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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외침-24] 유효기간이 끝난 크레딧카드로 장난치는 사람들
당당뉴스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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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2월 29일 (금) 00:00:00 [조회수 : 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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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이민교회의 실상을 다루는 복음과 희망(www.gospel-hope )에 "이민성도" 라는필명으로 올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필자는 미주교회에서 전문직업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장로로 미주교회들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쳤는 바 오늘날의 한국교회 실상에서 대단히 유익하고 귀담아 들어야할  "어느 평신도의 외침"이라고 판단하여 연재합니다.  당당뉴스가 책임지고 실명을 보호합니다. (당당뉴스 운영자)

무엇이 의식인가?
일반인들에게 "의식" 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본다.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말인 "직업의식을 가져라, 기업의식을 가져라" 고 하는데 "직업의식이나 기업의식" 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흔히 쓰는 일상적인 말인데도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말로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사전적 의미로 “의식” 에 대한 정의는 "개인이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느끼고 있는 주관적인 것" 이라고 한다. 이러한 “의식” 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환경과 정보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의식의 흐름" 이라고 한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 이 모여져서 형성되고 보여지는 것을 "인격" 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의식과 인격” 이 하나의 통일성을 가진 것을 “자아” 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의식과 인격과 자아” 는 떨어질 수 없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인격과 자아” 는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위 사람들과 환경과 사건을 통해서 경험하고 느낀 “의식” 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말과 행동의 뿌리를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출처와 의식의 흐름” 을 분석해보면 지금의 “인격과 자아” 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의 뿌리
속이는 자로 알려진 야곱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의 뿌리” 는 어머니 리브가에서 “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져야 한다” 는 데서 출발한다. 그 “의식의 뿌리” 때문에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는 삶을 살다가 결국 외삼촌 라반에게 속고, 자식들에게 속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야곱이 어릴 때 형성된 “의식과 인격과 자아” 는 얍복강에서 시작하여 요셉을 만났을 때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나긴 세월 속에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 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깡패나 소매치기나 사기꾼과 어릴 때 어울리면서 청소년시절을 보냈던 사람은 평생 그 시절에 체험하고 형성되었던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갑자기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라고 수많은 심리학자들의 연구보고서에 나와 있다. 깡패가 목사가 되어도 나중에 본전이 드러나면 반드시 깡패짓을 하게 되어 있고, 소매치기가 목사가 되어도 나중에 본전이 드러나면 반드시 소매치기 짓을 하게 되어 있는 “의식과 인격과 자아” 가 깊숙하게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여러 고등종교에서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참자아" 를 발견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정통적인 기독교회 내에서도 영성훈련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많이 하는 것을 듣게 된다.  

과연 그들이 “자아” 의 출발이 어디에서부터인지 알고 있다면 그런 “자아실현, 자기 발견, 참자아” 라는 미사여구를 사용할 수 있는지 많은 의문이 든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깡패나 소매치기나 사기꾼으로 있을때 형성된 의식과 인격과 자아는 깡패나 소매치기나 사기꾼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하였다고 해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마 손가락을 끊고, 배를 가르고, 다리는 자르는 일이 벌어져도 그가 가진 “의식” 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 한국 대통령이 "각종 비속어" 를 사용하면서 평통자문위원들 앞에서 70분 동안 손바닥을 치면서 격하게 연설한 내용이 주요 일간지의 톱기사로 장식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기사도 나오고 있다.

