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태안민간인학살로 가족 4명을 잃었어요”
최윤희  |  youloveme12@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3년 03월 22일 (수) 02:54:44
최종편집 : 2023년 03월 28일 (화) 21:48:03 [조회수 : 957]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interview
한국전쟁민간인 희생자 태안유족회
정석희 회장 

“태안민간인학살로 가족 4명을 잃었어요”

 

‘태안민간인학살’ 부역 혐의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삼촌 네 명을 잃은 정석희 회장. 이때 당시 정 회장은 세 살에 불과했다. 기억은 많지 않지만 이로 인해 정 회장은 소실 할머니 댁에서 자라며 이후 서울로 올라와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낸다. 게다가 연좌제 때문에 공직에 대한 마음도 접고 공기업 진출은 물론 사회진출에 대한 불이익을 많이 당했다. 지금부터 ‘한’ 많은 얘기를 들어보자.

글. 최윤희 │사진. 김광용

 

   
 

‘억울한’ 빨갱이 주홍글씨

빨갱이를 아버지로 둔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말.

“빨갱이 새끼...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침 뱉고 발길질하고 그리고 아무나 찢어 죽여도 좋은 빨갱이 새끼였던 것이다. 나는 왜 빨갱이로 태어났을까. 그때처럼 아버지가 미웠던 적이 없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사람들이 침 뱉는 빨갱이가 되어가지고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풀기 빠진 핫바지처럼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일까...”

이 마음이 바로 정석희 회장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라. 여기에서 말하는 빨갱이는 진짜 빨갱이가 아니다. 빨갱이로 몰린 빨갱이다. 그러니 그 억울함이 오죽했으랴. 죽은 사람도 남겨진 가족도... 도대체 왜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빨갱이 학살을 당한 것일까?

“이 얘기를 하려면 우리나라 역사를 언급해야 합니다. 여운형 선생이 일본 패망하기 1년 전부터 ‘건국동맹’이란 걸 만들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1944년부터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예견했던 사람인데 우리나라 스스로 자생적인 통일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며 만든 것이 바로 ‘건국동맹’이었어요. 일본 패망 전이라 암암리에 조직했어요. 주체성이 강한 지방들을 전부 포석해서 확대해나갔어요. ‘건국동맹’의 가장 큰 힘이 됐던 게 바로 ‘인민위원회’였어요. 지방마다 있었는데 일본 총독부의 감시 때문에 내놓고 활동을 못 했죠. 잘못하면 교도소에 가야 하니까... ”

정 회장의 집안이 화를 당한 게 할아버지 때문이었단다.

 

쑥대밭이 된 집안

“할아버지가 동네에서 ‘인민위원장’을 하셨어요. 할아버지는 동경제국대학이나 미국 하버드대학을 나왔다든지 하는 대단한 분은 아니었지만, 동네에서 굉장히 명망 있는 분이셨대요. 사서삼경을 다 알고 한학 공부를 많이 하셔서 글자도 많이 알고 한문으로 모든 글씨를 다 쓰셨대요. 나중에 볼 기회가 있었는데 명필이셨어요. 조선 제일의 명필이었던 한석봉 같은 글씨체셨으니까요. 그런 분이셨으니 ‘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된 거죠.”

여기까지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동네에서 명망 있고 똑똑하신 할아버지의 ‘인민위원장’ 활동이 그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계기가 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것 역시 역사를 알아야 해요. 일본이 패망하고 패퇴하면서 미국군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거예요. 미군정이 우익친일세력이었던 ‘한민당’과 합작으로 반공 운동을 했는데 여운형 선생이 만든 ‘건국동맹’을 좌파 사회주의로 본 거예요. 한마디로 빨갱이로 봤다는 거죠. 그러니 건국동맹이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결성되면서 ‘건준’의 전국 조직이었던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인민위원장들이 학살당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거 같아요.”

해방 공간에서 국가가 혼란했던 시기에 ‘건준’이 뭔지, 인민위원회가 뭔지도 정확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것이 화근이 되어 1950년 6.25 전쟁기에 빨갱이 누명을 쓰고 가족이 학살당했다. 여기에는 또 정치적인 수가 작용했다.

