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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치유> 발행인 최윤희 목사 “잡지는 내 치유 목회”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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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3월 18일 (토) 23:38:16
최종편집 : 2023년 03월 23일 (목) 23:28:57 [조회수 : 2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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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부 기자로 일하다가 각별한 체험을 통해 목사가 된 최윤희 목사.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연예인들을 만나 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연예부 기자 일은 또 하나의 별세계였을 듯하다. 10여 년 동안 이어진 별세계에서 떠나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강북지방의 작은 교회에서 알콩달콩 8년째 목회하고 있다. 목회하다가 기자가 된 본 기자와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고나 할까.

목회 10년이 지난 지금은 사람들의 상처를 다루는 계간 잡지 ‘치유’를 발간하는 일을 겸하고 있다. 이 또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를 알게 됐고 그들의 치유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 비슷한 상처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화자와 독자가 함께 치유의 길로 나가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최 목사는 이 작업을 미디어 목회로 규정하고 잡지 ‘치유’가 자신의 설교라고 말한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목사’ 두 글자


“전에 연예부 기자 몇 년 하신 거예요?”

“대학 졸업하고 35살까지 했나... 한 10년 정도 하다가 하나님께서 저한테 사인을 주시더라고요. 연예부 기자를 그만두고 잡지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그래서 엄마랑 같이 어느 기도원을 찾아갔어요. 서울 시내의 어느 교회이자 기도원이었는데 그 목사님이 제 기도를 해 주시고 나서 ‘신학 공부를 하셔야겠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 웬 신학 공부?’ 갑작스런 말에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이상하게 계속 신경이 쓰였어요. 그런데 그러고도 두 번이나 똑같은 말을 들은 거예요”

최 목사에게 신학 하라고 한 사람은 총 세 명이었는데 세 명 다 여자 목사였다. 최 목사는 세 명의 여자 목사님의 권유에 금방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응답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엄마랑 오산리 순복음기도원에 올라가 삼일동안 금식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면서 부르짖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오전 예배를 마치고 이제는 내려가야 할 상황. 들판으로 나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 저 이제 내려가요. 만약에 응답 안 해주시면 저 내려가서 그냥 하던 거 할 거예요.”라고 했는데 그때 갑자기 하늘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단다. ‘목사, 목사, 목사’ 글자가 점점 커지면서 응답을 받은 것이다.

“저는 그런 걸 처음 겪어봤어요. 저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그런 걸 믿지도 않는데 말이죠.”

 

좌충우돌 감신 목회신학대학원

 

“응답을 받고 내려와서는 대학에 편입을 해야 하나, 대학원에 들어가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그 당시 광림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감리교니까 감리교의 신학대학교를 선택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 제일 좋은 신학대학교는 총신대학교라고 생각하던 터라 지원을 하려고 했는데 거긴 야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10곳을 놓고 고르는데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님이 감리교신학대학교(이하 감신)를 나오셨으니까 그곳으로 가자고 해서 일단 감신으로 결정하고 당시 광림교회 부목사로 계시던 박동찬 목사님(일산광림교회)에게 이메일로 진로에 대한 의견을 여쭈니까 대학원을 추천해주셔서 감리교신학대학교로 일단 마음을 정했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감신으로 가서 학생을 만났다. 학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서. 지나가는 남학생 한 사람을 붙들고 “내가 이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는데 이 학교는 어떤 학교냐?”고 물어봤단다. 그랬더니 그 남학생 말이 “여기는 시계를 분해해서 다시 맞추는 곳이다”라고 말했단다. 최 목사는 정통보수파라 그 말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신앙만 온전하다면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랴 싶어 그곳에 입학하기로 하고 학교에서 내려와 서점에 들러 문제집을 사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를 통해 제 일등으로 접수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시험을 봐서 합격하고 야간으로 목회신학대학원(이하 목신대원)에 입학해서 M.Div 8기 3년을 다녔다고 한다.

 

위기가 찾아오다

 

학교를 다니면서 대치동에 있는 모 초등학교에서 방과후학교 강사로 활동했다. 방송반, 아나운서반, 기자반을 지도하면서 학비를 벌면서 야간 신학대학원을 다녔다. 학교에서 근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가려면 시간이 너무 빠듯해서 저녁 먹을 시간이 없어서 지하철 안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냄새를 풍기는지, 남들이 쳐다보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허기를 채우면서 3년을 다녔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다.

“제가 원했던 거는 성경 공부인데 그거는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고 그냥 맨날 칼 바르트가 어쩌고저쩌고 신학만 가르쳐주니까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목회 나가면 그런 건 하등 필요 없는 것들인데 재미도 없고...”

