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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이 지나간 장소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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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2월 08일 (목) 02:44:57 [조회수 : 2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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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에게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날이다. 교회는 기다림의 절기로 한 해를 시작한다. 기다림을 촉발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싹튼 그리움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움을 품고 산다. 어쩌면 그리움이야말로 우리 삶을 밀어가는 힘이 아닐까?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않을 때 삶은 권태롭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의 대상이 올 때까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더럽고 어지럽혀진 집을 정돈하는 사람처럼, 기다림의 대상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자 요한은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이해했다. 아름다운 세상을 기대하는 이들은 그 세상을 선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 세상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이태원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우리 가슴을 울린다. 그 울음소리는 국가 부재의 상황 가운데서 죽임 당한 이들의 신원을 요구한다.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이들이 더 이상 피눈물을 흘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부는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거나 아픔의 기억을 망각의 강물로 밀어 넣으려 하면 안 된다. 책임자 처벌은 물론이고 피해 가족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에어즈 록은 호주의 북부에 있는 거대한 모래 바위이다. 약 6억 년 전에 생성 되었는데 단일 바위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 한다. 평원에 우뚝 서 있는 그 바위는 매우 신비롭게 보인다. 호주 원주민들은 그 바위를 울룰루라고 부르며 신성하게 여긴다. 울룰루는 ‘그늘이 지나간 장소’라는 뜻이다. 호주 교민인 수필가 남홍숙은 울룰루에 얽힌 이야기를 하다가 그늘 속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늘 속에는 슬픔, 아픔, 고픔이라는 세 결핍이 산다. 이 세 '픔'은 저마다의 품계를 지닌다. 슬픔이라는 축축한 물기, 아픔이라는 명료한 통각, 고픔이라는 허기진 느낌들. 그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픔의 징후가 수많은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마치 검은빛과 흰빛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빛들의 슬픈 잔치같이."

지극한 슬픔, 아픔, 고픔을 맛본 이들은 그늘 속에 산다. 그 그늘은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는 고마운 그늘이 아니라, 영혼을 우울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음습한 그늘이다. 그런 그늘을 운명처럼 견디며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그늘을 없애주려는 이들이 아니라, 말없이 그들 곁에 머물러주는 사람이다. 이정록 시인은 ‘주전자 꼭지처럼’에서 어머니가 들려주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어미 아비가 되면 손발 시리고/가슴이 솥바닥처럼 끄슬리는 거여./하느님도 수족 저림에 걸렸을 거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처럼 가슴 시린 일이다. 누군가를 염려하여 애태우는 것, 그것이 인간됨의 본질이다. 각자도생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허둥거리는 동안 우리는 무정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누군가와 연루되기를 꺼린다. 그렇기에 외로움은 더욱 깊어가고 그늘 또한 짙어간다. 어머니는 시인인 아들에게 ‘아무 때나 부르르 뚜껑 열어젖힌 채/새싹 위에다 끓는 물 내쏟지 말고’ ‘마른 싹눈에 주전자 꼭지처럼’ 절하며 살라고 가르친다.

지치고 마음이 스산해질 때마다 지거 쾨더 신부의 ‘기원과 완성’이라는 제목의 그림 앞에 머문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의 그림이다. 화면의 한복판에는 하얀 면사포를 쓴 여인을 두 팔로 꼭 부둥켜안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굳이 그 인물이 누구인가를 따질 필요는 없다. 화가는 어쩌면 온 세상을 향한 신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핵심은 사랑이다. 부둥켜안은 둘은 원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선은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의지도 작동되지 않는다. 둘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 그 중심으로부터 화려한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분할된 화면의 아래쪽에는 반원 형태의 지구가 보인다. 그곳 역시 다양한 색채들이 어울려 빛의 공간이 되고 있다. 지거 쾨더는 사랑이야말로 역사의 기원인 동시에 목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부둥켜안음 혹은 얼싸안음 속에서 새로운 현실이 태어난다. 슬픔, 아픔, 고픔의 자리에 선 이들을 부둥켜안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잉태하는 일이다.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이들은 먼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 2022/11/26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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