“이걸 얘기하려면 또 역사적인 얘기를 해야 합니다. 해방 이후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국가를 새로 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특히 남한 내의 좌파척결을 위해 보도연맹(1949.6~1950.6.25)을 만들었는데 1년 동안 가입한 보도연맹원들은 약 30만 명 정도 됐다고 해요. 이들 중에는 지식 있는 사람도 있었고 신문에 자기 죄를 뉘우친다고 자수한 사람도 있었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 외의 사람들이었어요. 보도연맹원들은 정부가 모집했는데 면서기들이 정부에서 실적 오르면 성과급 주고 훈장 주고 하니까 친척들 명단까지 다 넘겼다고 해요. 면서기들이 보도연맹원들을 많이 모집하기 위해 ‘신발 준다’ ‘비료 준다’ ‘밀가루 준다’ 하니까 뭣 모르고 도장 찍고 보도연맹원이 된 거죠. 그런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의 학살이 시작되었고 9.18 수복 후는 군경을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보도연맹원을 포함하여 부역혐의자들까지도 좌익세력으로 몰아 척결에 나섰던 것이지요.”

 

태안군 민간인 학살 희생자

보도연맹원외에도 예비검속자, 부역혐의자들을 색출해서 대규모의 민간인학살을 자행했다. 한마디로 세력이 없었던 이승만 정권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정적 제거로 이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 모든 학살을 가리켜 ‘태안군 민간인 학살’이라고 명명했다. 억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 회장 집안은 부역혐의자들로 몰려서 희생됐다.

“이때 돌아가신 분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삼촌 4명이었어요. (어떻게 다행히 어머니는 안 돌아가셨네요?) 네. 정말 다행이었죠. 그러나 어머니는 안 잡혀가시긴 했지만 ‘한청’(우익 청년 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약칭) 사무실에 끌려가서 코피 터지도록 맞고 오시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어요. 저는 그때 나이 대여섯 살이었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나마 어머니가 용케 죽지 않으셔서 저희 세 형제가 살 수 있었어요.”

 

토지 문서까지 뺏기다

그리고 집에 대한 감시는 계속됐다. 빨갱이 집은 늘 감시했으니까. 빨갱이라고 피해도 많이 봤다.

“때만 되면 불려가서 ‘뭐 내놔라’ 하는 통에 빼앗긴 것도 많았어요. 심지어는 토지 문서도 넘어갔대요. 우익 세력들이 앞장서서 활동했는데 식량이나 짐승도 다 잡아갔어요. (어떤 짐승들을 잡아갔나요?) 소나 돼지 같은 짐승들이요. 사람도 죽이는 판에 그런 정도는 노래 부르면서 아무렇지 않게 잡아갔죠. 전시 때라 아무 때나 생각나면 죽일 수도 있고 겁탈할 수도 있고 이런 것들은 아주 예사였다고 해요.”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나서 그의 집안은 어떤 삶을 산 걸까?

“어머니가 집안을 책임지셨죠. 게다가 저희 세 형제가 혹시나 끌려가서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 당시 열대여섯 살 된 어린 고모가 있었는데 형과 갓난아이밖에 안 된 막냇동생을 업고 나가서 산과 바다로 다니면서 낮에는 안 보이게 피해 다녔대요. 갓난아이인 막내 울음소리가 들리면 끌고 가서 죽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저녁때는 집안의 불을 다 끄고 마치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지내셨대요.”

 

이산가족 되다

정 회장은 왜 형 동생과 같이 안 있었던 걸까?

“‘빨갱이는 씨앗을 다 없애야 한다’ ‘3대를 다 멸족시켜야 한다’는 찬바람이 불 때라 그런 느낌을 어머니께서 아시고 형과 막내는 어머니가 키우시고 저는 소실할머니 집으로 보내셨어요. 소실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그럼요) 그 당시 좀 배운 사람들은 원부인 외에 소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저는 소실할머니 품에서 자랐죠. 그래서 어머니와 형과 동생에 대한 정이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형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는데 동생만 고향으로 내려가 살고 있어요. 그런데 동생 같지 않아요. 느낌이 그래요. 동생이 들으면 못된 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동생 역시 저를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별로 없었어요. 태안에 선산이 있어서 1년에 두세 번 정도 만나는데 얘깃거리가 없어요.”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서로 어색한 것이다.

 

말뚝에 사람 묶어 놓고 총살해 죽이다

한 집안에 네 명이나 죽었는데 그때 상황은 어땠을까?

“제일 먼저 죽인 사람이 아들 둘이었어요. 장가 안 간 삼촌을 먼저 죽였고 그다음이 아버지, 그다음이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에 돌아가신 건데 왜 할아버지를 먼저 안 죽이고 나중에 죽인 건가요?) 참 잘 말씀하셨어요. 그 부분에 있어 논란이 있었어요. 왜 논란이 있었느냐면 할아버지는 김일성을 만난 사람도 아니고, 김일성을 지지한 사람도 아니고, 여운형 계통의 인민위원장밖에 지낸 게 없는데 이미 세 사람을 죽였고 할아버지까지 죽이려니까 ‘자식까지 다 죽여서 없앴으면 됐지 이 사람까지 죽여도 되냐’는 논란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제일 늦게 죽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죽인 걸까?