한번은 어느 수업시간에 교수에게 “왜 성경 공부는 안 가르쳐주고 신학 얘기만 합니까?”라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한다는 소리가 “그러려면 성경학교에 가라”고 했단다. 최 목사는 그 소리에 너무 화가 났단다. “아니, 학생이 얘기를 하면 잘 달래서 계속 학교에 다니게 해야지 성경학교에 가라니? 무책임한 말에 너무 화가 많이 났었어요.”

1학년이 끝나갈 즈음 수업에 대한 회의가 들어서 도저히 다닐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동기 신학원생들의 만류에 그만두지 못하고 결국 3학년 1학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어느 교수의 강의를 듣는 순간 ‘아, 내가 이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구나’라고 생각을 했단다. 최 목사는 그 교수의 강의에 단단히 매료가 됐던 모양이다. 그래서 덕분에 마음에 위로를 받으며 졸업을 하게 됐다고 한다.

 

사역자의 길로 들어서다

 

목신대원 6분의 5학기를 마치고 분당 불꽃교회에서 파트타임 전도사로 처음 교역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름이 불꽃교회라 왠지 너무 뜨거울 것 같다는 부담도 됐지만 어쨌든 합격해서 그곳에서 영⦁유치부 전도사로 교역자 생활 첫발을 떼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암 선고를 받으셨고 말기암으로 진행이 되면서 교회를 사임하게 됐다. 엄마가 소천하고 나서 분당지방 한 교회 목사님의 추천으로 만나교회에 수련목으로 들어갔다. 수련목을 마칠 때쯤 호남선교연회 전남서지방 금동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가서 2년 동안 담임 목회를 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서 어느 지방에 개척을 하려고 했으나 미자립교회라는 이유로 개척을 못했다.

“2년간 미파로 지냈어요. 단지 미자립교회란 이유로 개척을 안 해주는 게 너무 억울하고 화도 나고 해서 많이 항의를 했지만 6개월만 기다려라, 1년만 더 기다려보라, 이러다가 2년을 흘려보냈어요. 감리사님과 선교부 총무에게 항의를 했어요. 후배 목사가 개척하려고 하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후배 앞길을 막느냐고요.”

어떤 교회는 큰 교회에서 2년간 지원해주고 생활비에 성도까지 보내준다고 하니까 최 목사보다 늦게 왔는데도 개척을 허락해줬다. 그러나 2년간 기다려보라며 희망 섞인 말을 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최 목사에게는 개척 허락을 안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정리하고 그 지방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너무 상심이 커서 더 이상 서울에서 개척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아빠가 계시던 원주로 가려고 했으나 그나마도 여의치 않아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개척 준비하고 있던 지방의 감리사님의 추천으로 지금 목회하고 있는 강북지방으로 오게 됐다고 한다.

 

열악한 현실 교회

 

개척은 안 해도 돼서 그건 부담이 없었지만, 목회현실은 열악했다. 부임한 교회는 10년 된 교회였지만 성도는 한 명도 없고 이월통장도 없는 완전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한숨만 나오는 교회였다. 10년 된 교회에 4대 담임목사? 허울만 멀쩡한 교회였다. 그렇게 시작한 목회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교회 건물 3층과 4층에 하숙집이 있어 전도를 해서 몇 명의 성도가 나오긴 했지만, 뜨내기들이라 언제 교회에 안 나올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월세는 90만 원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서 이사를 해야 했고 역시 거기서도 월세가 부담돼 한 번 더 이사를 했다. 지금 있는 교회는 6평밖에 안 된다. 그리고 1층이다. 이런 장소를 얻게 된 것은 교인이 없어 목회가 안 되다 보니 평일에는 영어교습소를 하기 위해서였다. 근처에 학교가 있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35평에서 6평의 적은 평수로 옮기고 3층에서 1층으로 옮겼다. 다행히 아이들은 조금씩 늘어났고 4년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고 카톡으로 가르치다가 하나님이 마음에 ‘이젠 교습소를 그만두고 목회에만 전념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교습소를 과감히 정리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정리한 목회는 여전히 어려웠다. 코로나 여파도 있었지만, 열정과 열심이 부족했다. 상황을 탓하기에는 본인 탓이 크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목회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이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뉴스레터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바로 한세대학교에서 발간하는 뉴스레터였는데 그곳 담당 교수를 평상시 잘 알고 있던 터라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창간호만 만들어주고 손을 떼야 했다.

“그곳 목사들이 감리교 목사가 순복음 일을 한다고 안 좋은 시선으로 말하는 거예요. 순복음 교회 목사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감리교 목사가 우리 일을 하냐고요. 저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교파가 뭐 중요한가요? 경력이 있으면 하는 거지. 기자 출신 목사가 많은 것도 아니고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제가 적임자로 저를 부르신 거고 그래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는데 말들이 많아서 교수님과 의논하고 그만두기로 했어요.”

