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임종석 칼럼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살진 돼지를 보고 행복하다 할 것인가
임종석  |  seok9448@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3년 02월 08일 (수) 14:19:01
최종편집 : 2023년 03월 28일 (화) 00:20:23 [조회수 : 1248]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

― 살진 돼지를 보고 행복하다 할 것인가 ―

   
 

기독교 신앙의 원 줄기

 

기독교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종교다. 믿고 영생하는 종교다. 좀 세련되지 못한 표현으로 말하면 예수 믿고 천당 가는 종교다. 원색적이어서 거부감이 들 수도 있으나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가장 함축적이고도 정확하게 한 표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수 믿고 천당’을 도식적으로 말하면 ‘천당’ 즉 ‘하늘나라’가 목적지이고, ‘믿는 것’이 목적지에 가기까지의 과정, ‘예수’가 그 과정의 실체이다. ‘과정’을 ‘길’로 바꿔 말하면 예수가 하늘나라라는 목적지에 가는 길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길이 예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라는 길을 통해 하늘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을 설명해 주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성경이다. 성경 구약 39권, 신약 27권을 합친 신구약 66권이다.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어이없이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그 방대한 책을 어느 하세월에 다 읽는다는 말인가. 그것도 소설 읽듯이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어서 읽고 또 읽어도 뜻을 모르는 내용이 수두룩한데, 그래서 강해서나 주석 등을 뒤져가며 평생을 읽어도 모르는 것투성이인 것이 성경인데 말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생각하면 극히 간단할 수도 있다. 성경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그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하는, 그러기에 ‘작은 복음’이라고도 ‘복음서 중의 복음서’라고도 하는 요한복음은 3장 16절을 보면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역시 예수 믿고 영생,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예수를 어떻게 믿는가 하는 그 방법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대복음 22장 37-40절의 예수님 말씀으로, ‘강령’이라 했으니 이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의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신구약 성경 전체 말씀의 근간, 근본이 되는 큰 줄기인데 어떻게 이에 토를 달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실체는 하나님, 성삼위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함으로 섬기는 가운데, 이웃 즉 사람들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주 대상이 사람이니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작은 자’, 곧 사회적 약자 사랑이 사람 사랑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기까지 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삶으로 하는 순교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이웃 곧 사람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한다? 말로만이라면 누군들 못하겠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니 불가능하다. 정말로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한다면 주위에 돈이 없어 고통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자기도 돈 한 푼 없는 알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인들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라 하시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한다는 말씀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의는 무엇일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물질로 말할 것 같으면 가능한대로 절약하여 자신의 경제능력보다 검소하게 살면서 절약한 것으로 나누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목숨까지 다하여 죽도록 사랑한다는 것도 그렇다. 선교의 사명을 받아 사지로 가서 순교하는 것은 귀중하고 또 소중한 일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다 그런 사명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사명은 생활 속의 순교이다. 죽지 않고 살아서 삶으로 하는 순교라는 말이다. 바르게 벌어 바르게 쓰라는 말이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속담이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정승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는 것이 바른 경제활동이고, 그것이 경제적 순교가 되는 것이다. (이 속담에 대해 구구한 해석이 있지만, 여기서는 개의 부정적 이미지와 정승의 긍적적 의미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이 또한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아니 극난이다. 그러니 여기에 순교라는 말까지 붙는 것이다.

돈, 물질뿐만이 아니라 지위나 명예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바르게 내 것으로 하여 바르게 쓰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의 ‘바르게’란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같은 삶이 곧 신앙생활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모법적인 신앙생활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무슨 말인가.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이,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에 자신을 팔아 인당수에 빠져 죽음으로 용왕께 바친 것처럼, 아니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실제로 죽음으로써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은 아닐 거고…, 무슨 말인가. 순교, 죽지 않고 살아 생활로 하는 순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산제사로 영적예배가 되는 것이다. 최고최상의 예배가 되는 것이다. 왜일까.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데, 예수를 구세주, 나의 구주로 믿어 구원을 얻는데, 그 믿는다는 것의 실체, 그 내용물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사람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성경 66권의 중핵은 이것이다. 그 귀결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서 죽도록 그리한다, 너도 나도 그리한다! 어떤가. 아름답지 않은가. 정말, 정말 멋있고 아름답지 않은가. 생각만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종기가 커야 고름도 많이 나오는 법이다

 

성경은 우리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빛이요, 소금이요, 향기라고 말한다. 같은 것을 시각적이고, 미각적이고, 후각적으로 표현만을 다르게 한 것일 뿐 셋은 거의가 같은 의미이다.

