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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와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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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1월 29일 (일) 20:45:44 [조회수 : 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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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와 강가에서
에스라 8:21-23
(2023/01/22, 주현 후 제3주)

설교 : 김재흥 목사

     
 

[• 고향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기록적인 한파와 폭설로 좀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아 오래간만에 부모, 형제자매, 온 가족이 모여 좋은 시간을 가지셨는 줄 압니다. 명절을 맞아 오래간만에 며칠간 옛가족들과 같이 지내다 보면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습니다. 가족이라, 식구라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이런저런 삶의 습관들. 오랜 세월 부대끼며 살아 알게 된 것들이지요. 다른 자리 같았으면 내가 왜 이런 행동과 말을 하는지에 대해 상대방에게 설명해야 하지만, 가족 간 부모자식 간 형제자매 간에는 그런 많은 것이 생략됩니다. 아니까. 이해하니까. 시인 김준태는 <고향>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향에서는 눈 감고 뛰어도 자빠지거나 넘어질 땐 흙과 풀이 안아준다./ 나의 모난 모습, 어리숙함과 실수까지도 다 품어주고 이해해준 사람들. 그런 이들이 있는 곳, 나의 부족함을 알고도 정죄하기보다는 이해해주고 품어준 사람들이 있는 곳, 그래서 꾸미고 장식하지 않아도 내가 그대로 나로서 편안할 수 있는 곳, 그곳이 고향입니다.

• 갈등 사회
우리가 명절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 고향집, 어머니, 어머니의 밥상, 동기들을 찾아가는 것은 그 안에 우리가 잊을 수 없는, 놓칠 수 없는 삶과 생명의 본질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에덴의 동쪽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세상입니다. 살기 쉬운 세상이 아닙니다. 끝없는 대립과 경쟁의 세상을 살면서 긴장하고 긴장하고 또 긴장하며 살아갑니다. 누군가 실수로 자빠지고 넘어질 때면 그를 위해 부드러운 흙과 풀이 되어주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짐에 쓰러져 사회를 향해 도와달라 소리칠 때면, ‘너만 힘드냐? 인생이 본디 힘든 거다. 지금 다 힘들게 산다’ 소리 지르며 보고도 못 본 것처럼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살벌한 세상입니다.

2021년 영국 킹스 칼리지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28개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갈등지수 조사’에서 대한민국이 7개 항목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물론 좋은 1위는 결코 아닙니다. 빈부 차, 이념 차, 지지정당 차, 성별 차, 학력 차, 세대 차, 종교 차의 갈등지수에서 우리나라가 1위를 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갈등관리 능력은 거의 최하위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느새 갈등과 대립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일상화되어 있기에 크게 문제시하지 않고, 문제시하지 않기에 해결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갈등과 대립이 일상화된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작년 2분기와 3분기의 자녀 출산율은 0.7%대였습니다. 이 수치는 전 세계 꼴찌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불과 70여 년 전, 나와 생각과 입장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민족입니다. 생각과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가 나를 죽일 수도 있었기에 내가 먼저 그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수백만 명을 죽였고, 나라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으며 그 분단은 현재도 지속 중입니다. 남과 북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름을 향해 겨누고 있는 총부리는 휴전선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다른 것’은 틀린 것을 넘어 악한 것, 위험한 것, 제거해야 할 것이라는 도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한 생각과 입장을 묻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단순히 그의 생각과 입장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같은가 다른가를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름이 확인되면 그의 존재와 인간성과 인권을 무시하는 말들을 총알처럼 쏟아붓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악한 것이며 위험한 것이며 나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기에 내가 먼저 죽여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 <소문의 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해의 조그만 포구의 어느 집에서 밤에 주인공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전짓불을 눈앞에 들이대며 주인공에게 “좌익냐? 우익냐?” 물었습니다. 전짓불 뒤에서 질문을 던진 자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참으로 슬픈 대목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전짓불은 오늘 우리사회의 곳곳에서도 계속 비춰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이념, 성별, 세대, 지역, 경제, 교육, 종교, 삶의 전 영역에 있어 우리는 총과 전짓불을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서로에게 들이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그렇게 서로에게 총과 전짓불을 들이댄다면 나와 너 사이에는 잿더미와 수많은 철조망만 남게 될 것입니다. 다름이 죽음의 이유가 되지 않는 곳, 꾸미고 장식하지 않아도 내가 나로서 평안히 살 수 있는 공간, 가끔 실수하고 잘못해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관계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사라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 있을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게 되면 제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는지 예수님은 연이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 짠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있을 곳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당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에게 머물 곳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묵으셨습니다. 베다니에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 남매의 집에서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많은 이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던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눈엣가시였습니다. 제사장 무리는 번번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트집을 잡았으며 결국 없는 죄목을 만들어 벼랑 끝으로 내몰았습니다.

