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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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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3월 19일 (일) 18:30:09
최종편집 : 2023년 04월 16일 (일) 22:52:08 [조회수 : 1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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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어라
마 25:1-13
(2023/03/19, 사순절 제4주)

음성으로 듣기

   
 

["그런데,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하였다. 신랑이 늦어지니,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제 등불을 손질하였다.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을 하였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신랑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장엄한 세계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벌써 사순절 넷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으셨는지요? 기도, 절제, 나눔을 실천하고 익히는 절기입니다. 저는 가끔 일상이 답답하다 여겨지면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며 마음을 가다듬곤 합니다. 최근에는 우리 교우가 작가로 참여한 KBS 다큐 ‘히든 어스’를 몇 편 보았습니다. 그 작품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은 기껏해야 백 년을 사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사연과 비밀을 간직한 채 우리 앞에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그들이 살 땅과 세계를 만드셨다고 전합니다. 그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놀라운 진실입니다. 그 신비를 떠올릴 때마다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물과 바람, 햇빛, 새들의 지저귐, 산과 들, 각종 동물들, 그리고 인생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귀 기울여보면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이 고달프다고 느낄 때마다 더 큰 세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미국항공우주국이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을 통해 찍은 별 사진을 보았습니다. 지구로부터 1만 5천 광년 거리에 있는 울프-레이에 124(Wolf-Rayet 124)라는 별인데, 그 별은 지구 질량의 1000만 배나 된다고 합니다. 그 별이 엄청난 양의 가스와 먼지를 우주 공간으로 내뿜는 장면을 망원경이 포착했던 것입니다. 우주는 광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골몰하는 동안 우리는 삶이 선물이고 신비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오늘의 교육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가르치지 못한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길이 재는 법, 무게 다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러러보는 법, 놀라고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했다. 장엄함을 느끼는 감각이나 인간 영혼의 보이지 않는 위대함과 모든 사람에게 가능성으로 부여된 어떤 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은 좀처럼 심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세계는 평면이 되고 인간의 혼은 텅 비게 된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을 찾는 하느님>,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40-41)

마치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우리 현실을 보고 쓴 글 같습니다. 신앙생활의 보람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삶의 신비를 자각하고 경외감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은 삶의 여정 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 채 허둥거리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볼 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을 다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기름이 떨어져 불을 밝힐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아닌지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 예기치 않은 상황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개념적 언어로 종교를 가르치기보다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더 큰 세계로 데려가십니다. 사실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언어로 다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나이고자 하는 나’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건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특정한 개념 속에 욱여넣는 것은 불경함입니다. 하늘 나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비유 혹은 이야기를 통해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려내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 사회 어디에서나 일상적으로 볼 수 있던 결혼식이 배경입니다. 예수님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기가막힌 이야기꾼이십니다. 일단 사람들이 다 익숙하게 아는 현실을 소재로 삼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속에 감춰진 비상한 뜻을 발견하도록 이끄십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결혼식 풍습을 보여줍니다. 약혼식 이후 신랑과 신부는 각자의 집에서 삽니다. 그러다가 결혼식 날이 되면 신랑은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신부 친구들의 역할은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신랑을 영접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부의 들러리가 되어 신혼집으로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낯선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친구의 두려운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것일 겁니다.

친구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이지만 이 비유에서는 들러리인 신부의 친구들이 핵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등잔을 준비하고 거기에 소용되는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친구들의 의무였습니다. 신부의 들러리가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설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부의 친구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입니다. 두 부류 모두 등잔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했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의 경험에 비추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초저녁에 올 줄 알았던 신랑이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측이 빗나간 것입니다. 기다림에 비친 신부의 친구들은 졸음을 못 이겨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친구들은 황급히 일어나 각기 제 등불을 손질합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친구들은 자기 등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당황합니다. 다급하게 다른 친구들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하지만, 친구들은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쓰라”고 말합니다. 매정한 이 거절이 우리 마음을 괴롭힙니다. 결핍의 상황이 돈독했던 우정을 깨뜨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나눠주면 결국 신랑 집으로 가는 도중에 등불이 다 꺼지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길 테니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 닫힌 문 앞에서
거절당한 친구들은 뒤늦게 기름 장수에게 달려가 기름을 장만하여 급히 잔치 자리를 찾아갔지만 이미 혼인 잔치의 문은 닫혔습니다. 실제의 결혼식에서 어떤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문을 닫지는 않겠지만 예수님은 비상한 상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즐겨보는 드라마는 우리 현실 속에서 있을 법한 소재를 다룹니다. 그러나 드라마들이 막장처럼 보이는 것은 그 현실을 과장되게 재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슬그머니 덮어두고 넘어가는 일들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런 방식으로 폭로됩니다. 주님도 이런 방식을 이야기 방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닫힌 문 앞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을 두드리며 애원합니다.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신랑의 대답은 냉정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결혼식 이야기가 어느 결에 심판에 대한 이야기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은 욥기와 잠언에 나오는 말씀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결국 악한 자의 빛은 꺼지게 마련이고, 그 불꽃도 빛을 잃고 마는 법이다.”(욥 18:5)
“의인의 빛은 밝게 빛나지만, 악인의 등불은 꺼져 버린다.”(잠 13:9)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그 처녀들을 ‘악한 자’ 혹은 ‘악인’이라 일컫지 않고 ‘어리석은 처녀들’이라고 지칭합니다. ‘어리석다’는 헬라어 단어 모라스(mōros)는 어리석다는 뜻 외에도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다’, ‘불경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도 ‘모라스’였습니다.

