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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와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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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1월 22일 (일) 14:54:44 [조회수 :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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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와 강가에서
에스라 8:21-23
(2023/01/22, 주현 후 제3주)

음성으로 듣기

   
 

[그 곳 아하와 강가에서 나는 모두에게 금식하라고 선언하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와 우리 자식들 모두가 재산을 가지고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보살펴 주시기를 엎드려서 빌었다. 왕에게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이 잘 되도록 보살펴 주시지만,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는 하나님의 큰 노여움을 피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가 있어서,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원수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보병과 기병을 내어 달라는 말은 부끄러워서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금식하면서,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 옛 기억으로의 소환
설날 아침,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이맘때면 더욱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파와 함께 찾아온 설날이 실향민, 난민, 이주 노동자, 홈리스, 고립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외로움을 더욱 깊게 만들지 않기를 빕니다. 외로움의 감정은 분리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생성됩니다.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은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중학교 때 배웠던 미국 민요 ‘산골짝의 등불’이 떠오릅니다. “아득한 산골짝 작은 집에/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그리운 내 아들 돌아올 날/늙으신 어머니 기도해”. 왜 하필이면 미국 민요를 배우며 살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계신 산골짝에 밝혀진 등불에 대한 기억이 도시를 떠돌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의 닻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은 새로운 시간의 도래(到來)를 기뻐하는 날이지만, 옛 기억으로 우리를 소환(召喚)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설 연휴를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느라 잃어버렸던 나의 정체성을 되찾는 시간, 내가 홀로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연결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시간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바빌론 유배지에 살던 유대인들의 귀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려 합니다.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들의 마음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시 137:1-3)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강변에 앉아 울고 있는 이들을 보며 비웃을 뿐입니다. 그들은 약자들을 자기들의 여흥을 위한 수단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방 땅에서 차마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아프고 아렸기 때문일 겁니다. 상처의 기억이 안으로 쌓이면 한이 되는 법입니다. 유배지에서 이등 시민으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국으로의 귀환을 간절히 꿈꾸었을 것입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마침내 왔습니다. 바빌론을 물리치고 근동 지역의 패자로 떠오른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각 민족의 해방과 자치를 허용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부푼 꿈을 안고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서둘렀습니다. 오늘 본문은 첫 번째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복귀한지 거의 8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의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 에스라에게 내린 특명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다스리던 시절이 배경입니다. 그에게는 유대인에 관한 업무를 맡은 비서관이 있었습니다. 에스라입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는 그를 깊이 신임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를 잘 보살피셨으므로, 왕은 에스라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주었다”(라 7:6)는 구절이 그 증거입니다. 왕의 신임은 그의 성실성, 탁월한 일처리 능력, 충성심 때문일 테지만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보살핌’ 덕분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아닥사스다는 어느 날 에스라에게 칙령을 내려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인솔하라고 명합니다. 칙령은 그가 해야 할 일을 아주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1) ‘가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데리고 가라’, 2) ‘왕과 보좌진이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은과 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로니아 모든 지방에서 얻은 은과 금, 사람들이 바치는 자원예물을 가지고 가라’, 3) ‘각종 제물을 사서 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 4) ‘그 외에도 성전에서 써야 할 것이 더 있으면 국고에서 공급받도록 하라’. 매우 적극적인 조치입니다. 왕은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방의 모든 국고 출납관들에게 조서를 보내 제사장 에스라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김없이 주라고 명했습니다. 물론 한도도 정해주었습니다. 5) ‘성전에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조공, 세금, 관세 등을 부과하지 말라’. 커다란 특혜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하나님의 분노가 왕과 페르시아에 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잇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라에게는 재판관을 세울 권한도 주어졌습니다.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에스라는 자기의 귀환 이야기를 제2의 출애굽기 서사로 삼고 싶어합니다. ‘떠나라’는 왕의 명령, ‘은과 금을 가지고 가라’는 허용, 하나님의 분노가 내리지 않도록 기도해달라는 요청(cf. 출8:28) 등은 출애굽기에도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에스라 일행이 페르시아를 떠나는 날짜를 보면 이런 추정이 과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바빌로니아를 떠난 것은 첫째 달 초하루이다”(라 7:9). 첫째 달 초하루는 출애굽 사건의 시발점이 된 유월절에 해당됩니다. 에스라 일행이 출발일을 첫째 달 초하루에 삼은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위험 속으로 들어가다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곳이 지금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일종의 경계지대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은 언제나 경계지대, 다른 세계로의 입구였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한 후에 강을 건너 형 에서와 만났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갔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죽은 이들은 망각의 강인 스틱스 강을 건너서 저승으로 갑니다.