인터넷신문이나 종이신문에 연일 대서특필을 하고 있기에 관심을 가지고 대통령의 연설문을 읽어보았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파격적이고, 가히 천연기념물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진보적인 정치인들이나 386세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상당히 어필되는 내용들이었지만, 보수층들에게는 기절초풍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무절제한 인격문제를 거론하고 있지만, 이미 그 인격은 어릴 때부터 경험하고 느꼈던 "의식" 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며, 기회만 주어지면 다양한 태도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통령이 하였던 파격적인 70분의 연설문을 읽어보면 그의 속에 형성된 "의식->인격->자아" 의 강한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숨기는 것이 국민화합에 대한 예의이자 대통령의 행동규범이라고 하지만, 노대통령은 젊었을 때 배웠던 노동운동변호사로서 체험하였던 투쟁의식, 늘 정치의 주류에서 밀려났던 피해의식, 수년 동안 의식화된 386세대들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전염된 반미적인 진보의식이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경기도 좋지 않는데 대통령이 연말을 맞이하여 한편의 “블랙 코메디” 를 선사하였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질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경험하고 느꼈던 “의식과 인격과 자아” 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결코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서 심리학 연구에 있어서 좋은 연구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파격적인 발언으로 자신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변호사 대통령은 천연기념물과 같은 내 배 쨰라 식의 모양새이지만 분명히 스스로 선택하고 오랫동안 갈고 닦은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보여주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당한 배짱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이 가진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기 전 또는 만난 후에도 "의식의 뿌리" 을 죄성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숨겨진채 교묘하게 인격과 자아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단자들과 사이비들이 처음부터 이단과 사이비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철저하게 그 "의식의 뿌리" 를 숨긴채 때로는 헌신적으로, 때로는 성자와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군자나 초인의 흉내를 내면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40일 금식을 불사할 때도 있고, 초인적인, 초지성적인인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다. 사단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 와서 유혹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듯이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기 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항상, 자기 영광, 자기 배, 자기 욕심, 자기 지위라는 것으로 도달해버린다. 가장 더럽고 무서운 것은 거룩한 것을 가지고서 더러운 욕심을 채운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탐욕을 채우는 자들이다.

종교적인 광신은 의식과 인격과 자아를 삼킬 수 있다
오늘날 일부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아무리 불법적인 일을 벌이고, 사회법에서 고발당하여 감옥소를 출입하고 콩밥을 먹고 나와도 목회자 사회와 시무하는 교회에서 면죄부를 받으면서 전과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강단에서 설교와 목회활동을 계속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사람의 의식은 주관적인 경험과 느낌이며, 그러한 의식이 모여진 것이 인격이며, 인격적인 요소가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아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의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가장 짧은 시간에 “포로” 로 만들 수 있는 수단과 도구가 있는데 될 수 있는데 바로 “종교적(신앙적) 광신” 이라는 것이다. 어떤 집단(공동체, 교회)의 “종교적인 광신” 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면 그래도 애교로 보아줄 수 있는데, 문제는 집단의 지도자(목사)가 “무오설” 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적인 광신” 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적인 광신” 이 아니고서는 지금 한국교회나 이민교회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비성경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불법적인 일들에 대해서 일반 신자들이 침묵하고,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담임목사가 장기간 동안 수차례 여성도들과 간통을 저지르고 상대편 여성의 고백까지 나오고 법정에서 증거까지 제출되었는데도  “우리 목사님은 200% 무죄하다” 고 주장하는 당회원들이 있다는 것은 “종교적인 광신” 이 아니고서는 해석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성장하는 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각종 훈련프로그램을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사람들의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통일된 프로그램에 넣어서 “지도자가 요구하는 가이드라인대로, 지도자가 요구하는 수준” 을 가지도록 하는 “변태적인 종교적 광신자” 들로 만드는 것이 예상외로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 하루에 단 1분도 기도해줄 수 없고, 일반신자가 1년에 단 한번이라도 담임목사와 1대 1로 대면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대형교회에 무엇 때문에 그런 교회에 출석하고 있겠는가? 무엇이 그 사람의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묶고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가를 볼 필요가 다는 것이다.    

유행하는 인스턴트식의 의식개조프로그램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각종 형태의 영성훈련세미나 (사랑의 동산, 사랑의 불꽃 등)는 2박 3일 또는 3박 4일 동안 짧은 기간에 참석자들에게 인스턴트식의 경험과 느낌을 부여하여 각 개인이 지금까지 가지고 왔던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개조하고자 하는 의식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어제까지 부부가 등을 돌리고 늘 다투는 사이였는데, 영성훈련세미나에서 인도자의 감성적이고 세련된 멧세지와 프로그램에 의한 "의식화작업" 에 걸려들면, 지금까지 전혀 다른 "인격과 자아" 를 보이면서 상대편에게 대한다는 것이다. 일단 의식화작업에 걸려든 사람은 세상이 달리 보이고 상대편이 전혀 달리 보인다고 한다. 틀림이 없이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암환자에게 투여되는 진통완화제 (모르핀)는 그 효과가 일시적으로 있지만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못하며 시간이 갈수록 내성이 생겨 결국 투여량이 높아가고 약효가 떨어지면 더욱더 진통이 심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말기암환자일수록 마약성의 진통제를 더 많이 찾는 것과 같이 영성훈련세미나에 깊이 빠진 사람들의 내면과 삶을 관찰해보면 영적, 정신적으로 중증의 말기환자가 예상외로 많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성훈련을 통해서 벌어지는 “순간적인 의식개조프로그램” 은 “말기암환자에게 투여하는 마약” 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 정통교회 안에는 사람들을 의식화 시켜서 지도자의 성취욕이나 야망의 희생물로 삼고자 하는 두 가지 형태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이비들의 시도들이 있다.