내 앞에서 문이 닫혔다고 느낄 때의 암담함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이십 대 초반에 제가 경험했던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암담한 상황이 저를 신앙의 세계로 이끌긴 했지만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지금도 이런 상황에 처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이들을 책망하기 위해 선포된 말씀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기름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요? ‘기름’이라는 은유 혹은 상징을 믿음, 소망, 헌신, 헌금, 선행 등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게 영 그르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뿐일까요?

기름이 가리키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유가 하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기름을 오히려 ‘자기 비움’으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빛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실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 내 계획, 내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고집스러움이 우리를 어둡게 만듭니다. 가끔 우리 집 식구들이 모이면 유년시절의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1950년대 60년대, 무척이나 가난하던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이미 쓰라림은 사라졌고 즐거운 회억만 남았습니다. 저보다 12살 많은 작은 형은 저보다 4살 위인 막내 누나가 등잔에 담긴 석유를 다 쏟아버리고 거기에 재를 채웠던 이야기를 하며 배꼽을 잡습니다. 아직 어렸던 누이는 재 속에 불이 숨어있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기가 막힌 연상 아닌가요? 하지만 엉뚱한 것으로 채워지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비워야 주님의 은총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자기 비움이 기름이라면 이런 기름은 나눠줄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이런 기름은 스스로 마련해야 합니다. 자기를 비울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부력
비유의 마지막 대목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랑이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는 까닭은 뭔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중독, 탐닉, 두려움, 분노 같은 것들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지 못합니다. 채워져 있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뭔가로 자기를 채우려 합니다. 그래서 삶이 분주합니다. 상실감과 공허함과 대면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약물에 중독된 이들이 많습니다.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조금쯤은 현실과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더 큰 세계 속에서 자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마커스 보그)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국어사전은 부력을 ‘기체나 액체 속에 있는 물체가 그 표면에 작용하는 압력에 의해서 중력에 반하여 위쪽으로 뜨는 힘’이라고 설명합니다. 부력은 중력과 반대되는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총의 적절한 상징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할 때 우리는 비애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가끔은 씁쓸한 일을 만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를 위로 들어 올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음, 그것은 우리 삶이 기적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 김기택 님은 늦게 얻은 아기를 키우면서 생명의 신비에 눈을 떴던 것 같습니다.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는 시는 주변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근새근 잠을 자는 아기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옆에서 텔레비전이 노래 불러대고 아빠가 전화기에 붙어 회사 일을 한참 떠들어대도 아기의 잠은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다치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수액을 퍼올리는 뿌리와 같이, 잠은 고요하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창비시선 185, <사무원> 중에서). 신비하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있는 힘을 다하여 자고 일어났기에 아침에 깨어나는 아기 얼굴은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기만 하고, 웃음 말고는 다 잊어버린 것처럼 얼굴이 한들거립니다. 아기는 근원적 신뢰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스승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으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는 잠의 신 히프노스가 사람들에게 잠을 뿌린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욕망을 뿌려 영혼의 잠을 자게 만듭니다. 스스로 깨어 있는 줄 알지만 실은 잠든 이들이 많습니다. 이제 깨어날 때입니다. 우리와 함께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시려는 주님의 꿈에 동참하십시오. 선한 힘을 일깨우고, 악한 일은 폭로하십시오. 더 큰 세계에 접속하는 순간 중력처럼 우리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때 하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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