에스라 일행은 아하와 강가에 장막을 치고 사흘 동안을 거기 머물렀습니다. ‘사흘’이라는 시간도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에서 사흘은 예사로운 시간이 아닙니다. 사흘은 아브라함의 경우 이삭을 데리고 집을 떠나 모리아 산에 당도하기까지 걸린 시간이고, 호세아의 경우 하나님께서 넘어진 백성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시간(호6:2)이고, 요나의 경우 물고기 뱃속에서의 시간이고, 예수님의 경우 무덤 속에서의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사흘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 희망의 싹이 움트는 시간입니다. 그믐달이 진 후 초승달이 떠오르기까지의 시간도 사흘입니다.

아하와 강가에서 사흘을 보내는 동안 에스라는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다가 백성과 제사장 가운데 레위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지도급 인사들을 가시뱌 지방의 지도자 잇도에게 보내 레위인들과 성전에서 일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라 지시했습니다. 새로운 역사의 부름에 서른여덟 명이 응했고, 성전 막일꾼 이백이십 명도 캠프에 합류했습니다. 레위인들과 성전 막일꾼들이 동행함으로 귀환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이 확고하게 수립되었습니다.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모든 백성들이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 보살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하와 강가의 금식을 통해 그들은 공동 운명체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가려면 정말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하루에 얼마나 걸어야 할지, 숙영지는 어디로 정해야 할지, 습격을 받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지고 가는 귀한 보물들은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보급품은 어떻게 충당해야 할지, 누군가가 병이 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주 꼼꼼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호위 병력이 있었더라면 상당히 근심을 덜 수도 있었지만 에스라가 왕에게 했던 말이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이 잘 되도록 보살펴 주시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피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보병과 기병을 내어 달라는 말을 부끄러워서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물 가운데를 지나야 할 때도 있고, 불 가운데를 지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귀환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총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귀환 공동체는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7:9). 4개월의 여정이었습니다. 에스라서는 그 과정에서 귀환 공동체가 겪은 일들을 세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킬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과정을 섬세하게 인도하셨다고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8:23), “가는 길에 매복한 자들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잘 보살펴 주셔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8:31). 하나님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도자 개인을 영웅적 존재로 그리지 않는 것, 이것이 성경의 아름다움입니다.

•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
에스라의 그 후의 활동은 치열했습니다. 그는 무너진 유대인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진력했습니다. 무기력에 빠진 백성들을 일으켜 세우고, 거룩한 백성이라는 소명을 새롭게 정초하기 위해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에스라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유대교적 순수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삶을 사는 것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순수함에 대한 집착은 자기와 입장이나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비순수’로 낙인찍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침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에스라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순수와 비순수로 사람들을 나누었습니다. ‘가름의 정치’를 펼친 것입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까지도 이방 백성과 관계를 끊지 않고, 이방인의 습속을 따라 살고 있다고 에스라에게 고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이 성하여 주변 여러 족속의 피가 ‘거룩한 핏줄’에 섞여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말을 들은 에스라가 “너무나 기가 막혀서, 겉옷과 속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으면서 주저앉았다”(9: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은 후 이방 백성과 관계를 끊고, 데리고 사는 이방인 아내들과 여인들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을 다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일종의 정화 작업입니다. 이방인은 더럽고 유대인은 순수하다는 이분법이 여기에 작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마음이 매우 불편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타자들에게 전가하거나, 특정한 사람들을 불결하다는 찌지를 붙임으로 자기의 비윤리적 행태에 면벌부를 발행하곤 합니다.

타자들을 배제하는 에스라 시대의 이런 모습은 인류 역사 속에서 빈번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중세의 마녀 사냥이 그러하고, 유럽에서 일어났던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가 그러하고, 인종차별이 그러합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우리 현실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서나 환대받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유대 국가라는 정체성을 세워야 했던 시대임을 감안하더라도 이 배제와 혐오와 차별의 정치는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광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생이별의 아픔을 겪는 가족들에 대한 연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귀환의 이야기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이야기로 끝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결법에 의해 불결하다고 규정된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만나셨습니다. 그들의 약함과 더러움을 자기 속으로 받아들여 사랑으로 정화하셨습니다. 스스로 거룩하다 여기는 이들은 그런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멸칭(蔑稱)으로 불렀습니다. 주님은 그런 세간의 평가에 전혀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더러움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그를 혐오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영원히 옳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진리가 내일은 오류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허해야 합니다. 겸허함과 따뜻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강력한 끈입니다. 에스라는 멋진 사람이었지만 오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삶을 자꾸 성찰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해야 합니다. 배제와 차별과 혐오가 아니라 자비와 포용이야말로 우리가 마침내 가야 할 고향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둔 밤길을 걷고 있는 이들 앞에 밝혀진 작은 등불 하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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