첫번째는 지성적인 철학과 사상과 미사여구로 가득찬 수사법 그리고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적당히 성경을 섞어 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참자아(I am who I am)의 발견과 자아실현"이 신앙생활의 최고 목표라고 속이면서 사람들을 의식화하는 시도가 있다.

두번째는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대로 라는 말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대단히 보수주의자 또는 복음주의자인 것처럼 강조하면서 결국 교인들의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철저하게 내식으로 맹종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

전자는 파격적이고 궤변적이고 감성적인 언어수사법을 사용하면서 사람들의 의식을 개조하려고 하고, 후자는 성경을 늘 인용하면서 사람들의 의식을 자기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몰고 가려는 것이다.  

돌변한 뿌리 깊은 영성설교자
"뿌리 깊은 영성" 을 비롯한 "부드러운 영성 설교자" 로 잘 알려진 LA의 K목사의 요즈음의 모습을 보면 "아주 날카롭고 자기 말을 듣지 아니하면 쓰러트려 버리겠다는 힘의 의지를 가진 대단히 거친 사람" 으로 돌변해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부드럽고, 상대편을 배려하고, 모두가 하나 되기를 기도하는 부드러운 영성 중심의 설교를 해왔던 K목사가 왜 갑자기 저렇게 심하게 돌변하였을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의문을 품고 있을 것이다. 새벽설교나 주일설교를 통해서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교인들을 때려 잡고자 하는 의도성 있는 설교를 하는 등 선한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기사가 실려 나오고 있다.  

언젠가 K목사의 저서를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나는 J교회의 L목사님을 나의 멘토로 삼고서 늘 배우고 있었는데 L목사님께서 나에게 껄렁껄렁한 사람들과는 사귀지 말라" 는 내용이었다. 껄렁껄렁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사람답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세련된 사람을 섬긴 것이 아니고 대부분 껄렁껄렁한 사람들과 사기고 그들을 치유하셨는데, 예수를 닮는 것이 참영성이라는 영성설교를 하는 목회자의 글치고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품은 적이 있었다.

K목사가 이민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하는 동안 껄렁껄렁한 사람들로부터 틀림없이 많은 쓰라린 경험를 해왔을 것인데 그 경험이 바로 오랫동안 “의식과 인격과 자아” 로 형성되어 있을 것이고 결국 LA의 D교회에서 껄렁껄렁하다고 보여지는 장로들과 집사들에 대한 "K목사식의 의식, 인격, 자아" 가 드러나 지금까지 순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전부 벗어버리고 강경하고 거칠고 막가파적인 목회자의 본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다.

