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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최근의 성서비평 방법론과 그 적용: 고대 본문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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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5월 12일 (금) 04:56:55
최종편집 : 2023년 05월 12일 (금) 04:58:16 [조회수 : 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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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최근의 성서비평 방법론과 그 적용: 고대 본문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다》

스티븐 L. 매킨지 & 존 캘트너 편집, 유연희 외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23년 5월 25일, 신국판(가로 152mm, 세로 224mm), 343쪽, 값 15,000원.
ISBN 979-11-981962-4-8 93230
 원서 New Meanings for Ancient Texts: Recent Approaches to Biblical Criticism and Their Applications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3)

 

1. 책소개


성서해석을 위한 최근의 방법론과 그 적용 사례를 다룬 이 책은 성서에 대한 문화사비평, 생태비평, 신역사주의비평, 탈식민주의비평, 심리주의비평, 포스트모더니즘, 대중문화, 장애 연구, 퀴어비평에 대해 각 분야의 전문 학자들이 쓴 개론서이다. 성서를 해석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생들,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해 먼저 출판된 ≪성서비평 방법론과 그 적용≫(1993, 개정판 1999, 한국기독교연구소, 2022)과 마찬가지로, 최근의 방법론들이 등장한 이유와 중요 개념, 발전 과정, 특징들을 설명하고, 실제로 특정한 성서본문에 적용하며, 그 장점과 한계까지 해설한다. 

성서 자체가 성서비평을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믿는 미주장로교회(PCUSA)조차 2014년에 성경에 근거해서 동성결혼을 승인했다. 그러나 존 웨슬리 목사가 가르친 선행은총론과 보편적 구원론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근거해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감리교 목사들이 많다. 만일 사도 바울이 성경대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했다면, 기독교는 결코 세계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육체적 할례 대신 영적인 할례”를 요구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다. 성경 문자와 전통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무차별적 사랑에 대한 증언이라는 뜻이다. 특히 룻기, 요나서, 욥기는 하나님 이름으로 자행되는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과 차별에 대한 “도전하는 비유들”(크로산)이다. 또한 기독교 성서해석은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수(常數)로, 상황을 변수(變數)로 간주했지만, 최근에는 역사적 예수를 상수로, 그리스도를 하나의 변수로 간주하게 된 실존적 변화를 증언한 한인철 박사의 글, 그리고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성서해석 방법론을 잘 정리한 존 도미닉 크로산 박사의 글을 부록 1, 2에 첨부했으며, 포스트모던 성서해석의 한 사례로 홍정수 교수의 부활절 설교도 부록 3에 첨부하였다.빈부격차

와 생태계 파괴가 극심해질수록 사회는 더욱 비인간화되고, 사람들의 영혼은 더욱 피폐해지며, 불안과 폭력은 증가하고, 민주주의도 위협받고 있다. 이런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통합적 생태론과 형제애에 관한 회칙들을 발표하여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함께 공부하고 공동선의 실천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영리”와 “교회성장주의,” “번영의 신학”이 지배하는 개신교회는 흔히 “개인 영혼 구원”에 집중하며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회 안에서도 19세기 이래 성서비평학의 발전을 통해, 성서 저자들의 다양한 상황과 의도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서 안의 가부장적 이성애주의, 배타적인 선민사상, 전쟁과 폭력 등의 관점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주의적 이해, 인간(특히 백인 남성) 중심주의, 육체/물질/자연/여성을 멸시하는 탈육신 신학, 제국주의와 같은 집단최면 때문이다. 특히 지난 40년 동안 성서 연구에서는 “예수 세미나”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지배체제의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제국신학과 구원을 독점한 성전신학(“은총의 도구들”인 경전, 성전, 사제, 성일, 예배, 교리의 절대화) 모두를 뒤집어엎는 비폭력적 하나님의 역사변혁에 대한 꿈, 신화의 순기능과 역기능,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의 체제전복적인 의미,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과 후대의 신학이 예수를 언어폭력 남발자와 제국의 수호자로 왜곡시킨 이유들까지 밝혀졌다. 성서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혐오와 적대감이 넘쳐나는 불안한 세상에서, 성서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예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는 지름길은 우선 성서비평 방법론을 통해 반지성주의를 극복하는 길이다.

