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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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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1월 15일 (일) 14:54:11 [조회수 : 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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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라
학 1:1-6
(202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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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왕 이년 여섯째 달, 그 달 초하루에, 학개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 유다 총독과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제사장에게 전하였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때가 되지 않았다. 주님의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학개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 열정이 식은 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1월 중순을 지나고 있습니다. 정초에 세웠던 계획들을 잘 실천하고 계신지요? 우리는 일상의 분주함을 핑계 삼아 세운 계획들을 계면쩍은 웃음과 함께 슬그머니 폐기처분하곤 합니다. 모든 것을 닳게 만드는 시간이 새롭게 살려는 우리 바람을 무찌르곤 합니다. 새로움을 갈망하면서도 우리는 익숙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그런 우리의 삶을 돌아보려 합니다.

학개는 조상들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는 유력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한 예언자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때는 다리우스 왕 이년 여섯째 달, 그 달 초하루입니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를 대제국으로 세운 고레스(주전 559년 즉위)와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에 이어 왕이 된 사람입니다. 주전 551년에 즉위한 그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페르시아는 이전의 다른 제국들과는 달리 각 민족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페르시아는 다양한 언어, 문화, 습속, 경제, 사회 조직들의 용광로인 셈이었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대인들은 조국 재건이라는 꿈을 품고 귀환했습니다. 돌아온 첫 해에 그들은 무너진 제단을 다시 만들어 세우고 초막절을 준수했습니다. 폐허 속에 세워진 제단은 그들의 희망찬 미래의 상징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주도하에 그들은 성전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에스라서는 성전의 기초를 세우던 날의 감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화답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주님은 어지시다.’ ‘언제나 한결같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주님의 성전 기초가 놓인 것을 본 온 백성도, 목청껏 소리를 높여서 주님을 찬양하였다.”(라 3:11)

그러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귀환자들은 이방 문화에 의해 더럽혀진 이들을 성전 건축이라는 거룩한 사업에 동참시킬 수 없다고 여겨,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이들을 배제시켰습니다. 앙심을 품은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성전 건축을 방해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위협을 가하기도 하고, 유대인들이 반역을 시도하고 있다고 왕에게 모함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전의 기초만 놓은 채 20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초기의 열정은 싸늘하게 식었고, 성전 건축을 지속할 힘도 어느새 스러졌습니다. 황폐한 성읍을 일으켜 세우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귀환의 감격은 어느새 잊혀졌습니다.

• 나태한 정신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생각이 깨끗하게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때때로 그들을 압박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백성들은 ‘때가 되지 않았다’, ‘주님의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군의 주님은 학개의 입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기들의 소행을 돌아보라 하십니다. 만군의 주님은 전사로서의 하나님, 즉 싸우는 분입니다. 악한 세력과 싸우고, 혼돈과 싸우고, 무기력과 싸우십니다. 만군의 주님의 싸움은 한편으로는 파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으켜 세움입니다. 선한 세력을 일으켜 세우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시고, 무기력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여러 해 전 아르메니아의 학살 기념관 뜰에서 만난 조형물 한 점이 떠오릅니다. ‘잿더미 속에서 일어서는 엄마’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전쟁과 파괴로 인해 잿더미로 변한 땅에서 맨발의 엄마는 공포에 질린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심연처럼 자신을 잡아당기는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엄마가 두려움과 절망을 떨치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기어코 돌보고 살려내야 할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보아 주어야 할 여린 생명이 오히려 돌보는 이에게 살아갈 힘과 의지를 제공하는 역설, 이것이 생명의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그 놀라운 신앙의 신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시급한 문제에 몰두하느라 정말 중요한 일에 마음을 쓰지 못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자기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이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로 성전 건축을 방치한 자기들의 나태함을 가리려 했습니다. 한번 용기가 꺾이면 어떤 일을 하지 못할 이유를 수백 가지 발견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들의 내면에 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을까요? ‘생존 자체가 힘든 상황이니 달리 어떻게 해 볼 수 없다’, ‘성전 재건이 페르시아인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삶이 이렇게 곤고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게 바로 나태함입니다. 나태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sloth인데 나무늘보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태는 몸이 느리고 굼뜬 것만이 아니라 영혼의 활력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나태에 사로잡힌 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혀서 창조적인 일을 하지도, 할 생각도 없습니다. 나태를 뜻하는 헬라어 ‘아케디아’(akedia)는 ‘관심’이라는 뜻의 ‘kedos’와 ‘없다’는 뜻의 ‘a’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나태한 이들은 공동체적인 삶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고 싶어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도 말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여건이 허락하면…’. 이 말의 속뜻은 지금은 그렇게 살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들은 늘 아름다운 삶을 유보하며 삽니다. 자기만족을 구하는 욕망이 선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욕망은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을 낳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탑승한 이들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 못합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은 통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 공공의 문제에 무관심한 세태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이스라엘의 나태함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1:4) ‘무너진 성전’과 ‘잘 꾸민 집’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성전은 물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구별된 공간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무너진 성전’은 실은 언약 공동체의 지향을 상실한 그들의 영적 상태를 이르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택하심은 망가진 세상을 고치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홀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도구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 이해, 연민입니다.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질서 속에 들어갑니다. 자기일에만 몰두할 때 우리는 죄의 먹잇감이 되기 쉽습니다.

저는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인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페리클레스의 국장(國葬) 연설을 가끔 찾아 읽습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연설자로 선발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 가득 찬 연설을 합니다. 그 가운데 나오는 한 대목이 참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는다”. 이어서 그는 아테네인 가운데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사(戰士)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뿐입니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上>, 박광순 옮김, 범우사, p.175) 참여 민주주의는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마음의 평안이나 가족의 안위에만 마음을 쓰는 이들은 나쁜 사람은 아니어도 좋은 시민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시민이란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본향을 찾는 나그네’이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땅의 현실과 무관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칙칙한 일상 속에 하나님나라의 빛과 사랑을 전하는 통로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남북 간의 경색국면이 점점 강대강으로 치닫고 있어 전쟁의 위험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지구촌 전체는 기후 위기라는 심각한 재난 앞에 서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비관론에 기대 자기들의 나태함을 감추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그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기대 자기의 무책임한 삶을 정당화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 거룩한 삶의 연습
이런 상황이기에 주님의 말씀이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1:5).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자기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학개에는 동일한 구절이 표현을 조금 달리하면서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습니다(1:7, 2:15, 18). 돌이켜 생각함 속에 길이 있습니다. 論語 學而편 제4절에는 증자의 말이 나옵니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몸을 살피노니,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벗과 사귀면서 진실하지 않았는가, 배운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이게 바로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일일삼성이라는 고사입니다.

돌이켜 보는 까닭은 바른 길을 가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가 걸은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십자가는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입니다. 길의 존재 이유는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걷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를 길이라 고백하면서도 예수가 걸으신 길은 한사코 외면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고통이나 소외감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들의 품이나 설 땅이 되어주려 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의 보람은 무엇일까요? 속에서 솟아나오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사는 이들은 이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길을 외면한 채 행복을 찾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전도서 기자는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 1:8b)고 말합니다. 학개는 이것을 조금 달리 표현합니다.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1:6)

하나님과 이웃을 등진 채 자기 만족만을 구하는 삶이 이러합니다. 학개는 성전 건축을 독려하고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그의 경고를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의 공적인 문제에 책임적으로 응답하라는 초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라는 말씀이 우렁우렁 가슴에 울려옵니다.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 냉랭한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일이야말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누군가에게 봄바람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와 만난 이들이 삶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우리 삶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 이 척박한 세상에 스며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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