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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하나님의 큰 날에 전쟁” 요한계시록 16장 12절~21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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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2월 07일 (화) 15:55:25
최종편집 : 2023년 02월 07일 (화) 15:56:21 [조회수 :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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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하나님의 큰 날에 전쟁” 요한계시록 16장 12절~21절

 

1.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① (12절)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 첫째 대접은 땅, 둘째 대접은 바다, 셋째 대접은 강과 샘물, 넷째 대접은 태양, 다섯째 대접은 짐승의 보좌를 심판했다. 이어서 여섯째 대접은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진다. ‘큰 강 유브라데’는 단지 특정한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의지하던 최후의 보루를 의미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큰 강 유브라데’는 19절에 기록된 ‘큰 성 바벨론’을 가리킨다. 여섯째 대접의 재앙은 하나님의 종이라 일컫는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제국의 바벨론성이 함락된 역사적 사건과 일맥상통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바벨론제국의 수도 바벨론성은 성벽 둘레가 66킬로미터, 높이는 24미터가 넘었고 전차 네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그 규모가 웅장했다. 세계7대 불가사의인 ‘바벨론의 공중정원’도 있었다. 무엇보다 바벨론성의 가장 큰 특징은 유브라데스 강을 이용해서 성 주변에 해자를 만들어 적의 침입을 막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더 중요한 사실은 ‘큰 강 유브라데’는 유브라데스 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대적했던 바벨론성과 같은 모든 대적들을 통칭한다는 것이다.

▶ 다니엘서에서 바벨론제국의 마지막 왕 벨사살은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공격하는 와중에도 연회를 베풀 정도로 강고하고 안전한 성채였다. 이사야는 바사왕 고레스가 유프라테스 강에 둘러싸인 바벨론성을 어떻게 무너뜨릴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깊음에 대하여서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사 44:27~28)” 이사야의 예언대로 고레스는 유프라테스 강 물줄기를 막아 물길을 돌려 마르게 하고 강물 줄기를 도로로 삼고 쳐들어가서 바벨론성을 함락시켰다. 바벨론성은 훗날 헬라제국의 알렉산더대왕이 바벨론성을 제국의 수도로 세울 만큼 군사적 요충지였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벨탑은 바벨론성의 원형이다. 바벨론성은 단지 바벨론제국의 큰 성을 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의 오만을 상징한다.

▶ 본문은 일곱 대접의 재앙이 임하는 그 날에 큰 강 유브라데를 의지하던 바벨론제국의 바벨론성이 무너지듯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로마제국도 무참히 무너져 몰락할 것을 예고한다.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던 바벨론제국을 멸망시켰던 바사왕 고레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위임받는 이방의 왕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사 45:1)”

 

② (13절~14절)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 ‘동방에서 오는 왕들’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에 맞서 ‘큰 강 유브라데’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도 최후의 발악을 도모하며 강력하게 저항할 것을 예고한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은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독재자를 통칭하는 은유다. 유사 이래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존재와 그 하수인들이 말로 하나님을 훼방하고 맞서는 모습을 나타낸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이,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과 ‘큰 강 유브라데’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성 바벨론’ 사이에 벌어지는 최후의 결전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전쟁은 바벨론제국과 바사제국 간에 전쟁처럼 과거에도 있었고, 로마제국과 파르티아제국 간에 전쟁처럼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에도 있었고, 장차 바벨론제국과 로마제국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군대 사이에도 벌어질 것을 예고한다.

 

 