“돌아가신 거는 경찰서. 소원지서. 요즘으로 말하면 파출소죠. 예전에는 주재소라고 했어요. 한청대원들이 끌고 가서 양곡창고니 담배창고니 하는 데다 가둬놓고 몇 명씩 끌고 가서 처형했대요. 해안가로 끌고 가서 나무말뚝에 사람들을 묶어놓고 총살해서 죽였대요.”

 

빨갱이 감시와 연좌제

참으로 안타깝다. 그런데 유족의 고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빨갱이 감시와 연좌제를 적용해 사회생활에 제약이 많았다.

“1981년 3월 25일 연좌제가 폐지될 때까지 30여 년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은 희생자 유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하여 철저한 신원 관리와 사상검열 등으로 희생자 유족들의 정상적인 사회 진입을 가로막는 부관참시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유족들은 그저 땅이나 파먹는 농투성이로, 남의 집 머슴살이나 식모살이로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면서 찍소리도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어요. 멸족의 문턱에서 고아원에 맡겨진 유족들은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소리는 들을망정 빨갱이 새끼라는 손가락질만은 피할 수 있었죠. ‘나도 잘못 걸려들면 아버지처럼 어디론가 끌려가서 개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7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저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어요. 주홍글씨처럼 빨갱이 자식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비국민으로 살아왔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가정교사 생활

정 회장은 가족들과 떨어져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소실할머니가 연세도 드시고 서울까지 못 오시니까 저는 책가방 메고 혼자 서울 왔어요. 공부는 서울로 와서 해야 한다고 해서. (어디서 생활하셨어요? 친척이 있었나요?) 아니요. 전혀 없었어요. 자취생활을 했어요. 돈은 어머니가 부쳐주시고. 남처럼 세 끼 다 먹을 수 없으니까 한두 끼 정도만 먹었고 연탄가스 맡으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어요. (혹시 알바도 하셨나요?) 그때는 알바라고 하지 않고 가정교사라는 거 아세요? (그럼요) 제가 공부를 좀 잘해서 그랬는지 가정교사 쓰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고등학교 때 가정교사를 했어요. 저는 숙식만 해결하면 좋으니까 중학생을 가르쳤는데 3년을 했어요.”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돼!”

가정교사를 하며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성적에 지장은 없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했어요. ‘부모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그만한 불효가 없다’는 말이 있어요. 원수라는 건 ‘칼은 칼로 갚는다’ 이런 것보다 어쨌든 내가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지적자산’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양대 법정대 법학과에 들어갔어요. (공부를 잘하셨네요) 뭐... (웃음) 법대에 상당히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어요. 장학생으로 들어갔으니까. (대단하신데요) 이제 고시를 준비해야잖아요. 몇 명을 선출해서 숙식 제공하고 고시반에 자리까지 제공해줬어요. 집도 없고 할 때니 고시반에서 생활하는 게 저한텐 좋았죠. 그런데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빨갱이가 고시 봐야 되지도 않을 거 왜 이런 짓을 해?’ 피해의식에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예전에 형사를 지낸 아저씨가 계셨는데 그분이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돼!’ 그 얘기가 제 뼛속까지 박혔어요. 큰 충격을 받고 고시반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맨날 데모만 하고 학교에서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이건 내 갈 길이 아니다’고 해서 학교를 그만뒀어요.”

 

