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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솜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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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5월 14일 (일) 12:56:00 [조회수 : 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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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솜으로 산다는 것
출 2:16-22
(2023/05/14, 부활절 제6주)
음성으로 듣기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부으며,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 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그들이 아버지 르우엘에게 돌아갔을 때에, 아버지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목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고, 우리를 도와서 물까지 길어, 양 떼에게 먹였습니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런 사람을 그대로 두고 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를 불러다가 음식을 대접해라." 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자기와 함께 살겠다고 하므로,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하였다. 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

∎ 타향살이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몇 주 동안도 우리를 사랑의 끈으로 묶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만나지 못한 시간을 사랑과 그리움으로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부름 받았기에 부르신 자리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성도들과 만났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세계 도처에 주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습니다. 특히 이민 사회에서 교회는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타국에서 아픔과 설움을 겪으면서도 그분들이 거둔 아름다운 삶의 결실을 보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장의자에 앉아계신 노인들을 볼 때마다 저절로 그분들이 감내해온 시간의 무게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정말 애쓰셨다’고 말씀드렸고 저는 그분들의 눈에 어리는 눈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원로 장로님은 당신들의 존재를 그렇게 알아주고 위로해주어 고맙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민자들을 볼 때마다 고복수 선생이 부른 ‘타향살이’(1934년)가 떠오릅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 때는 옛날//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고향”

일제시대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실향민의 마음을 읊은 노래이지만, 지금이라 해도 그 마음이 다를 바 없을 것 같습니다. 뿌리가 없어 물결이 이는 대로 흔들리는 부평초처럼 가엾은 자기 처지가 스스로 눈물 겨워 먼 데 시선을 두는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고향 집 앞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만든 호드기(버드나무 가지를 비틀어 만들거나 밀짚으로 만든 피리)를 불던 때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굳게 살아볼 결심을 합니다.

궁궐에서 40년을 지내다가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달아난 모세의 마음도 이와 유사하지 않았을까요? 새삼스럽게 모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 여정 중에 뮤지컬 성극 ‘모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델라웨어 집회를 마친 후, 저는 일주일 내내 당신 집에 머물게 해주신 장로님 내외와 함께 필라델피아의 랭카스터에 있는 밀레니엄 극장에 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차를 타고 다니며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고 사는 아미쉬 사람들의 마을을 지나 극장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에는 이미 수 십 대의 관광버스가 서있었고, 공연장에 들어서자 족히 수 천 명이 되는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모세를 어떻게 형상화했을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무대의 규모는 압도적이었고, 연기자들의 연기와 노래 또한 대단했습니다. 극단에서 기르는 말들도 객석과 무대를 오가며 연기를 하고, 양들도 무대를 가로질러 달려갔습니다. 한 마디로 연극적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뮤지컬을 보는 내내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환호성도 지르며 반응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를 처음부터 민족의식에 투철한 영웅으로 그려내는 설정에 저는 고개를 조금 갸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경험했던 절망과 고뇌의 깊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은 천둥 같은 목소리로 모세에게 소명을 부과하셨습니다. 차라리 아주 고요하게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더라면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떨기나무와 천둥 같은 소리는 어울리는 짝이라고 할 수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낯선 세계와의 접촉
저는 모세의 고뇌 혹은 흔들림에 조금 더 마음이 갑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이야기는 온통 떠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을 떠나야 했고, 가인은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해야 했고, 아브라함은 살고 있는 땅, 난 곳,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고 그것은 다른 성조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출애굽기 역시 압제의 땅을 떠나 자유를 향해 가는 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는 것은 위험하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낯선 세계와의 접촉이 없다면 우리 의식의 확장 또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스스로 취약해진다는 뜻입니다. 평안한 때는 이웃들이 동료로 받아들이겠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언제라도 외인 취급을 받는 것이 나그네들의 운명입니다. 소돔 성에 살던 롯은 이웃들의 만행을 저지하려 하자 그들은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 우리에게 재판관 행세를 하려고 하는구나”(창 19:9) 하면서 롯을 밀치고 대문을 부수려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고통과 설움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지금 서러운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떠나라는 메시지가 넘치는 것은 그 떠남을 통해서만 얻게 되는 인생의 소중한 교훈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설움이 자기 속에 함몰되면 궁상이 되지만, 아름답게 승화되면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됩니다. 세상에 고통을 겪지 않는 이들은 없지만 고통을 통해 영혼이 웅숭깊고 아름다워지는 사람이 있고, 이악스러워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통과 설움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보람은 어려운 일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그것을 우리 인생의 품격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들어간 모세는 철저히 취약해진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의 경험도 없었을 뿐더러, 아무런 대비도 없이 무작정 떠나온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에 있든지 모세는 모세일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의 어느 우물가에서 그는 불의한 일을 목격합니다.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이 그곳에 이르러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양떼에게 먹이려 할 때, 뒤늦게 그곳에 당도한 다른 목자들이 여인들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도망자 신세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 일에 개입합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성정 때문입니다. 약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비겁한 자들의 특색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에 대한 폭력을 미워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분노’(Ira Dei)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 합니다. 위험하거나 불유쾌한 일에 연루되기 싫기 때문입니다. 무례하고 폭력적인 이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더욱 허세를 부리며 사람들을 압박합니다. 모세는 여느 사람과 달랐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모세라는 사람을 모세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그 힘센 목자들을 몰아내고 여인들을 도와줍니다.