제사장 무리는 왜 그렇게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일까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무리의 하나님은 유대인, 남자,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은 이방인도 받아 주시는 하나님, 여자들도 남자들과 동일하게 대해 주시는 하나님,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자들도 회개하면 자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에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도 달랐습니다. 제사장 무리는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 남자만이 하나님의 집,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율법을 잘 지키는 자뿐 아니라 죄를 지었지만 회개한 이들도 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하나님의 집을 오늘 본문 속에 나온 말로 표현해보자면 ‘있을 곳이 많은 집’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들 – 이방인, 여성, 세리, 창기, 장애인 등- 을 위해 당신이 친히 성전, 하나님의 집, 있을 곳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길’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좀 뚱딴지같이 들렸는지 도마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길’은 무슨 길입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셨으나 정작 제자들은 몰랐던 ‘그 길’은 무슨 길일까요? 그 길은 앞에 나온 ‘있을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 이야기와 연결해서 생각해보자면, 있을 곳이 없는 이들을 위해 있을 곳이 되어 주는 것, 넓은 하나님의 품이 되어 그들을 품어주는 것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그 길을 가신 분이셨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제사장 무리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율법의 좁은 길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 길을 거쳐야만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일부 권력층에게만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열려 있는 길은 진리도 생명도 아니며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회 구성원 모두를 차별 없이 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것,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 인간적 권리를 빼앗긴 이들에게 있을 곳이 되어 주는 것이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며 하나님께 이르는 방법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제사장 무리의 ‘하나님의 집’은 배제를 기반으로 한 극소수만을 위한 집이었지만, 예수님의 ‘하나님의 집’은 포용을 기반으로 한 만인을 위한 집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제사장 무리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걸으셨던 포용의 길을 걷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이 사회에 있을 곳이 없는 이들을 향해, “여러분,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믿으십시오. 여기에 있을 곳이 많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까? 진짜 그런 이들을 위해 있을 곳이 되어 주고 있습니까? 곳곳에서 그런 아름다운 헌신을 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온갖 교리와 이념의 전짓불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를 향해 정죄와 심판의 총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입장과 생각에 동의한 자만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렇지 않아도 대립과 갈등이 심한 사회에 평화와 화해, 이해와 공감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있을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에 있을 곳이 없기에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 있을 곳이 되어준 사람, 김장하
있을 곳이 많은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명절 연휴 기간 동안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보라고 추천해 주셨습니다. 44년생, 경남 진주에서 60여 년간 한약방을 한 김장하 선생에 대한 다큐였습니다. 아주 젊은 나이에 한약사가 된 김장하는 박리다매로 한약을 지어 팔았습니다. 비교적 저렴했지만 약효가 좋아 소문이 금방 퍼졌고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번 돈이라 다시 사회의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에 뜻은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7년, 8년씩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명신고등학교라는 사립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학교가 궤도에 서자 자산규모 100억이 넘는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그는 부유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았습니다.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와 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인권운동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1923년 진주에서 천대받던 백정들의 인권선언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을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으며, 지역 신문, 지역의 문화예술인, 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 개인이 해내기 힘든 일을 해냈음에도 그가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가 일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장학금을 몇 명에게 주셨습니까?’, ‘장학금을 얼마나 주신 겁니까?’ 물으면 아예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앞에 서게 될 때면 중앙이 아니라 언제나 끝자리, 모퉁이에 섰습니다. 김장하, 그가 가지고 있던 돈에 대한 철학이 있습니다. ‘돈은 똥이다’라는 것입니다. 돈은 똥과 같아서 모아두면 구린내가 나고 여기저기 퍼주면 나중에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큐에는 김장하 선생에게 도움을 받은 많은 이가 나와서 선생과의 인연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중 한 분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김장하 선생에게 받은 장학금으로 대학에 다니던 시절, 군사독재에 맞서 데모하다가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자기 돈도 아니고 선생님이 주신 돈으로 대학에 다니면서 공부에 집중하지 않고 데모하다 옥에 가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김장하 선생은, ‘그것도 사회에 기여하는 하나의 길이다’라고 말해 주면서 그를 존중해 주셨다고 합니다. 기자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살면서 그런 지지를 받아 본 적이 있으셨나요?” 그는 젖은 눈으로,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습니다. “아니요. 없는 것 같습니다.”

다큐를 보는 내내 눈과 머리와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진짜 어른을 보아서, 참 사람을 보아서, 우리가 놓치고 살아온 귀한 가치와 기준을 보아서 좋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극심한 갈등과 대립의 사회가 된 것은 그런 품을, 그런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의 자리만 생각할 뿐 기댈 곳 없는 이들의 품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옳다는 생각 속에서 자기와 입장이 다른 자를 쉽게 판단하고 정죄할 뿐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를 뿐 비움과 나눔이라는 큰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인 2월 4일은 입춘입니다. 아직 온통 한 겨울이지만 그 겨울의 한가운데에 누군가는 봄을 세워야 봄이 옵니다. 다큐 중에는 80세에 가까운 김장하 선생이 등산하는 장면도 나왔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등산할 때 알아두면 좋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부작 사부작 꼼지락 꼼지락’. ‘사부작거리다’라는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계속 가볍게 행동하다’ 김장하, 그가 이루어낸 업적과 변화는 크지만 그것은 몇 번의 시도와 노력으로 이룬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여러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가야 할 곳을 바로 보고, 욕심과 이기심의 무게를 줄이고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한 발 한 발 앞으로 사부작 사부작 나아갔기에 이룬 일이었습니다.

갈등과 대립이 일상화되어 점점 사람이 사람으로 설 자리가 사라지는 이 사회를 다시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일도 그런 마음으로 해 나가면 됩니다. 한 번에 혹은 몇 번의 시도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멀리 보고 꾸준히 해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사부작 사부작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욕심의 무게를 줄이고 늘 마음의 손으로 붙들고 있던 판단과 정죄의 총과 전짓불도 내려놓고 나와 너의 관계부터, 내가 속한 모임부터 배제가 아닌 포용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면 됩니다. 쓰러지고 넘어지는 이를 위해 부드러운 흙과 풀이 되어주면 됩니다. 있을 곳이 없는 이들에게 있을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이 되어 주면 됩니다. 우리 청파교회가, 우리 교회 교우들이, 이 땅의 크리스찬들이 있을 곳이 없는 이들에게 ‘있을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이 되어 주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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