없는 혹은 불충분한 참회와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준 선물입니다. 

요셉이 용서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그의 가족들은 애굽에 사는 동안 애굽에 혼합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선조들의 이야기도 사라지고 애굽에서의 생존과 탈출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용서로 요셉의 형제들 그리고 후손들이 애굽에서 번성했고 후에 출애굽 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용서 이야기를 끝으로 선조들의 이야기를 담은 창세기는 끝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애굽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 광야 이야기, 가나안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용서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이어지게 했습니다. 요셉은 보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서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요셉 이야기를 읽으면서 “보복심을 억누르고 용서한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하고 자랑스럽다. 우리 후손들도 그렇게 살자”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용서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사람들과 용서와 화해를 이루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않으면 그들은 심판받고 벌 받았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길을 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신약과 구약을 이어주는 핵심 주제를 구원으로 보면 그 내용은 온전케 됨 혹은 창조 질서로의 회복입니다. 분단, 전쟁, 갈등 등으로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이 다시 창조 상태로 회복되려면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이 필요하고 은총과 용서받은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것은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에게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지금도 어디선가 용서와 화해의 길을 걷고 계시는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며 선물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예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호소와 초대로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귀한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나도 네가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이 길을 같이 가자. 이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길이니까”라고 호소하고 권면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도 싫어하고 화해도 못 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불러 주셨기에 그것은 초대의 선물입니다. 어쩌면 천국은 이 땅에서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 길 끝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전쟁과 분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넘겨 주어야 합니다.

 


5. 큰 사랑 품게 하소서
    창세기 37:18-36  요한 1서 4:7-21

 

새해를 시작하며 올 한해 기도제목을 다이어리에 적었습니다. 그 기도제목은 ‘큰 사랑을 품게 하소서.’였습니다. 갈등과 분열이 심한 이 시대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사랑의 힘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4장 18절 이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완전한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두려움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분열과 원한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죠.  
안타깝게도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완전한 사랑이 깨어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사건이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갔던 사건이었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따먹지 말라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아담과 하와는 두려워 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아담을 부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합니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관계에 금이 가니 두려움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깨져 두려움이 찾아 온 것이지요. 그 다음 사건은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일로 이어집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끼리 다투고 급기야 죽이기까지 한 사건입니다. 이 또한 형제들 사이에 완전한 사랑이 깨져 나타난 비극이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깨지는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구약말씀도 완전한 사랑이 깨져 발생한 비극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야곱에게 1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이스라엘 12지파의 근원이 됩니다. 그 가운데 열 한번 째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어떻게 죽이려 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르우벤과 유다 때문에 요셉은 죽음에서는 벗어날 수가 있었지요. “그래도 우리 동기인데 그를 죽이고 그 피를 덮어 버린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요셉이 죽음은 면했지만 멀리 이집트로 팔려가는 신세가 됩니다. 이러한 비극이 발생한 것도 결국 야곱의 아들들 사이에 완전한 사랑이 깨진 결과였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이 그렇습니다. 그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왜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가까이해야 하는가 하고 반문하곤 합니다. 아예 이스라엘 역사를 배제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어떻게 완전한 사랑을 회복해 가시는지를 보기 위함입니다. 성경 안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 그것은 완전한 사랑을 회복해 가는 여정이 되지요. 
완전한 사랑이 깨지면 두려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두려움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바라보기보다는 자꾸 ‘나’만을 바라보게 되지요. 자기 자신만이 살 궁리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이기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기심은 우리 마음에 독이 자라게 합니다. 그 독이란 ‘의심’과 ‘비겁함’을 말합니다. 두려움은 이기심을 낳고 이기심은 의심과 비겁을 낳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나요? 의심이란 무엇입니까?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겁이란 무엇입니까? 용기나 줏대가 없어 겁이 많고 강자 앞에 굽히기 쉬운 태도를 말합니다. 이러한 의심과 비겁이 ‘우리’라는 공동체를 깨뜨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완전한 사랑에 이르도록 교육하시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았지요.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고자 물 위를 걸어 다가가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러하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 오라 하십시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예수께 걸어 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거센 바람이 불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됩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의심을 떨쳐낼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담대한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완전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지요. 우리는 이것이 정답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정답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지요. 우리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을 합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믿는다 고백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나요? 
제자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던 또 하나의 태도가 바로 비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은 모두 흩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잡힌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조차 3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를 가리켜 배반이라 말하지만 저는 비겁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제자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길은 매우 험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완전한 사랑에 이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살아서 동행하실 때는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완전한 사랑에 이를 수 있었을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을 만났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들은 경험했지요. 성령님을 체험하고야 그들은 알았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이제 작은 예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다시금 요한 1서 4장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랑을 경험해야 그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완전한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완전한 사랑을 경험했나요? 
 “주님, 제가 큰 사랑을 품게 하소서.” 여전히 저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큰 사랑을 그리워하며 찾고 있습니다. 육적인 관계로 맺어진 부모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원망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지요. 그 부족해 보이는 부모조차 하느님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저와 같은 존재까지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저는 더욱 기도할 것입니다. 더 많은 존재들을 품을 수 있는 큰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분단된 한반도가 하나가 되게 하소서.” 그런데 이렇게 기도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주님,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경험케 하소서.”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원수된 자들까지도 품을 수 있는 넒은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그 순간 우리는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이미 맛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주간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신지를… 그리고 나에게 그런 기억이 없다면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기꺼이 부어 주실 것입니다.

 

6. 이제, 6.25 한국전쟁을 넘어서다
    시편 85:1-13   이사야 40:6-8

 

오늘 여러분과 함께 6.25 한국전쟁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로부터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늘 있었습니다. 왜 전쟁이 발생하는것일까요? 평화가 깨졌을 때, 전쟁은 일어납니다. 개인간의 다툼을 전쟁이라 표현하지 않습니다만 이 또한 평화가 깨졌을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평화를 되찾아 주는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지난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럼에도 늘 전쟁의 위험은 우리 곁을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다른 분석을 할지 모르겠으나 종교인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평화가 깨진 데서 모든 불화의 원인을 찾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마지막 계명이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못한다.’입니다. 우리 이웃의 소유를 탐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의 평화를 깨고 결국은 전쟁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나에게 피해가 없고 전쟁으로 인해 우리에게 득이 생긴다면 전쟁은 가능하다는 입장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을 일으켰던 전범국가와 전범자들은 국제재판에 넘겨졌고 전쟁을 일으킨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독일의 경우 동서독으로 나뉘게 됩니다. 동독은 러시아가 통치하고 서독은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나치를 추종했던 전범자들은 끝까지 추적되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되었지요. 그러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전쟁 후 갈라진 것은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였습니다. 남쪽은 미군에 의해, 북쪽은 소련군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됩니다. 전범인 태평양 전쟁의 최고 사령관은 일본 왕이지만 그에게는 그 어떠한 형벌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전쟁은 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또다시 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후 5년 후에 전쟁이 발발합니다. 그것이 6.25 한국전쟁입니다. 그 전쟁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겼습니다. 전쟁으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수가 상당합니다. 국군의 경우, 대략 17만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유엔군의 경우, 4만명 가량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인민군은 62만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중공군은 12만명, 소련군은 300명, 민간인은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하나 대략 200만명이 죽거나 실종했다는 보고입니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가 대략 3천만정도였는데, 300만명 가량이 죽거나 실종된 것으로 보면, 10명당 1명꼴로 전쟁으로 인해 죽거나 실종을 당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남쪽은 기반시설 40%가 망가졌고 북쪽은 70%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후 한반도의 상태는 거대한 장례식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의 아픔은 우리의 무의식에까지 깊이 새겨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전쟁 후 지난 68년의 분단의 세월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분단의 원인을 제공했던 일본은 오히려 한국전쟁으로 큰 이득을 보게 됩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요. 그러나 한국전쟁특수를 누리게 됩니다. 일본내 850개 군수공장이 자유로운 생산을 하게 되었고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보급물자 생산 및 수송을 발주 받으면서 일본은 조기에 불황을 벗어나 경제 성장의 발판을 다졌습니다. 미국은 어떠합니까? 한국전쟁 후 미국의 경기가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습니다. 오히려 호황의 호황을 거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은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 전쟁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국에서 전쟁이 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죠. 
몇 해 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는 각 교단의 대표들을 모아 일본교회를 방문했습니다.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휴전협정을 정전협정으로 바꾸고 더 나아가 동북아 국가들 사이에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방문한 우리들을 일본교회는 히로시마로 안내했습니다. 히로시마는 태평양 전쟁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 도시입니다. 그곳에 갓 개발된 핵폭탄이 투하된 것이지요. 그 핵폭탄으로 순식단에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고 수만명이 죽었습니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핵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지요. 그 핵폭탄의 위력을 보고 일본은 항복을 하게 됩니다. 그 핵폭탄의 사용과 그 결과로 빚어진 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히로시마로 안내했던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까지 이어집니다. 만 3년동안 지속된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휴전하기를 극구 반대했다고 하는데, 미국과 소련 그리고 중국과 북한은 왜 휴전을 했을까요?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쟁의 범위가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미국은 핵폭탄을 사용했던 경험이 있었지요. 제가 어렸을 때 종종 들었던 이야기입니다만 인찬상륙작전을 진두지휘하였던 맥아더 사령관이 중국에 핵폭탄을 투여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소련과 중국에는 핵폭탄이 없었지요. 그들 역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에 전쟁이 더 장기화되고 심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 그들은 휴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재래식 무기로 싸우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적어도 이곳 동북아시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문제시되었던 국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곳에 전쟁이 난다면 핵전쟁이 되는 것이지요.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함께 죽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6,800개의 핵무기가 있습니다. 중국에는 270개정도의 핵무기가 있지요. 러시아에는 7,000개의 핵무기가 있습니다. 북한에는 20개정도의 핵무기가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러니 남쪽에서도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핵무장을 하기 위한 전단계로 합법적인 군대를 보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헌법 9조를 개정하려는 이유이지요. 이들은 이러한 방법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동북아시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북한은 이러한 세상의 평화 논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민을 굶기면서까지 핵무기를 개발했던 것이지요. 
이곳 동북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되는지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핵무기로 전쟁을 할 경우, 승자와 패자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영구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서로들 핵무기로 무장하려 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세상이 주지 못한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평화란 무엇입니까?
오늘 시편말씀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훼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소서. 당신의 구원을 우리에게 내리소서. 나는 듣나니, 야훼께서 무슨 말씀 하셨는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그것은 분명히 평화, 당신 백성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 또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주시는 평화로다.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드시리라.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 보리라.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 주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 가리라.”
성경이 가르치는 평화란 사랑과 진실 그리고 정의에서 옵니다. 사랑이란 불편해도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려는 힘입니다. 진실이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용서가 이루어지고 화해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정의란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평화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요. 우리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보았습니다. 남쪽은 물질적 부를 누리기 위해 자본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67불이었습니다. 세계 109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북쪽은 드디어 원하던 핵무기를 가졌습니다. 일본도 곧 핵무장을 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온전한 평화가 우리에게 올까요? 
성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했던 존재입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외쳤지요. “회개하라!” 오늘날 이곳에 수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불러 모으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평화에 안주하려 하고 있습니다. 너무 편한 길을 선택하여 가려고 하는 것이지요. 다시금 오늘의 교회가 세례자 요한이 걸었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한 소리 있어 명하신다. “외쳐라.” “무엇을 외칠까요?”하고 나는 물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 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멘.