소금을 들어 말할 것 같으면 대충 이런 것이다. 소금의 주된 기능은 맛을 내는 데 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서 요리의 명장이 만든 음식이라 해도 소금이 안 들어간다면 맛은 보장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소금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세상은 사랑이 없어 각박하게 되었다. 이런 각박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소금으로 녹여 맛을 냄으로 살맛이 나게 하라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자기 자신을 소금으로 녹여라. 그런데 소금은 녹이고 또 녹이면 종내는 없어지고 만다. 우리가 소금이라 했으니 죽으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아니다. 소금을 녹이는 것은 희생이고 맛은 그 희생이 낳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소금은 녹이면 닳아 없어지지만 사랑은 하면 할수록 커진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타도 행복하게 한다. 그리고 또 그 타의 행복은 나의 행복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하늘나라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데, 여기에서의 죽는다는 것은 실제로 죽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밀 알을 내기 위한 변화, 변신이다.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성화(聖化)이다.

희생이 낳은 사랑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늘나라 시민권 소지자다. 어려울 것 없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그게 물질이라면 가능한대로 절약하여 자신의 경제능력보다 검소하게 살면서 절약한 것으로 나누며 사는 것으로 족하다. 지위도 명예도 다 그렇다. 바른 방법으로 오르고 얻어 바르게 쓰면 된다. 저와 제 가족만이 아니라 타를 위해서도 쓰면 된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종기가 커야 고름도 많이 나오는 법이다. 우리가 돈을 벌고 지위나 명예를 얻는 이유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구제하고 알거지가 되어 노숙생활을 하라 하시지 않는다. 예수께서 한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하신 말씀과는 다르다. 다 팔아 모두 나눠주고 알거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의 말씀대로 했다면 노숙자가 아니라 사도의 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예수의 훌륭한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을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나누며 살면 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했다. 크리스천은 이 같은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기도하며 노력하는데도 가진 것이 많지 않은 걸 어쩌겠는가. 그게 내 잘못인가. 그게 잘못이라면 그 책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돈이, 물질이 없어 우리더러 나누라 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복을 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이다.

 

 

살진 돼지를 보고 행복하다 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하늘나라는 진정한 천국이 아니다. 진정한 그것은 저 세상에 가서야 누리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그것은 저 세상에서 누리게 되는 과정에서 맛보는 맛보기에 불과하다. 맛보기이지만, 죽어서 가 누리게 되는 진정한 하늘나라로 가는 과정으로서의 단 하나뿐인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그 사랑의 마음을 자신의 안에 품고 그 마음으로 사는 길이다. 그것이 자신을 빛과 소금으로, 향기로 사는 길이다.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하는 길, 미리 하늘나라를 맛보며 진정한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없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는 얻어 가진 것을 저와 제 가족들만을 위해 쓰는 저주의 자식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행복하다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그 선함의 작은 조각조차도 시궁창에 처박아버리는 것이 된다. 그 행복은 살진 돼지의 그것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을 하나님한테, 교회에 속박당하며 산다 하나, 실은 자기들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돈과 지위나 명예의 노예가 되어 그에 얽매어 산다. 돼지의 행복을 즐기며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보고 속박 당한다며 끌끌 혀를 찬다.

크리스천과 논-크리스천의 차이가 무엇인가. 자기의 주인이 누구냐 에 있다. 주인이 하나님이면 크리스천이고, 자기이면 논-크리스천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자기 안에서 자기를, 하나님 없는 자기를 몰아내는 일에 안간힘을 쓴다. 자기 안에는 하나님 있는 자기와 하나님 없는 자기의 두 존재가 공존하는데, 하나님 있는 자기가 우세하면 우세할수록 믿음 좋은 사람이 되고, 자기가 우세하면 그럴수록 믿음 작은 사람이 된다.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확장되어온 죄성의 인간적인,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자기, 곧 돈과 지위와 명예의 노예가 된 자기를 자신의 안에서 몰아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이 크리스천이고,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에 얽매어 그 종노릇을 하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며 사는 사람들이 논-크리스천이다.

물론 논-크리스천 가운데에도 드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다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선함으로, 자기의 선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다르다. (이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 유감이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살진 돼지가 그렇듯이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속박초차도 자유로 착각하며 산다.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만이 누리는 것인데,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누리려 하니 자유 아닌 속박까지도 자유로 착각한다. 남을 괴롭히고 피해를 주며 속박하는 일까지도 자기의 자유라 여기어 가슴을 펴고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로 활보하며 산다.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살인을 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부자를 털어 가난한 자들을 돕는 홍길동이 아니라, 빈자의 호주머니를 떨어 부자를 더 부자가 되게 하면서 좋은 일을 했다 기고만장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를 성주로 하는 아성을 견고하게 쌓아올리는 데에 진력한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그런 자기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데에 안간힘을 쓴다. 그것이 크리스천과 논-크리스천의 차이이다.

그런데 그런 아성을 소중히 여겨 견고히 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의 손상을 못견뎌한다. 자존심이 상한다며 길길이 뛴다. 물질이 됐건 지위나 명예가 됐건 그에 집착하는 정도가 심하다. 그것들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자기의 아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 견고하고 높이 쌓으려는 것과 반대로 그것을 헐려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술한 대로 그 후자 아성을 허는 이들을 크리스천이라 하는데, 그들은 그런 행위를 가리켜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 한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라고도 한다. 맞다. 불신적 자기를 죽여 하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크리스천이다. 

임종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59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