 

2. 저자


스티븐 매킨지(Steven L. McKenzie)는 테네시 주 멤피스에 있는 Rhodes College의 구약학 교수이다.

존 캘트너(John Kaltner)는 테네시 주 멤피스에 있는 Rhodes College의 종교학과 과장이다.

티모시 빌(Timothy Beal), 성서의 문화사비평, Florence Harkness Professor of Religion,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Cleveland, Ohio

워렌 카터(Warren Carter),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Professor of New Testament, Brite University, Fort Worth, Texas

노만 C. 하벨(Norman C. Habel), 생태비평, Professorial Fellow, Flinders University, Bellevue Heights, Australia

지나 헨스-피아자(Gina Hens-Piazza), 신역사주의, Professor of Biblical Studies, Jesuit School of Theology at Berkeley, Berkeley, California

냐샤 주니어(Nyasha Junior), 장애연구와 성, Assistant Professor of Hebrew Bible and Old Testament, Howard University School of Divinity, Washington, DC

앤드류 킬(D. Andrew Kille), 심리주의 성서비평, Editor of Biblical Workbench

휴 파이퍼(Hugh S. Pyper), 포스트모더니즘, Professor of Biblical Interpretation, University of Sheffield, Sheffield, UK

린다 S. 쉬어링(Linda S. Schearing), 성서와 대중문화, Professor of Hebrew Scriptures, Gonzaga University, Spokane, Washington

제레미 쉬퍼(Jeremy Schipper), 장애연구와 성서, Associate Professor of Hebrew Bible, Temple University, Philadelphia, Pennsylvania

켄 스톤(Ken Stone), 퀴어비평, Professor of Bible, Culture and Hermeneutics,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Illinois

밸러리 H. 지글러(Valarie H. Ziegler), 성서와 대중문화, Chair and Walter E. Bundy Distinguished Professor of Religious Studies, DePauw University, Greencastle, Indiana

 

3. 목차


저자 소개 / 6
서문 / 9

1장. 성서의 문화사비평 _ 티모시 빌 / 13
2장. 장애연구와 성서 _ 냐샤 주니어와 제레미 쉬퍼 / 47
3장. 생태비평 _ 노만 C. 하벨 / 77
4장. 신역사주의 _ 지나 헨스-피아자 / 111 
5장. 성서와 대중문화 _ 린다 쉬어링과 밸러리 지글러 / 141
6장.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_ 워렌 카터 / 177
7장. 포스트모더니즘 _ 휴 파이퍼 / 213
8장. 심리주의 성서비평 _ 앤드류 킬 / 249
9장. 퀴어비평 _ 켄 스톤 / 279

부록 1: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_ 한인철 / 317
부록 2: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성서비평 방법론 _ 크로산 / 331
부록 3: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_ 홍정수 / 337

   
 

4. 서평


“이 책은 성서비평 방법론에 대해 보통 단조롭고 밋밋한 학설들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교과서이다. 이 책은 지난 20년 동안의 성서학에서 발전된 매우 흥미진진하며 중요하고 변혁적인 발전을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을 교과서로 사용할 예정이다.”
― Stephen D. Moore, Drew University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이 책은 최근의 성서해석 방법론들에 대해 명확하며 꼭 필요한 개론서이다. 매킨지와 캘트너가 동원한 핵심적 학자들은 여러 방법론들의 배경이 되는 사상과 이론을 ‘전달해’줄 뿐 아니라 그 방법론들을 통해 성서를 어떻게 새롭게 읽을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이 책은 성서해석에서 새롭게 달라진 모습에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에게 탁월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 Colleen M. Conway, Seton Hall University, 종교학 교수