 

 

 

용서와 화해를 위한 7가지 기도

 

아래의 기도문은 ‘용서와 화해를 위한 7가지 묵상과 기도’ 자료집에서 기도문만 모아 놓은 것입니다. 2023 용서와 화해 기도주일 직전 일주일 동안(6월 19일-25일) 이 기도문으로 매일 기도할 수 있으며 지인들과 공유하고 함께 기도하면 더욱 좋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위한 7가지 기도

 

  1일(월, 6월 19일)    주님,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옵소서
  2일(화, 6월 20일)    주님, 용서와 화해를 배우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3일(수, 6월 21일)    주님,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게 하옵소서
  4일(목, 6월 22일)    주님, 우리가 진심으로 용서하게 하옵소서
  5일(금, 6월 23일)    주님, 우리 가정에 용서와 화해를 주옵소서
  6일(토, 6월 24일)    주님, 우리 민족이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옵소서
  7일(주일, 6월 25일)  주님, 우리 교회가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게 하옵소서

 

첫째 날(6월 19일, 월) “주님,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지난날 입은 상처가 마음에 돌덩이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황무지처럼 메마르게 하고 영혼의 생기를 빼앗아 갔습니다. 기쁨과 감사는 사라졌고 미움과 우울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손길로 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옵소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상처의 자리에서 꽃이 피게 하옵소서. 마음에 강물이 다시 흐르게 하시고 영혼에 신령한 바람이 불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주변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억울한 피해로 생긴 분노와 증오심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당신의 자비로운 품에 안아주시옵소서. 저의 상처와 주변에 상처로 고통당하는 다음 사람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오니 치유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자신의 상처와 주변 사람의 상처 치유를 위해 기도드리고 묵상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둘째 날(6월 20일, 화) “주님, 용서와 화해를 배우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너무 오랫동안 마음에 증오심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많이 힘들었습니다. 세상은 잿빛처럼 흐리게 보였습니다. 얼굴에는 웃음을 간직하려고 하지만 속으론 많이 울었습니다. 겉으론 평안하게 보이면서 속으론 미워하며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을 향하는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주님, 마음 굳게 먹고 저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약해집니다. 그러나 이젠 벗어나고 싶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미움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사랑과 평화가 머물게 하고 싶습니다. 용서와 화해에 대하여 배우면서 서서히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그토록 강조하시고 몸소 보여 주신 용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이제 용서하려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용서와 화해의 길로 초대해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셋째 날(6월 21일, 수) “주님,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오늘은 가해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여전히 밉고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주님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고 거듭나게 하옵소서. 자신의 잘못된 행위가 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얼마나 망가뜨리고 파괴했는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하옵소서. 당신의 은총의 햇살을 그 사람에게 비춰 주셔서 어둠에서 나오게 하옵소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할 수 있는 용기도 주옵소서. 주님, 저도 다른 사람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저로 인해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많은 은총과 사랑을 주옵소서. 저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여기서 가해자를 위해, 그리고 나로 인해 피해입은 사람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모든 인류를 넓은 사랑의 품으로 안아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넷째 날(6월 22일, 목) “주님,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제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에는 용서한 척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증오심이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용서하고 과거로부터 벗어나 앞을 보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가해자가 저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고 이제는 그냥 무조건 용서하려고 합니다. 주님,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많이 분노했고 많이 미워했고 많이 울었습니다. 주님이 저의 손을 잡고 인도해 주시지 않았으면 벌써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동안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는 동안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제 용서의 선물을 그 사람에게 주려고 합니다. 주님, 이제 그 사람을 용서합니다. 진심으로 용서합니다. 무조건 용서합니다. 그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로움을 더하여 주옵소서. 혹시라도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다시 생기면, 저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더해 주옵소서. (여기서 “주님, 제가      를 용서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모든 인류에게 그리고 저에게 용서의 선물을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섯째 날(6월 23일, 금) “주님, 우리 가정에 용서와 화해를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 가정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과 신뢰 대신 거절과 학대받은 자녀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신체적 아픔과 외로운 마음을 갖고 인생길의 마지막 코스를 힘겹게 걸어가시는 어르신들도 많습니다. 평생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한 부부들 사이에 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주님, 우리 가정에 평화를 주옵소서. 우리 가족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옵소서.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게 하옵소서. 살기 위해 우리 땅에 온 다문화 가족들과 탈북자 가족들을 우리가 환대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우리 가족과 주변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평안과 평화를 주시는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섯째 날(6월 24일, 토) “주님, 우리 민족에게 용서와 화해를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채로 서로 갈등하며 증오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되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 힘들고 어려워도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은 이 땅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며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여 주옵소서. 증오심이 녹고 맺힌 원한들이 사라지도록 더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여기서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드리고 묵상합니다.) 우리 민족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일곱째 날(6월 25일, 주일) “주님, 우리 교회가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는 주님의 용서와 사랑받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이 없었더라면 이 땅에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라고 세워주신 우리 교회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그들에게 크신 은총을 베푸시어 그들이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옵소서. 서로 상처 준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 아내와 남편이 여기 우리 교회에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얻게 하옵소서. 우리 민족을 위해 드리는 한국 교회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반도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주시옵소서. (여기서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워주시고 부흥케 하시며 귀한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용서와 화해를 위한 7가지 묵상과 기도 

 

용서와 화해를 위한 묵상과 기도 자료집은 용서와 화해에 대한 7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주제별로 오늘의 묵상과 기도 내용. 성서 이야기, 주제에 대해 생각하기, 주제 설명, 그리고 기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서 이야기는 요셉 이야기를 용서와 화해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교인들에게 책자로 만들어 제공하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1 일(월, 19일)   주님,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옵소서
    2 일(화, 20일)   주님, 용서와 화해를 배우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3 일(수, 21일)   주님,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게 하옵소서
    4 일(목, 22일)   주님, 우리가 진심으로 용서하게 하옵소서
    5 일(금, 23일)   주님, 우리 가정에 용서와 화해를 주옵소서
    6 일(토, 24일)   주님, 우리 민족이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옵소서
    7일(주일, 25일)  주님, 우리 교회가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게 하옵소서

다음의 몇 가지 사항에 유의하여 사용하시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직전 7일 동안(6월 19일~25일) 하루에 한 가지 주제씩 읽고 묵상하고     기도합니다. 
- 생각하기에 대한 질문에 간단히 답하면서 자신의 삶과 용서와 화해를 관련시킵니다. 
- 설명 부분을 읽으면서 용서와 화해에 대한 이해를 넓힙니다. 
- 성서 이야기를 오늘의 주제와 관련지어 살펴봅니다.
- 함께 드리는 기도를 드리고 마칩니다. 이 기도는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 할 수 있습니다.
- 지인들에게 알려서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위한 7가지 묵상과 기도’ 성서 본문
 
다음 성서 본문은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미리 읽고 성서 이야기의 설명을 참고하면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 50:15-26(개역 개정) 

15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22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첫째 날(6월 19일, 월)
주님,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옵소서

오늘의 묵상과 기도 내용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나쁜 영향을 주고 인간관계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상처는 묻어 둔다고 치유되지 않습니다. 상처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치유해야 합니다. 특히 억울함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의 길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성서 이야기: 타지에서 억울함의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요셉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가 애굽 사람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요셉은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슬펐을까요? 요셉은 처음에는 이국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며 온갖 수난과 수모를 견뎌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때는 믿고 따르던 형들로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한 억울함,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타향에서의 외로움 등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젊은 시절은 꿈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땀 흘렸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배신감과 증오심을 품고 날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때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보복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분투하면서 살아남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요셉 이야기는 형들의 배신, 부모님과의 생이별, 타국에서 험난한 삶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부모와 형제들을 만났을 때 크게 울었다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42:24, 43:29-31, 45:1-1, 50:17). 요셉은 보고 싶음, 억제된 억울함, 지난날의 고생, 형제 사이에 깨진 관계, 외로움, 서러움 등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 울었을 것입니다. 궁중에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요셉이 크게 울었다는 것은 그만큼 아팠다는 의미인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직면했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억울함의 상처를 가슴에 안고 혼자서 타지에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형들에 대한 용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억울함의 상처가 보살핌받아야 합니다.