 

   
 

‘치유’ 잡지 탄생 배경

 

많이 아쉬웠다고 한다. 목회 생활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내 재능을 사용하시겠지 하는 마음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함께 뉴스레터를 만들었던 편집 디자이너 집사가 “목사님, 잡지 만들 생각 없으세요?”라는 말에 마음이 최 목사의 마음을 움직였다. 늘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마음의 울림으로 들렸고 “당연히 있죠. 그럼 만들어 봐요”라고 말하고 한 달 반 만에 뚝딱하고 ‘치유’ 잡지를 창간하게 됐다.

“잡지 이름을 ‘치유’라고 지은 건 제가 치유가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극동방송을 자주 듣고 있던 시기에 정태기 목사님의 치유상담연구원 광고를 듣게 됐어요. ‘목회자가 먼저 치유 받아야 한다’라는 말이 가슴에 꽂히더라고요. 그리고 목회자들은 장학금 준다는 말도 한몫했어요. 그래서 당장 원서를 접수했고 합격해서 2년간 다녔어요.”

영성수련을 하면서 조별 모임을 하는데 최 목사의 상처가 치유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치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치유에 대한 관심이 많이 가면서 이름을 ‘치유’라고 지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치유’ 잡지가 탄생한 것이다.

“처음에는 섭외가 안 돼서 정말 고생했어요. 잡지가 이름이 없으니까 아무도 섭외에 응하지 않는 거예요. 하도 섭외가 안 되니까 창간준비호를 16페이지로 내고 그다음에 창간호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 교회 자매가 극동방송과 CBS에서 작가로 일한 적이 있어서 아는 사람이 많고 정보력도 뛰어났어요. 그래서 ‘게임중독치유’ 하는 김준태 목사님을 소개시켜줬는데 그때부터 섭외가 잘 되기 시작하더니 김동호 목사님, 브라이언킴, 김영서 작가, 김지영 목사, CBS TV ‘새롭게 하소서’ 등에 이르기까지 계속 섭외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16페이지로 창간준비호를 발간하려던 계획을 바꿔 84페이지로 창간호를 발간하게 된 거예요. 완전 기적이었죠.”

이렇게 해서 2022년 6월 최 목사의 ‘치유’ 잡지 사역이 첫발을 내딛었다.

 

잡지 <치유>는 무엇을 다루나



“주로 ‘상처와 치유’ 두 개의 키워드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치유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최근에는 억울한 사람 쪽으로 생각이 많이 가요. 억울한 사람들, 예를 들어서 김련희 씨 같은 경우는 북한 아줌마인데 이분은 탈북한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평양 시민이고 평양 아줌마예요. 병을 고치러 중국에 가셨다가 한국에 2개월 정도 가서 일하면 병원비를 벌 수 있다는 브로커 말에 속아 한국에 왔는데 국정원에서 북으로 못 가게 해 11년째 못 돌아가고 있어요.”

“유우성 씨 같은 경우는 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으로 억울함을 겪었어요. 그 사람이 서울시 공무원이었는데 간첩으로 몰린 거지 간첩은 아니었어요. 여동생을 4개월 동안 가둬 놓고 회유하고 때려서 얼굴에 상처 나게 하고 화장실에 CCTV 설치해서 목욕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정말 끔찍하게 만들어놨어요.”

“태안유족회 정석기 회장의 경우, 6.25 한국전쟁 당시 태안에서 있었던 민간인학살 사건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어머니까지 빨갱이로 몰려서 다 처형당했어요. 그 일로 집안이 완전히 박살났어요. 연좌제에 걸려서 취업도 못하고요.”

올해 초 발간된 치유 3호에 실린 이야기 들이다. 최 목사는 이렇게 상처 입은 사람들의 하소연을 글로 풀어낸다. 상처라는 것이 숨겨지고 잊혀져 아물어 가는 경우도 있지만, 잊지 않고 함께 아파하거나 분노해 주는 것으로 치유의 길로 나가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론 기자 본능을 살려 상처의 본질에 접근해 보고 구조적인 문제를 분석해 상처의 원인을 찾아내기도 한다. 자신이 왜 아픈지도 모른 채 고통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터뷰 상대가 정해지면 그 인물과 관련 기사와 정보를 분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터뷰도 꼼꼼하게 진행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만나야 하며 발언의 신빙성을 크로스 체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고된 작업이라고 했다.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접근성 있는 글로 풀어내기 위해 경제 문화 사회 스포츠 예능까지 섭렵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4호 때는 억울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나올 거예요.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의 경우처럼 억울한 사람의 대변인이 되고 싶어요. 그분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는 없지만 억울한 사람의 입이 되고 싶은 거예요. 상처의 치유에서 억울함의 치유로 치유의 영역이 점점 확장되고 있는 거죠.”



