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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나요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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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2월 12일 (월) 23:34:28
최종편집 : 2023년 03월 28일 (화) 00:19:20 [조회수 :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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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한 성령의 역사는 대단했다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는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실제로 이런 질문을 했다면 참 난폭하고 불손한 언사입니다. 그럼에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했으면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지 않는가 합니다. 특히 기도 때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저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기도하다가 베드로가 생각난 적이 많았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보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가 한 오순절의 그 설교는 명 설교의 범주를 뛰어넘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베드로 그는 불학무식한 어부로 성미가 급한데다가 덜렁대고 다혈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취할 것이라면 직선적이고 솔직한 면이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적 말로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는가 하면, 바로 이어, 자신이 죽음을 당한 뒤 살아날 것이라 한 예수님의 말씀에 항변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는 꾸중 이상의 심한 책망을 듣기도 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 호언장담해 놓고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예수님의 예언대로 세 번씩이나 부인하여 주를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뉘우쳐 회개를 한 것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던 베드로가 훗날 성령강림절이라고도 하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이 아니고 성전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디면 어떻습니까)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는 그처럼 엄청난 설교를 한 것입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 설교와 그의 말을 듣고 그날 하루에 세례를 받아 신도가 된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니 엄청나다는 말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할 만하지요.

그 오순절 날 열한 사도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이 모인 그곳의 상황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2-4)

많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이라 하면 아마 이런 현상을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당연합니다. 그러나 꼭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으면 당연히 방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모든 은사가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방언하는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단 방언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다른 성도들에게 피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절제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찬송은 좋은 것이로되 다른 사람에게는 소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성령강림절 이후의 베드로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고후5:17 참조)

 

 

성령으로 충만하다 해서 꼭 베드로처럼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베드로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가운데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같은 신자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맹인으로 태어나 구걸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였으나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은총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선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는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맹인은 자기에게 한 이 괴이한 일을 보고도 그 말에 군소리 없이 따라 그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떴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다,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맹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자기가 바로 그 구걸하던 맹인이 맞다고.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눈을 뜨게 됐냐고 물었고 맹인이었던 사람은 자초지종 말해 주었습니다. 일이 일단락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데로 옮겨졌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고 고쳐 받는 죄를 범했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물었고, 맹인이었던 사람은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은 안식일을 어겼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는 사람과, 아니다,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가 있겠느냐는 다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 준 그를 어떤 사람이냐 물었고, 그 대답은 ‘선지자’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를 불러 물었으나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부모는 일의 전말을 거의 알고 있었으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은 유대 공동체 사회로부터 추방당하는 출교를 하기로 되어있는 상황을 직시하고 극히 애매하게 에둘러 말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로서는 이대로 끝낼 수가 없어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렀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사실상 위증을 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가 죄인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지금 이렇게 본다는 사실입니다.’

이쯤 되다보니 바리새인들도 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고, 그런 이상 병을 고친 예수를 안식일을 범한 안식일 파괴범으로 모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다시 물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는데, 들은 척도 않더니 어째서 다시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는 겁니까?’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으로부터 허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한 방 먹고 만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성을 잃고 욕설을 섞어 말했습니다.

‘너는 그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만, 그 자야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모른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 알게 뭐냐는 태도였습니다.

‘참 이상하네요. 내 눈을 이렇게 뜨게 했는데도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다니요.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은 듣지 않으시고 경건하여 당신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베드로의 명 설교에 버금가는 거의 완벽한 논리 아닙니까. 이에 바리새인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더욱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난 놈이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라고 인신공격성 말로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KO승은 아닐지라도 다툼의 여지없는 (맹인이었던 사람의) 판정승이지요.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로, 모세의 율법뿐 아니라 예로부터 율법을 가르쳐 왔던 장로들의 유전, 선조의 전통까지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의식상 부정한 것을 철저하게 피하여 정결에 힘쓸 뿐 아니라 사소한 일상사에까지 율법을 적용하여 확실하게 지켰습니다. 그런 그들은 유대교의 중심이 되었고,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구걸이나 하던 맹인이었던 사람으로서는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맹인이었던 사람이 그들 바리새인에게 보인 모습은 골리앗 앞에 섰던 소년 다윗을 연상케 합니다. 그는 조금도 주늑들지 않았습니다. 당당했습니다. 구걸이나 하던 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학식 많은 바리새인들을 꼼짝 못하게 할 만큼 논리 정연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갑자기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팥소 안 든 찐빵만도 못한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믿게 하고, 그런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주된 일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고전12-3)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그리고 깊이 안다고 믿음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육화될 때, 말씀이 그 사람의 생각, 가치관이 될 때 믿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또한 많이, 그리고 열심히 한다고 다 좋은 기도는 아닙니다. 믿는 사람으로서의 인격변화가 없다면 그런 기도는 재고해야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롬14:8)이라는 말씀을 생활신조로 하며 산다는 사람이 조그마한 손익 앞에도 무릎을 꿇는 예는 얼마든지 있고, 평생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았다는 사람이 이웃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예 또한 많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알라고 있는 책이 아니고, 알고 행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며, 기도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의는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그분의 의고, 그 의를 이뤄 감으로 그분의 사랑에 거하게 되는 것이 그분의 나라가 아닙니까.

성경과 기도를 많이, 그리고 열심히 읽고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왜 그리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고전9:26) 해야 합니다.

예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유대는 앞에서 언급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런 그들의 속살을 보고 드러내어 세상에 보인 것입니다. 그들이 중시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일 뿐 정작 중요한 본질은 썩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네는 모세의 제자라 내세우지만 그들 안에는 모세의 진정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출애굽을 시작하던 어두운 밤 모세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 각 집의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려졌던 어린 양의 피는 하나의 예표이자 그림자이고, 그 실체는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였습니다. 출애굽의 광야에서 모세가 장대 위에 단 놋뱀의 실체 또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였습니다. 그런 예수를 바리새인들은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워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는 것이 겁났던 것이지요(요3:20 참조).

그들에게 있어서의 모세는 말만 스승이지 실은 팥소 안 든 찐빵보다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찐빵은 팥소가 들지 않았다 해도 먹을 만하거든요.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어떤가요. 참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바리새인들의 그것에 견줄만한가요. 물론 그들의 열심은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린 거라며 남을 헐뜯는다면 바리새인의 그 열심히 되는데, 설마한들 그런 사람이야 있겠어요.

세상은 점점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이들 나는 옳고 너는 옳지 않다 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자신인 것 같습니다. 자기를 재는 잣대와 남을 재는 잣대가 다릅니다. 남에게 관대하고 자기에게 엄해야 하는데, 반대로 자기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혹독하리만큼 엄한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에는 아예 눈을 감고 남의 잘못은 없는 것도 만들어내어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법을 잘 알면 법꾸라지가 되고 법의 적용도 상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방법은 달리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서야 합니다. 믿는 여러분과 제가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설교자는 교인들 앞에 서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설교해야 합니다. 저처럼 글 쓰는 사람도 자신부터 돌아보고 써야 합니다. 타를 비난하는 사람도 말하기 전에 자신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자신이 더 심한데 그 일로 남을 비난한다면 그 비난은 자신을 향한 것이 됩니다. 누워 침 뱉기가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방언도 할 수 있고 가슴이 뜨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결과가 그렇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을 못하고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사람으로서의 바른 마음, 가치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방언을 하고 가슴이 뜨거워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성경에 비춰보지 않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성찰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성경이 제시한 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방언을 못하고 병 고치는 은사가 없어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5:2),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자신의 안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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