“이 책은 지난 20년 동안 성서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대표적인 경향들에 대해 소개한다. 먼저 출판된 ≪성서비평 방법론과 그 적용≫의 정신을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도 각각의 관점에 대해 역사적으로 요약해서 그 이론적인 개념들, 성서본문에 대한 적용 방법을 보여준다.”
― David G, Garber Jr., McAfee School of Theology, 구약학 교수

 

5. 책 속으로

 

(p. 11) 이 책 속의 접근법들이 서로 다르고 다양한 것만큼이나 우리는 1993년에 나온 책과 비교할 때 성서 연구에서 더 일어난 변화를 보여주는 어떤 유사점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1993년의 모든 방법은 비평(criticisms)으로, 대부분 특정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다르다. 대부분이 여전히 ‘비평’이라는 제목을 자랑스레 쓰지만, 저자들은 거의 모두가 그들의 주제가 일련의 단계를 밟아 요약될 수 있는 방법론을 대표하지 않고, 성서를 보는 방식, 즉 접근법이나 관점(perspectives)이라고 강조한다. 문헌을 다루는 렌즈, 말하자면 각도라는 것이다. 

(p. 12) 편집자주: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대기오염 때문에 현재 해마다 9백만 명 이상씩 사망한다. 성서학자들이 당면한 전대미문의 현실은 기후변화로 인해 현재 추세로는 2100년까지 섭씨 3.2도(최고 4.4-5.7도) 상승하여, “기후 지옥”의 문턱(2도 상승)을 훨씬 넘게 될 뿐 아니라 “인류 멸종”의 문턱(6도 상승)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IPCC 6차 보고서, 2023). 기후학자 케빈 앤더슨은 2050년에 90억 명에 이를 인류가 “2100년까지 섭씨 4도 상승하면, 5억 명 정도만 살아남을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보다 훨씬 악화된 대기오염, 살인적인 폭염, 가뭄, 산불, 해충과 곰팡이의 창궐로 인한 질병, 태풍, 홍수, 식량난, 기후 전쟁 때문이다. David Ray Griffin, The Christian Gospel for Americans (Anoka, MN: Process Century Press, 2019), p. 314에서 재인용.