“잡지를 통해 복음을 전하려는 것인가?”



목사이기 때문에, 그리고 잡지가 자신의 설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잡지 ‘치유’가 신앙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 목사는 신앙 잡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전국 서점에서 그의 잡지가 ‘종교’란에 있지 않고 ‘독립잡지’란에 있는 이유이다. 종교란에 들어가 있으면 비기독교들이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의 요청으로 서점에서 전시 섹션을 옮겼다고 했다. 다만 대상은 신앙이 있든 없든 잡지를 통해 복음이 ‘스며들기’를 바랬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믿음을 가리지 않고 있잖아요? 처음에는 믿는 사람들만 다루는 게 어떻겠느냐고 주위에서도 얘기를 했지만 제가 꼭 목사라고 해서 믿는 사람만 인터뷰할 필요는 없는 거거든요. 믿는 사람 믿지 않은 사람 다 모두 대상이고요. 또 믿지 않는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복음이 스며들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 색채가 두드러지지 않도록 신경쓰고 있어요.”

현실은 어떨까. 복음이 전해지려면 서점에서 팔려야 하는데 재고가 쌓여 있다. 이제 겨우 3호가 나왔고, 계간지여서 독자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적다. 대중화나 유명세를 타기가 난망해 보인다. 서점에서 독자들이 이 잡지를 선택해야 하는 유인책은 있기나 한 걸까?

“유명인들을 등장시키는 전략도 쓰고 있지만 아직은 잡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저 혼자 하다 보니까 콘텐츠가 다양하지 못한 면도 있고요. 히딩크 말로 하면 아직 배가 많이 고파요. 미혼모나 성폭력, 노인문제, 유기된 아이들의 입양 같은 주제도 다루고 싶어요.”

최 목사는 잡지가 2주년을 맞을 즈음에 잡지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출연하는 ‘치유 콘서트’를 열고 싶다고 했다. 치유 잡지를 통해서 어떻게 변화됐고 달라진 점은 있는지, 치유 잡지에 바라는 점은 있는지 편안하게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또 하나의 현실, 출판 비용



“가장 큰 문제죠. 잡지가 잘 팔려서 출판비가 빠지면 모를까 매번 후원해 달라고 손 벌리는 게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해요.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왜 나한테 손 벌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나서 큰 상처를 입었어요.”

그의 통장엔 앞으로 두 번 출판할 수 있는 비용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는 듯했다. 지금까지의 인생 자체가 아슬아슬했고 지난 10년간 임대료 걱정 하나 없이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는데 앞으로 10년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최 목사. 당장 취재 길에 동행해 주시는 사진작가 목사님과 편집을 돕는 집사님에게 수고비조차 드릴 수 없는 처지가 죄송할 뿐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

 

“저희 잡지를 보면서 ‘내 상처가 되게 크다고 생각했는데 뭐 별거 아니네’ 그 얘기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저도 상처가 되게 큰 줄 알았었는데 이 사람들의 상처를 보면서 ‘제 상처는 별게 아니구나’하고 극복하는 계기가 됐거든요.”

좀 충격적이었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교 1학년 때까지 9년 동안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 기도까지 했었다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 항암치료 중에 목사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이혼하려고 집에 옷 가지러 갔더니 상대 여자가 커튼 밑에 숨어 있더란 어느 사모의 사연. 최 목사는 그들의 웃는 사진을 가리키며 이런 사람도 사는데 내 상처를 대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처럼, 이 사람들 보고 이겨내라고, 치료받을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치유 3호의 표지 그림은 김주영 서양화가가 그린 인물화다. 눈을 감은 채 주황색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눈 속에 핀 동백꽃 앞을 거의 지나간 여인의 모습인데, 최 목사는 상처받고 있는 모습일 수도 있고 치유 받은 모습일 수도 있는 작품 속 인물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쯤에서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떠오른다. 상처를 입어본 사람이 상처를 잘 다루듯이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최 목사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글로 표현해 내는 치유사역자다. 복음이라는 직접적인 표현보다 타인의 고통 속에 들어가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며 ‘치유잡지’라는 공간속에서 해방을 선포함으로써 결국은 복음을 전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저는 이 사역을 미디어 목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목회 상담하시는 분들처럼 저는 잡지 발간으로 치유 목회하는 거예요. 제 글이 설교이고 잡지의 등장인물은 우리 가족이자 성도예요. 독자들은 전도 대상자고요. 상처 입은 사람이 치유잡지에서 도움을 받아 다시 건강해지면 더 바랄 게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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