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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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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5월 21일 (일) 13:29:07 [조회수 : 2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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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뿌리
행 2:29-36
(2023/05/21, 승천주일, 웨슬리회심주일)

음성으로 듣기

   
 

[동포 여러분, 나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그 무덤이 이 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예언자이므로, 그의 후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그의 왕좌에 앉히시겠다고 하나님이 맹세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지옥에 버려지지 않았고, 그의 육체는 썩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일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키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 회심이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비루하고 힘겨운 일상이지만 우리는 잘 견디며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늘도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들 속에 하늘의 위로와 사랑이 스며들기를 기원합니다. 교회력으로 오늘은 성령강림절 직전 주일인 주님의 승천주일입니다. 동시에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 목사의 회심기념 주일입니다. 회심 기념 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한 사람’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거나 역사의 무대로 호출되어 나왔을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마어마하게 큰 변화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신비를 오롯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롬 5:15)

잘못된 삶을 부끄러워하며 뉘우치는 것도 회심(悔心)이고, 삶의 방향을 철저히 바꾸는 것도 회심(回心)입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은 세상의 인력에 이끌려 살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저버리고 욕망에 이끌려 사는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을 통해 ‘돌아오라’고 거듭 부르십니다.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사 55:7)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옛 사람에 속한 일들을 버려야 합니다. 악한 일, 악한 생각 말입니다. ‘돌아오너라’라는 메시지는 ‘나를 찾아라’(암 5:4)라는 말로 변주되기도 하고,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호 6:1)는 간곡한 권고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회심하면 바울과 루터가 떠오릅니다. 바울은 다마스커스 체험을 통해 박해하는 자에서 박해받는 자로 인생행로를 바꿨습니다. 온갖 시련을 다 겪었지만 그래도 그는 후회가 없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고전 15:10a)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그림자만 보며 살던 마르틴 루터는 은총의 빛을 향해 돌아선 후에 성채와 같이 단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던 삶에서 의롭다 하시는 이를 바라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바로 진정한 회심입니다.

웨슬리의 회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영국 런던의 올더스케이트 가에서 경험한 ‘마음이 뜨거워진’ 사건을 통해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삶을 살았습니다. 단번에 완전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번에 완전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일을 끈질기게 반복하면서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닦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회심을 경험했습니까? 오늘 우리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음행, 더러움, 정욕, 악한 욕망, 탐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골 3:1)

∎ 하강과 상승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이해하기 참 어려운 말입니다. 주님이 머물고 계시는 구체적 공간을 일컫는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입니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하나님의 도움이 오는 방향 혹은 어떤 사람의 명예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굳이 오해를 살 수도 있는 ‘하늘에 오르사’라든지 ‘오른쪽’이라는 공간적 개념을 사용한 것은 사람들의 사고가 공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나타내기 위해 성경이나 신조들이 선택한 공간 표현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강의 방향입니다. 하나님과 근본이 같으셨던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해 주님은 참 사람됨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은 박해를 받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이제 상승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차마 죽음의 자리에 버려두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을 일으키셨고, 결국 주님은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하강과 상승의 이 모든 과정이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세상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형제를 죽이고, 풍요의 환상에 사로잡혀 이웃들의 것을 빼앗고, 자기 욕망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세상 질서에 대한 저항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은 무한한 자기 확장을 도모하는 제국의 질서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 곁에 다가서시는 하나님,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엊그제 우리는 5.18 민주화 항쟁 43주년을 기념했습니다. 불의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났던 항쟁의 역사가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되어 4.19로 그리고 5.18로 면면이 이어지는 자유의 행진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기억합니다.

십자가를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주님이 자발적으로 지신 것으로 신비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자기들의 불의와 위선과 탐욕을 폭로하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이들이 사용한 도구였습니다. 어둠은 빛을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불의의 도구를 통해 인류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그렇기에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사건의 양면입니다. 주님은 오욕과 죄와 탐욕으로 얼룩진 역사를 해체하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세상, 모든 생명이 흥청거리는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비폭력적인 저항이었습니다. 남김없이 다 바쳤기에 주님은 가벼워지셨고, 그렇기에 가볍게 하늘로 오르실 수 있었습니다.