생각하기: 나의 억울한 경험에 대하여 

억울한 경험은 기억나고 또 기억납니다. 그 경험은 잊히기는커녕 아무 때나 불쑥 떠 오르고 그때마다 분노, 증오심, 수치심 등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만큼 억울한 경험이 상처가 되었고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경우에 억울함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배신감이 더해져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틀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마음은 언제나 검은 잿빛으로 덧칠한 상태가 되어 삶에 진한 그림자가 따라 다닙니다. 우리에게도 이런저런 억울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 질문에 따라 자신의 억울함의 상처에 대하여 생각해 보세요     

1.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에게서 부당한 억울한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언제, 어떤 상처를 받았나요? 왜 그것이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나요?

2. 억울한 상처로 인해 가장 힘든 것 혹은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3. 그 상처를 어떻게 했습니까? 다음 중에서 당신이 택한 선택은 무엇인가요?

  (1) 상처를 그냥 묻어 두었습니다.
  (2) 상처를 생각하면 계속 화가 나고 기회가 있으면 갚아 주려고 합니다. 
  (3)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4.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였나요?

억울한 피해, 상처, 보복심 

A가 B에게 고의로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이 B에게 피해가 되면 A는 가해자가 되고 B는 피해자가 되며, B는 A에 대한 보복심 혹은 원한을 갖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고의성과 피해자의 보복심/원한입니다. 고의적 행동이란 A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으면 그런 일이 안 일어났을 행동을 말합니다. 만일 B가 A로부터 입은 피해가 고의성이 없었으면 B에 대한 보복심은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B가 A의 행동을 이해하든지 아니면 A가 사과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그것을 B가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A의 행동이 고의적이었고 그것이 B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그것은 B에게 억울한 피해가 되고 그로 인한 배신감, 분노, 피해당한 수치심, 그리고 보복하고 싶은 원한 감정이 쌓이게 됩니다. A와 B가 신뢰적 관계에 있었다면 B에게는 배신감으로 인한 고통이 더해집니다. 억울한 상처는 보복심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흔들릴 정도로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자아가 흔들리고 가치관이 전도되고 영적으로 혼란스러워집니다. 억울함은 가슴에 박힌 돌덩이처럼 생각과 행동과 감정을 지배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흔들어 놓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게 만들기도 합니다.     

신앙인으로 가해자를 용서하려고 노력하지만 잘되지 않습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치유가 있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해야 할 일은 용서보다 상처의 치유입니다. 때론 용서하면 치유도 일어날 수 있지만, 치유 없는 용서는 상처를 덧나게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상처와 그것이 삶에 주는 영향을 살펴보고 치유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상처 입은 채로 평생 살아서는 안 됩니다. 원한을 품은 채로 평생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원한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는 전문가나 주위 사람의 돌봄을 받거나, 혹은 스스로 자신을 돌봄으로써 치유될 수 있습니다. 

상처가 치유되려면 ‘애도’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인정하고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망가졌어요”라고 말하면서 울어야 합니다. 애도하지 않으면 과거와 상처에 매입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형들을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번 크게 울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자신의 슬프고 아픈 과거와 대면했습니다. 애도를 통해 그의 자아는 조금씩 재구성되었습니다. 

상처 치유에서 ‘이야기하기’가 중요합니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가슴에 돌처럼 박힌 상처를 꺼내서 그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치유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비록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로 인한 상처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고 가해자에게 항의하고 세상에 알리고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상처에 관하여 이야기하다 보면 상처가 주는 고통의 강도가 약해지고 빈도가 줄어듭니다. 이야기하기도 애도처럼 상처 입은 자아를 재구성하는 작업입니다. 

치유에서 ‘좋은 경험하기’는 필수입니다. 좋은 대상과 만남, 즉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 함께 아파하고 분노해 주는 사람, 곁에 있어 주는 사람, 기도해 주는 사람과 만남은 좋은 경험이고 새로운 경험입니다. 이것은 가해자로부터 받은 피해와 다른 경험입니다. 좋은 경험은 상처를 견디게 하고 치유하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상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치유를 위한 기도도 중요하지만, 상처를 갖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픔, 슬픔, 분노, 억울함 등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고 호소하고 기도하면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상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가해자를 위해 기도드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그에 대한 증오심도 많이 사라지는 경험도 합니다.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면 피해자는 용서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지난날 입은 상처가 마음에 돌덩이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황무지처럼 메마르게 하고 영혼의 생기를 빼앗아 갔습니다. 기쁨과 감사는 사라졌고 미움과 우울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손길로 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옵소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상처의 자리에서 꽃이 피게 하옵소서. 마음에 강물이 다시 흐르게 하시고 영혼에 신령한 바람이 불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주변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억울한 피해로 생긴 분노와 증오심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당신의 자비로운 품에 안아주시옵소서. 저의 상처와 주변에 상처로 고통당하는 다음 사람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오니 치유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자신의 상처와 주변 사람의 상처 치유를 위해 기도드리고 묵상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둘째 날(6월 20일, 화)
주님, 용서와 화해를 배우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묵상과 기도 내용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서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용서와 화해에 대한 막연한 이해와 잘못된 이해가 용서와 화해를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해로운 용서와 화해에 이르게도 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가 무엇인지, 화해가 무엇인지. 용서와 화해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용서에 대한 오해는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서 이야기: 용서로 마감하는 요셉의 생애

요셉의 생애는 파란만장합니다. 부모님의 사랑받던 이야기, 형들에 의해 죽임당할뻔한 이야기,  이국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애굽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소위 성공 이야기, 그리고 형들과 부모님을 모셔 오는 이야기 등등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 이야기는 형들을 용서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는 형들을 용서한 후에 죽습니다. 형들과 다시 만난 후에 용서하고 화해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용서는 그의 죽음 직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그만큼 용서가 어렵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왜 요셉이 죽음 직전에야 용서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답니다. “요셉아, 이제 형들을 용서하렴.” 그러자 요셉은 “하나님, 안 합니다, 저는 형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아, 형들을 용서하렴. 비록 많은 고생을 했지만, 너도 많은 것을 얻었잖니?” 요셉은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용서 못 합니다. 저의 억울함은 제가 얻은 모든 것들보다 크고 저를 아프게 합니다. 제가 오늘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하나님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참 후에 하나님께서 세 번째로 요셉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아, 평생 억울함의 응어리를 안고 사느라고 고생 많았다. 이제 형들을 용서하렴. 그리고 나에게 오렴. 나에게 와서 편안히 쉬렴.” 그렇게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요셉이 용서하기까지에는 억울함과 분노와 외로움의 상처로 몸부림치는 오랜 세월이 있었습니다. 물론 애굽 사람들의 환대와 하나님의 보살핌도 있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용서나 화해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용서와 화해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권면하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생각하기: 용서에 대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로 인한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망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 지면 앙갚음, 즉 보복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망각도 안 되고 보복도 쉽지 않습니다. 상처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망각이 어렵습니다. 설령 잊힌다고 해도 다시 기억납니다. 보복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보복도 어렵습니다. 보복은 보복을 낳기 때문에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망각과 보복은 억울함에 대한 바른 대응이 되지 않습니다. 망각도 되지 않고 보복도 할 수 없는 상황은 피해 입은 사람을 피해와 가해자로부터 떠날 수 없게 만듭니다. 망각과 보복이 아닌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용서가 그 대안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보복이 쉬울까요? 용서가 쉬울까요? 둘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복이나 망각이 억울함에 대한 바른 대응이 아니라면 용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용서에 대한 바른 이해보다 잘못된 이해가 더 많습니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용서를 시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다음 질문에 답하면서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세요. 

1. 우리의 삶에서 용서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1) 용서는 상처를 받은 당사자를 위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용서하면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2) 용서는 대인관계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합니다. 용서가 대인관계에서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3) 용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합니다. 용서는 공동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요?