∎ 고향이 되어주는 사람
성경은 아주 짧게 그 상황을 설명한 후 장면을 전환합니다.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 딸들을 보고 아버지 르우엘은 반가워하며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딸들은 우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다 고합니다. 어느 낯선 사내가 무도한 목자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구해주고, 물까지 길어 양들에게 먹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르우엘은 그 사람을 집으로 모셔 들이지 않은 딸들을 책망하면서 어서 그분을 모셔다가 음식을 대접하라 이릅니다. 르우엘은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떠도는 모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서 자기 집에 머물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르우엘은 자기 딸 십보라와 모세를 혼인시킵니다. 르우엘이라는 이름은 이 사건을 다루는 대목에서만 등장하고 출애굽기의 다른 곳에서는 대개 ‘이드로’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풍부함’을 뜻하는 이드로보다는 르우엘이라는 이름이 이 에피소드에 더 적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르우엘은 고단한 처지에 빠진 모세를 자기 집에 맞아들였고,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에게 고향을 이루어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십보라와 모세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그 아이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합니다. ‘게르ger’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손님’ 혹은 ‘나그네’라는 뜻입니다. 아들에게 게르솜이라는 이름을 붙여줌으로 모세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신의 쓸쓸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모세는 어쩌면 역사의 무대 밖으로 떠밀려 버린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애굽과 가나안 사이의 공간, 그 척박한 광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 사이 공간은 나중에 출애굽 공동체가 40년 동안이나 머물러야 했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곳에서 미리 단련시키셨습니다.

자연주의자인 테오도르 모노는 광야 혹은 사막은 파우스트적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서 “사막은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강인해지도록 가르치는 학교”(테오도르 모노, <사막의 순례자>, 안-바롱 옥성, 안인성 옮김, 현암사, p.24)라고 말합니다. 그가 사막으로부터 배운 것은 많습니다. 무한에 대한 감각, 쓸데없이 말하거나 불평을 말하지 않는 것, 많은 것을 생략하고 사는 것, 느림의 소중함,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존중이 그것입니다. 광야는 모세에게 학교였습니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4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됨
지금 우리 가운데 광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분들이 계신지요? 도움의 손길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고, 하나님조차 멀리 계신 것 같은 때, 사방이 가로막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한데 ‘나 홀로’ 불행한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 고독의 시간은 견디기 어렵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우리 삶의 더 깊은 곳에 시선을 던질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상한 그 마음을 잘 살피고,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고통의 시간이 복으로 전환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히 5:2). 스스로 겪어봤기에 다른 이들의 아픔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말이 의미하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한 지평에서 사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성실하게, 꼿꼿하게, 옹골차게 당신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모세는 시련을 겪어봤기에 시련을 겪는 이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쓸쓸함을 경험했기에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기에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나그네의 신산스러움을 경험해 보았기에 약자들에 대한 연민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 속에 모세의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 22:21)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나그네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최희준 선생이 부른 ‘하숙생’을 참 좋아했습니다. 부드러운 저음에 담긴 노래의 서정이 부모님 품을 떠나 살고 있던 제 마음에 깊이 다가왔기 때문일 겁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어린 나이에도 왠지 인생의 쓸쓸함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압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인생이 선물인 동시에 소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은 믿는 이들을 일러 ‘본향을 찾는 나그네’라 말합니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나그네는 취약해진 존재라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이들의 호의에 기대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복의 매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 12:3b).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랑과 이해와 공감의 능력입니다. 게르솜으로 사는 것은 무척 힘겨운 일이지만 복된 일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꿈을 함께 꾸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를 우리의 고향으로 주셨으니 말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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