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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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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5월 22일 (월) 22:54:05
최종편집 : 2023년 06월 18일 (일) 06:13:13 [조회수 : 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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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복지를 꿈꾸며 제주도로 향하다

 

제주도 살이를 2년 2개월 8일로 마치고, 지난달(4월) 28일 고향 전주로 귀향하였습니다. 제주도가 좋아 전에도 한 달 살이, 보름 살이를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라 하셔서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다니 말이 되느냐 할 것이며, 개중에는 그런 저를 광신자로 의심하는 사람까지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오라, 가라 하시진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음성 아닌 상황으로 음성 이상의 분명한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합니다.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의심하려 해도 의심할 수 없도록 하시는 일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든 저는 제주도에 가서 2년여를 살다왔습니다. 제주도로 떠날 때 저는 제주도가 저희 부부에게 영육간의 가나안복지가 되게 해 주시라 기도드렸습니다. 저에게 있어서의 가나안복지란 복음, 새 생명의 복음을 온전히 믿어 그 새 생명의 복음을 사랑하고,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에게 있어 영적 가나안복지를 누리는 것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육적 가나안복지도 누리게 하여 주신다고 믿습니다.

육적 가나안복지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마6:33) 하신 말씀 중 ‘이 모든 것’ 즉 육신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도 될 수 있고, 건강도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위치나 지위도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 가나안 복지는 물론 방금 말씀드린 새 생명의 복음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들어 있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들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의 주된 대상이 사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새 생명을 보장받은 복음이라는 터 위에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따라서 이웃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며, 그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22:37-40 참조).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고, 또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영적 예배, 즉 최상최고의 예배입니다(롬12:1 참조).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복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요, 전부이기도 합니다.

말로만이라면 참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하기란, 그리 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온전히 그리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시자 사람(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결단을 내려 노력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를 다 말씀드리자면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여기에서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기에 이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어떻든 저는 2년여의 제주도 살이 끝자락에서 그리로 떠날 때 기도드린 가난안복지를 조금은, 아주 조금은 맛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복지가 귀향한 이 전주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 예감을 믿음이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조금이라도 자란 것이라고나 할까요. 은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성령님께서 함께 해 주신 은혜입니다.

 

 

카메라도 모르면서 사진을 찍는 얼간이

 

제주도는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는 피사체의 보고(寶庫)입니다. 카레라 셔터만 누르면 사진이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해 놓고 보니 과장이 심한 말이 되었습니다만, 저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만 했지 카메라의 기능을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보고 좋다 싶으면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런 주제에 찍기 시작하면 거기에 빠져 때가 지난 줄도 모를 정도가 됩니다. 배고픈 것을 못 참는 저입니다만, 그 조차도 의식 못하고 찍습니다.

저는 자연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봄의 꽃들, 여름의 신록과 뭉게구름, 가을의 단풍, 겨울의 눈 덮인 산야, 자연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4월말-5월초의 꽃보다도 더 고운 신록을 좋아합니다. 해를 향한 역광의 시각에서 보는 연록색 어린잎은 가슴까지 설레게 합니다.

그런 자연을 저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나서는 통째로 온전히 즐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카메라가 없을 때에도 렌즈를 통해 보는 프레임으로 묶어 극히 제한된 좁은 시각의 자연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사진으로 다시 태어난 상태의 자연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주된 경로에는 자연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자연을 통하여 저를 부르신 것이고 그에 제가 응한 것이지요. 언젠가는 상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오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믿기 전 어느 시점부터 신의 존재유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 그것을 확인하고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금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있을지도 모르는 신을 향한 기도였습니다. ‘신이여, 당신이 만약 계시다면 저의 이 기도에 응답하소서, 저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소서. 그러면 믿겠나이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몇날며칠을 기도해도 응답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연들이, 그것들의 질서가 하나씩 마음(영혼)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또한 간단히 말씀드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므로 다름 기회로 미루겠습니다만, 그래도 한 마디 말씀드리자면, 자연·자연계의 질서정연함에 조물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며, 감나무에 감만 열리고 밤이 열리지 않는가 하면 밤나무에도 밤만 열리고 감도 배도 열리지 않는 질서, 봄 다음에 겨울이 오지 않고 여름이 오며, 하루가 밤낮의 길이는 달라지지만 24시간이라는 길이는 달라지지 않는 질서 등등, 말을 하려들면 한도 끝도 없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인가의 힘에 의한 것이 분명하지요.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이 조물주, 창조주인 것이고요.

물론 이렇게 알게 된 창조주가 꼭 여호와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두뇌로는 가능치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것을 신은 없네, 신은 인간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산물이네 어쩌네,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井底蛙)인 것이지요. 우물밖에 나가보지도 않고 우물 안이 세상의 전부라고 떠들어 내는 개구리 말입니다.

각설하고 어떻든 저에게 있어 저 자신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증거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증거물인 셈이지요. 제가 지금까지 80평생을 살아온 삶의 족적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실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많은 사람들은 우연사(偶然事)에 과장을 섞어 하는 말쯤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다 해도 저로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게도, 손으로 만질 수 있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나 온도(溫度) 역시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그것이 높으면 뻘뻘 땀을 흘리게 되고 낮으면 오들오들 떨게 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저를 그렇게 보호하시며 인도하시어 지금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제 인생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저는 성경에서 봅니다. 그러니 성경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맺는 말 ― 인간은 위대하다 ―

 

인간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NASA의 차세대 우주 망원경인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이 지구에서 130억 광년 떨어진 우주의 풀-컬러 이미지 사진을 선명하게 찍었다니 말입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38만km로 1.3광초(光秒)이고, 태양은 1억5천만km로 8광분(光分)인데, 130억 광년(光年)이라니 저 같은 사람으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리이지요. 그런 거리의 사진을 선명하게 찍었다니 그런 인간을 위대하지 않다 한다면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광활한, 아니지요, 그것은 아마도 종횡무애 사방팔방 끝이 없는 우주의 점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르지요. 그런 우주를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과학이 어떻고 우주가 어떻네 하며 부정하는 것은 속된 말로 웃기지도 않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 같은 우주를 생각하면 생각이 혼미해져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까지 희미해지는 것 같아 태양계만을 우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기야 그 또한 제가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눈 고장(雪國)>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라는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에서 대양(大洋)을 보고 선향(線香)의 재 떨어지는 소리에서 낙뢰(落雷) 소리를 듣는다 했는데, 저는 그 같은 감각을 갖지 못했으나 자연과 그 질서에서 미루어 우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제가 스스로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시어 보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성령의 존재도 알지 못하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극히 주제 넘는 일입니다.

끝으로 외치는 한 마디―, 정저와들이어! 우물 밖으로 나와 보고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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