2. 용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용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1) 용서와 화해와 같은 것일까요? 용서하면 반드시 화해해야 할까요?
 (2) 용서는 그냥 상처를 묻어주고 잊어버리는 것일까요?
 (3) 용서는 정의와 반대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용서를 하게 되면 정의 실현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용서와 화해에 대한 이해와 오해 

용서는 대인관계에서 생겨나는 부당하고 깊은 상처를 효과적으로 해결해 주는 적극적인 자기 치유와 회복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용서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용서의 올바른 정의는 ‘다른 사람에게서 부당하고 깊은 상처를 받은 후에 생겨나는 부정적인 반응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를 괴롭힌 사람에게 가지고 있던 분노나 미움을 없애고 가능하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용서는 망각이 아닙니다. 용서하고 제대로 회복하기 위해서 상처를 정확히 기억하고 직면해야 합니다.

용서는 정의와 반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서의 시작은 정의 실현의 시작입니다. 용서는 부당하게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직면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내가 부당하게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복보다는 사랑과 자비로 상대방을 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다릅니다. 용서는 상처받은 사람의 내부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것이고, 화해는 상대방과 함께 노력하여 상호 신뢰를 회복하는 대인관계적인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과 관계없이 나 혼자도 할 수도 있지만, 화해는 상대방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사과 없이도 할 수 있지만, 화해에는 사과가 꼭 필요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용서와 화해를 배우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너무 오랫동안 마음에 증오심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많이 힘들었습니다. 세상은 잿빛처럼 흐리게 보였습니다. 얼굴에는 웃음을 간직하려고 하지만 속으론 많이 울었습니다. 겉으론 평안하게 보이면서 속으론 미워하며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을 향하는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주님, 마음 굳게 먹고 저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약해집니다. 그러나 이젠 벗어나고 싶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미움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사랑과 평화가 머물게 하고 싶습니다. 용서와 화해에 대하여 배우면서 서서히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그토록 강조하시고 몸소 보여 주신 용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이제 용서하려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용서와 화해의 길로 초대해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셋째 날(6월 20일, 수)
주님,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묵상과 기도 내용 

가해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들이 사과해도 진정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해자들의 진정한 사과는 피해자들의 상처 회복과 용서에 도움이 됩니다. 사과는 사과를 위한 기본요소들이 갖춰질 때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성서 이야기: 진정한 사과 없는 요셉의 형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다음에 요셉에게 보복당할까 두려웠나 봅니다. 먼저는 종들을 보내어 형들을 용서해주라고 아버지가 유언했다고 전했고, 이어서 형들이 와서 요셉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인들이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용서하라고 유언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사과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것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도 아니고 형들이 용서를 구했기 때문도 아니라 전적으로 요셉의 선택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용서 안 할 수 있고, 아버지가 용서해주지 말라고 했어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형들이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용서를 안 할 수 있고, 형들이 용서해주지 말라고 해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용서 부탁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용서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즉 참회와 사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참회와 사과 없는 혹은 불충분한 참회와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준 선물입니다.

생각하기: 사과에 대하여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면 피해자가 용서하기도 훨씬 쉽고 피해자의 상처도 많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해자는 여전히 가해자로 남아 있고, 피해자도 여전히 피해자로 힘들게 지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누군가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사과에 대한 이해를 살펴봅니다. 

1.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사과한 적이 있나요? 어떻게 사과했나요?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들였나요?

2. 때로는 사과를 했지만,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 사과하는 것이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사과일까요?

진정한 사과의 요소들 

사과는 단순히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사과에는 공감 표현, 잘못 인정, 보상, 재발 방지, 용서 부탁이라는 5요소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요소인 공감(후회) 표현은 가해자가 피해자가 입은 상처에 대해서 공감하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과 고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상처 때문에 얼마나 힘들고 아파하는지를 충분히 공감하고, 그런 상처를 준 것 때문에 가해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 깊이 고통스럽게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미안해. 나 때문에 상처 입고 많이 화났지? 네게 상처를 줘서 많이 후회되고 내 마음이 아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인 잘못(책임) 인정은 가해자가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처나 상처가 발생한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해명)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000한 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면서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세 번째 요소인 보상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물질적 피해나 정신적 상처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보상은 돈이나 선물을 제공하는 등의 물질적 보상도 있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표현하는 정신적 보상도 있습니다. 

네 번째 요소인 재발 방지는 가해자가 다시는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조처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로만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개선과 변화의 시도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요소인 용서 부탁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자신의 사과를 받고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용서 부탁은 사과의 마무리 작업입니다. 즉, 가해자가 앞에서 제시한 네 가지 사과를 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피해자에게 자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다시 받아들여 주고 관계회복으로 나아갈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과로 충분하지 굳이 용서까지 부탁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사과의 진정성을 느끼는지와 피해자가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회복으로 나갈 의향이 있는지를 확실하게 점검하기 위한 차원에서도 용서 부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가해자가 유의해야 할 것은 용서받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했으면 용서 구하기가 먼저가 아니라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도울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유의해야 할 것은 용서를 구했다고 해도 피해자가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하기는 피해자의 의무가 아니라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어떤 형태의 참회나 사과로도 보상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해자가 진정으로 사과하고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 중에서 용서와 화해라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선물처럼 주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오늘은 가해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여전히 밉고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주님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고 거듭나게 하옵소서. 자신의 잘못된 행위가 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얼마나 망가뜨리고 파괴했는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하옵소서. 당신의 은총의 햇살을 그 사람에게 비춰 주셔서 어둠에서 나오게 하옵소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할 수 있는 용기도 주옵소서.

주님, 저도 다른 사람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저로 인해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많은 은총과 사랑을 주옵소서. 저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여기서 가해자를 위해, 그리고 나로 인해 피해입은 사람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모든 인류를 넓은 사랑의 품으로 안아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넷째 날(6월 22일, 목)
주님, 우리가 진심으로 용서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묵상과 기도 내용 

마음에 증오심을 품고 평생 지낼 수는 없습니다. 증오심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 부정적 영향을 줍니다. 용서는 한 번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용서는 멀고 힘든 여정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용서는 영적 여정과도 같습니다. 스스로 노력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도하면서 용서의 여정을 지나면 억울한 상처 이전의 모습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한 모습이 됩니다. 

성서 이야기: 요셉의 용서의 여정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고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형들을 만나기 전의 요셉의 모습은 배신당함, 부모와의 이별로 인한 상실감의 슬픔, 외지에서의 외로움과 고독, 생존을 위해 견디기 힘든 고통, 형들에 대한 증오심 등등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는 용서는커녕 하루하루 견뎌내기 힘든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요셉의 모습과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 인정과 직면, 타지에서의 생존과 승리적 삶. 부모님과 형들을 초대하여 돌봐 준 뿌듯함, 보복당할까 두려워하는 형들에 대한 측은지심, 타지에서 살아가야 하는 후손들에 대한 염려, 애굽 사람들의 환대, 그리고 선하게 꾸며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등등입니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요셉은 용서할 수 없음에서 용서할 수 있음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셉은 오랜 세월 동안 피해의 이야기를 생존과 승리의 이야기로 바꾸었습니다. 

생각하기: 용서의 가능성에 대하여 

용서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가해자의 참회 혹은 변화도 중요하지만, 피해자의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여기서 피해자의 변화는 잘못한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의 상처를 입은 마음의 치유 혹은 변화를 말합니다. 피해자의 마음이 증오심과 수치심과 보복감정으로 가득 차 있으면 피해자의 상처는 진행 중이며 용서도 불가능해집니다. 피해자의 마음이 회복되어야 가해자도 수용할 수 있고 진정한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1. 어떻게 하면 진정한 용서를 잘 할 수 있을까요? 

2.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3. 용서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용서의 결심과 실천 

용서는 사건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즉 한 번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치는 과정입니다. 용서를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과정과 방법들이 있습니다. 

1. 자신이 받은 상처를 제대로 직면하기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부당한 상처가 있나요? 그것을 제대로 직면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나요? 상처를 직면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용서를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자신의 상처와 그 영향을 제대로 인식할수록 문제해결의 필요성을 더 많이 느끼고,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고 화가 나면, 절대로 그 화를 감추려고 하면 안 됩니다. 분노, 불안, 증오, 불신 등 상처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영향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2. 용서에 도움이 되는 방법들을 활용하기 
 
(1)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과 그가 준 상처를 맥락 속에서 다시 바라보고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맥락 속에서 새롭게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상처를 입힌 사람과 사건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의 입장,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 그리고 다양한 상황 등을 고려하면서 총체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모두 인간으로서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통찰하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과 나는 모두 인간이며, 단점과 한계를 가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통찰하는 것도 용서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를 통해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이 약하고, 부족하고,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이러한 발견은 용서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특히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이웃으로부터 용서받은 경험을 발견하는 것도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3) 공감과 측은지심을 느끼기: 용서에서 상처를 입힌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넘어서서, 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고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감은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생기는 감정으로, 상대방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화날 때 나도 화가 나고, 상대방이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한 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측은지심은 공감을 넘어서서, 상대방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상처를 나의 상처로 인정 수용하고. 상처나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등이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용서에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피해자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하기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용서하라고 가족이나 성직자가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는 용서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되고,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섭섭할 수도 있고, 기꺼이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할 수도 있으며, 이 때문에 또 다른 상처를 받게 됩니다. 적당한 시기에 용서를 하나의 선택으로 제안할 수는 있지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조심해야 할 것은 성급한 용서하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심각하고 부당한 상처를 받게 되면 부정적인 영향이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분노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불편해서, 손해를 볼까 봐, 관계가 악화될까 봐, 또는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까 봐, 내가 받은 부정적인 영향을 감추고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얼른 용서해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급한 용서하기는 매우 위험합니다. 용서는 천천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상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용서의 과정도 천천히 지나가면서,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나아가야 합니다. 