혹자들은 못된 장로들이 순하고 부드러운 K목사를 괴롭혔기 때문에 K목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하는데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못된 장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들이 본래 못되지 않았는데 이중인격적인 K목사와 같은 사람 밑에서 교회를 섬기다 보니 이렇게 못된 행동을 하게 되었다고 서로를 향해서 침을 뱉고 있다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무슨 말인가? 이미 K목사는 어릴 때부터 부드러운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었고 처절한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상처받은 의식과 인격과 자아” 가 있었는데 숨겨져 있다가 폭발한 것이며, 장로들은 이민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가지고 있다가 때리니까 죽을 둥 살둥 덤비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의식의 뿌리가 이미 그렇게 형성되어져 왔는데 서로 정체를 숨기다가 부하가 걸리니까 발동되어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분쟁의 뿌리는 전부 숨겨진 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천 번의 부드러운 영성 설교를 하고, 수백 번의 부드러운 영성세미나를 한다고 하여도 K목사가 어릴 때부터 주관적으로 체험하고 느껴왔던 "개인의 의식"을 스스로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실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의식에서 어떤 모양으로 인격이 나오고, 그 인격 가운데 통일적인 요소가 바로 자아라는 이 심리적인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겉 다르고 속이 다른 유명 목회자들의 기괴한 행동은 제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최대감리교회라고 알려진 K교회와 전과자이면서 여전히 설교를 열심히 하는 K목사의 행동과 그 교회의 교인들의 행동에 대하여 많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고등법원이나 대법원의 확정판결문에 K목사의 횡령과 배임과 불륜까지 적나라하게 나와 있는데도 그 교회의 교인들은 왜 꼼짝도 하지 못할까? 왜 동료목회자들은 그를 기소유예라는 면죄부를 주고 있을까에 대하여 수많은 해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묵상하고 들여다 보면 얼마나 오랫동안 K목사가 부흥사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꿩잡는 것이 매" 라는 “의식” 을 목회자들에게 강하게 심어주었는지에 대한 뿌려 놓은 의식의 씨앗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다. 이러한 의식을 성령의 역사로 둔갑시키는 파렴치한 부흥사들이 너무나 많았다. 파렴치한 의식인지 성령의 역사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너무나 쉽다. 그의 설교와 그의 태도와 그의 언어가 돈에서 자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성령세미나, 영성세미나 등 각종 집회가 있는데 돈에서 자유할 수 있는 곳은 한군데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돈 가지고 예수를 팔고, 성령을 파는 미친 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서 어린 영혼들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수년전 K목사가 뉴욕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는데 집회 마지막 시간에 “10만 달러 헌금할 사람, 5만달러 헌금할 사람, 1만달러 헌금할 사람, 1천달러 헌금할 사람…” 하면서 마치 경매장을 방불하는 일을 벌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종교적인 광신” 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지난 30년 동안 예수 이름으로 해왔던 것이다.

또 다른 모양의 율법주의
오늘날 교회를 개척하고서 갑자기 사람들이 수 백 명, 수 천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들이 하는 설교를 분석해보면, 무지한 교인들의 "의식을 개조하려는 고도의 심리 전술" 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야바위꾼들의 행위" “광신” 의 행위이지 결코 복음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러한 식의 설교이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교회에 와서 단 한번의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한번도 주일성수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번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벌을 주고, 그것 때문에 저주하는 신이라면 힘을 합쳐서 그런 신과는 싸워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줄타기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율법적인 정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생계 때문에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하는 교인들에게는 엄청난 의식개조적인 설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답답한 가슴을 풀어주고, 오늘날 이렇게 평신도들의 어려움을 이해해주는 목회자도 있구나 하고 지금까지 주관적으로 경험하고 느끼고 있었던 그 모든 의식을 하루 아침에 던져버리고자 합니다.

상기의 설교한 목회자는 그러한 설교에서 끝이 나면 이단이나 사이비가 되기 때문에 그 뒤에 반드시 이러한 말을 한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는 자유를 주어 보아야 나옵니다. 가짜 그리스도인은 저의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오늘부터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되구나, 이제 십일조 안 해도 되구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인은 내가 저주 받지 않으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지, 내가 좋아서 예배드리고, 좋아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지요"

기만적인 위장전술이 얼마나 대단한가? 가히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설교는 "십일조해라, 주일성수해라" 를 주장하는 설교보다 훨씬 율법적이고 훨씬 의도적이며, 훨씬 이데올로기적인 악한 설교이다.

무슨 말인가?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가 있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직분자들이나 교인들이 목회자나 사람들에게 어느 누가 가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겠는가? 가짜가 되지 않으려고, 가짜로 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쓸 것이며, 더 두꺼운 가면을 뒤집어 쓰고자 하는 의식으로 표시나지 아니하는 형태의 교묘한 종교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무조건 성령의 역사인가?
여의도에 있는 세계최대의 교회의 목회자는 줄기차게 성령충만과 성령체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중요하다.  무엇이 성령충만이고 무엇이 성령체험이냐는 것이다. 결국 교인들이 열심히 일해서 교회에 돈을 바치고, 목회자 말을 하나님의 말처럼 여기면서 복종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내 교회만 75만 80만 명을 채우는 것이 큰 축복과 큰 성공으로 인식시키는 "의식-인격-자아" 로 만들어가는 것이 성령충만, 성령체험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사이비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창가학회는 700만 명의 교도들과 80명이 넘는 국회의원을 가진 공명당과 수백 명의 기초단체의원과 장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불교이단인 창가학회는 전국 2천군데가 넘는 회당을 소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창가학회와 비교해 볼 때 그 규모면이나 대 사회적인 영향력면에서 창가학회의 발바닥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700만명의 교도들을 가진 창가학회의 규모가 성령의 역사라는 말인가? 절대로 아닐 것이다. 1억 2천 500만 명의 일본인구 중에서 개신교회에 매주일 출석하는 교인수가 30만 명도 되지 않는  일본 땅에 창가학회의 불교우상이 더 힘이 있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었다는 말인가? 결코 아닐 것이다.