(p. 26-27) 히브리성서와 신약성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동성애 논쟁에 대해 분명하게 다루지 않는다. 실상 히브리성서는 동성애는커녕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해 도덕적 가르침이나 법령의 형태로 분명하게 제공하지 않는다. 레위기의 법 규정 중 두 구절(18:22와 20:13)은 남자가 “여자와 눕듯이” 다른 남자와 눕는 것을 금한다. 이 금지는 수간, 간음, 월경하는 여자와의 성관계, 그리고 이혼한 여자, 과거 성매매자, 또는 형제의 미망인과의 결혼(사실 신 25:5; 창 38:8이 요구하는 관습)을 금하는 것과 함께 나온다. 두 본문 다 동성애 자체를 금하지 않는다. …
신약성서의 예수는 동성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섹슈얼리티 일반에 대해서도 별 말씀을 하지 않는다. 바울 서신은 더 넓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흔했던 일부 특정 남성과 남성의 성적인 실천(예를 들어, 소년애 또는 연상 남자가 연하 남자를 성적으로 ‘멘토링’하고 연하 남자 성매매자를 구매하는 것)을 실제로 폄하하지만, 성인 간의 합의에 의한 동성 관계를 명백하게 정죄하지 않는다. 간단한 사실은, 그리스도교 성서가 이 문제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p. 72) 지난 몇십 년간, 성서 연구 분야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우리의 학문이 결코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사회적 위치(locations)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p. 72) 편집자주: 존 캅 교수는 최근에 발표한 책 Salvation: Jesus’s Mission and Ours (2020)에서, 오늘날 구원과 제자직의 의미를 밝히면서, 교회가 성서를 절대화하고, 예수를 우상으로 만들며, 타종교들에 배타적이라서, 기독교를 “하나님 나라 실현에 가장 큰 방해물”(p. 107)로 만들어버렸다고 비판한다. 성서 연구/설교자들뿐 아니라 성서 기자들 역시 사회적 위치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사회적 위치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과 신을 이해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른 종교 전통들(특히 힌두교와 이슬람)이 가르친 창조 이야기에는 이 망가진 세상에 대한 창조주의 슬픔, 애도, 탄식, 투쟁이 나오지만, 창세기 1-2장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바빌론 포로기에 마르둑 신보다 야웨 하나님이 더 강력하다는 정치신학적 주장이었다. 또한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1492년에 추방된 이후, 이삭 루리아(1534-72)는 전혀 다른 창조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발적 유배, 즉 세상의 모든 공간을 신적 존재로 채웠던 편재하는 하나님(omnipresent En Sof)이 세상을 창조할 공간을 만들기 위한 자기 축소(Zimzum)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가장 가깝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현존인 쉐키나(Shekhinah)는 “영원한 유배” 가운데 세상 도처를 방황한다. 이처럼 성서 안과 밖의 신학적 다양성은 이스라엘 역사의 다양한 상황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quaddosh), 즉 “전적 타자성”(total otherness)을 강조한 것은 역사적 구원/해방 사건들에서나 자연에서의 놀라운 경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는 전혀 다른, 뜻밖의 “표현 불가능한”(Ineffable) 초월적 존재, 그 두렵고 떨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경험을 고백한 것으로서, 특히 오늘날과 같은 탈종교 시대에서는 그 신비 경험을 되살려내는 막중한 과제가 일차적으로 성서해석자들과 설교자들에에게 주어져 있다. 또한 오늘날 대다수 종교인들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기대하지만, 종교 전통들은 세상의 고통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고통당하는 생명체들에 대한 자비심이 우리를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며, 전적 타자의 거룩하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참조, Karen Amstrong, Sacred Nature: Restoring Our Ancient Bond with the Natural World (New York, NY: Alfred A. Knopf, 2022), pp. 69-79.

(pp. 81-82) 인류가 달에 첫 여행을 한 이후, 지구 행성을 더 이상 인류의 소비를 위해 석유, 토지, 그리고 무한 자원들을 택하고 착취하는 불멸의 물질 덩어리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아주 갑자기 지구는 지구 의식을 가진 많은 민감한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연약한 청록색 행성이 되었다. 지구는 더 이상 서로 충돌하는 국가들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지구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서식지였다. 그리고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우리는 이렇게 귀중한 행성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며, 왜 지구는 지금 이런 위험에 처해 있는가?
초기의 반응은, 우리의 집인 행성을 상당 부분 착취하고 파괴한 주요 원인 제공자가 그리스도교라고 지목하여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 린 화이트(Lynn White, 1967)의 연구였다. 지구 보호를 주창한 화이트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성서 읽기가 지구를 파괴적으로 지배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p. 82) 편집자주: 고대 종교는 대부분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 자연 속에 현존하는 신들을 강조했지만, 현대 기독교는 자연과 분리된 초자연적 하나님을 강조했다. 특히 뉴턴은 하나님의 본질을 “지배”로 정의함으로써, 자연을 하나님의 계시와 거처가 아니라 착취할 자원으로 축소시켰다. Karen Armstrong, Sacred Nature: Restoring Our Ancient Bond with the Natural World (New York, NY: Alfred A. Knopf, 2022), pp. 13-16.