4. 용서하고 화해하기: 용서와 화해의 과정에서 가장 바람직한 순서는 상처를 준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고, 피해자가 용서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 화해하기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학교폭력의 경우에 왕따를 시킨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피해자가 용서한 다음에 두 사람이 화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과정입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용서하기와 용서 구하기의 순서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용서에서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변화보다 피해자의 변화입니다. 피해자의 변화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가 상처를 치유하고 갈등을 해소하고 용서에 대해 고민하는 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마음도 넓어지면서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용서는 가해자에게 주는 선물인 동시에 피해자에게도 선물이 됩니다. 용서에 이르는 과정은 피해자에게 영적 여정과 같은 것이어서 용서하고 나면 영적으로 한 단계 올라간 것과 같게 됩니다. 피해자에게 용서는 영적 선물이 됩니다. 용서는 억울한 상처에서 시작하여 치유, 용서의 선택과 실천, 그리고 화해로 이루어지는 길고 먼 영적 여정과 같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제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에는 용서한 척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증오심이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용서하고 과거로부터 벗어나 앞을 보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가해자가 저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고 이제는 그냥 무조건 용서하려고 합니다. 

주님,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많이 분노했고 많이 미워했고 많이 울었습니다. 주님이 저의 손을 잡고 인도해 주시지 않았으면 벌써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동안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는 동안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제 용서의 선물을 그 사람에게 주려고 합니다. 주님, 이제 그 사람을 용서합니다. 진심으로 용서합니다. 무조건 용서합니다. 그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로움을 더하여 주옵소서. 혹시라도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다시 생기면, 저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더해 주옵소서. 

(여기서 “주님, 제가      를 용서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모든 인류에게 그리고 저에게 용서의 선물을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섯째 날(6월 23일, 금)
주님, 우리 가정에 용서와 화해를 주옵소서

 

오늘의 묵상과 기도 내용 

지금은 어느 시대보다 가족들 사이의 갈등이 점점 더 많아질 뿐만 아니라 심화 되어 깨어진 가족 관계도 많아졌습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생긴 상처는 신뢰 관계를 무너뜨리고 상처 입은 사람은 평생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족들 사이의 용서와 화해는 개인 간의 용서와 화해보다 더 복잡합니다. 그러나 가족 사이에서 용서와 화해가 일어난다면 가족들 사이의 신뢰감, 친밀감, 연대감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성서 이야기: 요셉 가정의 갈등 구조와 용서

한 명의 아버지, 4명의 어머니 그리고 12명의 형제로 구성된 요셉의 가족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거기다가 자녀들에 대한 부모님의 편애도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편애를 받는 요셉에 대한 형들의 냉대는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항의 표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갈등이 있는 가족, 소위 역기능적 가정은 언제나 희생자를 만들어 냅니다. 형들은 감히 부모님께 항의하지 못하고 대신 요셉에게 ‘네가 문제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고 하면서 그를 희생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집단적으로 못된 짓을 했습니다. 죽이려고까지 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더는 요셉을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요셉을 만난 후에 그들은 보복당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후에는 더욱 두려웠나 봅니다. 아버지가 용서해주라고 유언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식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잘못을 고백했어야 합니다. 야곱도 죽기 전에 자녀들 사이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 혹은 화해는 전적으로 요셉의 몫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보복 대신 용서를 선택했고 용서는 가족들 사이의 화해로 이어졌습니다. 만일 요셉의 용서가 없었으면 요셉의 가족들의 갈등과 대립은 계속되었을 것이고 후손들의 미래도 불투명했을 것입니다. 
 
생각하기: 가족 사이의 용서에 대하여 

“나는 엄마를 절대로 용서 못 해.” “나는 당신을 절대로 용서 안 해.” 가족들 사이에 일어나는 슬프고 아픈 절규입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생긴 상처는 그 어느 상처보다 깊고 그 고통이 오래갑니다. 가장 신뢰하고 돌봄 받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서 생긴 상처는 배신감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로 인한 분노는 강렬하고 좌절감이 큽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료하고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평생 걸릴 수도 있습니다. 가족들 사이의 용서는 관계 개선 즉 화해를 포함하기 때문에 다른 경우의 용서보다 복잡합니다.

1. 개인과 개인 사이의 용서와 가족과 가족 사이의 용서는 어떻게 다를까요?

2. 가족 관계에서 용서 후에 반드시 화해해야 할까요?

3. 가족 관계에서 용서 없이 화해할 수 있을까요?

4. 가족 관계에서 먼저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고 먼저 용서하고 화해할 수도 있습니다. 당  
   신은 어떤 것을 선택할까요?

5. 가족 관계에서 용서와 화해를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요?

가족들 사이의 용서의 과정 

가족 관계에서 피해자는 주로 약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억울함에 대하여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말하면 더 위험스러워질까 두려워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묵인하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말하면 가해 가족은 이미 죽었을 수 있고,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오래전의 일을 이제야 말한다고 하며 무시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용서가 실현되려면 먼저 힘의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피해 가족은 가해 가족이나 다른 가족과 같은 위치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 사이의 용서 그리고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몇 가지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첫째, 피해 가족이 입은 상처와 그것이 준 영향에 대하여 충분히 이야기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와 증오심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가해 가족이나 다른 가족 구성원은 피해 가족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야기에 공감해야 합니다. 

둘째, 가해 가족은 피해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행위가 어떻게 상처가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어떻게 피해 가족에게 상처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가해 가족이 많습니다. 가해 가족은 피해 가족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피해 가족도 가해 가족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용서와 화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가해 가족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면 용서와 화해가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가혹한 책임 추궁이나 분노는 용서와 화해에 지장이 됩니다. 

셋째, 피해 가족과 가해 가족 사이에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를 나누게 되면, 감정이 격렬해질 수 있고, 소리를 지르거나 우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피해 가족이나 가해 가족이 전혀 몰랐던 사실들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를 넓히고 회복, 용서, 화해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만들 수 있습니다.

넷째, 피해 가족과 가해 가족이 대화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의 신뢰가 회복되면 용서가 선언될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는 마치 결혼식처럼 그 중요성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단지 ‘용서한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경우에 따라 피해 가족과 가해 가족이 구분되지 않고 피해자며 동시에 가해자인 경우에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물론 용서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피해 가족과 가해 가족은 신뢰를 온전히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다섯째, 용서했다면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피해 가족은 원한 감정에서, 가해자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용서했어도 상처받은 것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부정적 감정들은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강도와 빈도가 약해집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 가정에 용서와 화해를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 가정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과 신뢰 대신 거절과 학대받은 자녀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신체적 아픔과 외로운 마음을 갖고 인생길의 마지막 코스를 힘겹게 걸어가시는 어르신들도 많습니다. 평생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한 부부들 사이에 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주님, 우리 가정에 평화를 주옵소서. 우리 가족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옵소서.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게 하옵소서. 살기 위해 우리 땅에 온 다문화 가족들과 탈북자 가족들을 우리가 환대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우리 가족과 주변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평안과 평화를 주시는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섯째 날(6월 24일, 토)
주님, 우리 민족에게 용서와 화해를 주옵소서

 

오늘의 묵상과 기도 내용 

우리 민족은 상처를 많이 입은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의 상처는 외적의 침입이나 천재지변보다 동족끼리의 갈등과 전쟁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뿌리 박혀 있습니다. 원한의 상처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물기는커녕 대를 물리기도 하고, 그것은 언제든지 무서운 보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상처를 돌보고 치유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치유가 개인적 및 사회적 차원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우리 민족의 분단 상처를 치유하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성서 이야기: 요셉의 용서와 민족의 탄생

성서의 유대인들에게 선조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정체성 형성과 민족 설립의 기본 정신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부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향 떠난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타향 사람들의 환대가 얼마나 소중했었는지를 기억했습니다. 이삭의 우물 파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타지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형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 그가 얍복강 가에서 얼마나 고민했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는지를 배웠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용서가 없었더라면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에서 살아남지 못했었을 수도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선조들의 이야기를 통해 환대, 용서 구하기, 용서하기, 화해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자비가 없으면 민족 공동체의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요소들을 대를 물리면서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종교,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제도의 기본 가치로 삼았습니다. 

요셉이 용서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그의 가족들은 애굽에 사는 동안 애굽에 혼합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선조들의 이야기도 사라지고 애굽에서의 생존과 탈출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용서로 요셉의 형제들 그리고 후손들이 애굽에서 번성했고 후에 출애굽 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용서 이야기를 끝으로 선조들의 이야기를 담은 창세기는 끝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애굽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 광야 이야기, 가나안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용서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이어지게 했습니다. 요셉은 보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서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도 전쟁과 분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넘겨 주어야 합니다.

