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 > 김기석 설교
아름다운 문 곁에서 생긴 일
당당뉴스  |  webmaster@dangdang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3년 04월 16일 (일) 22:54:46
최종편집 : 2023년 04월 17일 (월) 00:07:43 [조회수 : 1562]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아름다운 문 곁에서 생긴 일
행 3:1-10
(2023/04/16, 부활절 제2주)

음성으로 듣기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사람들이 떠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이 못 걷는 사람을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보시오!" 그 못 걷는 사람은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걸어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

∎ 마주 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주부터 7주간 우리는 부활절기로 지냅니다. 부활절기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확고하게 자리잡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앞에서 이끌어가는 강한 힘입니다. ‘생명은 죽지 않는다’, ‘우리는 패배해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신다’, ‘선이 결국에는 악을 이긴다’는 강력한 믿음을 품은 사람은 더 이상 허무주의자나 비관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조바심할 것도 없습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됩니다. 가끔 어지러운 세태에 멀미를 할 때면 저는 시편의 한 구절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들이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 107:27-30)

우리의 지혜와 경험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래서 속에서 탄식이 터져 나올 때,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물결을 잔잔하게 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바라던 항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 강렬한 이미지를 가슴에 품을 때 삶에 대한 용기와 평안이 우리 속에 배어듭니다. 일전에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으로 제자들의 가슴에 든든한 기둥 하나가 들어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와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서로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고, 함께 기도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생명과 축제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구름 사이로 얼핏 보이는 푸른 하늘처럼 인류 역사 속에 틈입한 하나님 나라의 전조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개시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후 3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오후 3시는 제사장들이 번제를 바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시간에 성전에 와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미완료 시제입니다. 그건 사건의 지속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와 요한은 늘 그 시간에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날 아름다운 문 곁을 지나던 두 제자는 사람들이 떠메고 와서 문 곁에 앉혀 놓은 한 사람을 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떠메다’, ‘앉혀 놓다’라는 단어는 그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 곧 구걸로 연명하는 가련한 처지였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문’이라 일컬어지는 장소에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전의 외적 아름다움과 대조되는 풍경입니다. 그런 풍경 자체가 성전 체제의 무능과 무관심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4장 22절은 그의 나이가 마흔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매우 각별한 의미로 사용됨을 우리는 압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 떠오릅니다. 사도행전은 수동적 객체에 불과했던 그가 나사렛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진입하게 되었음을 넌지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 없는 것, 있는 것
그 사람은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했습니다. 두 제자는 그를 눈여겨 보고(atenizō)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보시오!” 그는 무엇을 얻으려니 생각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동정이나 경멸이 아닌 낯선 눈빛과 만났습니다. 자기가 견뎌온 신산스런 삶을 다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고 감싸 안는 듯한 따뜻한 눈빛이었습니다. 그 눈빛은 어쩌면 그가 잃어버렸던 하늘을 비치는 렌즈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리둥절한 그를 향해 베드로가 마치 선언하듯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행 3:6).

‘은과 금’은 물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 일종의 환유일 겁니다. 구걸하는 이에게 금과 은을 줄 사람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제자들도 늘 빈 손으로 살던 이들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 속에는 ‘없다’와 ‘있다’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가 당장 바라는 것을 줄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내게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라고 밝힙니다. 베드로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단순한 기호가 아닙니다. 그 이름은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던 이름이지만 그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신비를 알아차리기까지 그는 정말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적을 눈으로 목격하고, 예수가 계신 자리에서 형성되던 아름다운 공동체를 경험하며 들떴던 순간들, 급기야는 주님을 버리고 달아났던 부끄러운 기억들, 그런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시며 새로운 소명을 주시던 주님을 겪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어져 열린 마음을 통해 주님은 그의 속에 확고히 들어오셨고, 그 이름은 그의 운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비로소 주님의 운명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 이름을 ‘내게 있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사람들이 땅에 묻어버리려 했던 예수의 이름을 복권시키는 행위였고, 그 절정은 의회 앞에서 한 베드로의 연설이었습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

오늘의 교회는 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신 예수님,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성육신의 진리의 구현자이신 예수님,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님은 오늘의 교회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예수님을 경배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분의 삶을 따르지는 않는 것은 불신앙이 아닌지요?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온 몸을 던지신 나사렛 예수는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접촉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외치는 동시에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드로의 손을 통해 그를 만지셨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이 사람들을 만지면 넘어진 몸이 일어선 몸이 됩니다. 주님은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고(막 1:31), 귀 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의 귀에 손가락을 넣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심으로 그를 고치셨고(막 7:33), 이미 죽은 야이로의 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고(눅 8:54),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모셔진 관을 만지심으로 그를 살려내셨습니다(눅 7:14).

접촉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꺼림칙하게 여기던 이들과의 접촉이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열어줄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유대교 사회적 세계가 불결하다고 규정한 이들과 접촉하는 일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빠삐용’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탈옥수인 빠삐용은 어찌어찌하여 나환자촌에 당도합니다. 배가 필요했던 그는 그들에게 배를 팔라고 청합니다. 얼굴과 손발이 다 뭉그러진 촌장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기가 피우던 담배를 빠삐용에게 건넵니다. 잠시 망설이지만 빠삐용은 그 담배를 받아 입에 뭅니다. 촌장은 자기들이 병을 옮기지 않는 음성 환자인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빠삐용은 몰랐다고 대답합니다. 촌장은 배는 물론이고 필요한 물건들을 제공합니다. 접촉이 신뢰를 만들기도 하는 법입니다.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과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는 행위가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일어섬’과 ‘걸음’은 새로운 삶이 도래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더 이상 누군가 떠메다가 앉혀 놓아야 할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제발로 우뚝 일어선 사람, 독립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한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사 35:5-6)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이 일화는 바로 이런 예언에 잇대어져 있습니다. 이 치유된 사람은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그런 표징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솔로몬 행각에 모인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힘 있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행 3:15)

∎ 오늘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들

오늘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만 9년이 되는 날입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유가족들의 마음에 난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많이 잊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 지갑에는 지금도 우리 교우들이 함께 나눈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부터 바꾸겠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진 종이가 꽂혀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이들이 있지만, 가족들의 바람은 희생자들의 죽음이 더 이상 무의미한 죽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한 추모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경남 거창에 있는 거창고등학교에서 4.16합창단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단원들은 합창을 통해 아픔을 넘어 새롭게 탄생하는 세상의 꿈을 전했고, 학생들 또한 영상을 통해 그분들에게 연대를 표시했습니다. 단원들은 학생들이 제작한 추모 영상 마지막 부분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학생들은 아이유의 ‘이름에게’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멈추지 않을게 몇 번이라도 외칠게
믿을 수 없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이 노래를 찾아 들으며 제 가슴도 뭉클해졌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를 망각의 강 속으로 떠내려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신원의 과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처지에 몰린 이들이 많습니다. 전쟁의 공포 속에 있는 이들, 산불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분들, 길고 긴 빈곤의 터널 속에서 좌절한 이들,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분들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쟁이를 만들자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 열어주신 생명의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도록 초대하자는 말입니다. 부활에 대한 고백은 부활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부르신 자리에서 희망을 만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당당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60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