현해탄만 건너도 금방 드러날 일을 가지고 좁은 한국에서 70만 명 정도 모아놓았다, 10만 명을 모아 놓았다. 5만 명을 모아 놓았다고 하면서 거대한 건물을 지어 놓고서는 그 속에서 왕노릇이나 하고 재정비리와 횡령과 탈세와 불법과 세습의 의혹 속에서 이 정도로 많이 모이는 것은 전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 무엇이냐고 큰 소리를 치고, 또 그런 사람들을 보고서 존경을 눈빛을 보내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면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 그리스도인의 위기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의식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가에 대한 통찰(insight)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한국에 살든, 외국에 살든, 너무나 오랫동안 민족 전체적으로, 소작의 고통, 일제식민지의 압박과 전후에 먹고 살기 위해서 회사에 들어가 죽도록 일하다 보니 남에게 구속 받고 남의 노예가 되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는 "노예의식" 이 우리들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민사회를 바라보면, 70년대와 80년대 미국에 처음 이민 왔던 그 "의식" 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그 “의식” 을 가지고 아이들을 교육시켜 놓으니 2세들이 미국에서 자랐는데도 의식은 부모들의 의식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다.

70년대 80년대에 한국은 어떠하였는가? 70년대는 북한보다 못살았고, 오직 잘 살아보세라고 하면서 인권과 민주와 자유를 거의 포기한 채 오직 부자 되기 위하여 미친 듯이 살아왔던 시대이고, 80년대는 군인들이 정치하면서 모든 것을 군사문화적인 특징을 가지면서 통제하고 득세하던 시대였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살다가 미국에 이민을 왔던 1세들이 가진 “의식” 은 무엇인가?

미국이 세계최대의 자유주의국가요 민주주의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예를 들면 교회 지도자들은 비밀주의, 소수의 당회와 담임목사 중심주의, 언론통제 등에 너무나 익숙해져, 미국적인 사고로 볼 때는 완전히 군사독재하는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동부나 서부의 중대형교회의 인터넷을 조사해보면, 자유롭게 토론하고 나눌 수 있는 나눔방이나 토론방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실명도 확인할 수 없는 미국인데도 실명제니 회원제니 하면서 인터넷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보면 50대 60대의 의식이 한국의 70년대 80년대 찌든 군사문화의식이 그대로 우상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체험하고 느꼈던 “개인의 의식” 을 바꾸는 것을 마치 생명을 끊는 것보다 더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을 많이 목격한다.

“의식”이 “인격”을 낳고 공통적인 인격적인 요소를 “자아” 라고 한다면 의식과 인격과 자아를 하루 아침에 뒤집어 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일 것이다.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고착되어서 서서히 질식하는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재정비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개혁" 이라고 한다. 제도적으로 어떻게 인간의 의식을 바꿀 수 있겠는가? 불가능이다. 제도적으로 어떻게 인격과 자아를 바꿀 수 있는가? 불가능이다.

한국의 개혁실천연대에서 교회의 모범적인 정관 가지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교회문제는 정관의 유무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정관을 운영하는 목회자, 장로, 집사, 교인들의 “의식, 인격, 자아” 가 근본적으로 뒤틀려 있는데 정관이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개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의식의 개조는 거짓이다
과연 "의식, 인격, 자아" 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먼저 내린다면 심리학적으로, 행동학적으로, 조직적으로, 인위적으로, 신학적으로도 바꾸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과 인격과 자아” 가 어떻게 바꾸어지는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수 없이도 가르쳐 주셨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와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억지로 물려받은 둘째 아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인격과 자아"의 출발을 보면 흥미롭다. 그의 의식은 아마 주위 친구들의 유혹이 있었던 것 같다. 즉 돈만 있으면, 여자친구들과 즐길 수 있고, 돈 만 있으며 아버지 품을 떠날 수 있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진 의식의 표현수단이 바로 “돈” 이었다. 가진 돈 때문에 창녀들이 몰려들었고, 그 “돈”이 떨어지가 창녀들이 전부 떠났으며, 결국 거지 신세가 되어 돼지새끼처럼 비참한 신세가 된 것이다.