생각하기: 우리 민족의 갈등과 용서에 대하여 

남과 북의 분쟁은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도 심화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 민족의 상처가 치료되고 용서가 일어나야 암울한 과거와 대면할 수 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1.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갈등과 상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인 갈등과 상처가 발생하고 있나요?

2.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이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용서와 화해를 활용할 수 있을까요?

3. 우리 민족의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나요? 

4. 나는 우리 민족의 용서, 화해, 평화, 치유를 위해 어떻게 하고 있나요?

전쟁과 분단 이야기에서 용서와 화해 이야기로 

용서와 화해는 개인들 간에 일어나는 갈등뿐만 아니라 종교, 지역, 국가 간에 일어나는 갈등을 치유하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필요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용서를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까지 치유한 용서의 영웅입니다. 만델라는 27년간의 감옥생활에서 벗어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후에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서, 오랫동안 지속한 심각한 흑백 인종갈등을 용서와 화해를 통해 치유했습니다. 이 위원회에서는 인종차별 시절의 가해자가 고백과 사과를 하면 사면해 주고, 피해자에게는 위로와 약간의 보상을 했습니다. 당사자들 간의 용서 구하기와 용서하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오랜 세월 지속하였던 심각한 인종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만일 남아공이 보복을 선택했더라면 국가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남북 갈등을 비롯하여 정치적 이념적 지역적 종교적 갈등 등이 많아서 많은 사람이 서로 증오하고 상처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용서를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가 매우 필요합니다.

해마다 6월은 우리 민족에게 전쟁을 상기시킵니다. 같은 민족끼리 죽이고 죽임당했던 끔찍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되었어도 전쟁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전쟁의 위협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전쟁은 우리 모두에게 끔찍한 상처를 주었고 여전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전쟁은 없었지만 우리는 전쟁 이야기하면서 또 전쟁 이야기 들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전쟁 이야기의 주제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전쟁 승리의 영웅담 이야기, 피난 시절의 고생한 이야기, 지금은 안보의식이 흐려져서 걱정된다는 이야기 등등입니다. 이제는 전쟁 이야기를 다르게 혹은 전쟁 이야기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할 만큼도 되었건만 여전히 전쟁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전쟁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전쟁이 주는 파괴적 부정적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전쟁하면서 살아온 셈입니다. 

전쟁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전쟁이요 파괴요 경쟁입니다. 입시전쟁, 교통전쟁, 환경파괴, 가격 파괴, 폭탄 세일 등 전쟁 언어가 일상어가 되었고 죽고 죽인다는 표현을 너무 자주 사용합니다. 신앙생활도 전쟁으로 표현합니다. 목숨 걸고 믿어야 하고, 세상과 싸워야 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예배 후에 나누는 인사도 “이번 주에도 날마다 주 안에서 승리하십시오”입니다. “이번 주에도 주안에서 평화를 이루십시오”라고 인사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갈등과 분쟁은 날마다 고조되고 있습니다. 갈등이 생기면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하거나 전환 시켜야 하는데 이기고 지는 전쟁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폭력적이고 갈등이 많은지에 대한 설명도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는 전쟁 이야기하면서 전쟁해 왔고, 전쟁 이야기로 계속 황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이젠 전쟁 이야기 대신 평화의 이야기, 화해의 이야기, 용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우리는 전쟁 이야기 대신 평화의 이야기, 용서의 이야기, 화해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 혹은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면 우리 사회도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전쟁과 분단의 이야기를 물려주면 안 됩니다. 용서의 이야기, 화해의 이야기, 평화의 이야기를 물려 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 민족에게 용서와 화해를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채로 서로 갈등하며 증오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되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 힘들고 어려워도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은 이 땅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며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여 주옵소서. 증오심이 녹고 맺힌 원한들이 사라지도록 더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여기서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드리고 묵상합니다.)

우리 민족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일곱째 날(6월 25일, 주일)
주님, 우리 교회가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묵상과 기도 내용 

교회의 사명은 시대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한반도에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고, 평화를 만들고, 통일을 이루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사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교회는 용서와 화해를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성서 이야기: 후손에게 용서 이야기를 남긴 요셉 

요셉의 용서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사람들과 용서와 화해를 이루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않을 때는 그들은 심판받고 벌 받았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길을 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신약과 구약을 이어주는 핵심 주제를 구원으로 보면 그 내용은 온전케 됨 혹은 창조 질서로의 회복입니다. 분단, 전쟁, 갈등 등으로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이 다시 창조 상태로 회복되려면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이 필요하고 은총과 용서받은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용서해 달라고 비는 형들에게 요셉이 말했습니다. “….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창세기 50:19-21, 새 번역). 요셉은 애굽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고 하나님의 많은 은총을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많은 선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선물을 받은 요셉은 용서라는 선물을 형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선물은 단지 형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모든 후손에게 준 엄청난 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요셉 이야기를 읽으면서 “보복심을 억누르고 용서한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하고 자랑스럽다. 우리 후손들도 그렇게 살자”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생각하기: 용서와 화해에 대한 교회의 실천에 대하여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라고 불릴 만큼 용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를 동시에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 혹은 ‘집 나간 아들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의 잘못을 묻지 않고 크게 환영하며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 용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1. 우리 교회 프로그램 중에서 용서와 화해에 대한 교육과 실천 프로그램이 있나요?

2.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가요?

3. 우리 교회가 우리 민족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 이바지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과 교회의 사명 

예수님은 누구보다 사람의 용서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용서하라고 가르치셨고,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가 연관되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35). 산상 설교에서도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마태 6:14-15)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전에 먼저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 5:23-24).”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용서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입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기독교적 용서의 특징은 공동체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기독교 공동체가 계속 실천해야 하는 삶의 형태입니다. 죄와 악은 언제나 관계와 교제를 위협하고 파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용서와 화해를 통해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이 시대의 용서와 화해를 이루길 기대하고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교회는 용서하고 화해하고 치료하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이고, 교회 구성원들은 용서와 화해의 삶을 실천하고 그것을 위한 능력을 향상시키고 세상에서 죄와 악에 대하여 공동으로 대응하는 곳입니다. 
 
기독교인은 용서와 화해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난 용서 하시고 화해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이야기에로의 초대입니다. 이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은 죄를 따라 사는 삶을 버리고, 깨어짐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화해를 실천함으로 용서를 실천합니다. 용서는 죄와 악의 현실과 대항하면서, 적대자들과 함께 사는 길을 찾는 삶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실현된 용서의 정신입니다.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것은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에게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지금도 어디선가 용서와 화해의 길을 걷고 계시는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며 선물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예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호소와 초대로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귀한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나도 네가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이 길을 같이 가자. 이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길이니까”라고 호소하고 권면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도 싫어하고 화해도 못 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불러 주셨기에 그것은 초대의 선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 길 끝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는 주님과 함께  그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 교회가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는 주님의 용서와 사랑받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이 없었더라면 이 땅에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라고 세워주신 우리 교회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그들에게 크신 은총을 베푸시어 그들이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옵소서. 서로 상처 준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 아내와 남편이 여기 우리 교회에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얻게 하옵소서. 우리 민족을 위해 드리는 한국 교회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반도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주시옵소서. 

(여기서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워주시고 부흥케 하시고 귀한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용서와 화해를 위한 7가지 묵상과 기도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치유, 용서, 화해, 평화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용서에 대한 종교의 가르침  


                                                               
용서는 거의 모든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많은 종교들은 신의 용서를 받고, 서로 사랑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종교는 그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을 보살펴 주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종교는 용서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많은 지침을 준다. 

1. 용서에 대한 종교적 관점

첫째, 모든 종교는 용서를 거룩하게 여긴다. 

용서는 신이 허물과 죄 많은 인간에게 베푸는 거룩한 은총이며 용서는 신을 닮아가고, 신의 뜻을 실천하고, 또 신과의 관계를 향상시키는 방법이다.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그에 대한 잘못일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범죄가 된다. 

그러므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피해 입은 사람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동시에 신에게 참회해야 한다. 피해 입은 사람이 가해자에게 동정심을 표현하고 사랑을 베풀고 그를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신의 은총으로 자기의 고통을 치료 받고, 신의 도움으로 가해자를 용서하려고 노력한다. 

용서를 거룩하게 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종교적 이해와 관련이 있다.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존엄성을 지닌 귀한 존재라는 사실은 용서에서 아주 중요하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무리 악하고 타락했다고 해도,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떤 사람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가치를 지닌 귀한 존재이다. 인간은 신의 성품을 지닌 귀한 존재이며, 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귀한 존재이며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특별히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나 피해 입은 사람에게는 사랑과 존중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용서가 더욱 요청된다. 

둘째, 종교는 용서의 모델을 제공해 준다. 종교적 문헌들에는 피해 입은 사람이 돌봄과 치료를 받고, 가해자에게 동정심과 사랑을 베풀고 용서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셋째, 종교는 용서를 위한 자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각 종교마다 참회와 용서를 위한 종교 의식이 있고 지침서들이 있다. 종교 공동체는 피해 입은 사람들을 보살피고 지원해 주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는 신의 은총을 받고 종교 공동체로부터 지원 받고 가해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도움을 받는다. 

