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전에>

1869년부터 러시아에서 추방된 죄수와 혁명가들이 이주해 살던 사할린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표현대로 ‘슬픔의 틈새’였으며, 한국인에게는 일제시대 강제징용을 당하여 유배된 곳이며 해방된 조국마저 이들을 팽개친 슬픈 상처를 안고 있는 곳입니다. 게다가 러시아 전투기의 KAL기 폭파사건의 현장이기에 한국인들에게는 슬픔의 틈새였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이후 인류는 단 하나뿐인 지구를 형제끼리 서로 죽이는 삶의 현장으로 만들었으나 구원자이신 예수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를 소망하는 줄거리가 성경 이야기라는 생각을 합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전도사도 아니며 고국을 알리는 공무원도 아니고 단지 돈벌이와 호기심 때문에 사할린으로 오게 된 제가 겪었던 체험담을 “본대로 느낀대로”적어 보았습니다.

이제 10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사할린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매장량이 많다는 가스와 석유 덕분에 때아닌 봄꽃이 피고 있습니다. 경험이 부족했던 저로 인해 마음 상함과 물질의 피해를 본 고국 분들에게 사과하는 마음과 가인 같은 마음을 가진 일부 사할린 동포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다소 주관적이고 세속적인 이야기가 등장을 하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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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초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4월말까지 알루미늄 200t이 사할린에서 출발해야 됩니다. 꼭 부탁 드립니다.”
비철을 구매하기 위해 8개월 전부터 3차례나 사할린을 방문하였고 자금을 투자한 국도금속 현사장이 국제 전화로 최후 통첩을 하였는데, 거구답게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지 않은 그가 얼마나 속이 타는지 긴 한숨소리가 이국 사할린 땅까지 들릴 정도였다. 허긴 나도 작년 6월까지 같은 구매자였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최후의 무서운 결단을 내리기 위해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지나온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젊은 혈기만 믿고 사업을 하다 부모가 준 유산까지 다 털어버린 나는 1988년 늦겨울인가 89년 초겨울에 동기가 원장인 의원에서 사무장으로 근무하였는데,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간접 X-ray 미필 집단 보건증 사건으로 77일간의 구치소 생활을 하다 집행유예로 출감을 하였다. 이후 병.의원에 소모품과 의료기구를 판매하는 업자가 되었는데, 편하게 앉아서 구매를 하던 자가 뛰어다니며 구걸하는 영업이 힘들었지만 부산 근교와 경남일대에 전문병원이나 준종합병원의 붐이 조성되기에 대지구입, 자금문제, 고가 의료기 리스 등의 해결사 노릇을 목표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1992년 초봄.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무역을 하는 고등학교 동기인 해양무역 조사장에게서 8만불 가량의 의료용품 주문이 들어옴으로 나의 직업이 또다시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 토박이인 나는 어릴 적부터 중앙동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황당무계하거나 사기꾼이 많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동기는 의리를 중요시하는 성격의 선장출신이기에 그의 사업이 어렵다는 소문을 듣고도 믿어보기로 했던 것이다. 허나 주문이 콘돔, 일회용 주사기 등의 소모품에서부터 수술도구, 병원용 침대, 수술기구, 치과용기구까지 다양하였기에 러시아에서 폐선을 사서 수리한 후 도로 외국으로 파는 친구가 나에게 이 주문을 준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나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의사는 구매에 까다롭고 결재가 느렸으나 보증수표인 반면 계약금도 없고 물건을 배에 실은 후에 B/L을 받아 은행에서 돈을 찾는 형식이라 무역맹인 나는 당황했으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구매자인 의사협회 니콜라이 회장이 L/C(신용장)를 보내고 부산에 도착함으로 일은 급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니콜라이 의사가 보낸 주문서에 몇 차례의 견적서를 보냈으나 정확한 구매 품목이나 가격은 한국에서 현품을 본 후에 결정을 하는 조건이기에, 나 생전 처음 보는 러시안인과 병원을 다니며 의료 기구들을 보여주었고 통역은 초량 텍사스 거리에서 일을 하는 사할린 동포나 외국어 대학생들이 도와주었다.