사람이 가진 “의식과 인격과 자아” 의 수준이 “돈” 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처절한 장면인 것이다.  오늘날 중대형 교회들이  “매주 들어오는 돈” 뚝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97년도 IMF가 되었을 때 거대한 건물을 짓다가 파산한 교회, 은행 빚으로 교회땅을 사놓고 있다가 파산한 교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교회 내에서 목사편, 장로편이 서로 옳다고 주장하고 반목하면서 들고 나오는 전형적인 패턴이 “돈 문제” 이다.  

목사편은 “십일조나 헌금” 을 교회에 내지 않는 직분자들은 인정사정 없이 치리하고 출교시키겠다고 하고, 장로편은 “이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 돈을 착복하거나 마음대로 쓰기 때문에 십일조를 이 교회에 할 필요가 없다” 고 주장한다. 결국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지금까지 가지고 왔던 “의식과 인격과 자아” 가 “돈문제” 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춤추고 있음을 보여주고 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 이 완전히 뚝 떨어져 버린다면 모두들 어떤 행동으로 나올까?  

거지신세가 된 탕자는 거지신세가 되어보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식과 인격과 자아" 가 철저하게 거짓된 것이며,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내 아버지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아버지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였다면 그는 자살하거나 평생 돼지 치면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인생이 되었을 것이다.

교회의 최대 위기는?
오늘날 교회가 가지는 최대의 위기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의식” 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교회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의식” 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십 수건이나 되는 간통을 저지른 목사가 설교하는 그 앞에서 “아멘” 할 수 있고, “우리 목사님은 200% 무죄하다” 라는 미친 소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더럽고 악한 바알을 섬기는 “종교적인 광신” 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허랑방탕하다가 결국 거지신세가 되고 돼지새끼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에게 축복인가? 저주인가? 바보가 아닌 이상 탕자에게 있어서는 저주가 아닌 축복인 것이다. 만약 그가 아버지 재산으로 타국에 가서 창녀들과 놀아나면서 부자 되고 출세하였다면 영원이 아버지에게도 돌아올 수 없는 저주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꺼꾸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등장하면서 아버지에게 삿대질하는 모범적인 첫째 아들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는 하나님의 것을 횡령하고, 불륜하고, 형무소까지 들어가는 돼지새끼의 신세가 되어서 거지신세가 되어서 “나는 죄인입니다. 차라리 나를 아버지의 품군으로 사용해주십시오” 하면서 모든 것을 놓는 삶을 사는 것이 축복의 삶인데 놀랍게도 “머리를 쳐들도 나와서는 나는 의인이며, 빨갱이 정권에게 핍박을 받는 순교자” 라는 식의 설교를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지성적인 설교, 수많은 화려한 예배, 수많은 세련된 영성세미나프로그램, 수많은 고급 제자훈련의 결말과 결론은 어떠한가? 대단히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첫째 아들처럼 아버지께 분노하는 모습을 가진 종교인들을 양산하고 있지는 않는가? 첫째 아들처럼 양심도 눈물도 동정도 없는 인간이 아닌가? 앞에서 언급한 어떤 대형교회 목사는 자기에게 도전하는 교회내 직분자들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이 치리하고 출교하였던 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이고, 반교회적인 범죄를 저질러 놓고서는 동정에 호소하고 정상참작을 노회에 호소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적이 있다.

예루살렘의 유대지도자들이 예수청년이 짧은 기간 동안 사역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병든 자들이 치유받고, 귀신들린 자들이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들을 보면서 왜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는가? 전부 "본전의식" 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훈련 받고, 지도자로서 교육을 받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어디 시골구석에서 학교도 다니지 않은 가난한 목수 청년이 와서 말씀을 증거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살아나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종교생활에 투자한 본전의식" 때문에 돌을 쳐서 죽이려고 하였고, 조롱하고, 묵고, 때리고 침 뱉고, 벌거벗겨서 십자가에 매달아 버렸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사는가? 예수님을 패대기 쳤던 유대지도자들처럼 교회에 투자한 “본전의식”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을 무시하고, 작은 소자들의 호주머니나 털고 그 턴 돈으로 조직하고 건물 짓고, 그 속에서 거만하게 왕 노릇이나 하려고 하지 않는가?