넷째, 용서는 영적 훈련과 성장의 과정이다. 피해 입은 사람이 힘들고 어렵지만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용서의 과정을 시작하면, 원한이 누그러지고 가해자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며 그에 대한 동정심과 선의가 생긴다. 피해자는 이 과정에서 자신도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이지만, 누군가의 용서와 또 신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종교는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를 시작하도록 힘을 주며, 용서하려는 사람은 용서의 과정을 통해 영적으로 더욱 성장한다. 

2. 이슬람교와 불교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 

아브라함의 전통에 근거한 종교인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는 용서에 대한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용서하시는 신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는 이슬람교의 신, 알라의 여러 성품 중의 하나이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는 용서를 나타내는 세 개의 표현이 있다. 첫째는 afw로 이것은 코란에 35회 나오는데, 그 의미는 사면, 양해, 처벌의 면제이다. 둘째는 safhu로 코란에 8 회 나오는데 그 의미는 ‘죄로부터 돌아서다’이다. 셋째는 ghafara로 코란에 234회 나오고 그 의미는 ‘덮는다’ ‘용서한다’ 혹은 ‘면제하다’이다.

코란은 신자들에게 용서에 힘쓰고 친절을 베푸는 것을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식구들이 악하게 행동하더라도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그들을 용서하라고 한다. 알라로부터 용서받고 싶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일 알라가 그의 약점을 눈감아주길 원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눈감아주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용서는 좋은 평판과 존경을 얻게 해주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다. 만일 보복하는 대신에 용서하고 화해하면, 알라로부터 보상을 받는다. 보복은 언제나 자신이 손해 본 것보다 더 많은 손해를 타인에게 주기 때문에, 결국은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게 한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알라로부터 많은 보상도 받게 해준다.

알라에게 용서를 구할 때 참회는 필수적이지만, 인간관계에서 용서를 구할 때는 가해자의 참회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가해자가 참회한다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더 좋은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화해가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 용서에 꼭 필요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가해자에게 심각한 성격적 결함이 있다고 피해자가 느낀다면, 그와 화해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슬림 형제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로 있으면 안 된다.

용서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핵심은 아니다. 불교의 덕목인 관용과 자비는 용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관용은 용서보다 더 넓은 의미이다. 관용은 고통을 견디면서 그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한 원한을 없애는 것이다. 자비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을 줄이는 데 동참하게 만들어 준다. 피해자가 베푸는 자비는 가해자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관용과 자비는 세상은 고해(苦海)라는 불교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불교에서 모든 형태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한 종교적 목적이다. “자비의 중요한 기능은 다른 사람의 고난과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것이고, 관용의 중요한 기능은 가해에 대하여 다르게 반응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에게 더 이상 고난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증오하면, 그가 나를 증오하게 된다. 그러므로 관용과 자비를 통하여 증오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유익한 일이다. 

관용과 자비는 부처가 수양을 통해 얻은 최고의 덕목이다. 불교 수행자도 부처처럼 관용과 자비를 베풀기 위해 수행해야 한다. 불교 수행자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 특히 상처를 주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견디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관용과 자비는 매우 일방적이다. 관용과 자비는 가해자와 상관없이 베풀어진다.
 
3. 유대교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

유대교에서의 하나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신명기 34:6-7). 그러나 하나님은 잘못을 눈감아 주시지는 않는다. 잘못을 저지르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리시는 분이기도 하다. 

용서는 단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이웃에 대한 분노를 품지 말고, 원수를 갚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셨다.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레위기 19:17-18). 랍비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동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동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고 한다. 

유대교에서는 용서하는 것에 대한 교훈과 실제보다 용서받는 것에 대한 교훈과 실제가 더 많다. 구약성서 시대에 하나님의 용서는 성전에서 드리는 동물 희생 제사를 통해 베풀어졌다.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기도가 동물 희생 제사를 대신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씩 거행하는 예식에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의 아버지,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를 용서 하소서, 우리가 곁길로 나갔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유대인들은 새해와 대속죄일인 욤 키프르(Yom Kippur) 사이에 열흘 동안 참회한다. 유대교의 제의에서 가장 거룩한 날인 대속죄일에는 노동을 하지 않고 금식하면서 죄를 씻는 특별한 의식을 거행한다. 대속죄일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날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받는 날이다. 

유대교에서 용서를 나타내는 몇 개의 표현이 있다. 첫째, mechilah는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다. 가해자가 진실하게 회개했으면 피해자는 그에게 mechilah를 베풀어야 한다. 빚을 탕감해주면 더 이상의 채무관계가 없어지는 것과 같이, 용서는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이 모두 말소되었음을 의미하며, 용서한 다음에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어떤 요구나 주장을 하면 안 된다. mechilah는 화해나 가해자를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의 사면처럼 받을 벌을 면제해주는 것과 같다. 둘째, selichah는 용서를 의미하는 말로 진심으로 가해자를 이해하는 마음의 행동이다. selichah는 가해자를 범죄하기 쉽고 연약하며 동정 받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셋째, kapparah와 tahorah는 용서의 온전한 형태로 죄의 모든 습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전자는 속죄, 후자는 정화를 의미한다. 속죄와 정화는 하나님만 베풀 수 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영적 오염을 정화시킬 수 없다. 

개인들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피해자가 어떻게 용서하느냐에 대한 가르침보다 가해자의 회개의 과정에 대한 가르침이 더 많다. 가해자는 자신의 영적 혹은 심리적 안녕보다는 피해자의 신체적, 물질적, 심리적 및 영적 안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해자가 용서 받으려면 우선 피해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동체는 정의를 실천하고 가해로 생긴 문제를 해결하고 더 이상의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용서가 가능해진다.

유대교에서 회개 혹은 돌아옴을 의미하는 teshuvah는 죄, 참회, 그리고 용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teshuvah는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는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이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났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으며, 그로 인해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뉘우치는 것이다. 셋째는 잘못된 행동을 중단하는 것이다. 넷째는 피해 입은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피해를 보상해 주는 것이다. 다섯째는 공동체의 의식에서 기도 중에 혹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가해자의 회개 없는 용서를 진정한 용서로 보지 않는다.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는 다시 다른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회개하지 않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정의와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유대교의 랍비였으며 위대한 철학자였던 마니모니데스(Manimonides, 1140-1203)는 유대 법전인 미쉬나 토라(Mishneh Torah)를 기록했다. 이것은 성서, 미쉬나, 탈무드, 관습 등을 종합하여 유대교의 법 전통을 그 당시에 맞게 체계화하고 요약한 것이다. 이 책에서 teshuvah의 과정이 좀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잘못을 인정하라
 - 하나님과 공동체에게 잘못을 고백하라
 - 공개적으로 참회하라
 -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라
 - 피해자에게 보상하라
 - 피해자에게 진실하게 용서를 구하라. 필요하다면 피해자의 도움을 받아라. 
   그리고 세 번까지 용서를 구하라
 - 잘못을 저지르게 할 조건들을 피하라. 
 - 처음 잘못을 저질렀던 것과 같은 상황을 만나면 다르게 행동하라. 

기독교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이다. 유대교에서는 인간을 여전히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에게 책임을 더 묻는다. 그러므로 회개는 전적으로 가해자의 책임이다. 그러나 피해 입은 사람도 가해자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책임이 있고, 그가 회개하면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가해자가 진정으로 회개했어도 피해자가 그를 용서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피해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용서해야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회개가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를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가해자가 진심으로 회개했는데도 용서해 주지 않으면 피해자가 비난을 받게 된다.

유대교에서 용서는 내적, 심리적 과정이 아니라 행동이다. 가해자의 회개는 진정한 뉘우침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공동체로 되돌아오는 구체적 행동이다. 가해자가 회개의 과정을 실천하면, 하나님은 그를 받아 주시고, 피해자는 그를 용서해 주고, 공동체는 그를 환영해 준다. 용서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대교적 용서는 대인 관계적 과정이다.

유대교에서 용서가 꼭 화해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을 용서하고 그 후에 그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가족이나 오래된 친구와는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족의 경우에 비록 애정이 없어도 관계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끔찍한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 용서를 해도 자꾸 기억이 나서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이런 경우에 관계의 회복은 또 다른 고통이 된다. 때론 용서 없이도 화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피해자는 용서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해자와의 관계회복을 선택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현재 유대인들과 독일인들은 과거 대학살의 피해 당사자들이나 나치의 주범들이 아니라 그 후손들로서, 그들은 용서 없이 현재와 미래의 입장에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 

4. 기독교의 용서에 대한 이해

1)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

예수님은 용서에 대하여 많이 가르쳤다.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용서보다 인간의 용서가 더 많다.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 교훈의 핵심이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라고 가르쳤다.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 혹은 ‘집 나간 아들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다(누가 15:11-32).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의 잘못을 묻지 않고 크게 환영하며 큰 잔치를 베풀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실천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자기를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원했다(누가 23:34). 