행정고시도, 공기업도 다 불합격

고대 경제과로 옮겼다.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태안군의 군수를 하고 싶었어요. 이건 내무부 관할이잖아요. 내무부에서 임명을 다 했거든요. 그때는 선출직이 아니고 임명직이었잖아요. 그러니 행정고시 출신들이 되게 많았어요. 일 년 동안 사무관으로 있다가 서기관 정도 되면 군수로 보내고 그랬거든요. 저는 이십 대에 군수 되기를 꿈꿨어요. 태안군수로 가야 하겠다고. ‘이게 내가 아버지 할아버지 원수를 갚는 길이다’ 이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것마저 이뤄지지 않았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회사 시험을 보기로 했어요. 공부는 워낙 잘했으니 시험 보면 합격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때 조선공사, 대한석유공사 등 공기업에 입사원서를 넣었어요. 역시나 불합격이었어요. 억울했어요. 마음속에 분노가 솟구쳤어요. 사회벽이 너무 높았죠. 대기업은 신원조회 때문에 어려웠어요. 그래서 중소기업 쪽으로 눈을 돌렸죠. 이런 거 얘기하면 너무 디테일한데... 롯데라는데를 들어갔어요. (롯데는 대기업인데요?) 지금이야 롯데가 대기업이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롯데는 작은 중소기업이었어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시작되면서 일본 롯데기업이 한국에 진출해 롯데제과 주식회사를 1967년도에 세웠고, 1975년도에 입사해서 약 25여 년간 직장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롯데제과 해외영업담당 이사로 정년퇴임을 했죠.”

롯데는 정 회장이 입사할 당시만 해도 중소기업이었지만 하루에 백 퍼센트 성장하며 급성장했단다.

“회사가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이 되면서 이런 인재들은 해외 나가야 한다고 해서 나가게 됐어요. 사실 그동안은 여권도 안 나왔어요. 그런데 대기업이 개런티하는 거니까 된 거죠. 정석희란 이름으로 여권을 만드는 게 아니라 회사 이름으로 나가는 거니까요. 덕분에 10년 만에 해외 나가게 됐죠.”

 

   
 

사회적 불이익이 무서워 숨다

그는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꺼려했다.

“밝혔다간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혀 사회생활은커녕 주위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저희 자식들도 혹시나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면 안 되니까 말할 수가 없었죠. 그러나 이제 나이도 들고 은퇴도 하고 더 이상 억울하게 살아온 제 과거를 뒤로 감추고 살기 싫었어요. 저도 빛 가운데로 나오고 싶었어요. 늘 신분이 밝혀질까 봐 노심초사하고 지냈는데 더 이상 감출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006년 8월 1일 진실화해위원회에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진실규명 신청서’를 냈어요. 커밍아웃을 한 거죠.”

정 회장은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밝혀진 진실규명서를 들고 어머니 산소에 갔다.

“어머니는 끝내 진실 규명되는 것을 못 보고 돌아가셨어요. 산소에 진실규명서를 올려놓고 절을 드리며 한참을 울었어요. 그리고 다짐했어요. 꼭 사법적 규명도 받아내겠다고. 그래서 2009년도 3월에는 태안유족회를 발족했고 고향 마을 곳곳에 숨겨진 유족들을 찾아 나섰어요. 그 후 2010년도에 국가를 상대로 한 배상청구소송을 천 명의 소송의뢰인의 이름으로 서울중앙지법에 소를 제기해 2016년 6월에 629명이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아 승소했어요. 들쑥날쑥한 법원의 판결로 100% 승소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은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나마 승소금 일부를 후원받아 건물도 매입하고 4층 사무실 한켠에는 1,049명의 위패를 모시는 위령의 방도 마련했습니다.”

 

“너희 집에 가!”

그는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상처가 있다.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보지를 못했어요. 네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저는 소실할머니 댁에서 자랐고 서울로 올라와 학교 다니고 직장생활을 했으니까요. 사실 형도 형이라고 불러보질 못했어요. (그래도 고향에 계실 때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뵈었을 거 아니에요?)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집에 갈 일이 없잖아요 (왜요? 어머니랑 형제들 보러 가야죠?) 다들 어린 나이라 제가 집에 가면 형이나 동생이 싫어했어요. ‘너희 집에 가라’고 했어요. 한창 예민할 땐데 상처를 크게 받았죠. 그래서 이후에는 저도 가기 싫고 어머니도 ‘왔니?’라고 따뜻하게 보듬어주시지도 않아서 안 가게 됐어요.”

많이 외로웠겠다 싶었다. 여길 가도 저길 가도 환영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머니에게 효도하다

어머니는 여러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정 회장이 집에 가도 따뜻하게 맞아줄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어머니란 말도 잘하지 못하고 살았고 효도 한 번 못해본 게 늘 한이었다. 그걸 풀고 싶었다.

