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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에 들어갈 자” 요한계시록 15장 5절~8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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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1월 24일 (화) 22:59:44 [조회수 : 1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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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에 들어갈 자” 요한계시록 15장 5절~8절

 

 

0. 회개하라,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

 

이 땅의 모든 기독교가 교회력으로 지키는 대림절은 주님의 초림을 기억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다. 많은 교회들이 대림절을 보내며 주님의 초림을 축하하는 성탄을 기뻐하면서도 주님이 다시 오심을 예비하는 재림에는 무관심하다. 마치 이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면서도 정작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몰랐던 것처럼,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모른 채 살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을 자세히 증거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믿음을 촉구한다. 난해한 요한계시록을 정독해야 할 이유는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아주 가까웠기 때문이다. 개인의 일생을 마치는 죽음의 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온 세상의 종말도 그리 멀지 않았다. 코앞에 닥친 기후위기로 인한 멸종과 인류를 순식간에 불로 멸망시킬 핵전쟁의 위협이 마지막 심판을 예고하는 뚜렷한 증거다.

 

 

1.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

 

① (5절)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 ‘또 이 일 후에’ 본문은 앞서 살펴 본 유리 바다 가에 서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광경에서 연속되는 말씀이다. 이 노래는 짐승의 박해를 믿음으로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부르는 승리의 찬송이다. 절망의 탄식에서 승리의 찬가로 변화된 새 노래다. ‘아무나 배울 수 있는 노래’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이들만 부를 수 있는 노래다.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도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성도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 이들이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를 영광의 찬송이다.

 

▶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지은 성막을 가리켜 ‘증거 장막(출 38:21, 민 1:53)’이라고 표현한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행 7:44)”,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히 8:5)” 증거(testimony)는 언약(testament)과 동의어다. 따라서 ‘증거 장막의 성전’이란 ‘언약의 말씀대로 지어진 성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땅에 있는 타락한 옛 성전’과 구별되는 ‘하늘에 있는 거룩한 새 성전’을 의미한다. 땅에 있는 옛 성전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림으로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어진 하늘에 있는 새 성전은 굳건히 세워져 있음을 반증한다. ‘하늘에’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이단사이비 신천지의 치명적 오류는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 성전을 자신들이 땅에 세운 특정한 건물을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 성전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은 땅에 있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무너질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영원한 성전이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신앙생활은 눈에 보이는 사라질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 본문의 핵심은 땅에 있는 옛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라고 해서 모두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 성전에 합당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은 오직 말씀대로 준행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본 ‘하늘에 증거 장막 성전’을 선지자 에스겔도 보았다. 에스겔 40장~43장에 자세히 기록된 새 예루살렘 성전의 비전이다. 에스겔이 바벨론제국으로 인해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성전은 무너졌지만 믿음의 눈을 들어 하늘에 새 성전을 바라본 것처럼, 사도 요한도 로마제국으로 인해 헤롯이 지은 예루살렘성전은 무너졌지만 믿음의 눈을 들어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증거 장막 성전’이 전하는 메시지는 세상의 믿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절망의 순간에도 믿음의 눈을 들어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볼 것을 촉구한다.

 

 

2.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금 대접

 

① (6절)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15장은 마지막 일곱 대접의 재앙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계 15:1)” 사도 요한이 본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은 11장에서 지팡이 같은 갈대로 땅에 있는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했던 사건과 맥을 같이한다. 일곱 대접의 재앙은 11장에 기록된 ‘땅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에 대한 척량의 결과다. 따라서 일곱 대접의 재앙은 ‘땅에 있는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다시 말해 땅에 있는 옛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던 자들이 과연 하늘에 있는 새 성전에 합당하지 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일곱 대접의 재앙을 통해 최종적으로 판가름하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땅에 있는 성전과 제단에서 경배하던 자들이 모두 하늘에 있는 새 성전의 주인공이 될 수 없고, 오직 새 성전에 합당한 자들만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② (7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 이 장면은 앞서 일곱 나팔의 재앙이 시작될 때 벌어진 장면(계 8:1~5)과 동일하다. 일곱 나팔의 재앙은 성도들의 부르짖는 애타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곱 대접의 재앙도 14장 후반부에 기록된 순교자들이 흘린 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보응으로 시작된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계 14:19~20).” 하나님의 진노의 술틀은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다. 틀에서 나오는 피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며 말씀대로 준행하다가 무참히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흘린 피다. 따라서 일곱 대접의 재앙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보응이다. 여기서 말하는 순교자는 말씀대로 죽기까지 순종한 자들을 의미한다.