∎ 우리 곁에 계신 주님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그저 자족적인 평화를 누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신다고 말합니다(롬 8:34). 주님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역사가 아무리 진창과 같을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어둠이 아무리 짙어져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가끔은 길이 끊긴 것처럼 보이고, 악한 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오해와 분열이 우리를 갈라놓아도 화해와 이해와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우리의 꿈은 스러질 수 없습니다. 시편 시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도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16:8-10)

감리교회의 정신은 개인적 영성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성화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감리교인들은 세상의 불의를 못 본체 하지 않습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을 외롭게 홀로 버려둘 수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설 땅을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짊어질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 곁에서 시련을 겪고 있는 이들의 고향이 되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타자의 모습으로 오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이들의 마음을 통해 확산됩니다.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저는 크리스토포로스 성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 앞에 한참 머물렀습니다. 화가는 건장한 한 사람이 어깨 위에 어린아이를 앉힌 채 강을 건너는 모습입니다. 그 아기는 왼손에 지구의를 들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주후 3세기경의 인물인 레프로보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이교도로서 아주 힘센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힘센 사람을 만나면 그를 섬기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왕과 악마를 만나보았지만 곧 실망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그리스도가 가장 힘이 세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떠돌았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산에 은거하여 살던 수도자로부터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라는 말을 듣고, 그는 어느 강가에 머물며 뱃삯이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어 강 건너로 데려다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아이 하나를 어깨에 얹고 강을 건너는데 아이가 점점 무거워져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간신히 강을 건넌 후에 ‘너는 참 무겁구나’ 하고 말하자 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너는 하늘과 땅을 지은 왕을 업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레프로보스는 ‘그리스도를 나르는 자’라는 뜻의 크리스토포로스로 불렀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곤경에서 구해주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나르는 이들입니다. 진정한 희망은 이런 이들의 헌신을 통해 조용히 척박한 세상에 뿌리를 내립니다.

∎ ‘내일 말고 오! 늘!’
여러분에게 조금 낯설 수도 있는 한 분을 소개하려 합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권용석 님은 10년을 검사로 그후 20년을 변호사로 살았습니다. 연극인인 부인 노지향 님과 함께 홍천에 ‘행복공장’을 설립하여 많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선사했습니다. “비행을 저질러 6호 처분을 받은 소년·소녀들이나 고립 청년들”을 그곳에 초대하여 자기를 성찰하고 상처를 치유하도록 무료 프로그램을 제공했습니다. 10여 년간 암과 싸우면서 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온 삶을 그 일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가 남겨놓은 글을 모은 책 <꽃 지기 전에>에 저도 짧은 추천사를 썼습니다. 그 가운데 나오는 소박한 시가 오늘의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내일은/내 게으른 영혼의 도피처/내 비루한 마음의 가림막//오! 감탄하면서/깊이/기쁘게/오늘 숨쉰다/가벼워진 몸/날개 돋는 영혼/자유롭게/펄럭펄럭//오! 깊이…/늘! 기쁘게…”(권용석·노지향 지음, <꽃 지기 전에>, 파람북, p.108~109)

우리는 늘 지금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며 삽니다. 권 변호사는 그것이 바로 ‘게으른 영혼의 도피처’요 ‘비루한 마음의 가림막’이라고 말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예감하며 살았기에 그는 지금이 영원과 맞닿아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그렇기에 ‘오! 감탄하면서/깊이/기쁘게 오늘 숨쉰다’고 노래합니다. 지금을 철저히 살았기에 그는 가벼워졌고 그의 영혼에는 날개가 돋았습니다. 그는 승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 현실이 아무리 비루하다 해도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의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벅찬 소명을 가슴에 품고 어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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