“태안군 민간인학살 배상 청구 소송을 해서 배상금을 받았어요. 이걸 어떻게 하면 유용하게 쓸까 고민하다가 ‘인혁당 사건’을 맡아 승소로 이끌어 낸 후 4.9 재단을 맡고 계시던 김형태 변호사님을 만나서 의논했어요. 근데 자꾸 김 변호사님이 저를 피하는 거예요. 곤란했는지... 그래서 제가 숙제를 줬죠. ‘삼 개월을 줄 테니 저의 배상금을 어떻게 유용하게 쓸지 숙제해오세요’라고요. 삼 개월이 지나고 나서 김 변호사님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저녁이나 같이하자’고요. 만났는데 김 변호사님이 ‘배상금을 어떻게 운영했으면 좋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제가 평소 생각해둔 게 있어서 얘길 했어요. ‘내가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한번 불러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 한 번 못한 게 평생의 한이다. 그러니 기금 이름을 어머님 이름으로 해달라’고 했죠. 어머님 성함이 고인숙인데 결국 ‘인숙평화인권기금’으로 했죠. 그래서 어머니한테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어요.”

 

가족묘지에 어머니 이름을 새기다

어머니를 위해 또 하나 효도한 게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모셔진 조상님들의 시신을 찾아 한곳에 모아 가족 묘지를 만들었어요. 시신을 찾아보니 윗대 선조들의 유골이 거의 없더라고요. 까만 흙만 나와요. 그런데 어디서부터 뼈가 나오냐 하면 6.25 때 돌아가신 분부터 나오더라고요. 저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총 맞은 자국도 그대로 있고. (그래도 어떻게 다 찾으셨네요?) 네. 찾아보니까 다 있더라고요. 돌 같은 걸로 표시해놨었거든요. 용케 찾았죠. 찾아서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정식 장례를 지냈어요. 동네 분들 모셔서 제사음식과 조그만 답례품도 드리고 잔치처럼 합동장례를 치룬 셈이죠. 2002년도였어요. 그리고 묘지 앞에 제단 대신 형님의 시가 새겨진 큰 돌을 놓아두고, 어머니 이름을 딴 ‘인숙원’이라는 표지석도 세웠어요. 서울에서 3톤짜리 트럭을 빌려서 돌을 실어다가 해놨어요. 그제야 자손으로서 할 도리를 했다는 뿌듯함이 들더라고요.”

 

비국민에서 국민으로 거듭나기

‘태안 민간인 학살사건’이 칠십 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정석희 회장. 사람에 대한 두려운 마음에 기자가 어떤 사람일지 몰라 처음 만난다고 했을 때 두려움이 먼저 일었다고 한다. 상처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도 상처란 희한한 감정이 들어오면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정상적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 비정상적인 삶으로 살게 된다. 국민으로 살아야 할 정 회장은 오랜 세월 동안 비국민으로 살았다. 연좌제로 인해 원하는 공직도 대기업도 못 들어갔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런 것에서는 벗어나고 싶다고 한다.

그는 현재 강남에 살고 있다. 비싼 동네다. “빨갱이도 그런 동네에서 살아보자” 이런 생각을 했단다. 소위 ‘강남 좌파’라는 말을 처음 썼다고 한다. 좌파는 가난해야 하고 어디 가서 주눅 들어야 하고 못살아야 하고 이러지 말고 강남의 틀을 바꿔보고 싶고 강남에 이런 사람도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단다.

그는 많은 걸 이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못다한 효도도 하고 조상에 대한 도리도 어느 정도 했고, 보수의 아성이라는 지역에서 터도 잡아 살고 있다. 여전히 트라우마는 남아있지만... 나이 때문에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여전히 인터뷰 하러 만난 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한국전쟁희생자 배⦁보상 법안 필요성에 관한 국회 토론회’도 참석하고, 추가 인터뷰를 위해 전화 한날도 6.25 당시 마산 학살의 중심지였던 괭이바다 근처에 설치된 위령비 제막식과 위령제에 다녀온다고 하는 걸 보면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부디 건강한 몸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다 해결했으면 좋겠다. 그게 지난날의 보상일 테니.

 

<이 기사는 계간 ‘치유’ 3호에 실렸습니다>

   
 

<치유> 잡지 후원자가 돼주세요.

-1구좌에 10,000원
-후원비는 <치유> 잡지 제작비로 사용됩니다.
-정기구독 신청계좌 신한은행 110-541-777944 (예금주:최윤희)

정기구독자가 되시면
-<치유> 잡지 선교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발행과 동시에 어디서나 편히 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오프라인 구매-광화문, 목동, 잠실, 천호, 일산, 평촌, 인천, 대구, 울산
온라인 구매-인터넷 교보문고(‘계간 치유’로 검색)와 쿠팡(‘계간 치유’, ‘치유 잡지’로 검색) 등

‘치유’ 잡지 블로그 주소
https://blog.naver.com/yunhichoi1/222995046077

값 5,000원

 

최윤희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57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