(p. 104) 나는 생태비평의 기본 단계들을 나일강물이 어떻게 피로 변하는지를 말하는 성서 내러티브에 적용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신들, 즉 주도적인 주인공들에 초점을 두는 인간중심적 유산을 폭로했다. 나는 나일강과 동일시하며 노골적인 부정의를 식별했다. 즉, 강물과 나일강의 생명체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손에 의해 부당하게 고통당한다. 나는 신음하고 피 흘리는 나일강의 억울한 목소리에 경청하며, 하나님의 백성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세계에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요청하는 나일강의 비통한 외침을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p. 105) 편집자주: 카렌 암스트롱은 욥기가 자연의 본래적 가치를 처음 주장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욥기 저자가 욥을 “새로운 모세”로 제시한다고 해석한다. “지혜문학 저자들은 우리가 자연세계로부터 배우는 교훈이 십계명만큼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욥기 저자는 더 나아가, 자연이 시내산의 협소한 윤리를 산산조각낸다고 주장했다.”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고 질문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질문들(38:1-41:14)을 퍼부으시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아름다운 우주적 질서, 즉 폭력과 고난이 모든 생명체들의 삶에서 불가결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영광에도 불가결한 우주적 질서를 계시하신다. 동물들은 그런 도전들에 대해 멋지게 맞서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불평하고 탄식하는 대신 (함께) 견디어내며, 더욱 용기를 내고 찬란하게 된다. … 욥이 암흑과 죽음을 본 곳에서 하나님은 에너지와 생명으로 펄떡이는 우주를 계시하신다.” 자연세계의 장엄한 신비 앞에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제한된 것인가를 깨닫고, “욥처럼 (자기중심적으로) 투덜대지 말고,” 우리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결코 표현 불가능한(the Ineffable)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침묵하라(42:6),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미하라는 말이다. Karen Armstrong, op. cit., pp. 58-66.

(pp. 134-5) 신역사주의는 한 이야기와 함께, 또는 그 이야기 자체 안에서 다른 역사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창세기 본문 뒤에 있는 고대세계를 알 수 없지만, 신역사주의는 본문 속의 또 다른 이야기로 우리의 주의를 끈다. 신역사주의는 수사학적 장치, 내러티브의 특징, 본문 상호간 연결 등을 고려하거나 문학적 통합이나 문학적 통일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균열, 미묘한 논평, 이야기의 이면, 작품 속에 잠재하는 혼란의 표시에 주의를 기울인다. 신역사주의는 지배적인 이미지, 대화, 그리고 등장인물을 단일한 마스터 이야기로 통합하려는 경향에 저항하며, 본문 속 놀이(playfulness)를 다룬다. 신역사주의는 본문의 주변부에 있는 순간의 언급(예, 웃음), 불일치(17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및 18장에서 사라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대답이 없는 질문(왜 사라가 웃었는가?)에 주의를 기울인다. 신역사주의는 방문객과 아브라함의 환대에서 주의를 돌이켜 변두리에 시선을 고정한다. 예를 들면, 장막이 그러하다. 그 결과, 열외로 취급된 듯한 사라는 실제로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참여자로 떠오른다. 게다가 사라의 조용한 큭큭 웃음은 펼쳐지는 사건에 대해 아브라함이 이해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p. 174) 오늘날 확장하는 소통 기술과 그로 인한 정보의 홍수는 인터넷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중문화의 성서 활용을 아주 흔하게 만든다. 달리 말하면, 21세기의 성서학자들은 본문의 세계와 본문 배후의 세계를 연구할 뿐 아니라 본문 앞의 세계도 연구한다. 전통적인 성서학에서 고대 본문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현재 성서가 이해되는 맥락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학자로서 왜 대중문화와 성서를 연구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는 대신에 “우리가 대중문화를 무시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p. 206) 수로보니게 여자는 가나안 사람으로서 열등하고 외국인이고, 이스라엘이 정복하고 소유한 땅을 재현하고,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교에서 “침략당하고, 정복당하고, 멸절될” 인물이다. 이 여자의 귀신 들린 딸은 “악하고 위험한” 외국인을 나타낸다. 경쟁이 되지 않는 그녀를 “개”라고 부르는 무관심한 예수에게 그 여자가 궁핍하고 필사적으로 간청하는 것은, 민족들을 향한 선교가 상호의존적인 해방의 선교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p. 215) 악명 높게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재난은, 지성과 사회가 필연적으로 진보하고 합리성의 힘이 조화로운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는 계몽주의의 ‘대서사’에 종말을 가져왔다. 인간 문화의 어둡고 비이성적인 측면이 전면에 등장했다. 자연과 인간 정신의 비밀을 풀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인간 지성의 힘이 의심을 받게 되었다. … 20세기는 인간 경험의 이 측면에 대해 다시 문화적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꿈의 세기라고 불렸다. 하지만 “악몽의 세기”라고 부르는 것이 공정한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여파는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이라는 경쟁적 대서사 자체가 환상이었음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줄 논의를 보여주기보다는 편견과 비합리적인 혐오와 선동적 힘이 충격적으로 지속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핵무기로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라는 새로운 현실은 말할 것도 없다.