 

▶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사건 곧 세상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은 출애굽기에서 애굽 왕 바로에게 내리신 열 가지 재앙처럼 세상에서 왕 노릇 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시는 과정인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내리신 마지막 열 번째 재앙(장자의 죽음, 유월절 사건)으로 애굽 땅과 바로 왕을 심판하시고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일곱 대접의 재앙은 ‘하늘에 있는 새 성전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시고 ‘하늘에 있는 새 성전에 합당한 자들’을 선별해서 구원하시는 최종 심판이다. 선별의 기준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말씀대로 순종한 순교자 곧 십자가와 부활을 삶에서 체험한 사람들이다.

 

 

3.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자 누구인가?

 

① (8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 사도 요한이 본 ‘하늘에 증거 장막 성전’은 선지자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 성전’이다. 에스겔이 본 성전의 특징은 모든 공간이 텅 비워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은 ‘담장’, ‘문간’, ‘북문의 제단’ 등 크게 셋으로 요약된다. 첫째, 성전전체를 둘러싼 높고 두터운 담은 세속과 구별된 거룩함을 드러낸다. 둘째, 6명의 수문장이 지키는 6개의 웅장한 관문(GATE)을 통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성소에 합당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성전임을 나타낸다. 셋째, 북문에 위치한 제단을 통해서 새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타락한 제사가 거룩하게 회복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라는 말씀은 하늘에 있는 새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만 가득 차 있고 그 안이 아직 텅 비워져 있다는 뜻이다. 누구나 제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제자로 살 순 없듯이, ‘누구나’ 땅에 있는 성전에서 경배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늘에 있는 새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하늘에 있는 새 성전에 합당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은 오직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성도들’을 위해서만 예비 되었기 때문이다.

 

▶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이 말씀을 통해 일곱 대접의 재앙을 행하시는 목적이 드러난다. 일곱 대접의 재앙은 하늘에 있는 새 성전에 합당한 자들과 비록 땅에 있는 성전 안에 있지만 새 성전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을 판가름하시는 최종 심판이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16장에 기록된 ‘일곱 대접의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자들’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로 구별된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서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지금은 양과 염소가 뒤섞여 있지만 그 날에 판가름 난다. 그 날은 일곱 대접의 재앙이 임하는 날이자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다. 일곱 대접의 재앙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가 판가름 난다. 이는 비가오고 창수가 나는 날에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는 날에 친일파와 애국투사가 구별되고, 박해를 통해 순교자와 배교자가 나오듯, 일곱 대접의 재앙은 배교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순교자들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최후의 심판이다. 여기서 말하는 순교자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말씀대로 준행하는 순교자이고, 배교자는 믿음의 길을 버리고 짐승에게 경배한 자를 가리킨다.

 

▶ 15장은 세상의 믿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고 천국과 지옥으로 판가름 나듯, 마지막 일곱 대접의 재앙을 통해 ‘짐승의 표를 받은 배교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과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에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을 예고한다. 그러니 비록 땅의 성전이 무너졌다고 절망하지 말고 하늘의 성전을 바라보며, 일곱 대접의 재앙이 내리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구원과 의의 최후승리를 믿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최후 승리를 얻으라는 것이다. 또한 땅에 있는 성전과 제단에서 경배한다고 해서 모두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기에 자만하지 말 것을 경계한다. 위대한 전도자 사도바울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믿음의 경주에 힘쓰길 당부하고 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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