2.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① (16절)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 아마겟돈(Armageddon)은 라틴어로 아마게돈(Armagedōn), 헬라어로 하르마게돈(Ἁρμαγεδών), 히브리어로 하르 므깃도(הר מגידו‎; Har Megiddo)다. 히브리어 하르 므깃도에 주목해야 한다. 언덕, 산이라는 뜻의 하르(harar)와 인파가 많은 곳이라는 뜻의 므깃도 (Megiddo)를 합쳐서 ‘므깃도 산’이란 뜻이다. 므깃도라는 지명은 엘리야와 바알선지자의 전투가 벌어졌던 갈멜산이 있는, 현재 이스라엘의 하이파에서 남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갈릴리의 평야에 위치한 곳이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므깃도에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 벌어졌다. 남 유다의 왕 요시아 시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앗수르제국과 신흥강자로 부상한 바벨론제국 사이에 벌어진 각축전 속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바벨론제국에 의해 수도 니느웨를 빼앗긴 앗수르제국은 애굽왕 느고와 동맹을 맺고 니느웨 탈환을 위해 유프라데스로 출병을 요청했다. 그때 당시 친(親)바벨론 정책을 펼치던 요시아 왕은 앗수르제국의 연합군이던 애굽 왕 느고를 맞아 므깃도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왕하 23:29~30, 대하 35:20~24). 요시아 왕의 죽음과 함께 남유다의 운명도 한순간에 저물었다.

▶ 왜, 요한계시록은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최후의 전쟁을 가리켜 ‘아마겟돈, 하르 므깃도’라고 명명(命名)했을까? 므깃도 전투는 고대 열강 간에 벌어진 세계대전이며 남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되는 기점이 된 최후의 결사항전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이후로 ‘아마겟돈’이란 단어는 전쟁터와 대전쟁, 파괴와 대재앙, 끝과 종말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으로 널리 쓰였다. 얼마 전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세계 3차 대전을 가리켜 ‘아마겟돈’이라 칭했다. “우리는 케네디와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로 이러한 아마겟돈에 직면했던 적이 없었다. (We have not faced the prospect of Armageddon since Kennedy and the Cuban Missile Crisis-Joe Biden)”

 

② (15절)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 인류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의 목적은 분명하다. (메시지성경) ‘조심하라! 나는 예고 없이, 도둑처럼 온다. 깨어 옷을 갖춰 입고 나를 맞을 준비가 된 사람은 복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큰 수치를 당할 것이다’ 벌거벗었다는 말은 무방비 상태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큰 날에 벌어질 최후의 전쟁’에 대해서 예언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경고했다. 신약성경도 그 날에 반드시 벌어질 일에 대한 무사안일을 누누이 경계하고 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살전 5:1~6)”,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2~44)”,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

 

 

3.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① (17절~18절)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 일곱째 대접의 재앙이 공기 가운데 쏟아진다. ‘공기’라는 단어는 ‘공기 중에’, 곧 ‘공중에’로 번역할 때 뜻이 더 명확해진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새찬송가 413장)’,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큰 지진이 있어’ 일곱째 대접의 재앙으로 역사상 유래 없이 큰 지진이 날 것을 예고한다. 과학자들은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멸망과 더불어 자연재해로 인한 화산 대폭발의 위험을 경고한다. 서기 79년 로마제국에 있던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진 폼페이의 최후와도 같은, 백년 주기로 벌어진 백두산의 화산폭발을 이구동성으로 경고하며 제주도에서도 거대한 화산 구름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핵폭탄은 구소련의 ‘차르 봄바’라는 수소폭탄인데 1961년 핵 실험에서 엄청난 위력의 인공지진을 일으키며 높이 60㎞, 폭 30~40㎞의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어냈고 구름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관측되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펼쳐질 심판의 광경을 증거하고 있다. 그 날은 구원의 날이자 심판의 날이기 때문이다.

 

② (19절~21절)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대 없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 과학자들은 핵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보다 방사능 낙진에 의한 핵겨울과, 화산폭발로 인한 사망보다 화산재로 인한 광범위한 피해를 더 심각하게 경고한다. 인간의 오만에 의한 자멸과 자연재해로 인한 인류의 멸종에 대한 경고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이다. 역설적으로 심판의 날은 동시에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코앞에 닥친 기후재앙과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멸망의 위기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며 오늘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하듯, 요한계시록은 그 날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날이 있음을 알고 사는 지혜를 촉구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늦기 전에 삶의 방식을 돌이켜 회개하라는 것이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며 감사하며 섬기며 나누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듯, 인류 종말의 순간에도 종말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신실한 청지기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오늘의 삶을, ‘마지막처럼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다. 비록 난해하고 무겁지만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할 이유가 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종말인 죽음이나 전 지구적인 재앙으로 인한 인류의 멸종 앞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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