(p. 245) 편집자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모더니즘의 이성(logos) 중심적 사고방식 때문에 성서 안의 ‘신화’(myths)를 ‘거짓된 것’ 또는 ‘미신’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신화가 이성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다른(보완적) 방식이며, “한번 일어났지만 동시에 항상 일어나는 사건,” 인간 경험의 가장 깊은 차원인 삶의 기원과 의미, 영원하며 보편적 진실과 가치에 관한 “고대의 심리학”이라는 점을 깨닫게 했다. 신화는 논리적 탐구와 합리적 증거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시처럼 직관적인 것이며, 종교제의를 통해 삶의 깊은 차원을 파악하도록 돕는 것이다. 악보는 악기를 통해 연주되어야만 그 의미가 살아나는 것처럼, 신화는 영적 훈련과 제의를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난다. 오늘날의 과학기술 시대는 이성 중심적이라서 실용성, 미래성에 집중하여 자연의 신비에 대한 경탄과 찬미가 결여되었지만, 신화는 인간의 삶의 고통과 궁극적 가치에 집중한다. 우리가 예술과 문학에서 미학적 황홀경을 경험하는 것처럼, 관건은 고대의 신화들을 제의와 실천을 통해 현재화하는 작업으로서, 이 작업을 통해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 보다 큰 실재(하나님 중심성)의 한 부분임을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으며, 자기 비움과 자기희생을 결단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좌뇌 중심의 세계관이라 자기파괴적이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좌뇌와 우뇌가 조화를 이루는 세계관으로 전개되어야만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참조, Karen Armstrong, op. cit., pp. 20-26.

(p. 271) 하나님은 지혜로운 부모처럼 불가피하게 유년기(childhood)의 집을 떠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알고, 선택을 하는 능력을 발달시킨 것을 인정하신다. 인간은 이제 살아가기 위해 아이와 식량 둘 다를 생산하고 돌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우리 중 하나같이” (3:22) 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이 발달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 나무로 돌아가는 것은 어린애 같고 무의식적인 세계와의 결합을 나타내고, 현실로부터의 후퇴, 이제는 생각과 인지의 부적절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즐거운 정원에서 쫓아내고 퇴행적인 생명나무(the regressive tree of life)로 가는 길을 막으신다. 사람이 한번 의식(consciousness)으로 들어가면 되돌아갈 수 없다.