생각외로 가격이 저렴한 물건을 선택 하는 대신 품목이나 수량을 늘이려는 니콜라이 의사의 태도는 당시 어려운 상황의 러시아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개인구매가 아니라 주정부 구매인지라 그의 수고비로 5%인 4000불을 제외하고는 다 구매하기에 별 걱정은 없었다. 일주일 후에는 친구의 사무실에서 둘은 통역도 없이 카다록에 번호를 붙여 한 품목마다 가격은 달러, 수량은 아라비아 숫자로 적어 일치를 보았는데, 콘돔도 크기부터 색상과 모양에 따라 수 십 종류가 되었고 간단한 수술도구는 너무 다양하였으나, 서로 눈을 마주쳐 고개를 끄덕이면 통과할 정도로 친숙한 사이가 되었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조사장은 러시아에서 구입한 폐선을 수리하여 중국으로 팔기위해 급히 중국으로 가면서, 주문을 다 마치고 5일 후에 출국해야 하는 니콜라이 의사의 관광과 뒷처리를 나에게 부탁을 하였기에 점심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했다. 부산 역 앞의 텍사스 거리는 화교들의 터전이었으나 동족전쟁으로 미군들의 휴식처가 되었다가 이제는 러시아인들을 상대하는 거리로 변해 주변 강대국 속의 한국 현대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영화 세트 같은 거리였다.

니콜라이 의사는 오전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은 텍사스 거리에서 혼지 쇼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었으며 낮부터는 말도 통하지 않는 한러/러한사전을 든 나와 손짓발짓으로 백화점과 시장, 슈퍼마켓 그리고 구포국수 같은 먹을 것은 만드는 소형공장까지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이는 니콜라이 처남이 무역을 하기에 한국의 많은 샘플을 가져가고 부산에서 동업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는 배로 이틀이 걸리나 승객의 개인 짐은 많이 싣고 갈 수가 있기에 세르게이 의사는 컨테이너를 실은 배로 출발을 하였는데, 조사장은 폐선 사업가이니 일용품에 관심이 없기에 나보고 투자를 하여 처남과 먹는 상품장사를 하면 큰 돈을 번다며 주소와 전화번호 등을 적어 주며 블라디보스톡에 한번 꼭 오라며 ‘다비스다니야(안녕)!’하면서 배에 올랐다. 나는 그 당시 변화 속의 러시아를 알지 못했기에 직업이 의사인 사람이 한가롭게 장사까지 신경을 쓰는 모습은 돌팔이라는 진단을 할 뻔했으나, 보름동안을 같이 지내본 경험으로는 정직하며 품위 있으며 점잖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8만불에서 세르게이 의사 수고비로 5%인 4000불을 제외하고(서류상에는 8만불) 7만6천불의 물건을 팩킹(packing) 전문회사를 통해 콘테이너에 싣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배에 선적을 하니 B/L을 주었고, 외환은행에선 러시아 B/L이라 투덜거리면서 이틀 후에 전액을 내 주는 광경은 신기하기만 했다. 친구에게 총 금액의 10%만 소개비로 주고 나머지 금액을 받아야 하는데 절반만 주고 차일피일 미루기에 두 달 동안 돈 받으러 다니다, 친구 사무실에서 89년도부터 러시아 사할린에 다니며 무역을 한 최윤양이란 30대 초반의 사람을 알게 됨으로 어둠 속의 한 많은 사할린 섬과 묘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눈이 조그만 최는 모교 근처에는 와보지도 않았으나 동문에 대해선 훤히 아는 움직이는 동문백과사전이었다. 후에 백과사전이 된 이유를 알았는데, 구두닦이 출신으로 자신의 이름조차 한자로 쓰지 못하는 짧은 가방끈이나 세속을 보는 눈치는 국제적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