둘째, 예수님은 용서를 베풀었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로 왔을 때, 예수님은 “네 죄가 용서 받았다”(마가 2:5)라고 선언했다. 이 광경을 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용서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보았다. 그들은 용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음행하는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했다. 그들이 떠나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요한 8:1-11).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 받은 존재로 자신을 보았다.

셋째,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핵심은 신에 의한 용서라기보다 인간에 의한 용서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용서하라고 가르쳤고(마태 6:12),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다(마태 18:21-22).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왕으로부터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얼마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자, 왕은 그를 다시 투옥했다(마태 21:23-35). 이 종은 용서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용서는 하나님의 권한이고 신앙의 목적도 신의 용서를 받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예수님은 오히려 인간은 용서하는 존재이며 인간에게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예수님은 부활한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한 후에, 그들에게로 숨을 불어넣고 말하였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넷째, 예수님은 인간의 용서와 신의 용서가 연관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인간이 서로 용서해야 하나님도 용서해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했다(마태 18:35). 산상 설교에도 같은 의미를 가진 교훈이 나온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마태 6:14-15). 물론 하나님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용서
하지 않아도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본자세라고 가르쳤다. 

다섯째, 예수님은 용서와 함께 화해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에게 용서는 화해를 위한 용서이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르고 공동체에서 쫓겨난 사람을 다시 공동체가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공동체가 그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세하게 제시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태 5:23-24).


여섯째, 예수님은 제한을 두지 말고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같은 사람이 여러 번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는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다(마태복음 18:21-22).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일곱째,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예수님은 용서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고 가르쳤다. 원수도 용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를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나?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가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이며 사명이다. 

2) 공동체적 삶과 용서

용서는 기독교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회복된다. 기독교적 용서의 특징은 공동체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1) 공동체적 삶의 형태로서의 용서

존스(L. Gregory Jones)의 용서에 대한 신학적 분석에 의하면 용서의 목표는 화해와 교제의 회복이며, 그것은 많은 훈련과 실천으로 연마되는 기교를 통해 구체화되는 공동체적 삶의 방식이다. 

첫째, 존스는 기독교적 용서의 목적을 화해와 교제의 회복으로 본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고 모든 창조물과의 교제 가운데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와 악은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창조물과의 교제를 파괴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이 하나님, 다른 사람들, 그리고 모든 창조물과 교제할 수 있도록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재창조적인 활동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인간도 과거를 진실하게 기억하고, 깨어진 것을 고치고, 분열을 치료하고, 화해하고, 그리고 관계들을 새롭게 함으로 용서를 실천해야한다. 용서는 단순히 죄를 면제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의 목적은 교제의 회복, 즉 깨어짐의 화해이다.”

둘째, 용서는 기독교 공동체가 계속 실천해야 하는 삶의 형태이다. 죄와 악은 언제나 관계와 교제를 위협하고 파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용서와 화해를 통해 회복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셨고, 그것은 지금도 성령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용서도 특별한 경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와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 분열의 상황에서 화해를 계속 추구하는 기독교인의 삶이다. 용서는 선언되는 말, 느껴지는 감정, 혹은 실행되어야 하는 어떤 행동도 아니다. 용서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다. 

세례는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분명하게 구체화된 용서하고 화해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로의 초대이다. 이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은 죄를 따라 사는 삶을 버리고, 깨어짐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화해를 위해 투쟁함으로 용서를 실천한다. 용서는  죄와 악의 현실과 대항하면서, 적대자들과 함께 사는 길을 찾는 삶이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실현된 용서의 정신이다. 

볼프(Miroslav Volf)는 십자가 정신의 핵심을 포옹으로 본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적으로 남겨두지 않고 자기 안에 그가 들어 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팔은 열려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들어 놓고 적에게 들어오라고 하는 초대의 표시이다.” 예수님은 적들을 포옹하려고 십자가에 팔을 벌린 채로 달리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누가 23:34). 기독교 공동체는 적대자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을 초대하는 공동체이다. 

셋째, 존스는 용서의 실천을 위해서는 훈련된 기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이루어졌다. 인간의 용서도 많은 훈련과 오랜 기간의 노력을 통해 형성된 기교(craft)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실천되는 것이다. 옛 삶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의 새 삶이 평생 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용서는 일련의 단계들을 밟아 간다고 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의 기교는 용서를 통해 죄를 버리고, 삼위일체 하나님, 사람들 그리고 모든 창조물과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사는 것을 배우는 과정을 통하여 심화된다.” 

기독교 공동체는 용서의 삶을 경험하고 훈련하며 실천하는 구체적 장이다. 존스는 기독교 전통과 현대사회에서 용서가 공동체적 훈련과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성품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경우에만 실천되는 행동 혹은 기술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용서하시고 화해하고 치료하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이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용서와 화해의 삶을 실천하고 그것을 위한 기교를 연마하며, 세상에서 죄와 악에 대하여 공동적으로 대응하는 곳이다. 

(2) 발견으로서의 용서

회복과 화해의 삶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생긴다. 용서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용서하고, 참회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사람이 참회한다. 피해자들이 돌봄과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그들은 원한이 사라지고, 아픔이 사람들과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고 수용되며, 고통이 줄어들거나 견딜 만하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공감과 동정심이 증대되며, 상처의 자리에서 새로운 자아가 자라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패튼(John Patton)은 용서를 피해자의 어떤 결정이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돌봄과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본다. 그는 용서에서 피해자의 아픔을 먼저 돌보고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용서는 계속적 치료과정에서 나온다. 용서의 실패는 의지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상처가 아직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서는 (행동처럼) 성취되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피해자가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근거하여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만들어가지 않을 때, 긍정적 자존감의 표시로 일어난다.” 피해자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료 받게 되면, 그는 가해자와 대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의 인간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 때 피해자는 자신도 죄인이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도 해를 끼친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으며, 누구를 용서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진정한 용서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신앙공동체의 과제는 용서의 행동들을 지도하고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그들의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3) 공동체의 과제로서의 용서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용서의 수직적 차원, 즉 하나님의 용서를 주로 강조했다. 독일 신학자인 뮬러-화렌홀즈(Geiko Mueller-Fahrenholz)는 수직적 차원의 용서는 신앙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만 강조함으로 죄와 용서의 문제를 개인들의 사적인 영역으로 환원시켰고, 세상과 단절된 영적인 문제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용서의 수직적 차원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 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도외시된다. 기독교의 예전, 교리적 선언들, 찬송 등에도 죄로 고통 당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배려가 나타나 있지 않다. 수직적 차원의 용서는 피해자들을 무시함으로써 죄가 사람들에게 주는 고통과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게 했고, 용서가 그들에게 회복과 해방을 주는 능력이라는 것을 증언하지 못하게 했다.  

용서는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데, 그것은 공동체적 차원에서 볼 때 해방이다. 악한 행위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속박한다. 악한 행위는 가해자로 하여금 보복 받을 두려움과 죄책감에 빠지게 하고 피해자로 하여금 상처와 분노에 감금한다. 그러나 용서는 고통스런 속박을 풀고, 모두를 해방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이것은 단순히 선언이나 행위가 아니라 해방과 구원의 긴 과정이다.  

용서를 해방의 과정으로 볼 경우에 그것은 단순한 심리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의 해방이다. 이런 경우에 용서는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공동 대응이며 과제이다. 일단 잘못이 생기면 그로 인한 피해가 생기고,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며 공동체도 위협을 받는다. 특별히 폭력이나 불의로 인한 피해의 경우에 피해자는 대응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상처에 사로잡히고, 가해는 계속된다. 이런 경우에 용서는 하나님의 해방의 활동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사명이며 과제가 된다. 

여성 목회상담학자인 마샬(Joretta L. Marshall)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피살된 사람에 대한 대응을 기술하면서 용서를 공동체적 과제로 강조한다. 그는 패튼이 용서를 단지 수동적으로 발견되는 것, 존스가 공동체적 삶의 형태로 본 것과 달리, 용서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과제 혹은 대응으로 본다. 용서의 목적은 화해나 상처입기 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과 공동체들을 속박하는 고통과 상처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속적 해방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과제 혹은 대응으로서의 용서는 심리적 변화나 단일한 행동이 아니라 다층적 과정이다. 용서는 어떤 잘못이 생겼을 때, 그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고통 당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에게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아내 그에게 책임을 묻으며, 공동체가 그 잘못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졌고 그것이 잘못을 저지르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리고 피해자가 원한을 갖거나 복수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도록 도우며,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관계성을 발달시킴으로 보다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또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일들에 대한 공동적 대응을 모색하고, 이 과정에서 용서하시고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원하는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이런 복합적, 공동적 과정은 하나님의 해방적 사건에 참여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포함하는 기독교적 용서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회복과 화해를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기독교적 용서는 죄와 악으로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창조물의 교제를 회복하고 화해하게 한다. 또한 기독교적 용서는 기독교 공동체가 죄와 악으로 상처 입은 세상을 치료하고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는 거룩한 실천이다.

 

 

 

2023 용서와 화해 기도 주일 자료집을 읽고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안이나 의견이 있으시면 알려 주세요. 다음에 자료집을 만들 때 꼭 참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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