(pp. 305-6) 소돔 남자들은 롯의 손님들을 강간하려고 접근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소돔 도시를 더욱 악한 곳으로 묘사하기는 하지만, 이 묘사를 현대 형태의 동성애에 적용하는 것은 고대 세계의 동성 성폭력이 함축하는 바를 무시한다. 이 맥락에서 성적인 관통은,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굴복(social sub- mission)의 관점으로 이해되며 젠더 용어로 암호화된다. 따라서 소돔 남자들이 롯의 손님들을 성적으로 “알려고” 요구한 것은 그 손님들의 남자다움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환대와 남성성이 얽혀있는 정도만큼 롯 자신의 남자다움도 손님에 대한 공격 때문에 위협받는다. 
그래서 롯은 소돔 사람들과 흥정을 시도하며 강간의 대용품으로 자신의 딸들을 제공하는, 악명 높은 제안을 한다. 롯의 제안은 딸들의 강간이 남자 손님들의 강간보다 나을 거라고 가정하므로, 그 제안은 성서 본문을 낸 가부장적 사회의 증상이라고 자주, 그리고 올바르게 비판받는다. 롯이 “손님 또는 손님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딸들을 제공함으로써 명예 집중적인 문화(honor-intensive culture)에서 남성의 의무를 다하려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p. 321) ‘예수 세미나’가 내게 준 가장 큰 영향은 나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직신학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항상 상수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은 변수라고 생각을 했다. 그에 따라 변하지 않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오늘의 한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여전히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신학의 근본 과제였다. 
그러나 ‘예수 세미나’의 결과물들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다. 신학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는 역사적 예수이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말은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가 하나의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연구 결과는 다양할 수 있지만, 역사적 예수라는 인물 자체는 항상 기독교 신학의 변하지 않는 상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예수를 오늘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소개하고 선포하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과거 한때에 유의미했던 하나의 소개, 하나의 선포, 하나의 고백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또 다른 케리그마 형태로 예수를 달리 선포할 수 있을 것이고, 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신학의 새로운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pp. 323-5) 왜 사영리의 틀 속에 있는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막힌다는 것인가?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교리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가 예수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본질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가진 죄인이라, 예수처럼 못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그렇게 못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십자가를 지고 죽었고, 그 예수를 믿어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왜 이미 구원을 얻은 마당에 우리가 굳이 예수처럼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죽하면 예수를 믿겠느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죄인인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믿는 교만한 생각이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처럼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은 율법신앙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예수처럼 살려는 것은 바로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예수처럼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 기독교인이 지금 말한 이러한 세 가지 이유를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신학교에 들어간 1973년 이후 기독교 안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 안에 사영리를 따르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세 가지 이유에 근거해서, 예수는 믿되 예수를 살지는 않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예수처럼 살지 않는 데에는 이러한 세 가지 교리적인 이유 말고도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설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그분이 가르치시고 앞서 살아내셨던 그 삶을 따라 사는 것이라는 점을 내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예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다. 

(pp. 340-1) 우리 시대의 의인들, 충신들은 지금 동작동에 묻혀 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죄인들, 역적들은 대부분 망월동에 묻혀 있다. 그런데 동작동 부근에 가면 “정숙”이라고 하는 대형 경고판이 붙어 있다. 어르신네들의 영원한 쉼을 혹시라도 방해할까 걱정을 해서다. 그런데 망월동에도 그런 표지판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는 당신들이 말하는 곳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었기에 아직도 눈감지 못하고 있는,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저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하는 뜻으로 말이다. 
이 두 공동묘지를 나란히 두고 성서의 부활 사건 이야기를 읽으면 그 의미는 이렇게 분명해진다. 부활 사건은 망월동에 묻혀 있던 죄인, 역적 하나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역사 속으로 되돌아오게 된 사건”이요, 또한 천지개벽의 시작이었다. 즉 이미 영원한 쉼을 쉬고 있던 자들 중 하나가 징그럽게도 무덤을 박차고 되살아난 사건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임금이 역적과 죄인이라고 처형해버린 불의한 자들, 곧 망월동에 묻혀 있던 자들 중 하나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살아난 사건”이다. 이것은 썩다가 만 한 인간의 부활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시작을 뜻한다. 이것을 어렵게 말해서 “종말적 사건”이라고 한다. 현존의 정치 질서, 곧 각종 구조적 갈등과 민족적 분단의 세계를 정의로운 세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몸으로, 삶으로 저항하다가 그들에 의하여 고문당하고 죽어갔던 한 청년이 하나님에 의하여 되살아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처형한 그 죄인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을 심판할 새로운 정의로서 확정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부활 사건은 망월동에서 시작되어 동작동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심판 사건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망월동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 사건의 시작과 완성(재림)의 중간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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