정통교회 안에서도 교인들의 의식과 인격과 자아를 세뇌시키는 이단과 사이비들이 교묘하게 엉덩이를 처박고서 어린 영혼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수많은 거짓교사, 거짓된 삯꾼들이 있다는 사실을 두 눈을 부릅뜨고서 지켜 보아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성경과 철학과 사상을 교묘하게 혼합시켜서 교인들을 가르치든, 아니면 성경만을 가지고서 교인들을 가르치든, 가르치는 설교자들이 "교인들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욕망” 으로 교조적으로 몰고 가고 있다면, 아무리 수 백 명, 수 천명, 수 만 명이 모인다고 하더라고 그의 가짜이거나 사이비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우리의 힘으로 절대로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비주의 모슬렘의 인지술인 애니어그램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거나 각종 영성훈련프로그램으로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의식개조작업을 하는 자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역사를 얼마나 강력하게 방해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유효기간이 끝난 크레딧카드로 사기치는 자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의식과 인격과 자아” 가 예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의식과 인격과 자아”는 전부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크레딧카드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 유효기간 때에 열심히 사용하였던 크레딧 카드에 대한 애착을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무효가 된 그 카드는 사기를 치지 않는 한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야바위꾼이나 사기꾼들은 우리들에게 유효기간이 끝난 크레딧카드로 잘만 사용하면 사용할 수 있다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고등종교 안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과 인격과 자아” 를 잘 훈련시키면 “참자아” 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통교회 안에도 이런 거짓된 가르침과 철학과 사상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거짓된 자들이 예상외로 많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죽었던 상태였던 우리들의 가지고 있었던 “의식과 인격과 자아” 는 “유효기간이 완전히 끝난 크레딧카드” 와 같이 철저하게 폐기 처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복음이며 진리” 이다.

우리들이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 형성된 모든 “의식과 인격과 자아”가 바로 옛 사람이며, 십자가에 정과 욕심과 함께 철저하게 못박혔던 무효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고 거듭난 사람이며 구원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전하고 거룩한 교회를 위해서 섬기도록 성령으로 부름을 받았던 유명 목회자가 다시 불륜하고, 횡령하고, 도둑질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능성은 거의 제로라고 보면 된다. 그 사람은 전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성경을 읽고 인간적으로 감동을 받아서 타종교에서 흔히 있는 “종교적인 광신” 으로 지금까지 버텨 왔다가 정체가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일본의 창가학회 회장(교주)인 이캐다라는 사람은 700만명의 교도들을 모으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행위는 바로 “종교적인 광신” 에서부터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면 중증의 정신질환자의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정통교회 안에서 불륜하고, 횡령하고, 도둑질하는 자가 담임목사라고 하면서 큰 소리를 치고 있는데 어떻게 그 교회의 되어지는 일을 보고서 “성령의 역사” 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 눈 앞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눈이 뒤집혔거나 미쳐있거나 아니면 “종교적인 광신” 속에 있지 않고서는 해석이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식과 인격과 자아는 유효기간이 끝난 크레딧과 같이 아무 효과도 없으며, 전부 육신과 사망의 법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가짜 크레딧과 가짜 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눈에 보이는 복" 을 강조하면서 "종교적인 광신" 으로 몰아가지 않는 한 사람들을 절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 어떻게 가짜들이 거룩한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에 있는 성령의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가짜삯꾼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죽었던 옛사람(옛의식, 옛인격, 옛자아)들을 다시 끄집어 내어 놓고서는 자기의 목회성공과 야망을 위해서 어린영혼들에게 "성공의식, 출세의식, 기복의식, 번영의식, 종교적인 광신, 목사우상의식" 을 마구잡이로 심어주면서 망하게 하는 길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땅에 와서 오늘날 중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성전건축해서 화려하게 꾸며라, 새상에서 성공해라, 세상에서 출세해라, 세상에서 높아지라, 돈많이 벌어서 열심히 교회에 바쳐라" 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였다면 분명히 반복적인 내용이 나오는 4복음서에 단 한줄이라도 기록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 줄 정도는 언급하였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미 무효화된 크레딧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고 속이는 자들은 야바위꾼이거나 사기꾼이라는 것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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